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우리가 절대 알 수 없는 예수 (스캇 맥나이트)

수호천사1 2010. 8. 7. 13:00

우리가 절대 알 수 없는 예수
‘진짜’ 예수를 찾으려는 학자들의 시도가 무위로 돌아간 까닭과 그런 사실이 좋은 징조인 까닭은

스캇 맥나이트  Scot Mcknight April 1, 2010 이지혜 옮김

 

나사렛 예수를 가르치는 수업 첫 날이면, 나는 두 종류의 표준 심리검사를 실시한다. 그런데 그 결과가 아주 놀랍다.

첫 번째는 예수에 대한 설문이다.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지면서 예수님의 성격을 추측해보라고 한다. “예수님은 율법을 따르기보다 자기 방식대로 하는 것을 좋아하시는가?” “그분은 걱정이 많으신가?” 두 번째도 똑같은 내용의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진다. 단, “그분은 걱정이 많으신가?”라는 질문을 “당신은 걱정이 많은가?”라는 질문으로 대체한다. 이 검사에 정답 같은 건 없다. 학생들에게 예수님을 더 잘 이해시키려는 의도도 없다. 이 검사를 많은 사람에게 실시해보면,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자기와 비슷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같은 질문을 두고도, 내성적인 사람은 예수님이 내성적이라고 생각하고, 외향적인 사람은 예수님이 외향적이라고 생각한다.

영성 형성 전문가들은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소리를 듣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검사 결과는 오히려 반대다. 학생들은 갈수록 예수님이 자기와 더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학생이 아니라 다른 성인들을 대상으로 검사를 해보아도 결과는 대개 비슷하게 나올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자기 이미지와 비슷하게 만든다.

이왕 이런 주장을 하는 마당에, 역사적 예수 학자들도 한번 생각해보자. 이들이 학문을 하는 목적은 기록을 검토하고 역사적 배경에서 증거를 찾아 그 증거의 가치를 판단하여 “예수가 정말 어떤 분이었는지” 초상화를 그려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예수님을 자기 이미지로 찍어내기는 마찬가지였다.

역사적 예수 연구의 전성기


1980년대, 학계에서 성경 연구의 핵심 기관이었던 미국 성서학회(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관심으로 활기를 띠었다. 그 전만해도 역사적 예수라는 주제는 수십 년간 방치된 상태였다. 당시에는 로버트 펑크(Robert Funk)가 창설한 예수 세미나가 언론 머리기사에 자주 등장했다. 로버트 펑크는 정통이라면 죄다 열렬히 비판하는 사람이었다. 유명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역사적 증거를 근거로 예수님이 정말로 말씀하고 행하신 것이 무엇인지 투표를 했다. 펑크를 비롯한 다른 학자들은 자기들이 진짜 예수님을 밝혀냈다고 생각하는 책들에 그 결론을 제시했다.

그중 일부는 이상한 내용이었고, 또 어떤 내용은 정통이나 정경 복음서와 흡사했다. 언론의 주목을 받은 학자들로는 벤 메이어(Ben F. Meyer), 샌더스(E. P. Sanders),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 마커스 보그(Marcus Borg), 폴라 프리드릭슨(Paula Fredriksen), 톰 라이트(N. T. Wright) 등이 있었다. 나는 만원 강의실에 앉아 톰(톰 라이트)과 돔(존 도미닉 크로산)이 열변을 토하는 것을 보았고, 마크(마커스 보그)와 톰이 서로 옳다고 주장하며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을 들었다. 가톨릭 신자였다가 유대교로 개종한 폴라는 유대교에 대해 너무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면서 학문 전반을 놓고 계속해서 경고했다.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다. 500명이 넘는 학자들 앞에서 예수님이 본인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 논문을 발표했던 일이 기억난다. 역사적 예수의 전성기는 이제 끝났다.

그렇다면 여러 사람에게 다양한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 ‘역사적 예수’라는 표현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예수’는 실제로 이 땅에 살면서 숨 쉬고 먹고 말하며 제자들을 부르셨던 예수를 가리킨다. 이 예수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많은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다시 산 그 예수다. 역사 연구를 통해 이 예수는 본인의 유대 배경에 자리 잡았다. 이 예수를 ‘유대인 예수’라고 할 수 있겠다.

또 다른 한편으로, 사복음서 기자를 비롯한 나머지 신약성경 저자들은 성경 이야기가 전개되는 상황에서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메시아’나 ‘하나님의 아들’, ‘인자’ 같은 용어로 예수를 해석했다.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실행하실 분으로 이해했다. 이 예수는 ‘정경의 예수’라고 할 수 있겠다.

한 가지 더 살펴볼 차원이 있다. 교회는 예수를 신학적 관점에서 이해했기 때문에 본인들이 이해한 ‘예수’를 과장했다. 이 예수를 ‘정통 예수’, 즉 삼위일체의 2위이자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 빛에서 나온 빛이라고 하기로 하자.

그러나 역사적 예수는 이런 것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역사적 예수는 신약성경 복음서가 묘사하는 예수의 모습이나 교회의 정통 예수와는 대조적으로, 역사적 방법을 바탕으로 학자들이 재구성한 예수다. 역사적 예수는 정경의 예수나 정통 예수보다는 유대인 예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현대 학계의 양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다양한 예수상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역사적 예수는 학자들이 역사적 방법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예수다. 학자마다 다르므로 재구성한 내용도 다르다. 더 나아가 학자들이 사용하는 방법도 다르므로, 재구성한 내용은 더더욱 다를 수밖에 없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역사적 예수 학자들이 대부분 복음서를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들 학자들은 복음서가 제시하는 증거의 타당성 여부를 알아보려는 의도로 복음서에 접근한다. 학자들은 복음서에 접근하면서 흔히 역사 연구에서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특별히 역사적 예수 연구를 위해 만들어진 방법을 사용한다. 대부분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사용하는 기준을 ‘이중 비유사성’(double dissimilarity)이라고 한다. 허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역사적 예수 학자들 다수가 아직도 이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중 비유사성이라는 기준에 따르면,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동 중에서 당대 유대교와 예수 직후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념 둘 다와 다른 것만 신뢰할 수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른 것이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예다. 유대교나 초기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른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예는 처음부터 문제가 많다. 사실 ‘아바’(‘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용어로 ‘아빠’와 비슷한 의미다)는 이중 비유사성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데, (비록 드물기는 해도) 아람어 신약성경은 물론 유대교에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버지’라는 단어는 안 나오는 데가 없을 정도다. 그러나 역사적 예외는 별도로 하더라도, 예수님이 아버지를 ‘아바’라고 부르셨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내용으로 인정받았고, 따라서 모든 역사적 예수 학자들의 마음을 얻었다.

수많은 기준이 등장하고 비판을 받고 사라지고 수정되었지만, 그 모든 기준에는 공통점이 있다. 역사적 예수 학자들은 사복음서 내용의 신뢰성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역사적 방법을 활용하여 예수님의 모습을 재구성했다는 것이다.

둘째, 재구성이라는 단어는 좀 더 주의를 요한다. 대부분의 역사적 예수 학자들은 사복음서가 예수님을 묘사한 내용이나 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은 예수님이 스스로에 대한 생각하신 것과 사복음서 저자들이 믿었던 것보다 과장이 심하다고 전제한다. 이 학자들은 복음서의 가르침과 교회의 믿음과 달리 과장되지 않고 좀 더 원시적인 예수를 찾고 있다. 복음서가 정확하고 교회 신앙의 타당성을 입증할 수만 있다면, 굳이 역사적 예수를 연구할(“진짜 예수가 어떤 분이었는지” 조사할) 이유가 없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동참하는 이유는 두 가지밖에 없다. 첫째, 교회가 예수님을 제대로 파악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둘째, 교회가 그렇지 못했다면 교회가 제시하는 것보다 진짜 모습에 더욱 가까운 예수를 발견하기 위해서다.

이 점은 모든 진정한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근본적인 논평으로 이어진다. 역사적 예수 학자들은 사실상 제5복음서를 구성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재구성된 예수는 정경의 예수나 정통 예수와 같지 않다. 그는 재구성된 예수, 즉 ‘새로운’ 예수를 의미한다.

더 나아가, 이 학자들은 대체로 스스로 재구성한 예수를 믿는다. 역사적 예수 연구 1세대인 20세기 초반의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는 예수를 종말론적 예수로 이해했다. 최근 연구에서 샌더스의 예수는 종말론적 선지자다. 크로산의 예수는 재치가 넘치고, 기득권층을 비판하는 냉소적인 지중해 무지렁이다. 보그의 예수는 신비주의 천재이고, 라이트의 예수는 포로기의 종말을 알리는 메시아적 예언자로, 스스로를 시온으로 되돌아가는 하나님으로 믿었다. 이런 목록은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겠지만, 이 정도면 우리가 전달하려는 요점은 나온 것 같다. 역사적 예수 학자들은 예수 본연의 모습을 재구성하고 그렇게 재구성한 내용을 바탕으로 신앙을 형성했다.

이런 사실에서 세 번째 요점이 등장하는데, 오늘날 다시 한 번 새롭게 강조해야 할 내용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역사적 예수 학자들은 사복음서의 기자들과 교회 신앙에 의도적으로 반대되는 예수를 재구성한다는 점이다. 라이트는 유명한 역사적 예수 학자들 중에서는 가장 정통에 가깝다. 전통 신앙을 고수하는 역사적 예수 학자들은 한 손에 꼽을 정도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사복음서의 과장이 지나쳤고, 교회가 한낱 갈릴리 예언자를 그리스 철학자 수준으로 받아들였다는 데서 촉발되었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우리가 바라는 모습과 흡사한(나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다) 예수를 믿는 기존 신앙과 신학의 배후를 파헤치려는 시도다.

우리는 역사적 예수 연구 배후에 있는 세력이 실제 사건에 대한 역사학자의 순수하고 객관적인 관심이라기보다는 정통에 대한 선험적 불신은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이 내린 신학적 결론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선호와 강력하고 밀접한 연관성이 있어서 다른 식의 제안은 불가능하다.


학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신학이나 기독론, (더 중요하게는) 신앙을 부침이 심한 역사적 연구 결과와 연관 지을 수 있는가?

누구의 예수를 믿을 것인가?


성서학회에서 마지막으로 참석했던 역사적 예수 관련 모임에는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였다. 내가 짧은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던 그 모임은 역사적 예수 연구가 무엇인지를 잘 알려준다.

진짜 예수를 발견하고자 했던 학자들의 바람은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혔고, 그날 우리는 이 학문 시대의 종말을 목격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본연의 예수를 발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차츰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물론 그 과정에서 재미와 보람도 느끼고, 복음서에 대한 수많은 통찰을 얻기는 했지만 말이다). 더군다나, 재구성된 예수는 한 학자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정도로는 학자 본인과 제자들(제자들은 대개 교수에게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법이다), 소수의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설득하기 힘들 것이다.

독일 신학자 마르틴 캘러(Martin Kähler)는 예수를 믿는 신앙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일어나지 않은 사건, 그에 따른 재구성에 대한) 역사가들의 결론에 의지할 수도 없고, 의지해서도 안 된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누구의 예수를 믿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마땅하다. 복음서 기자와 사도들의 예수를 믿을 것인가? 교회의 예수, 즉 정통 예수를 믿을 것인가? 훌륭한 역사가의 최신 논문에 등장하는 예수를 믿을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현대 역사학계에 근거하여 우리가 합의를 도출해낸 예수를 믿을 것인가? 역사적 예수 연구는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최신 역사적 예수 연구의 죽음을 살펴보았다. 물론, 다는 아닐 것이다. 아직도 자기 자신과 추종자들을 위해 예수를 재구성하기에 여념 없는 사람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더라도 열기는 한풀 꺾였다. 아무리 중요한 제안을 해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해석에 묻혀버린 예수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보다는 지루하다는 반응을 만나기 일쑤다.

내 책상 위에는 메이어(J. P. Meier)의 「역사적 예수를 다시 생각하다」(Rethinking the Historical Jesus)의 제4권이 있다. 애초에 두 권으로 기획했던 책이 이미 두 배 분량이 되었고, 앞으로도 한두 권이 더 나올 예정이다. 1권 출간 직후에는 각종 대화가 무성하더니, 4권은 소리 소문 없이 서점에 나왔다. 메이어 책 옆에는 마르틴 헹겔(Martin Hengel)의 「예수와 유대교」(Jesus und das Judentum)가 놓여 있다. 700쪽이 넘는 대작인데, 아마도 학계의 중요 저작으로는 마지막 작품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 헹겔의 책을 번역하면 박사 과정 학생들이 읽고 교수들이 사용할 테고, 비평가들은 훌륭한 책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가끔씩 강단에 서는 목사들 중에서도 유용하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0년도 못 되어 모두 잊히고 말 것이다. 왜? 역사적 예수 학문은 막다른 길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21세기 들어  두 학자가 역사적 예수 연구의 부고장을 발표했다.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은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새물결 플러스 역간예정)이라는 두꺼운 책과 「예수에 대한 새로운 관점」(A New Perspective on Jesus)이라는 얇은 책에서, 복음서를 가장 깊이 파고 들어가면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이 기억하는 예수 배후의 모습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가 전부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을 일으킨 예수요, 우리가 따를 가치가 있는 유일한 예수다. 던의 견해로는, “기억된” 예수에는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의 신앙관이 들어 있고, 우리는 그 신앙관을 넘어서지 못한다.

내가 미국에서 가장 박식한 신약성경 학자로 평가하는 대일 엘리슨(Dale Allison)은  최신간 「역사적 그리스도와 신학적 예수」(The Historical Christ and the Theological Jesus)에서 던보다 훨씬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내게는 이 책이 역사적 예수 탐구의 임종을 알리는 나팔소리처럼 들린다. 30여 년에 걸친 역사적 예수 연구를 훑으며, 앨리슨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소위 현대 이론들(머리를 맞대면 확실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을 대략적으로 소개한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암울한 결론을 내놓는다. “진보가 모든 주제에 동일하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어떤 합의가 이루어졌던 간에, 그것은 대개 지루할 것이다.”

앨리슨은 예수에 대해 쓴 자기 책에서도 이 점을 인정한다. “나는 명약관화한 사실에 눈을 떴다. 나는 나와 닮은 나만의 예수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전문 역사학자들은 사실을 수동적으로 기록하기만 하는 기계가 아니다.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적극적으로 일한다. 우리의 합리성은 감상이나 감정, 희망과 두려움, 예감과 야망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그는 깊이 숙고한다. “아마도 우리가 경솔하게 [예수의] 전기를 자서전으로 축소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문제에 더하여 방법론의 문제가 있다. 앨리슨의 말이다. “학자들의 역사적-비평적 능력의 한계와 단편적이고 불완전한 증거 때문에,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과거를 복원하는 작업이 얼마나 힘든지 고백할 수밖에 없다.” 앨리슨은 매우 호소력 있는 한마디로 죽음을 선언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준을 휘두른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예수 시대로 돌려보내줄 (가치나 신학에서 자유로운) 방법은 없다. 앨리슨이 완전한 비관론자는 아니다. 그는 역사적 예수를 발견하기 위한 복음서 연구에서 일부나마 진실한 영감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그의 책을 읽고서 “그 시대는 막을 내렸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투신한 두 학자는 비교적 비슷한 결론에 대한 두 관점을 대변한다. 그 결론이란, 역사적 예수 게임은 기한이 다했지만 우리에게 본래 예수의 모습을 전달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가 밝혀준 것


이제 한 가지 고백을 해야겠다. 나는 교수로 재직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복음서와 역사적 예수 연구에 투자했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한 한 나는 내부자이며, 성서학회의 역사적 예수 분과 운영 위원회에 몸담은 적도 있다. 사실, 분과장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도 있다. 5년 전에 그런 제안을 받았더라면 흔쾌히 수락했겠지만, 「예수와 그의 죽음: 역사기록학과 역사적 예수, 속죄 이론」(Jesus and His Death: Historiography, the Historical Jesus, and Atonement Theory)을 집필하는 길고 긴 프로젝트 말미에 받은 제안이라 그 자리를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역사적 예수 연구에 헌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의 1장을 맨 마지막에 썼는데, 책의 방법론과 역사적 예수 연구의 성과에 관한 내용이었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1장이 역사적 예수 연구의 신학적 중요성을 상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챌 것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동원된 방법들을 적용하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역사적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이해했는지, 이해했다면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찾아보려고 최선을 다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내용이 진짜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또 원했는데, 그 중요한 사실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역사적 연구 방법들로 증명되기를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이다. 역사기록학(Historiography)으로는 딱 그만큼만 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최종 원고를 손질하던 어느 날, 우연히 로마서 4장 25절 말씀을 보게 되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역사학자로서 나는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과 그가 본인의 죽음을 대속의 죽음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무덤이 비었고, 부활이 그 빈 무덤을 가장 잘 설명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적 방법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게 있다. 예수님이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사셨다는 것이다. 어느 지점에 이르면 역사적 방법의 연료는 다 소진된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성령과 교회가 우리를 인도해주는 곳까지 우리를 인도해주지는 못한다. 나는 과거에는 눈이 멀었지만, 이제는 볼 수 있다. 하지만 내 시력을 되찾아준 것은 역사적 방법이 아니다. 역사적 방법에는 그런 능력이 없다. 믿음은 역사학자들이 증명할 수 있는 내용에만 오롯이 근거할 수 없다.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길을 통과하여 진짜 예수를 찾는 탐색은 딱 그만큼을 증명해주었다.


스캇 맥나이트(Scot McKnight)는 시카고 노스 파크 대학의 종교학 교수로, 「예수 신경」(The Jesus Creed)을 비롯한 여러 책을 저술했다.  
 
|출처/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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