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와 교육
황태연 목사
교육이란 한 사회를 유지하거나 개혁을 위해 교육자가 피교육자에게 변화르 주기위한 일련의 체계화된 상태변화 과정의 행위이다. 선교를 위한 교육도 피선교국의 사회를 유지하거나 변화를 위하여 선교사 자신이 먼저 피교육자가 되어 교육을 통한 어떠한 방향들을 설정하고 그 틀을 가지고 가르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 소고는 일반적으로 선교에 따르는 교육에 있어서 이러한 방향들로써의 교육을 잘못 인식하거나 미처 관심의 대상이 되어지지 못한 문제점들을 소개하여 함께 토의를 하고져 하는 것이 목적이다.
첫째, 일반적으로 선교교육을 바라보는 시각인 두극단이 선교 교육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선교는 문화권이 다른곳이기 때문에 국내(파송국)에서 받는 교육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극단성은 선교는 하나님이 하는 것이지 인간의 어떠한 것을 통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신앙의 맹신적인 헌신의 자세에서 오기도 하고,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에서 배운 것은 선교지에서 새롭게 배워야한다는 국내 교육의 무용론에서 오는 발상의 결과라고도 생각된다. 이러한 사고의 저편에는 교육이라는 것이 한 사회에서 적용하기 위한 일반적인 지식과 정보와 기술축적만을 위한 과정이라는 생각과 혹은 형식 윤리나 법률을 습득하는 도장으로 여기는 교육의 잘못된 인식이 있다.또한 선교라는 말과 타문화권이라는 생각이 서로 연결되어 타문화라는 사실에 너무 집착하거나 타문화권 상황을 너무 과대평가함으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부작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다른 한편의 잘못된 인식은 국내교육의 우월성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여 타문화권에 대한 지식과 접근자세에 있어 무관심하거나 과소평가하는 생각이다. 현대사회는 지구촌을 형성하여 간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문화의 유사도가 높아져 가고 있기에 선교사가 현지 선교지에서 받는 교육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과 더불어 본국에서도 국제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사실, 언어와 사고구조도 현대화 내지 산업화라는 말과 더불어 서구적 사고가 동양과 아프리카 여러 지배층사회의 정신세계에 침투한 것도 사실이다.또한 이민으로 인하여 인종이 다원화 현상을 보이고 있음은 각국간에 교류할 수 있는 문화적 접촉도와 유사성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신적 변화는 물질적 변화속도 보다 훨씬 변화 속도가 늦으며, 또한 그러한 속도를 우리가 앞당겨야 할 필요가 있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민족과 환경을 사랑하는 선교사로써의 우리는 우리가 섬겨야 할 많은 선교지 민족들이 이데올로기나 종교의 교리를 넘어선 보다 근초적인 정신세게의 변화에는 생태적으로 변화를 거부하는 모습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역해야하는 곳은 전술한 바와 같이 문화적 접촉도와 유사성이 높은 모든 국가의 수도권만이 아니다. 우리의 일할 사명지로서의 문화권은 보다 더 깊은 곳에 가려진 국제사회에서 소외되어진 곳이 많다. 더나아가, 설령 한나라의 수도권에서 사역한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전달하는 신앙과 학문이 보편적인 것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만큼 선교에서의 교육은 타문화적인 요소를 떠나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에서의 교육쪽에 있어 보다 넓어질 수 밖에 없고 또한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면을 염두에 둔다면 국내교육과 타문화권을 위한 교육이 조화를 이루어 균형을 이루지 아니하면 아니된다고 본다.
두번째 범하기 쉬운 선교교육의 오류는 선교를 본국 교회의 연장사역으로 생각하는 면에서 오는 문제이다.
선교는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모형으로 성장하고 그 안에서의 주안에 형제된 자들과 교제의 기쁨을 누리는 곳이다. 이러한 기본 목표는 잘못하면 인간적인 욕구로 발전되어갈 수 있는데, 곧 파송교회의 모형을 피선교국의 교회에 재생시켜 보자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 교육이 이러한 욕구수행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 쉽다.
교회가 성숙하면 그 문화에 따라 조직화되어지고 관료화되어지지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조직은 필요불가한 악인고로 한 교회의 체제 혹은 전체적인 교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목회자나 전문적인 기독교사역자가 되려는 자들은 이러한 것을 배우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선교지에 나간 자들이 이러한 교육프로그램의 원래의 동기를 잊고 이러한 교육프로그램 그 자체가 마지막 가치로 전환되어 이러한 것에 집착하여 절대화하고, 원래 필요한 교육은 소홀히 하거나 세속된 것이라는 이름하에 박대하거나 무관심의 대상으로 여기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본국교회에서 잘 적용되거나 유행하는 교육행정, 목회행정,지도자론 등 심지어는 어떠한 특수한 교리의 강조점까지 성경과 동일시하여 실제 선교지에서 사용되어져야 할 다른 모델들이나 이론들을 비성경적으로 돌리려는 폐쇄적인 자세이다.
선교교육은 국내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명심하여야할 것이다. 국내에서 필요한 목회방법과 기술이 꼭 선교지에서 필요하거나 그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선교지의 타문화권에서의 리더쉽을 관찰하면 한국적 유교방식의 지도자상과 많은 차이점이 있음을 보게 된다. 한국에서의 목회행정이 장로교행정이라는 것이거나 감리교적인 교파의 전통이라는 것만으로 선교지에서의 강제주입을 정당화할 수 없다. 교파전통이라고 말하는 많은 것들이 얼마나 한국화하였는가를 살펴보면 우리는 국내에서의 목회자 양육을 위한 프로그램이 피선교국에서 똑같은 비중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생각과 이를 위한 선교교육프로그램은 많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선교교육을 실시하는 교과내용에 있어서 본국목회자 양성을 위한 내용보다 보다 넓고 다양한 면들을 제시함으로 한국목회의 연장사역을 위한 교육이 아닌 피선교국에 또 다른 형태인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교육이라는 것을 강조하여야 할 것이다.
세번째 범하기 쉬운 오류는 두번째 오류의 연장된 면인데,곧 한국교회의 전통에서 한국의 전통을 강조한 교육이다.
곧, 한국적 교육을 절대화하거나 성서화시키려는 자세이다. 한국에서의 교육은 가정과 사회에서의 비정규교육과 더불어 정규교육과정에서까지 한국적 가치를 극화시키고 절대화시키는 면을 우리는 본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의 가치주입은 한국선교사가 선교지에서의 교육에도 반영되어지는데 가령 신의,명분,체면,보은,서열,등등의 가치관이 성경을 해석하거나 교회의 행정에 관하여 강의할 때 강조되어지고 있다. 한국적 가치관이 절대화 혹은 성서화되어지는 것은 선교사가 타문화권에서 교육할 때 피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요소이다.
더 나아가, 성서의 세계관과 자신의 세계관을 중복시켜 가르치는 면도 없지 않다. 미국인들의 천국에 관한 상상은 필리핀인들이 가지는 상상도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H.Paul Douglass 교수의 연구는 미국에서의 개신교도들은 구원,용서,순종 등 도덕적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고 발표하고 있다. 반면,필자가 조사한 필리핀 개신교도들의 가치는 전통적인 도덕적 가치보다 오히려 성취적 가치 곧,자기만족(평화) 자기성취도,완성도, 논리성을 보다 더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면보다 인간과 사회가 총체적으로 발전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문화의 한계성 때문에 자기 사회에 필요한 면만을 보게 되었고, 선교사는 그렇게 성서를 보아왔기에 자기가 찾은 면만 선교지에서 강조하는 경향을 자주 보게 되는 것이다.
두 문화의 가치관 차이에서 빚어지는 교육의 차이점을 인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선교지와 파송국의 두 문화권을 깊숙히 접해 본 전문가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현상황은 한국의 선교학교수 대부분이 피선교국의 문화를 밀도있게 접해볼 수 없는 우리의 짧은 선교역사이고,또한 접하여 본 자가 있다할지라도 그가 체계적으로 연구하지 못한 비전문인에 의해서는 교육이 효과적으로 수행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우리는 안고 있는 것이다.
네번째 선교를 위한 교육의 문제점은 선교국의 시대정신에서 오는 약점이다.
모든 나라가 자신의 고유한 개발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렇나 개념은 정치적인 개념부터 시작하여 경제,문화,인력개발에 이르기까지 인생이 관련된 모든 분야에 적용되고 있다. 낭만주의 사조에 살던 사회의 일반적인 교육의 지침은 개인의 완성이다. 실용적인 교육관에 입각하여 풍요로운 미국사회를 맛본 많은 이들은 인간의 실용적 개발에 목적을 가지고 교육을 실시해왔다. 선교사는 인간이나 사회의 개발에 대한 자신 나름대로의 개념을 가치척도의 기준으로 삼아 피선교국과 자신의 모국과 비교하는 자세를 먼저 버려야만 한다. 더 나아가, 선교사가 세우는 여러가지 사역이 진정 영적인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가진 개발개념에 의하여 선교 활동에 임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다.
영적인 면에 있어서도 영적 개발의 잘못된 이해에서 오는 미숙한 점은 마찬가지이다. 개인의 영적 개발을 기초로 한 기독교의 하나님 나라 확장은 분명 개인주의적 기반에 선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전도방법, 제자와 훈련를 대상으로 개발되었는가를 재확인하여 보아야할 것이다. 이러한 시도없이 신학교에서의 선교후보생을 위한 교육은 비교의 기회가 전혀없기 때문에 이 방법은 훌륭한 방법이고 더 나아가 이 방법은 성서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영적 개발 범위와 분야, 그 방법은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한 사회가 말한다고 본다. 다만 이러한 것들이 인간의 총체적인 발전을 저해할 경우에는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는 진리를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사의 교육이 일반적인 교육의 제한성을 파악하고 상대적이라는 면까지 인식할 수 있는 교육의 장이 필요하다고 본다.
다섯번째로는 한국 선교교육이 너무 수입의존적 교육이라는 것이다.
한국선교사들의 기질과 장단점을 고려하지도 아니한 채 서구선교교육을 수정없이 받아드리는 것은 우리가 한국선교사가 되고져함을 버린 자세이다. 선교의 경험축적은 물론 우리는 서구선교기관과 개인에게서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교육은 피교육자의 특성을 고려치 않고서는 그 교육은 인간을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에 프로그래밍을 하는 것과 같다. 한국의 여러 단체들이 서구선교단체들과 협력사역하는 것은 보기에 바람직하다. 그러나 보다 우리도 그들에게 공헌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고 이러한 것들을 교육에 적용해 보자.
제언
초교파적인 차원에서 모인 여러 신학교육의 지도자들의 세미나에서 조종남학장(서울신학대)은 신학교의 난립과 낮은 교육수준,신학교의 교육 이념의 불확실성,교수의 자질과 커리큘럼의 문제, 재정문제 교회와 협력 문제등이 현 한국신학교육의 문제라고 제기하였다. 이러한 처방으로는 이수영교수(장신대)는 성경공부 성경공부지도,변증학,선교학,전도훈련,최신경제,사회,인문,자연과학 및 법률상식,북한연구, 통일문제 및 북한복음화 방안연구,외국어 강도높은 도덕훈련 및 수도자적 영성 훈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문제 제기와 처방은 국내 사역을 위한 목회 지도자 개발을 중심으로 연구되어진 것들이라고 본다. 이러한 한국신학교육을 초교파적으로 협의하는 시도를 고무적으로 보면서, 이러한 교육의 문제의 문제제기와 방안이 선교교육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어 보다 전문적인 면에서 선교교육방안이 나와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면에서,상기한 여러 조화되지 못하고 미숙한 선교교육방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몇가지 제안을 하고져 한다.
첫째, 한국식 교육이 표준이라는 사고를 지양하고 교육의 내용과 그 방법론을 선교지의 필요와 그 문화에 따라 실시되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선교사 교육을 실시하는 자들은 가능한 타문화를 경험하고 한국문화가 상대적 가치 밖에 갖지 못한다는 경험을 가진자로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선교후보생을 위해 강사진이 다국화되어지길 바란다. 더나가 다국화되어지더라도 서구중심의 혹은 선교사 파송국 중심으로 되어진 다국화라기보다는 피선교국의 지도자들도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다국화된 교육팀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둘째로는 각교단 중심의 선교 교육을 실시하는 협소한 자세를 버리고 보다 달란트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각교단 선교지도자들과 교육자들의 협력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본다. 아직 한국의 선교 경험과 인적자원은 부족하고 미숙한 상태이다. 이러할 때 일수록 보다 여러 교단이 경험과 인적자원을 서로 나누며 협력할 수 있는 보다 큰 Pool(방)이 필요하다. 이러한 협력은 정책적인 면이나 한국교계의 어떠한 역동성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만이 아니고 보다 실질적이고 보다 장기적인 차원에서 이뤄져야 하며,정책 수립자와 직무를 할 수 있는 두 차원에서 협력의 장이 이룩도어야 된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 있어 한국세계선교협의회와 같은 단체의 태동은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임이 더 나아가 실질적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초교파적인 교육기관,정보 센터 등을 이룩해야 된다고 본다.
셋째로, 신학교에서의 선교교육과 일반 선교단체 혹은 기관에서 실시하는 선교 교육이 서로 특이성을 살리면서도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실시되어야한다고 본다. 신학교 교육에서의 선교사 훈련과정과 선교단체에서의 선교교육의 실시가 중복되거나 아전인수격인 협소한 의미의 선교교육만을 실시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러한 면을 선교 교육자와 선교일선에서 일하는 지도자들이 서로 모여 조정하는 일이 필요하리라 본다. 아직도 몇 단체들은 꿩잡는게 매라는 발상으로 선교 교육내지 선교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보다 진지하게 접근하여 나가지 아니하면, 폭풍이 지나가고 난후 몇개의 살아남은 꽃들을 보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고 감사만 할 것인가? 선교 부흥회도 필요하지만 선교목회도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네번째, 현지 선교를 통한 선교훈련을 강조하되 그 과정을 보다 체계화되고 전문화된 현지 선교기관에 맡기자는 것이다. 필자는 필리핀에서 10여년 거주하고 있다. 60년대 후반부터 쏟아지는 선교단기 사역자들의 삶과 사역을 지켜볼 수 있었고 필리핀 이외 지역 선교사들에게서도 선교지에 끼치는 패단을 한 두번 들은 것이 아니다. 한국사람들끼리 몰려다니는 관광객 같은 모습을 보며 이들이 현지이들에게 선교라는 면역을 심어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곳에 가면 그곳의 지도자가 있기 마련이고 그곳에도 그들의 문화와 교회사와 사역의 미래를 기도의 제목으로 삼고 있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의 통제를 원치아니하고 단순히 우리식의 현장교육을 통해서는 선교지 현장교육을 통한 능률을 크게 기대할 수 없다.
더 나가,우리의 진정한 선생은 우리가 섬겨야 할 자들이다. 우리활동의 진정한 평가와 거울은 그들의 수용성과 민족성이다. 이러한 면에 있어 나르치스처럼 스스로의 만족에 빠져 자신의 얼굴만 바라보며 웃는자로써 선교ㄱㄱ에 임하지 말자. 오히려 현지 우리가 섬겨야할자들이 우리가 무엇이 부족한가를 일깨워주도록 귀를 기울이자, 선교에 관한 글을 싣는 언론제도보다 거시적인 자세로써 선교교육의 활동을 바라보아 건설적인 면과 수정되어야 할 부분들을 함께 제시할 수 있는 평론적 자질있는 집필진이 더욱 요구된다고 본다. 또한 이들의 귀도 현지인들의 가슴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한국선교의 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되고 선교교육 전체의 방향틀을 마련해주는 길잡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선교교육은 한 목적을 위하여 틀을 만드는 것이다. 한국선교의 틀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할 것인가? 선교단체별로 만들 것인가? 교단별로 만들것인가? 서구 선교인들로부터 수입된 틀에만 의존해야할 것인가? 한국 목적을 놓고 단체와 기관과 교파와 국가문화의 특수성을 서로 인정하며,이 방향틀을 함께 세워나가야 하지 아니할까? 서로 가진 달란트를 내것이라 여기지 아니하는 자세로 서로 나누는 그러한 협력이 한국 선교교육을 성숙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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