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전문인 선교시대
전문인 선교의 필요성은 점점 커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거부하는 창의적 접근 지역(선교 접근 제한 지역)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21세기 선교 환경을 보면 이런 추세는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타종교의 근본주의 세력화 운동, 포스트모더니즘의 광범위한 영향력, 그리고 미래학자들이 예상하는 문명의 충돌의 시대! 이러한 시대적 조류를 보며 창의적 접근 지역이 더욱 급격히 증가할 것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현재 선교 접근 제한 국가의 수는 약 130개국, 2030년이 되면 180개국에 이를 것이라는 자료들이 이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렇듯 복음에 대해 문을 닫은 국가와 체제는 존재해도, 하나님께서 문을 닫으신 선교지역은 어디에도 없다. 선교지 입국이 어려우면 목회자 중심의 전통적 선교 패턴을 탈피하여 선교지 침투 가능한 인력을 투입시키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아래 세계 선교 운동 가운데 전 세계적으로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것이 전문인 선교(Tentmaker mission)이다.
전문인 선교사에 대한 고정관념은 깨져야
대개의 사람들은 전문인 선교사에 대해 맘 놓고 사역을 맡기기엔 뭔가 부족하고 미흡하다는 생각을 감추지 않는다. 이러한 의식 속에는 '전문인 선교=평신도선교' 라는 오해가 존재한다.
전문인 선교에 평신도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목회자 출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전문인 선교사는 전통적 선교사, 즉 목사 선교사에 대한 상대적 개념이 아니다. 전문인 선교는 선교현장의 접근을 위한 전략적 관점으로 이해돼야 한다.
종교 비자를 받기 어려운 창의적 접근 지역에서 일하는 선교사라면 누구든지 전문인 사역자로 신분을 확보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창의적 접근 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는 목회자든 평신도든 전문인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더라도 신학만 공부한 목회자 출신은 직업적 전문성이 없어서 신분 확보가 곤란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겠다.
'전문인'이란 용어는 별 것이 아니다. 선교지에서 뭔가 법적으로 인정받는 세속신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 특별한 전문 직종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이미 우리는 '대중 전문인 시대에 살고 있다. 파출부 아줌마는 가정 관리사, 보험 아줌마는 생활설계사. 간호보조원은 간호조무사라는 법적 호칭이 있듯이 특별하지 않아도 충실하게 뭔가 하면 전문인으로 인정되는 시대이다.
그리고 직업적 전문성도 팀의 '직업적 전문성'을 의미하지 꼭 개인의 전문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자신이 속한 팀이 직업적 전문성을 확보하면 개인의 전문 직업이 없어도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컴퓨터 학원으로 선교 베이스를 구축했다면, 컴퓨터 전문가 외에 컴맹인 목회자가 그곳에서 원장이나 사무장의 신분으로 비자를 얻을 수 있다.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는 격려 받아야 한다
이상의 설명으로 '전문인 선교=평신도 선교' 라는 고정관념은 깨어졌으리라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인 선교사가 뭔가 부족하고 미흡하다는 생각은 해결되지 않는다.
이것은 목회자 전문인 선교사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에 대한 불안일 것이다. 불안하다고 기독인구의 98%에 이르는 평신도 자원의 선교 동원을 주저한다면 성경에 흐르는 만인 선교사직론을 거스르는 것이요, 세계선교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평신도라는 신분이 제한의 요소가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다. 선교 현장을 감당할 만한 자질과 훈련이 그 문제의 관건이다.
전문인 선교사는 전통적 선교사보다 열등한 사역자가 아니다. 오히려 더 엄격한 자질이 요구된다. 복음을 제한하고 배척하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사역적 전문성, 직업적 전문성 그리고 지역적 전문성도 필요하다. 결국 '평신도' 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평신도냐'가 문제인 것이다. 지역 교회와 해외 선교 단체가 파송 과정을 합리적으로 강화하여 준비된 사역자를 평신도이든, 목회자이든 파송하면 되는 것이다. 목회자니까 괜찮고 평신도니까 부족하다는 고정관념은 버려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평신도라도 파송한 후에는 온전한 선교사로서 인정하고 기도와 신뢰를 계속해서 보내야 한다.
불행하게도 아직 일부이긴 하지만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에게 도전이 있다. '평신도가 무슨 선교사냐 !"라는 무지한 저항이다. 그리고 사역이 활성화되면 평신도가 설교도 하고 교회 개척도 한다고 쏟아지는 비난이다. 사실 이것은 바울 사역팀이 이미 받았던 성경적인(?) 비난이다. 그들은 로마 전역을 횡단하며 사회적 침투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장막(텐트)을 만들며 동시에 복음을 전하므로 사역의 효율성을 배가시켰다.
하지만 베드로와 동류가 아니라는 점에서 약점을 가지고 있던 바울은 이러한 세속적인 업에 종사함으로써 '당신도 사도냐!"라는 거센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그러나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 (고전 9:22)이라고 영혼에 대한 열정을 말하며 오직 열매로 사도임을 증명하였다.
이것은 지금도 일부에서 좋은 결과를 나타내고 있는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에게 "네가 안수를 받았느냐! "고 비난하는 것과 유사한 모습이다. 성경과 교회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안수(ordination)를 통해서 일하시기보다는 기름 부음(anointment)을 통해 일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목회자 전문인 사역자도 격려 받아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 전문인 선교사에게도 어려움은 올 수 있다. "어떻게 안수 받은 자가 세속 직업에 종사할 수 있으며, 어떻게 목사가 하나님이 위임한 목사 신분을 숨길 수 있느냐!"는 비난이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목회자라는 신분은 복음을 위한 것이다.
그것이 복음에 제한이 된다면 그 직분을 버릴 용기도 있어야 한다. 복음을 거부하는 선교 접근 제한 지역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회자의 신분을 잠시 유보해 놓은 이 분들이야말로 진짜 목회자요 선교사이다.
우리가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면서 선교지 문이 닫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선교학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신학적 지식의 빈곤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결국 지상 명령을 제한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평신도 팀 사역으로 교회를 개척하라!
전세계 개척 선교팀의 사역을 생각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회자 선교사를 중심으로 평신도 선교사들이 보조하는 모습을 연상한다. 다시 말하면 팀 사역의 정점에는 항상 목회자 선교사가 위치해야 하며 평신도 선교사는 단지 조력자라는 인위적인 구조에 익숙하다.
평신도는 단지 목회자의 조력자인가
심지어 목회자 선교사 없이 평신도 선교사만으로 교회개척해서는 곤란하다는 어처구니없는 편견도 존재한다. 팀을 이끄는 목회자 선교사의 영성과 능력이 탁월해서 지도력의 위치에 있다면 문제가 없지만, 목회자라는 것 때문에 무조건 팀의 지도력을 가져야 한다면 이것은 팀에 상당한 부담을 주게 될 것이다. 팀은 창의적이며 유동적이고 성령의 음성에 민감해야 하는데 이와 같은 상하복종의 고정된 구조를 가질 때는 경직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조로서는 선교사들 안에서 서로가 상담의 상대자요, 동역자라는 인식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미 팀 사역의 의미는 사라지게 된다. 이런 모습으로 사역을 잘하는 팀이 있다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서의 모델은 될 수 없다. 자칫하면 팀 사역의 기능적 효율성을 무시한 채로 그저 팀을 사람들의 집합체로 전락시키게 된다.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는 목회자 전문인 선교사가 교회개척하는 데 단지 직업적 전문성을 가지고 도움을 주는 조력자라는 고정관념은 반드시 수정돼야 한다.
은사 통해 팀 지도력을 공유해야 한다
교회 개척에는 교단도 교파도 없다. 어쩌면 사도행전의 개척되는 교회들처럼 이제 처음으로 소수의 신앙 공동체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개척을 위한 팀 사역의 모델을 성경에서 발견해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1-12절에서 이렇게 권고하고 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자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함이라." 이러한 5차원의 사역은 개척 선교 사역의 근간을 이룬다.
개척될 교회의 모습은 교회 개척에 참여하는 구성원의 은사들에 의해 투영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각각의 은사는 먼저 발굴과 확인 과정을 가져야 한다. 누군가가 사도적 은사가 있다고 선포해서, 혹은 선지자적 은사가 있다고 주장해서 그 지위에 오르고 그 역할을 맡는 것이 아니다. 은사는 공동체 안에서 검증을 받아야 한다. 자신의 은사를 통해 공동체가 강하고 풍성해지는데 기여했을 때 그러한 은사가 있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그는 팀의 한 분야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게 된다.
진정한 영적 공동체라면 직분이나 어떤 임무를 위해 지도력을 외부에서 갑자기 영입하여 책임을 맡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적 권위는 낙하산식으로 임명된 사람에 의해 행사되는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의 기름부음이 있음을 팀의 구성원이 모두 인정할 때 온전히 행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지시나 명령에 의한 경직된 구조가 아닌, 인정된 권위에 의한 은사적 팀 구조가 형성되고 지도력이 공유케 된다. 성령의 은사가 팀 안에서 다양하고 풍성하게 나타나고 그것이 인정되면 지위적인(Positional)구조에서 기능적인(Functional)구조로, 제도적인(Institutional)구조에서 영감적인(Inspirational)구조로의 전환은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교회 개척을 위한 팀 사역의 묘미를 극대화한다.
그렇게 되면 각 사역자들의 능력과 은사가 역동적으로 시너지 효과를 나타나게 되고 교회 개척의 수많은 장애물도 돌파하기가 용이해진다. 외국인에 대한 감시. 기독교에 대한 상처와 분노, 적대적인 정치 사회제도, 그리고 그 땅을 장악하고 있는 영적 존재 등 결코 복음에 호의적이지 않은 세력들의 거센 도전을 극복하며 교회 개척을 수행하려면 이러한 역동적인 은사적 팀 사역에 의한 유연한 구조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참으로 개척 선교지 상황과 성경적 교회관은 은사에 의한 지도력의 공유를 지지하고 있다. 이러한 성령의 기름부음에 의한 은사적 팀 사역을 통해 목회자 선교사와 평신도 선교사가 지도력을 공유할 때 진정한 동역이 일어나고 교회 개척은 불꽃처럼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확장을 위해 필요한 이들을 부르실 뿐 아니라 누구를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실 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모든 사역자들은 편견 없는 열린 마음으로 귀 기울여야 한다.
평신도뿐 아니라 목회자도 깨워야 한다
이슬람 사회에서 인간은 알라 앞에 미미한 존재일 뿐이다. 오직 알라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만이 최고의 미덕이다. 그러므로 '왜?' 라는 질문이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단지 그것이 알라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슬람의 인간론과는 달리 우리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다. 우리 하나님은-무조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따르는 것이 아닌-하나님께 대한 나의 반응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묻고 깨닫는 것에 뭔가 어색함을 느낀다. 학교뿐 아니라 교회에서까지도 주입하는 대로 여과 없이 받아먹어야 했던 잘못된 순종(?) 교육에 너무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유를 질문하면 반골(?)로 간주될 수 있는 경직된 교육은 한국교회의 계급 구조와 맞물려 상하복종을 미덕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것이 비복음적이라는 사실을 눈감아 버린 채 교회 안에 유교 문화의 잘못된 영향력이 너무 깊게 뿌리를 내렸다. 그래서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은 한 인격체로서 하나님께 질문하면서 하나님과 역동적 관계를 맺고 더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에 너무 서툴고 어색하게 되었다.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관계도 동역 관계 가운데 이루어지는 성경적 교제가 아닌, 일방적인 지시와 복종이라는 권위적 틀 속에서 안주하는 것이 상호간에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
우리 한국 교회를 보면 마치 이슬람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답답함과 동시에 안타아운 아픔을 느낄 때가 있다. 성직자의 직분이 목자 정신이 아닌 목자의 위상으로, 주인의식(Ownership)이 아닌 주민(Owner)으로, 영적 권위가 권위주의로 변질되어 버렸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섬김의 영적 영향력 대신 지배력으로 타락해 버린 교회의 지도력! 과연 한국 교회는 이 부분에 대해 얼마나 자 유할 수 있을까?
하나님 앞에서 목회자, 평신도를 가리지 않고 모든 성도들은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동일한 신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유와 계급의 개념이 교회 안에 들어와 위탁을 소유로, 직분의 차이를 신분의 차이로 잘못 적용한 오류가 있다면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목회자에 의해 지시된 역할만을 묵묵히 감당하는 평신도가 좋은 신앙인(?)으로 칭찬을 받는 구조 속에서는 공동체 내에서 진취적으로 자신의 은사를 활용한 창의적 사역은 분명 한계가 있다. 이러한 관료적(?) 시스템 속에서는 평신도는 스스로 문제 해결의 능력을 배양할 수 없게 되고 끊임없이 목회자에게 의존하게 됨으로 교회의 영적 빈곤의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선교한국(Mission Korea)에서 헌신한 수많은 청년 학생들이 선교의 모판이 돼야 할 지역교회에 돌아가 전문인 선교사로서의 그 비전을 소멸시킨 이유가 이러한 지도자들의 경직성과 그 구조에도 관련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평신도를 깨우자"는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참으로 고무적이고 또 깨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깨우려면 제대로 깨워야 한다. 혹시 목회자 입장에서 깨우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진정한 동역자로 깨우기 위함인가! 아니면 조력자를 확보하기 위함인가! 이대로 깨운다면 그저 조력자만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교회의 창조적 개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이미 머리의 위치에 앉아 버린 목회자를 깨우는 일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평신도가 교회 개척에 나설 때이다
세대(Generation)가 변하고 있다. 새로운 세대는 표현이 직접적이고 개방적이다. 그리고 자신이 흥미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투자를 하고 관심을 보인다. 과거의 세대들처럼 무조건적인 충성심은 거의 없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가만히 앉아서 시키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반골의 세대이다. 그리고 위아래도 없다. 능력으로 승부한다. 이러한 새로운 무리에게 현재의 한국교회의 경직된 패러다임을 강요(?)한다면 그 결과는 결코 밝지 않을 것이다. 지금쯤 우리는 사역을 독점했던 모세에게 그의 장인 이방 족속(!) 이드로가 한 뼈있는 충고를 한번쯤 기억해야 한다.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다. 그대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연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중함이라 그대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출 18:17-18).
모세는 충고에 따라 지도력을 나누고 공유케 하여 연합된 팀 사역의 모습으로 탈바꿈시켰다. 이제 점점 한국의 영적 상황도 변하여 선교 개척지의 상황처럼 복음에 대해 호의적인 분위기는 아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에 따른 은사 팀 사역은 21세기의 새로운 세대의 기질에 알맞을 뿐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교회 개척 방법이다. 목회자와 평신도를 구분하지 말고 은사와 능력에 따라 팀 사역을 해야 한다.
교회 안에 목회자와 평신도의 진정한 동역이 일어나야 한다. 교회의 지도력은 공유돼야 한다. 평신도들이 교회 개척의 첨병으로 뛰어야 교회가 산다. 이제는 평신도들이 교회 개척을 할 때가 되었다. 한국 교회의 회년을 기대하며.
21세기 는 평신도 전문인선교의 시대이다.
서구의 선교 주도 국가에서는 전문인 선교가 이미 보편화되었지만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 전문인 선교에 헌신해 온 단체들이 전문인 선교에 대한 보급과 활동을 위하여 '한국전문인선교협의회(KAT)'를 만든 것이7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실제로 한국의 전문인 선교 현황은 여러 가지 상황에 있어 초보적인 단계이다.
그러나 21세기의 문턱을 밟는 지금이 전문인 선교를 활성화시켜야 될 때이고 기존의 교회 개척 선교의 패러다임에 전문인 선교의 패러다임을 추가하지 않으면 미래가 불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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