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에 있어서 사회적 접근의 필요성
- 김요셉 교수(터키어권 선교회 대표,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교수)
미국의 사회학자 파슨즈(Talcott Parsons:1902-1979)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한 사회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유지(Maintenance)기능, 목적달성(Goal Attainment)기능, 통합조정(Integration)기능, 도덕적(Moral)기능 등의 네 가지 기능을 필요로 하며 이 중 하나의 기능이라도 균형이 무너진다면 그 사회는 변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이제 해외의 선교지는 더 이상 10년, 20년 전의 모습을 유지하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계속 변화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실질적으로 기독교 선교 사역을 내적 혹은 외적으로 도와주고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선교지의 경제적인 악순환에 따른 내부사회 저변층으로부터 발생하는 심각한 여러 현상들은 정부로 하여금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서구를 비롯해서 지구촌 여러 국가들과의 연합 및 문호 개방을 불가피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다양한 현상들은 기독교 선교 사역에 깊은 영향을 끼치면서 여러 가지 사역의 청신호로 등장해왔다. 이는 특별히 복음 전도를 인정하지 않는 선교 지역과 창의적인 접근을 필요로 하는 미전도 지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접근성’이란 말은 사회적으로 참여할 가능성(ability to participate)을 의미한다. 아울러 본고의 주제인 ‘선교에 있어서 사회적 접근’이라는 말은 선교 사역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여러 다양한 사회적인 참여들을 뜻한다.
특별히 본 글에서는 주로 미전도 종족들이 살아가는 곳, 즉 복음 전도가 허용되지 않은 선교지를 중심으로 갈수록 다양한 모습과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현대 선교의 효율적인 사회적 참여들을 모색해 보며 그 필요성을 알아보고자 한다.
가. 선교 국가의 정치-경제와 지역 교회와의 관계
본인은 오랫동안 복음 전도를 허용하지 않는 선교 현지에서 살면서, 지극히 적은 소수의 현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대다수의 비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그 지역의 선교에 가장 효율적일 수 있을까에 대해 많이 고민해왔었다. 현재 창의적인 접근을 필요로 하는 선교지에서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못 배우고, 가난하고 또한 현 국가의 정치 및 경제 체제에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있는 실정이며, 실질적으로 그 나라의 정치와 경제를 이끌어 나갈 계층과는 거의 상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이는 우리의 선교지가 아직도 눈에 띄게 변하지 못하는 주요 원인으로 꼽힐 수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현지 교회가 선교지에서 먼저 할 일은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적인 투자에 최우선 순위를 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현지 교회는 곱셈법 번식을 목표로 정하고 인근 대학 캠퍼스 전도에 역점을 두고 기도하며 필요한 준비들을 갖추어야 한다. 이렇듯 캠퍼스 복음 전파를 통한 고학력자들의 배출은 장기적으로 지역 지도자 양성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현지 소수의 지역 교회에서 그 국가의 정치와 경제를 움직이는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을 길러내는 산실로 만든다는 목표를 세워야 할 것이다. 둘째로, 지역 교회들은 현지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전부 일당백의 ‘제자를 낳는 제자화’에 목표를 두고 온 정성과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선교지에서 이 ‘제자를 낳는 제자화’는 가장 중요한 질적 부흥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로, 지역 교회들은 선교사들로부터의 재정적인 독립을 선포해야 한다. 지역 교회들은 이를 위해 주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도 모범적인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재정적인 자치-자전-자립의 모델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현지 기독교 선교가 오해 없이 성장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이 외에도 선교 국가의 정부 방침과 권위에 순종하는 소수로서의 기독교 교회의 모습은 정부의 요주의 대상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이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합법적인 교회의 모습은 현 정부와의 갈등을 다소 해소시켜 줄 수 있을 것이고 좀 더 수월한 복음 전도의 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본인이 살았던 국가로 온 새로운 사역자들 가운데 공공연하게 쿠르드인 선교를 알리고 쿠르드인들의 전도를 계획하지만 이는 현지에서 가장 예민한 정치적 사안으로 선교사가 아닌 간첩으로 먼저 추방될 수 있는 위험이 다분히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제 선교사들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선교지에 역량 있는 회사 경영인, 국회의원, 교사와 대학 교수, 음악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그리스도인들을 배출하기 위해 사역 대상에 변화를 주는 일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나 선교지의 지역 교회들이 이러한 다양한 사역 패턴을 설정하며 나가는 데 있어서 정말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정직한 삶이 반드시 이 과정 속에서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슬람 지역의 젊은이들은 자신이 무슬림이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또 다른 무슬림들로부터 속고 사기당하며 상처를 받아왔기 때문에 그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정직해야 하며, 주고받는 헌신적인 사랑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만약 선교지에서 선교 역사가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기독교인들이 소수로 남아 있다면 기독교인들이 현지의 비 기독교인들과 큰 차이 없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는 큰 차이도 없는데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굳이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며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의 핍박과 고난을 감수할 특별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선교지에서 자신들과 다른 정직함과 섬김 그리고 손해를 보고도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을 보게 될 때 그들은 변하게 되고, 그 땅의 고난과 핍박을 각오하고도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그 땅에서 살아가는 현지 교회와 현지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무언가 달라야 하며 마태복음 5장의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결코 그 땅에서 비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진정으로 삶을 바꾸는 역사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 선교지에서 선교사와 현지인들과의 관계
그동안 현지에서 선교사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 배경과 기독교 문화로 말미암아 믿지 않은 현지인들에게 기독교를 아주 배타적이고 독단적인 종교로 오해하게 만들었다. 이는 현지 기독교 선교를 궁극적으로 막는 결과를 초래해왔다고 본다. 이는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잘 되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그 사람의 단점들을 끊임없이 비난하며 공격하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면 기독교인의 이름으로 수많은 전쟁과 살인의 역사들이 있었고, 또 이슬람권에서 사역하는 사역자들은 거의 무슬림들로 이루어진 사회 속에 살아가면서도 무조건적으로 그들이 성서로 믿고 있는 ‘꾸란’과 선지자로 믿고 있는 ‘무함마드’를 비난해왔다. 또한 많은 기독교 국가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성적 음란과 비도덕적인 문제들, 가톨릭교의 성상숭배 같은 문제들은 오늘날 지구상에 살아가는 13억의 무슬림들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분노와 상처로 자리 잡고 있음을 우리 모두는 기억해야만 한다.
기독교 문화가 전혀 없고 기독교인들도 없는 복음의 불모지에서 한 명의 새로운 기독교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많은 희생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지역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국가적인 배신행위요 또 자기 민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불순한 행위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부모와 가족, 이웃과 친구, 친척으로부터의 온갖 핍박과 위협 속에서 살아감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 선교사들은 믿음으로 자신이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을 그 사회 속에서 담대하게 외치게 하고 있으며, 또 자신의 믿음을 지키며 순교할 각오까지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선교사들에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으며, 그런 도전은 오직 현지인 지도자들이 다른 현지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다. 선교사는 언제나 선교지에서 손님이다. 선교지 상황이 어려우면 외국인으로서 그 선교지를 언제든지 빠져 나갈 수 있는 외국 여권 소유자인 것이다.
본인은 이를 위해서 소위 ‘내부자 운동(Insiders Movement)‘으로 알려진 새로운 선교패러다임으로 전환할 것을 권한다. 이것은 미전도종족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다수를 향한 선교의 새로운 사회적 접근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이슬람권에서 사역하는 모든 선교사들은 우선적으로 ‘예수 잘 믿는 무슬림’들을 만들어 나가는 일부터 계획하고 실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를 영접했다고 해서 그 사회에서 무조건 꺼내려고 시도하는 것은 그 자체가 그를 고립시키고, 사회로의 재진출을 막아버리게 할 수 있다. 또 라마단 금식 절기가 되면 무슬림들과 함께 금식하기도 하고, 여성 사역자는 무슬림 여성들처럼 히잡도 쓸 수도 있을 것이고, 예배의 장소에 꼭 십자가가 없어도 좋고 모스크처럼 의자 없이 바닥에 그냥 모일 수 있는 것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듯 한 영혼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한 현지 선교의 상황화(contextualization) 연구가 더욱 활발히 진전되어야 할 것이며 더욱 더 많은 사례들이 발표되고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올바른 상황화의 적용을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고, 성경 말씀이 이 상황화 사역 방침들을 뒷받침해줘야 한다. 이는 어떻게 해서든지 한 명의 영혼이라도 주님께로 인도하려는 바울 사도의 마음(고전9장)과 천국 문화를 포기하고 이 땅에서 인간의 몸으로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사랑의 마음을 본받는 게 마땅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할 때 선교의 주체가 선교사 자신이 아니라 성령님이시라는 것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다. 한국 교회와 선교사가 선교지를 위해 꼭 알아야 할 것들
선교지에서 현지인들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과 수용의 어려움이 있다. 비록 내면의 장벽 즉, 기독교의 편견이 다 무너졌다 할지라도 기독교인이 될 때 찾아오는 주변사람들의 핍박, 직장에서 관계의 어려움 그리고 장래에 대한 두려움을 그들은 잘 극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기쁘게 복음을 받아들였다 해도 세상의 염려로 인해 복음의 싹이 그들의 영혼 속에서 열매로 나타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와 선교사들은 구원받은 영혼들이 그 사회에서 잘 정착하도록 그리고 그들에게 직면한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믿음으로 잘 승리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도와주어야 한다.
특별히 현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들이 갖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편견들로 구성된 내면세계의 장벽이 무너져야 한다. 이 장벽을 어떻게 무너뜨리느냐에 따라 복음전파의 승패가 달려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서 그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그 보혈의 피로 죄 값을 치루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신 이 사실, 그리고 화목케 하신 증거와 구원받은 증거로 우리 가슴속에 성령을 보증으로 준 이 사실을 이들에게 믿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선교사들을 바울 사도와 같이 특별한 방법으로 저들을 구원하는 복음 사역에 쓰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것 또한 잊어서 안 된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성경 배포 사역도 중요하고, 기독교 방송 사역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쉽고 보편적으로 할 수 있는 사역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먼저 선교사들이 이들의 친한 친구가 되어주는 사역이다. 이슬람권에서 가장 효과적인 전도는 친구 관계를 통한 전도 방법이었음을 본인은 경험을 통해 잘 기억하고 있다.
이제 선교지를 향해 우리가 간절히 바랄 것은 그 곳의 현지 형제들이 예수 안에서 스스로 서서 어느 곳에서 살아가더라도 주님의 자녀로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며,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증거하며 살아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너무 숫자에만 치중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지 않는 교인과 교회들이 늘어나는 것을 방치한다면 앞으로 현지 교회 발전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비록 기독교라는 종교는 그 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할지는 모르지만 주님이 참으로 원하시는 하나님의 공동체는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또 하나 우리 선교사와 한국 교회가 명심해야 할 것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한 형제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그들이 다 지도자라든지 전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믿었다고 모두 다 같은 성격을 가질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환경과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올바로 살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선적이어야 한다. 선교지라 해서 예수를 믿는 형제들이 모두 신학교에 가야 하거나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역자들의 성급함과 실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른 또 하나의 실수는 교회 내에서 어떤 형제가 유능하고 지도자의 자격이 있는가를 가늠하면서 그를 지도자로 자랄 수 있도록 훈련하고 가르치려는 일에만 치중하지만, 정말 지도자가 될 사람들은 그러한 지식이나 훈련에서보다는 형제들을 잘 섬기는 자들 중에서 선택되어야 한다. 이 땅에서 주님은 섬기는 자를 원하시지 지도자를 원하시지 않는다. 주님 자신도 이 땅에 섬기러 오셨기 때문이다.
앞으로 더 많은 전문인 사역자들이 여러 형태를 가지고 다양하게 선교지에서 살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을 거부하는 지역에서의 접근방법으로 이 방법 외에는 더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현재로서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문 직업을 통해 겸손히 현지인들을 섬기려는 자세로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그 땅에서 또 다른 실패를 맛보아야 할 것이다. 진정한 주님의 나라는 어느 곳에서든지 참 겸손과 섬기는 자들을 통해 임하기 때문이다.
맺는 말
지금까지 본 글을 통해 선교에 있어서 사회적 접근방법의 필요성에 대해 알아보았다. 선교의 사회적 접근을 가장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수많은 전문인 선교사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들이 필요한 곳 대부분은 복음을 전하기 힘든 곳이며 그래서 창의적으로 접근을 해야 하는 곳이다. 한국도 복음이 처음 전해지기 시작한 때는 선교사들에게 일하기 좋고 편한 곳이 아니었다. 많은 박해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지역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도착함으로써 하나님이 축복하신 땅으로 새 출발을 하게 되었고 한국인은 가슴 속에 젖과 꿀이 흐르는 심령들로 변화되면서 찬송과 감사의 소리를 높여갔다. 전문인 선교사들이 들어가야 할 지역들이 지금은 황량하고 고통스러운 지역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주를 향한 기도소리가 높아질수록 그 땅들과 그곳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변해갈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탄과 싸우고 피를 흘리며 승리를 얻었던 그 땅을 축복할 것이다. 또 그 땅 위에 살며 하나님을 경배했던 백성들의 눈물과 기도를 지금도 기억하고 계실 것이다. 이제 새로운 옷을 입은 선교사들이 새로운 이미지로 회복해 나갈 때 이 모든 것은 가능할 것이다.
기독교가 왜곡되고 선교사의 이미지가 상실된 선교지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은 죽은 자를 다시 살려주는 일과 같다. 이 일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성령님으로 인해 할 수 있다. 선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성령님께서 주도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희망이 있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주리니 너희가 살리라.”(에스겔 37: 5-6)
이렇듯 우리를 죽음에서 살려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현지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해 주실 것이며, 초대 교회 때처럼 놀라운 성령의 불이 그 땅 가운데 다시 한 번 일어나도록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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