믿음으로 사는 길 마6: 25-34/ 옥한흠 목사
모 일간지의 어떤 경제부 기자가 최근 우리 나라가 겪고 있는 경제적인 위기를 놓고 이런 글을 쓴 것을 보았습니다. "지난 한두 달 사이 이 나라의 곡간 사정이 얼마나 아슬아슬했는지를 속속들이 알았다면 심장병이나 고혈압이 있는 분들 중 상당수는 응급실로 실려갔을 지도 모른다." 매우 실감나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모르는 게 약이다'라며 덤덤하게 지냈습니다만 우리 나라가 얼마나 숨막히는 고비들을 넘겨 왔는지에 대해 소상히 알았더라면 아마 밤에 잠도 못 이룬 채 피가 마르는 고통을 당했을 지 모릅니다.
한번 우리 나라가 소위 '모라토리움', 다시 말해 국가 부도를 겪게 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지 상상해 보십시오. 어느 국제 경제 전문지는 그런 상황을 가상하며 이런 글을 썼습니다. "국제 자본 시장으로부터 한국은 완전히 단절되어 단 한 장의 신용장도 구할 수 없어 수출과 수입이 전면 중단 될 것이다. 그리고 거리에는 폭동을 진압하는 경찰관과 노동자 시위대가 험악하게 대치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정말 이와 같은 상황이 되었더라면 우리는 다시 연탄 때는 시대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몇 년 전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되었 때 사람들이 생필품을 사려고 가게 앞에 줄을 서 있는 것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면서 우리가 먼 산의 불 구경하듯 하지 않았습니까? 잘못하면 우리 모두가 그런 꼴이 될 번 했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서늘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모라토리움의 위기를 넘기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는 이러한 위기들을 겪으며 수술대 위에 누워있는 중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힘으로 마땅히 고쳐야 될 병을 5년,10년,20년 끌며 방치하다가 이제는 우리 힘으로 도무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IMF라고 하는 집도의의 손에 우리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어려운 고비가 한 3-4개월 지나면 다 끝나고 다시 옛날처럼 안도하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막연한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순진하고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거에 영국이 얼마나 엄청난 진통을 겪어서 오늘의 영국이 되었으며, 멕시코가 얼마나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며 경제 위기를 넘겼는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대수술일수록 회복을 위해 더 오랜 시간의 고통과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제가 존경하는 형제 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대학교 교수인데 지난 7월달에 배 안에 생긴 종양을 제거하는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을 하고 나서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제가 병 문안을 갔었는데, 그분의 사정을 잘 아는 지라 걱정이 되어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8월 여름 방학 동안 뉴질랜드에 가서 겨울 학기(winter school) 강의를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할거요?"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이고 목사님, 곧 회복될텐데요. 뭐. 8월달에 뉴질랜드에 갈 겁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친구 아직도 수술이 뭔지 모르고 있구나.' 수술했다고 해서, 혹을 제거했다고 해서 곧 바로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복에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도 수술을 해 봤지만 한번 수술을 하고 나서 회복이 되려면 몇 달 아니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금방 수술을 하고 누워 있는 사람이 다음 달에 간다니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습니까? 그렇다고 그분과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후 뉴질랜드 아니라 제주도도 못 가고 있습니다. 수술한지 7개월 된 지금에야 겨우 얼굴빛도 제 색깔로 돌아오는 기미가 보입니다. 사람이 한번 수술을 해도 회복을 위해서는 이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물며 이 큰 나라 경제가 수술대에 올랐는데 어떻게 그렇게 금방 쉽게 회복될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앞에는 길고도 추운 겨울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한번 쓰고 버리는 우리의 잘못된 버릇도 고쳐야 합니다. 한 번 쓴 것은 다시 쓰고, 고장난 것은 고쳐 쓰고, 아직 멀쩡한 것들이라면 서로의 필요에 따라 바꾸어 써야 합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일부러 우리 교회 화장실에 가 봤습니다. 그런데 화장실 문을 열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변기 위에 화장지가 두세 통씩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화장지가 여러 통 있는 것을 보면 아끼고자 하는 마음보다 많이 쓰려고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인간의 심리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한 통만 남겨 두고 다 치우게 했습니다. 그리고 걸어 놓은 것을 다 쓰고 나서도 금방 새 것을 갖다 놓지 말고 한참 두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찮은 화장지 한 조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정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조금 산다고 거드름 부리던 교만도 쓸어내야 됩니다. 사치, 향락의 냄새가 나는 곳은 완전히 도려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간에 가리지 말고 열심히 일해서 버는 풍토를 만들어야 합니다. 앉아서 떼돈을 모을 수 있다는 그 사악한 생각이 자리를 잡지 못하는 건강한 사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정직과 공의가 물 흐르듯이 흐르는 참으로 신뢰받는 정치 풍토가 이 나라에 자리 잡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수술을 달게 받아들이고 회복되기까지 한 동안 아픔과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믿음은 실천입니다. 믿음은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와 같은 큰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실천에 옮겨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두 가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함께 말씀 드리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염려를 하지 않는 것이 믿음의 행동입니다. 25절 이하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눈만 뜨면 무엇 먹어야 하나, 날이 새면 오늘 무슨 옷을 입어야 하나, 무엇을 몸에 걸치고 나가야 하나를 걱정하는 생활이라고 하면 이것은 완전히 밑바닥 생활입니다. 우리 중에 눈만 뜨면 이런 걸 가지고 걱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삶을 사셨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머리 둘 곳이 있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분이셨습니다. 때가 되면 어디 가서 무엇을 먹을 지 고민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런 것들로 염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도 똑같은 자세를 요구하십니다. 설사 그러한 궁핍한 상황에 처한다 해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5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7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그게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까?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염려하는 것이 정상 아닙니까? 당장 생활이 어려운데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자꾸 억누르면 오히려 정신적으로 병 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염려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하도록 내버려두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거듭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몇 가지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를 먹이고 입히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번 생각해 봐라. 먹이고 입히는 분이 누구냐? 지금까지 네가 먹고 살아온 그 모든 과정을 한번 돌이켜 봐라. 누가 먹였느냐? 네가 쌓아놓고 먹었느냐? 누가 마시게 했느냐? 누가 입혔느냐? 네가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았느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고 오늘까지 돌보아 주신 것이 아니냐? 그런데 왜 하나님의 걱정을 네가 도맡아 하느냐?" 하나님이 하실 걱정을 도맡아 하다니 얼마나 바보스럽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예수 믿는다 하면서 날마다 걱정하는 것이 너무나 유치해 보여서 우리의 유치한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이 교훈을 들려 주셨습니다. 유치원에 가면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얘들아, 저기 날아 가는 게 뭐니?" "참새요." "그래. 참새를 봐라. 참새가 농사를 짓니?" "아니요." "참새가 곡간이 있니?" "아니요." "그럼 저금 통장은?" "없어요." "그런데 아침에 참새가 먹고 나왔니? 굶고 나왔니?" "먹고 나왔어요." "누가 먹였니?" "하나님이 먹였어요." "얘들아, 저 꽃은 무슨 꽃이니?" "백합화요." "야, 저 백합화가 옷 예쁘게 입었지?" "예." "백합화가 길쌈했니?" "아니요." "옷 공장을 가지고 있니?" "아니요." "그럼 누가 입혔니?" "하나님이요." 마치 이런 식의 교훈을 들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생활 걱정으로 날마다 얼굴을 찌푸리고 계시는 분들 중에는 정말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장 직장이 날라가고 내일 어떻게 살지 모르는 그런 상황이 되면 염려를 안할 수 없는 것이 인간적인 심정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주님의 교훈을 떠올려 보십시오. '주님이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염려하는 사람을 유치하다고 했다. 내가 하나님의 걱정을 도맡아 하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가정에서 어린 손자, 손녀가 "아이고 국가 부도를 당했다고 하는데 할아버지, 내일 뭘 먹고살지요? 우리 학교는 어떻게 가지요?"하며 날마다 염려하며 밥도 안 먹고 앉아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몰골입니까? 아무리 지금 당장 쓸 게 없어도 아빠나 할아버지가 보고 가만히 있겠어요? "뭐 이런 애가 있어? 정신 차려. 이 놈아!"하고 타이르지 않겠어요? 당장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염려하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정신차려라. 내가 너희를 먹이는 데 네가 왜 도맡아 걱정을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 수백 만 명이 시내산 광야로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시내산 광야는 농사도 지을 수 없는 땅입니다. 먹을 것도 없습니다. 사냥도 할 것이 없습니다. 물로 없습니다. 도저히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기에 수백 만 명을 몰아 넣고 40년 동안 먹이고 마시우고 입히셨습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데, 그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어떻게 조금 궁색해졌다고 해서 날마다 걱정하느냐 그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염려하는 자들을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0절을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우리는 걱정을 다 쓸어내는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는, 우리의 염려가 쓸데없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10분 염려하면 1밀리미터가 자라고 1시간 하면 1센티미터가 자란다고 하면 저도 걱정을 하겠습니다. 저도 조금 더 컸으면 좋겠거든요. 우리 집의 손녀애가 어릴 때 참 키가 안 커서 집안이 모일 때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쟤가 왜 저렇게 안 크지? 저렇게 안 크다가 나중에 난쟁이가 되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생각하면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한 꼴이 되었습니다. 너무 잘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보시기에 걱정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염려는 주제 파악을 못한 데서 오기 때문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보통 염려라고 하면 미리 앞당겨 놓고 걱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장 내 앞에 지금 먹을거리가 없어서 염려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미리 앞당겨 놓고 걱정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내년에 어떻게 살까? 내일은 어떻게 돈을 쓸까? 20년 후에 노
우리 교회 성도 중에 아주 유능한 판사 한 분이 계신데 오늘 아침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아직 50대도 안된 사람이었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재판정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판결문을 선언하던 그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중에는 내일을 내 날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일을 주시면 그 때는 또 믿음으로 내일을 살면 되는 것이지 괜히 오늘 앉아서 내일 문제 가지고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은근히 마음에 불안과 염려를 갖고 계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치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치료해 주셔서 여러분의 염려를 하나님이 싹 쓸어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큰 믿음 가진 사람이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할까, 어떻게 하면 이 세상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주님이 하루라도 빨리 재림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의 마음에 원하는 일을 먼저 할까 하는 것들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어떤 때는 시간을 바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어떤 때는 젊음도 송두리째 희생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어떤 때는 가난과 불편함을 감수하며 우리가 가진 재물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먼저 씁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내 형편에 따라서 주의 나라와 그 일이 좌우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19절부터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19절부터 34절까지 내용은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하나의 맥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맥은 쉽게 말하면 이것입니다. "너희가 부할 때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너희가 가난할 때에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33절 말씀은 19절부터 24절까지에 나오는 부한 사람에 대한 교훈과 25절 이후에 나오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훈에 대한 종합적인 결론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19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어느 집이든지 보물이 좀 있다고 하면 그래도 살만한 집안입니다. 요즘 도둑놈이 들어가 가지고 장롱을 뒤지니까 달러 뭉치가 나오고 금뭉치가 나오고 야단법석 나잖아요? 재물이 그래도 좀 있다는 살만한 집안입니다. 그런데 이 재물은 어떤 점에서는 참 유익하고 좋은 것이지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위험한 것일 수 있습니다. 물질이 많으면 그 물질 때문에 눈이 가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2-3절에서 예수님이 갑자기 눈 이야기를 하신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워진다. 왜 갑자기 이 말씀을 하십니까? 재물이 사람의 눈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재물로 인해 우리의 눈이 가려지면 하나님은 눈에 안 들어오고 재물이 하나님으로 보이게 됩니다. 24절이 바로 이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러다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해도 물질 때문에 그 영혼이 저주받은 자처럼 될 수 있고 나중에는 그 물질 때문에 하나님 앞에 무서운 심판을 자초하는 불행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가끔 보면 그래도 살 만한 여건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분들 중에 정말 눈이 가리워진 사람처럼 신앙 생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돈밖에 안 보입니다. 말은 주여, 주여 하는데 실제로는 돈을 좇아 다닙니다. 재물을 가졌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크나큰 불행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물질을 주실 때 정말로 두려워하며 떨어야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재물이 있다고 생각되는 분들은 재물 때문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재물이 자기 하나님이 되어 있지 않나 심각하게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물질을 주셨을 때에도 변함없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자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20절에 있는 말씀대로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주님이 주신 재물을 기쁨으로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필요하시다면 내가 덜 써도 주님을 위해서 내 놓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필요하시다면 내가 쓰려고 계획했던 것도 뒤로 미루고 그 일을 앞세워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재물을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이런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 동안 교회를 위해서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자기 옷은 아주 값싼 것을 사 입어 가면서 하나님 앞에 헌금하는 귀한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일각에서는 자기를 위해서는 풍성하게 쓰지만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너무나 인색한 분들도 교회 안에 꽤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떨어야 합니다. 끝까지 그러시면 하나님이 주셨던 물질을 한 순간에 다 빼앗아 가실 지도 모릅니다. 요즘 부도 만나는 사람들 보십시오. 한 순간에 다 날라가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빼앗으면 한순간에 다 없어집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떨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저는 엊그제 신문에서 어느 불교 신도의 이야기를 읽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김영한씨라고 하는 부인이 자신이 성북동에 가지고 있던 대원각이라는 큰 음식점과 일대 부동산을 자신이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는 법정 스님에게 희사해서 거기에다 길상사라는 절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1천 억원 상당의 어마 어마한 재산을 헌금한 것입니다. 천주교의 누가 거기 가서 축하를 해 줬다고 해서 신문에도 사진이 나고 한 것을 여러분이 보았을 것입니다. 저는 그 기사를 보고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만든 불상, 거기에 무슨 생명이 있습니까? 그게 무슨 복을 줍니까? 그게 인간의 운명을 좌우합니까?
아무 것도 아닌 불상 앞에도 천억 원이 넘는 자기 재산을 송두리째 내 놓는데 오늘날 예수 믿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고 얼마 안 있으면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나타날 것을 기대하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는 우리 중에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그 만한 재산을 바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앞으로 재물 주시면 이렇게 멋지게 하나님의 영광 위해서 쓰는 귀한 주님의 제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게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궁핍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은 궁핍할 때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궁해지면 누구나 생각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게 되기 쉽습니다. 자꾸 생활이 어려워지다 보면 '내 코가 석잔데'하며 자기 걱정만 합니다. 자기 식구 걱정만 합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다 2선으로 물러갑니다. 그래서 자기나 자기 식구가 최고의 관심사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아무리 황급한 상황이 되어도 믿음을 가진 사람답게 주님의 나라와 그 의를 우선에 두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걱정을 대신 책임져 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마귀는 분명 우리 귀에 이렇게 속삭일 것입니다. '야, 경제가 어려운데 너 여러가지 좀 잘 생각해봐. 헌금도 좀 잘 생각해봐. 생활을 낮춘다고 해도 어느 수준까지는 유지해야 될 거 아니냐? 그러기 위해서는 너 지혜롭게 잘 생각해야 돼. 믿음이라는 건 그렇게 맹종하는 것이 아니야.'
그러나 여러분, 사렙다 과부 이야기를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녀는 3년 반 동안 이스라엘을 강타한 무서운 기근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아들과 함께 곡간에 있는 양식을 아끼면서 근근히 버티다 결국 막바지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겨우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밀가루 조금과 기름 몇 방울밖에 남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 마저 끊어지면 이제는 어디 가서 손 벌릴 데도 없었습니다. 온 세상이 지금 못 먹어 가지고 허기진 짐승이 되어 있는데 어디 가서 먹을 것 찾겠습니까? 그래서 그녀는 '남은 것 마저 구워 먹고 이젠 죽자'라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불을 피우려고 마른나무 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그때 엘리야 선지자가 찾아왔습니다. 엘리야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의 집에 있는 통에 그 밀가루 가지고 떡을 만들어서 나에게 먼저 가지고 오라. 만약 나에게 먼저 가지고 와서 나로 먼저 먹게 하면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셔서 기근 동안 너의 모자가 굶어 죽지 않도록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없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공급하실 것이고, 기름통에 기름이 없어지지 않도록 공급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니 너는 가서 빵 구워
그녀의 입장에서 얼마나 고민이 되었겠습니까? '야, 웃기지 마라. 지금 이 마당에 어떻게 너부터 먼저 주냐? 죽어도 내가 먼저 먹고 죽겠다.' '아니야, 하나님의 선지자가 저런 말씀을 하는데 믿어 보자. 믿고 내가 못 먹어도 이것을 주의 종을 위해서 바치자.' 엘리야의 말을 믿지 않든지 믿고 그 말대로 하든지 그 어느 쪽이든지 선택을 해야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만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기근이 다할 때까지 가루 통에는 먹고 나면 또 생기고 먹고 나면 또 생기고 기름통에는 계속 기름이 남아 있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먹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궁핍하고 가난해도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필요할 때에는 내가 못 먹어도 드리고, 내가 쓸 것을 못 쓰더라도 우리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필요하다면 내놓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큰 믿음은 우리의 발상을 전환시킵니다. 큰 믿음은 세상 사람처럼 우리가 살지 못하도록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놓습니다. 작은 믿음은 세상 사람을 따라가게 만듭니다. 작은 믿음은 이 세상의 물 흐르는 대로 걸어가도록 항상 우리를 던져 놓습니다. 여러분 어느 믿음을 갖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적은 믿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우니까 헌금 좀 줄이자." 아마 몇 달 지나면 헌금이 자꾸 줄어들지도 모릅니다. "기름 값도 많이 올라가는데 기름 아끼기 위해서 매주마다 교회 갈 거 뭐 있냐? 두 주에 한번씩 세 주에 한두 번씩 교회 가자." "선교는 무슨 선교냐? 때가 어려우니 만큼 선교사를 전부 불러들이도록 해라." 그리고 주일 학교 어린 자녀들을 위해서 꼭 필요한 어떤 일을 하려고 해도 "이 어려운 때 뭐 그런 걸 하느냐? 다음에 사정이 좋아지면 하자" 라며 못하게 막을 것입니다. 또 감사 헌금이 어디 있어요? "이 어려운 때 감사는 무슨 감사냐? 불평을 해도 한이 없는데"라면서 감사 헌금도 안 할 것입니다.
믿음이 작기 때문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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