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역사적 예수 연구는 포기해야 하나? No. 우리는 역사가 필요하다. |
두 가지 대답을 제시한다 |
N.T. 라이트 N. T. Wright April 1, 2010 송자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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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캇 맥나이트는 일종의 금식을 주장하고 있다. 나는 이제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평생의 습관을 버려야 하나보다. 좋다. 어차피 사순절 기간이다. 포도주, 어쩌면 위스키가 필요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하는 것이 논리에 맞는 것일까? 여기 세 가지 의견과 세 가지 결론을 제시한다
둘째, 스캇은 역사적 예수 연구의 다양한 전형을 구분하지 않았다. 벤 메이어를 따라, 나는 스캇이 묘사한 역사 기술의 종류와, 내가 ‘세 번째 탐색’이라 명명한 종류와의 엄청난 차이를 설명해왔다. 또한 ‘이중 비유사성’을 거부하고, ‘이중 유사성’의 균형을 맞추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말한다면 비난받을 소지가 있겠지만 예수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틀림없는 유대인이었다. 또한 독특하다면 독특할 수 있겠으나 우리가 현재 ‘교회’라 부르는 것의 시발점이다.
예수님의 동시대 사람들은 서사, 상징, 소망의 네트워크 안에서 예수를 받아들였다. 예수에 관한 그들의 이야기가 이를 방증한다. “우리는 그 믿음의 관점의 진상을 조사할 수 없으므로” “과거는 회복하기 어렵다”라고 말하는 것은, 영향력을 잃고 있는 모더니즘 인식론에 굴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종교개혁 신학자 필립 멜란히톤으로 거슬러 가면, 예수가 구세주였음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예수가 ‘나’의 구세주였음을 알아야 한다. 역사는 이를 우리에게 설명해줄 수 없지만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구조를, 곧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성경적 구조를 재구성할 수 있다. 예수가 실존하지 않았다면, 혹은 정말 혁명을 외친 열심당원에 불과하다면, 혹은 불교 신비주의자 원형에 불과하다면, 혹은 이집트계 프리메이슨 회원에 불과하다면, ‘나의 구세주’라는 생각은 아이가 놓친 헬륨 풍선처럼 주관주의의 엷고 취약한 공기 속을 둥실둥실 표류하리라. 적절한 역사적 맥락에서 예수를 이해할 때, 비로소 부활은 예수를 메시아로서 제시하고, 메시아가 왕 중 왕이며 나를 위해 죽었다가 나를 위해 부활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역사는 넘어야 할 장벽인 동시에 우리의 믿음을 재확신해준다.
그러나 대단히 효과적으로 불신이 종종 숨는 연막을 걷어낸다. 역사와 믿음은 각각 기독교의 왼쪽 발과 오른쪽 발이다. 그리고 모더니즘은 지금 왼발이나(회의적인 ‘역사 기술’) 오른발만으로(비역사적인 ‘믿음’) 깡총깡총 뛰고 있다. 피곤하고 위험하고 불필요한 일이다. 여기서 또 수수께끼. 스캇도 이를 믿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N. T. 라이트(N. T. Wright)는 영국 성공회 더럼 주교다.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예수와 하나님의 승리」(이상 크리스찬다이제스트 역간)을 비롯, 다수의 책을 썼다.
}출처:크리스채너티 투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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