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 목회' vs. '소극적 목회'
모두가 적극적으로 목회하라는 말을 하는데, 소극적인 목회를 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나는 정말 생뚱맞은 사람인지 모르겠다. 적극적으로 하고 싶은 사람은 적극적으로 하시라. 내가 보기에 인간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잘된 일은 하나도 없다.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자기가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적극적인 생각보다는 어떤 힘에 어쩔 수 없이 이끌린 것뿐이다.
물론 지금 적극적으로 목회하는 사람들도 모두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았다고 말하겠지만 자신의 욕망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별하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건 그렇고, 내가 소극적으로 목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언가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어떤 구체적인 일을 하지 않고 무작정 침체된 상태로 머물러 있으라는 말도 아니다. 훨씬 근원적인 힘에 사로잡히라는 말이다.
p align="justify">그 근원적인 힘은 바로 하나님이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존재(Sein)이며, 도(道)이며, 궁극적인 토대이며, 궁극적인 관심이다. 그런 힘을 경험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약간 맛본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그런 경험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건 자기 자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을 회피하고 그저 자신이 익숙하게 생각하던 그런 삶을 강화하는 쪽에 승부를 건다. 그래서 무언가 성과를 올리는 것으로 삶의 목표를 삼는다.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훨씬 본질적으로 근원적인 힘이 끊임없이 자기를 엄습하는 사람은 결국 모든 삶의 부자연스러운 모습,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을 차츰 정리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게 다른 사람에게는 소극적인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소극적인 목회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신비를 놀랍게 경험한 사람들이 더 이상 ‘총동원 전도주일’이라든지 ‘뜨레스디아스’ 같은 행사를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영성을 소비할 뿐이지 창조적인 게 아무 것도 없다. 이는 흡사 시트콤을 들여다보면서 인생을 보내는 것과 같다. 물론 그렇게 시트콤을 보는 삶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자기의 존재를 가볍게 함으로써 일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유의미할 것이다.
말을 좀 바꾸어, 적극적인 목회를 통해서 교회를 부흥시켰다고 하자. 거기서 남는 것은 무엇일까? 월급을 많이 받는다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 교회를 부흥시켰다는 성취감이 남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을 구원시킨 것일까? 바로 이 질문이 여기서 핵심이다. 우리가 목회에 그렇게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이유는 물론 개인적으로 목회의 성취감이 있기도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을 구원시키겠다는 사명감이 가장 클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게 가장 큰 유혹이자 위험이다. 목회자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내가 과연 신자들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멀리 떨어지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목사들은 신자들을 교회 중심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그들을 구원시키는 것이라고 믿는지 모르지만 이건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마지막 심판 때에 목사들은 이런 기준에 따라서 심판받지 않을까 생각한다. 과연 그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에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새벽기도회로부터 교회 봉사, 각종 선교단체 활동, 모든 인생을 교회 활동에 쏟아 넣게 하는 게 과연 하나님이 보실 때도 바림직한 것인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만약 마지막 때 하나님이 목사들에게 ‘왜 그런 방식으로 그 사람의 삶을 소비하게 만들었는가’ 하고 책망하실지 모른다.
나는 많은 평신도들이 자기 삶을 그렇게 소비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지금 내가 목회의 모든 행위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성실하게 목회하는 젊은 목회자들의 기를 꺾으려는 것도 아니다. 지나친 자신감을 조심하라는 말이다. 자기의 목회 행위가 과연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의존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성취욕과 욕망에 치우친 것인지 늘 성찰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는 무엇이 가장 바람직한 목회인지, 더 궁극적으로 무엇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모습인지 잘 모른다. 그렇다면 성령이 활동하실 수 있도록 목사는 뒤로 물러서는 게 최선이다. 이 말을 이해하시는지. 성령의 활동과 목사의 활동이 왜 다른지를 말이다.
내가 보기에 목사가 가족 생계를 꾸릴 정도가 된다면 그렇게 교회를 크게 늘릴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지혜로울 것 같다. 왜냐하면 나중에 그 많은 영혼들을 자기가 책임지기 힘들기도 하고, 자기 구원에 시간을 쏟기에도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국 땅도 좁다는 듯, 세계를 누비며 교회를 확장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참으로 불가사의다. 그들의 영적인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들의 선교적 비전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무슨 근거에서 자신들의 행위에 그렇게도 강한 확신을 갖는 걸까? 그들의 믿음과 용기가 나로서는 부럽다. 지금 나는 남의 잔치에 재를 뿌릴 생각은 전혀 없다. 큰 교회를 부러워하지도 않고, 비난하지도 않는다. 다만 연민을 느낄 뿐이다. 본인들이 그게 행복하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다만 자기 구원에 천착하는 것과 교회 성장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젊은 목회자들에게 내 나름의 길을 제시할 뿐이다. 굶지만 않는다면 자기 구원에 천착하시라. 여기서 말하는 자기 구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설명하지 않겠다. 생존의 위기를 안고 있는 목사들에게는 일단 그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굳이 목회를 전담하지 않더라도 일단 생존의 길을 찾는 건 중요하다. 오늘도 역시 내 말에 두서가 없었다. 그래도 행간에서 무언가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자위할 뿐이다.
정용섭 목사 / 샘터교회 담임·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출처/ 미주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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