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맥락에서 본 한중관계와 중국선교 문제
김형석 (총신대학교 교수)
1. 머리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와 네번째로 넓은 영토를 가진 중국은 풍부한 자원과 엄청난 경제적 잠재력으로 인해 다가오는 21세기에는 또다시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과는 지리적으로 국경을 인접한 탓에 역사적으로 항상 불가분리의 관계를 형성해 왔다. 정치적으로 독립을 유지하기는 했으나 늘 중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고, 문화 또한 중화문명권의 주변문화로 발전해 왔다. 따라서, 사상적 측면에서의 유교문화, 문자 언어생활에서의 한자문화, 정치체제에서의 동양적 전제군주제는 물론이고, 생활양식과 음식문화에 이르기까지 유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생성된 문화적 동질성은 양국민들의 의식구조에 많은 공통점을 갖게 하였다.
이처럼 수천년에 걸쳐 형성된 양국의 유대관계는 금세기에 이르러 정치이념과 체제의 상반된 입장으로 적대관계로 돌변하였으나, 최근의 국제정세 변화와 함께 다시금 동반자적 관계로의 재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지난날 중국인들은 한국인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또 오늘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새로운 역사 창조를 시도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다.
더욱이 선교가 지상과제인 크리스챤의 입장에서 볼 때, 중국은 세계 최대의 선교시장이며 지난날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통로였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갖게 한다. 이같은 점에 비추어, 이 글은 중국문제는 물론 중국선교에 대해 관심 있는 이들에게 바람직한 한중관계의 수립을 위한 방안정립에 작은 도움이라도 제공하려는 뜻에서 '중국인들의 한국관'을 역사적 맥락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한중관계의 역사적 변천
1) 전통시대 중국인들의 세계관과 대한관(對韓觀)
① 중국인들의 천하사상
고대 중국인들은 천하사상(天下思想)에 따라 그들의 국가관과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천하'란 원래 서주(西周)시대의 최고 신이었던 '천(天)'의 주재 아래 있는 모든 영역과 그 안에 있는 만물을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으로서, 현실적으로는 서주의 통치력이 미치고 있던 국가질서관이었고, 종교적인 면에서는 이방신이 주재하는 변방에 대한 우월성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즉 왕실의 직접 지배영역인 '사토(四土)'와 간접적인 지배영역인 '사방(四方)'의 영토적인 개념에 왕실의 종교적 권위를 높여주는 선민사상이 결합된 형태가 천하사상이었는데, 이것이 중국의 발전과 함께 밖으로 연장되어 민족우월주의적인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관으로 변형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대 중국인들은 우주를 단일한 것으로 인식하여, "중국은 인간세계의 중심지이며 모든 인류 문화와 문명의 원산지이므로, 세계의 형세는 마치 북극성을 중심으로 한 성군(星群)의 배열처럼 중국을 중심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일수록 문명 수준이 저급화되어 간다"는 천하통일론적인 세계관을 형성한 것이다.
이같은 그들의 논리는 자신들의 국가를 '세상에서 가장 가운데의 나라'라는 의미로 '중국(中國)'이라 불렀고, 그들의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의미로 '중화(中華)'를 주장하였으며, 이에 비해 주위의 지역에 대해서는 동·서·남·북의 사방 모두를 미개지이며 야만인들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오랑캐라는 의미의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한국은 '동이'에 해당되었는데 그 뜻은 '활을 잘 쏘는 오랑캐'이지만, 그 속에는 '남만'을 '사람과 개의 혼혈'로 인식하듯 경멸과 질시의 관념이 포함된 개념이었다.
고대 중국인들의 이러한 중국 중심적 세계관은 한(漢 ; B.C. 202∼ A.D. 220)에 이르러 동아(東亞) 근방의 주변국 외에 멀리 서방세계에 로마제국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로마문화의 뛰어남도 깨달았으며 원거리 교역도 행하였으나 그것이 중국인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칠만한 것은 되지 못하였고, 당(唐 ; 681∼907 A.D.)에 이르러서는 홍해로부터 중국 남부에 걸친 대규모 무역공동체를 형성한 아라비아 상인들이 진출해 왔으나 중국인들의 민족적 우월감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당왕조는 문화적 자신감에서 불교·이슬람교·경교·마니교 등 외래종교를 수용하여 국제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처럼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세계관은 중화족과 이민족을 구별하는 민족의식의 바탕 위에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확고히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고대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들의 모습은 '동이' 즉, '동방의 미개한 이민족'이었다. '동이'에 관하여 비교적 자세한 소개를 하고 있는 《삼국지》(三國志)의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 의하면, 그 대상을 부여(夫餘)·고구려(高句麗)·동옥저(東沃沮)·읍루(揖婁)·예(濊)·삼한(三韓)·왜(倭) 등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왜를 제외하면 모두가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거주하던 종족들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개념은 한민족(漢民族)의 형성기인 진한(秦漢)시대에 그들이 화하족(華夏簇)을 주축으로 주변종족들을 동화시켜 나가려는 데서부터 형성된 것으로 시대에 따라 그 의미 또한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살펴볼 때 동이족 중에 포함되는 여러 종족 중에 우리 민족의 주류를 형성한 한(韓)이나 맥(貊)이 있었던 것이지 동이족 전부 또는 동아시아족 전부가 우리 민족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동이'와 중국과의 관계는 때로 대립과 전쟁의 양상으로 발전된 적도 있었지만 원칙적으로는 화친론의 바탕 위에서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한대의 '기미론'과 그 후대에 형성된 '조공관계'이다.
기미론이란, 천하는 중국을 중심으로 모든 주변국가들이 일정한 질서 하에 결집되어 안정된 범주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관념인데, 이 원리를 문화적 동화정도와 정치적 통치관계에 적용하여 기전(畿甸)·내복(內服)·번병(藩屛) 등으로 분류하였다. 이중 '기전'과 '내복'은 정치적으로 중국 군주의 통치지역에 소속되지만, '번병'은 중국 통치지역에서 벗어난 정치적 독립지역인데 한국의 경우 이 '번병'에 해당되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문화가 발달되어 중국의 문화적 수준에 근접되어 있는 '외번(外藩)'으로 평가되었다.
② 사대주의와 사대외교
전통적 한중관계는 '번병'의 입장에 따라 국가적 자주성과 정치적 독립을 전제로 하지만, 외교·문화적으로는 중국적 질서에의 참여를 전제로 한 것이었으며, 그 구체적 표징으로서 조공관계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세계사에서 볼 때, 유독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사회에서 크게 발달한 이 조공제도는 주변국들이 종주국인 중국에 예물을 바치면 이에 대한 답례로 하사(下賜)·상사(賞賜)하는 물건들을 받아오는 것인데,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정치적 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경제적 손실이 과중하여 곤란을 겪었다. 이로 인해 송대의 대표적 지식인이던 소식(蘇軾)은 "고려와의 조공으로 말미암아 경제적인 피해가 극심하다"고 하여 열렬히 반대한 일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명태조는 3년1공(三年一貢)을 원했으나, 국내 정정(政情)의 불안을 대외적인 외교관계에 의존하여 해소하려 했던 조선의 태조가 도리어 1년3공(一年三貢)을 주장하며 연간 3사(三使)를 보내는 사대외교를 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건국 200년만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이처럼 다분히 의례적이고 외교적인 관계에 그쳤던 대명사대외교(對明事大外交)를 실질적인 정치적 종속관계로 변화시켰다. 임진왜란시 명군의 파병은 중국에 대한 조선의 지정학적인 역할이 수도권(北京)의 방어를 위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조선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의 고루한 명분론과 화이론(華夷論)에 젖어 있던 전후 조선은 명조에 의지하여 왜란을 진압하였다는 명분 때문에 내부적으로 모화사상(慕華思想)이 발흥하여 정치적·윤리적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었고, 대외적으로도 명의 실질적 간섭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명·청조에서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함으로 한반도에의 정치적 지배권을 행사하려 하였으며, 특히 19세기 들어 제국주의 침략이 가속화되어 한반도의 군사적 중요성이 점증되자 아예 조선을 속국화하려는 양상마저 나타났는데, 임오군란(1882) 당시 청의 제독이던 오장경이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면서 "조선은 본래 중국의 속방(屬邦)이다"라고 선언하여 물의를 일으킨 것은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단적으로 나타낸 한 사건이었다.
이처럼 전통시대의 한중관계는 국가생존을 위한 전략으로서의 사대외교가 화이론적 성리사상의 풍미와 함께 사대주의로 변질되었으며, 이로 인해 종래의 전통적 외교관계가 종속적 관계로 변질되고 말았다. 또한 중국인들의 대한관(對韓觀)에 있어서도 평등성이 약화되고 소국인(小國人)으로서의 정치적 의미가 보편화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2) 중국의 변혁과 대외관의 변화
① 근대화로의 모색
전통시대의 중국은 그들을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 속에 파묻혀 오로지 중화사상의 자존망대(自尊妄大)한 생각에서 자만하였으며, 외교관계에 있어서도 조공과 사신이 있음만 알았지 서양의 국제관계인 공사·영사 같은 외교제도가 있음은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서양인을 아시아의 주변국처럼 오랑캐로 여겨 '양이'(洋夷)라고 불렀으며, 심지어 서양인들의 외모를 기이히 여겨 '바다 건너 온 귀신'이란 뜻의 '양귀'(洋鬼)라고 하는 자들도 있었는데 이처럼 민족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던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외국인들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영국과의 아편전쟁을 치르고 전쟁의 패배 충격 속에서 굴욕적인 남경조약(1842)을 체결 당한 중국은 계속되는 열강의 침입에 처하여 영토가 할양되고 '양귀'가 '
즉 청말의 양무·변법운동이나 해방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사상적 차이점은 모두 서양의 선진적 방법을 이용하는 점에서는 같으나 그것을 활용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발생한 것이다. 모택동(毛澤東)의 경우 중국의 부강을 위해 서양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점에서는 중체서용론을 수용했지만, 그 대상을 자본주의 국가인 서방진영으로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에 성공한 소련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는 곧 새로운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가 중국의 근대화와 경제건설을 위해 적합한 방책을 제공할 것으로 믿었는데, 그것은 레닌주의가 비서구국가들이 어떻게 서구적인 가치와 기술을 도입·흡수하는가 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항거하는 방법을 교시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택동의 혁명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방식에 의한 중국의 근대화와 경제건설을 지향하면서도, 그것을 원형 그대로 중국혁명에 적용하는 것을 금하고 부단한 학습을 통해 중국의 구체적 현실에 적용시키는 구체적 실천과 결부시키고자 하였다. 이렇게 중국의 혁명을 위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도입하되 그것을 중국적 실정에 맞춰 재창조한 것이 모택동 사상의 주체로서 곧 '중국적 마르크스-레닌주의'였다.
② 개방과 실용주의 노선의 등장
중국이 내부적으로 서구의 이론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적 현실에 적용시켜 국가 발전에 노력하고 있을 때, 외부적으로는 미·소 양대국 간의 패권주의적 대립이 강화되어 세계가 두 강대국의 영향아래 양분되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처음 중국은 소련과 동맹관계를 확고히 하고 미국을 주적(主敵)으로 삼았으나, 1956년 후르시쵸프가 평화공존론을 제창하고 1957년 수에즈운하사건이 발생하여 미·소 양국 중심의 세력판도가 점증되면서 중·소간에도 경제·군사협력관계가 악화되자,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중간지대 국가들을 규합하여 미·소 양국의 제국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소위 '제3세계론'을 주창하고 그 주도적 위치에 나섰다.
이같은 중국의 외교정책은 현실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국경을 접하고 있는 소련과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 속에서 소련의 팽창주의를 저지하고, 소련의 경원 속에 기술자원이 단절된 곤경을 서방세계의 자본과 기술도입을 통해 해결하려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세계관 역시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현실적 실용주의적 전략관으로 수정될 가능성을 내포하였으며, 곧이어 미국과의 수교로 중·미 화해를 추구하는 한편 소련의 팽창주의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새로운 외교정책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모택동 사후 중국의 지도자로 등장한 등소평은 국제적 상호의존체제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과학기술 및 자본을 도입하려는 경제개방정책을 구체화시켰다. 중국은 1949년 공산정권이 수립된 이래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을 위해서 초기부터 스탈린형 경제체제에 입각하여 자력갱생과 권역내교역(圈域內交易)을 기본 정책목표로 설정하고 경제를 운용하였으나 대내외적 모순과 시행착오를 거듭하였는데, 1958년부터 시작된 '제2차 5개년 계획' 기간 중에 전개된 대약진운동과 1966년에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경제를 실패케 한 대표적 사건이다.
제1차 5개년 계획기간(1953-57) 중에 중공업부문에서는 괄목할 성과를 거두었지만 농업부문이 상대적으로 낙후되었음을 인지하고, 농공부문의 균형적 발전과 소련에 대한 편향적 정책에서 탈피한 독자적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위해 대약진운동을 전개하여 약 20만개의 소규모 공장을 급조하였으나, 정책상의 시행착오와 대규모의 자연재해, 기술부족 등의 요인이 겹쳐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인한 경제적 위기에 처한 중국은 3년간의 조정기를 거친 후, 1966년부터 '제3차 5개년 계획'을 시도하였으나 이때에는 처음부터 문화대혁명이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계획대로 정책을 추진조차 할 수 없었다. 문화대혁명의 본질적 의도는 대약진기의 개발전략을 수정하여 효율적인 사회주의 국가발전을 도모하려는데 있었으나, 실제로는 수백만의 젊은 홍위병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방해하는 낡은 문화전통을 혁신하여야 한다"는 명분 하에 모든 행정·경제조직을 파괴한 혼란기였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더욱 피폐해진 국가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그동안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주은래(周恩來)·등소평(鄧小平) 등 실용주의자들을 중용하게 되었고, 이들에 의해 농업·공업·국방·과학기술의 현대화를 추구하는 이른바 '4개 현대화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즉 그는 경제발전을 위한 자본의 확보와 배분문제에서 테크놀리지(Technology)를 강조하였고 대외교류를 위해 개방정책을 추진하였는데, 서방 외국과의 과학, 기술협정을 확대시킨 등소평의 개방정책은 소련의 압력에 대한 방어효과와 함께 외국 자본가들로 하여금 중국에 대한 투자를 증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당시 당 총서기이던 등소평이 "생산만 증대된다면 우리는 개인기업(자본주의적 경제론을 지칭)으로 환원할 수도 있다. 좋은 고양이는 검은색이냐 흰색이냐가 문제가 아니다. 쥐를 잘 잡는 것이 좋은 고양이다."라고 한, 이른바 백묘흑묘론(白描黑描論)을 주창한 것도 바로 이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실용주의 노선을 천명한 것이었다.
3) 현대 중국의 한반도 인식
① 중국과 한반도
중국에 있어서 한반도는 지리적 인접성과 문화적 동질성으로 인하여 역사적으로 항상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특히 안보상의 논리에 있어서 한반도의 위치는 '순치보거'(脣齒補車 : 입술과 이처럼 서로 돕는 관계라는 뜻)의 관계로 인식되어져 왔으며, 이에 따라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정세가 불안하여 중국의 안보에 위협을 준다고 판단할 때엔 출병을 서슴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명군의 출병이라든지, 한국전 당시 중공군의 참전은 그들이 내세워온 '순망치한'(脣亡齒寒 ;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것처럼 서로 이웃하고 있는 한 나라가 멸망하면 다른 한 나라도 위험하다는 뜻)의 논리에 따라 국가보위를 위한 선택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배경으로 한 중국의 실용주의 노선은 오늘날의 대한(對韓)외교정책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4개 현대화 계획의 성공적 추진과 개방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키 위해서는 한반도의 긴장완화가 필수적이므로 남·북한 간의 힘의 균형을 통한 현상유지를 원하고 있다.
현대 중국에 있어서 한반도가 갖는 또다른 중요한 의미는 경제적인 측면이다. 등소평의 등장 이후 '4개 현대화 계획'이 추진되면서 점차 한국과의 경제적 교류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그것은 한국이 중국대륙에 인접한 모든 국가 중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된 나라이면서 동시에 서로 상호보완적인 경제구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중국은 각종 자원과 노동력이 풍부한 대신 기술과 자본이 부족한 실정이고, 한국의 경우 그 반대 형편이므로 상호 보완적 성격을 갖고 있다. 기술력 역시 중국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고도기술(high-tech)보다 한국의 중간기술(Semi high-tech)이 더 필요한 실정이며, 최근 20여년 간에 걸쳐 한국이 체험한 경제개발의 경험 또한 중국에게 있어서는 매우 소중한 재산이 될 수 있다.
문화대혁명이 전개되기 전 해인 1965년의 경우, 중국의 수출 총액은 22억$이었던데 비해 '아시아의 4소룡(小龍)'으로 불리는 한국·대만·홍콩·싱가폴의 수출 총액은 24억$로서 거의 비슷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20년이 경과한 1985년의 경우를 보면, 중국은 겨우 273억$인데 비하여 '아시아 4소룡'은 996억$로 중국의 3.6배에 달하였으며, 그 중 한국(295억$), 대만(307억$) 등 한 국가만으로도 중국 대륙을 앞지르고 있다. 이같은 국제정세의 인식을 토대로 등소평의 흑묘백묘론과 같은 개방화의 주장이 제기되었고, 「중국공산당 11기 중전회」에서는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의 기준'이라는 명제에 따라 "경제제일주의에 의한 4개 현대화의 실현이야말로 중국의 현실에 적합한 실천"이라는 정강정책이 공식적으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② 동반자적 관계로의 전환
중국의 개방화는 양국간의 경제교역에도 영향을 미쳐 1979년 첫해 1,900만$이던 교역량이 1987년에는 18억3,800만$로 불과 8년만에 79배나 증가하여, 한국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전체 대공산권교역의 81%에 해당될 정도로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이처럼 양국 간의 교류가 확대되고 서로의 필요성이 증대되자 중국 지도자들의 대한관(對韓觀)도 변화되어 나타났는데 그것을 유형별로 살펴보면 크게 다음의 세가지이다.
첫째 부류는 정치위주형인데, 대부분의 장·차관과 당 중앙위원 이상의 지위에 있는 고위 관리들이나 당 원로들의 입장으로, 한국에 대한 경제적 제휴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남북한 관계, 대만 관계 등의 정치적 불편함을 들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可有無有)로 생각하며 정경분리 또는 관민분리의 입장에서 한국을 대하는 것이다.
둘째 부류는 경제위주형으로, 전국의 각 성·시의 경제담당 부성장 이하 간부들과 대부분의 개혁이론 연구가, 지식층, 상공기업 책임자, 연해 개방지구 책임자, 경제특구의 책임자들인데, 한중교류를 보다 활성화하고 이를 통해 지방경제를 발전시키고자 주장하며 양국 경제의 상호보완적 특성과 한국을 이용한 대일(對日) 입지강화를 위해서도 한국과의 수교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 부류는 실무형으로, 중·하층 간부들이 포함되는데 한중수교에 가장 열정을 보였던 계층이다. 1991년 9월 양국 간의 수교가 이루어진 점을 생각하면, 바로 이들 실무자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지난 89년의 천안문사태 때 '퇴2보'(退二步)했던 등소평이 '진3보'(進三步)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볼 때, 현대 중국의 한국관은 탈이데올로기의 세계적 추세에 맞춰 지난 반세기동안 지속되어온 특수한 남북관계의 고정적 틀을 깨뜨리고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되는 이웃으로서 인식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오늘날의 중국은 이념보다 능률이, 영웅 칭호나 메달보다 돈이, 지식보다 시장메커니즘이 원동력이 되는 새로운 사회이다. 이 때문에 한중관계 또한 유독 경제분야의 교역량에 있어서만 급속한 신장세를 나타내고 있는데, 1994년도에 이미 100만$을 돌파한 교역규모는 1995년도에 150억$에 이를 전망이다. 그러나 이처럼 문화적 교류나 인간적 교류는 도외시한
채 오직 경제적 목적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자칫 상대를 물질적 이익의 동반자로만 생각하게 되어 사소한 이해관계에 따라서도 우호관계가 깨어질 수 있는 위험을 배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중국의 개방속도를 놓고서 아직도 보수와 진보진영 간의 갈등을 빚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현재와 같은 경제적 동반자보다는 지난날의 문화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정치·경제·외교·문화 등 전분야에 걸쳐 공동의 이익을 함께 창출하는 공동체적 자세가 진정으로 필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3. 중국선교의 전망
1) 한국교회의 중국선교 현황
① 중국선교의 동향
최근 한국선교정보연구센타에서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중국에 파송된 한국인 선교사의 수효는 129명으로, 필리핀과 러시아에 이어 세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선교단체에 적을 두고 공식 파견된 수치일 뿐, 유학생·상사·주재원·사업가 등의 신분으로 진출한 평신도로서 개교회가 자격을 인정한 자비량 선교사들이나 보안상의 이유로 공개되지 않은 경우를 감안하면 실제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의 수효는 몇 배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교사들의 사역 또한 초기 단계의 개인전도나 성경공부, 처소교회 후원에서 발전하여, 지금은 교회건축·의료선교·사회복지선교·교육선교·문화선교·산업선교 등 거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한국교회의 중국선교가 이처럼 단기간에 걸쳐 급속하게 발전한 것은 최근 수년간 양국 간의 경제교류 확대에 따른 인적자원의 진출이 급증한 데다가, 역사적인 문화의 유산을 공유하고 있어 쉽게 동화되어지며 현지의 조선족들을 통하여 언어의 장애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계의 선교활동을 포함한 모든 한중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조선족의 존재이다. 일제하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형성된 조선족은 현재 약 200만 명에 달하고 있는데, 이 수치는 중국내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11번째로 많은 것이다. 이들은 특유의 성실함과 높은 교육열을 바탕으로 안정된 위치를 점하고 있어서, 조선족의 복음화는 한족(漢族)을 비롯한 중국어권의 선교기지로서 효용성이 클 뿐 아니라, 연간 15만 명으로 추산되는 중조(中朝) 간의 인적교류를 활용한 북한선교에도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하여 그 중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족을 활용한 중국선교는 그간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준비없이 시작된 무분별한 한국교회의 선교활동과 갑작스런 개방정책으로 야기된 현지 조선족들의 물질욕이 어우러져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다.
2) 중국선교에 있어서 조선족
1920년대 이후 집중적으로 설립되었던 조선족교회는 중국 현대사의 굴절과 함께 부침이 심하였다. 해방과 함께 곳곳에서 발생한 한족(漢族)들의 민족적 박해로 쇠퇴의 기미를 보이던 조선족 사회 속에서, 반우파운동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교회에 대한 박해까지 겹치게 되자 모든 교회들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으며, 이 기간동안 순교한 성도들의 비보도 연달아 전해지게 되었다.
그후 1980년대의 개방화정책과 함께 소수민족에 대한 보호정책이 강화되고, 신앙의 자유 또한 어느 정도 보장되자 동북 3성의 조선족 거주지에서도 교회의 복원과 설립이 이루어져, 1990년까지 요녕성 23개, 길림성(연변조선족자치주 지역 포함) 29개, 흑룡강성 1개 등 50여개의 교회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지고 있다.
이같은 수치는 1993년도에 중국기독교협의회의 기관지 《천풍》(天風)을 통해 발표된, 동북 3성의 조선족 교인수 65,000명, 교회 58개, 처소 1,300개, 목사 7명, 전도사 11명, 장로 9명, 신학생 26명이라는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되어진다.
조선족 교회의 실태와 한국교회의 선교활동에 대한 현지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대륙선교회가 몇 개의 조선족교회를 대상으로 표본조사한 내용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다음〈표 2〉에 소개된 교회 가운데 (가)∼(마)는 길림성의 농촌지역 교회들이며, (바)∼(카)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소도시에 소재한 교회들이다. 그리고 교인수 중 ( )의 수치는 해방 전부터 신앙을 소지하고 있던 교인들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바 중국내 조선족교회는 모두 1980년의 개방화 이후 설립되었으며, 전통있는 용정교회(1905년 설립)와 연길교회(1924년 설립)가 정부의 허용으로 옛 건물을 되찾아 복원된 것을 제외하면, 가계 전승적인 신앙을 견지하였거나 새롭게 입신한 성도의 가정에서 처소교회로 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조사대상 교회 지도자들 모두의 입신동기가 '신유의 은사'로 질병이 나음받은 데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의 대부분이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하지 못하였으며, 신비주의와 이단문제에 취약함을 보이고 있다. 실제 1992년의 '다미선교회 사건' 당시 한국 못지않게 사회적 물의를 빚은 것도 이러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 교회의 대부분이 한국교회의 발전상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한국 선교사 및 방문단들의 행위에 실망하여 한국교회와의 교류를 망설이거나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 자료가 3년 전에 조사된 것이어서 현재의 상황과는 변화가 있을 수 있으나 한국교회가 지속적인 중국선교를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4. 현대 중국의 종교 인식
1) 삼자교회와 가정교회
중국에 있어서 종교는 공산주의 혁명의 시작과 함께 혁명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즉, 유교는 반봉건의 대상으로, 도교와 불교는 비과학적인 미신으로, 기독교는 반외세의 표징으로 인식되어 비판받았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정권 수립 초기인 1950년대까지는 맑시즘에 합당한 종교적 이론을 제공하여 양립할 수 있는 방안이 제기되었으나, 문화혁명으로 모든 종교는 파괴되고 억압 당하였다.
현재 중국에는 '삼자교회'와 '가정교회'가 병존하고 있는데 이 두 교회가 형성된 역사적 배경을 고찰하면 그같은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당시인
곧이어 선교부가 운영하던 학교·병원·고아원 등을 인수하였으며, 순전히 중국인에 의하여 운영되던 Y.M.C.A와 Y.W.C.A는 오히려 지원을 강화하였다. 결과 교회도 1951년도부터 자치(自治)·자양(自養)·자전(自傳)의 '3자운동'을 표방하였고, 1954년에는 공산당 산하에 '3자 애국운동위원회'가 결성되어 '애국적 교회의 건설을 목표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통일'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순수신앙을 강조하는 신자들(일부 반정부 친미인사 포함)은 3자교회에의 참여를 거부하고, 그 이유로 교회가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킬 것과 정부가 18세 이하의 청소년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조항을 폐지할 것을 제시하였으며, 이같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독자적인 교회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가정교회'이며 서방에서는 '지하교회'로 불려지고 있다.
최근 중국의 기독교인 숫자에 관하여 중국 정부는 500만명의 신도가 있다고 발표하였고, 서방교회에서는 5,000∼6,0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부가 공인하는 '3자교회'의 숫자와 거기에다 '가정교회' 숫자까지를 더한 통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2) 중국의 종교정책
중국의〈신헌법〉에는 "신앙의 자유, 종교를 믿지 않을 자유, 무신론 선전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언뜻 보기에 신앙의 자유를 무조건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서방세계와 다를바 없어 보이지만, 다른 시각에서 그 내용을 음미해 보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는 듯 하면서도 동시에 불신앙의 자유를 허용함으로 종교의 본성인 포교의 자유를 봉쇄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것은 동시에 무신론 선전의 자유를 인정하여 학교나 당에서 맑시즘의 교수를 당연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것과는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중국의 종교정책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보다 전문적인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중국의 종교정책을 논리적으로 분석한 양감홍(梁鑑洪)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헌법 제2장 제36조에서 말하고 있는 종교의 자유는 세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종교를 믿는 것은 자유이며 어떤 힘을 사용하여 종교를 믿거나 믿지 못하도록 할 수 없다. 둘째, 국가는 정상적인 종교활동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유의할 점은 종교활동의 보호가 아니라 '정상'적인 종교활동의 보호라는 점이다. 정상적인 종교활동이 있다는 것은 또한 비정상적인 종교활동이 있다는 것이며, 정상적인 종교활동은 보호하지만 비정상적인 종교활동은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셋째, 외국 세력이 국내의 종교사무를 간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에 외국에서 중국의 종교사무에 문서나 경제적인 것을 포함하는 지원이 있다면, 외국세력이 국내의 종교사무를 간섭하는 것이고 역시 위법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헌법에 '정상적인 종교활동'이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비정상적인 종교활동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우선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을 '정상적인 종교활동'이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중국자신의 시각에서 보아야지 외국의 시각에서 보아서는 안된다. 이른바 정상적인 종교라 함은 중국정부가 관장하는 종교단체를 가리킨다. 이런 단체가 하는 일이라야 비로소 '정상적인 종교활동'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의 종교정책은 중국적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는 그들의 특수한 현실 여건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서,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단지 체제유지의 수단으로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을 따름이다. 중국에서 종교문제에 가장 민감한 지역인 티벳자치구의 종교국 책임자인 양지청(陽志淸)의 말도 이같은 생각을 뒷받침하고 있다.
"우리들은 마르크스주의자이다. 역사유물론에서 보면 종교는 반드시 소멸한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것을 보호한다. 행정명령으로 종교를 없애지는 못한다. 소멸되기까지에는 시간이 걸린다. 과학지식이 보급되고 인민의 물질적 생활이 향상되어 사람들의 인식이 높아질 때까지는 종교는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5세대가 걸려도 없어지지 않을지도 모르고 혹은 수세기가 걸릴지도 모른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완전한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을 위해서는 역사 발전에 따라 종교가 소멸될 때까지 당(黨)이 종교와 사상의 통제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되며, 실제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중국의 종교정책이 그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용주의적 노선이 확산되면서 1979년에는 종교국이 부활되었고, 1982년의 신헌법에서는 제한적 범위에서나마 종교·신앙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등소평 시대의 종교정책이 국가통제 속에 제한적인 자유화를 추구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물질적 생활여건의 변화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 정부의 강압적인 통제로써 민중들의 정신적·종교적 욕구를 억압할 수 없음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즉 2천년동안 유교가 중국에 끼친 영향은 아직도 중국인의 중심에 살아있으며, 불교의 인생관이나 도교의 자연주의는 아직도 중국인의 심령상에서 역량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오랫동안 북경특파원을 지낸 카케 타카오가 "중국에서 종교는 아편에서 안정제로"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급진적인 종교 억압정책을 지양하고 어느 정도의 종교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오히려 급속한 개방화에 따른 소수민족의 정치적 독립열망을 해소하기 위해서 이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5. 바람직한 한중관계와 중국선교
1) 중국선교의 몇가지 문제들
한국교회의 중국선교가 재개된 것은 1980년대 초 중국의 개방화와 함께 미주지역의 한인교회들이 교포 선교사를 파송하면서부터였고, 국내에서 직접 선교사가 파송되기는 1990년 북경 아시아경기대회를 전후해서이다. 이처럼 짧은 연륜에도 불구하고 중국선교는 놀라울 정도의 신장세를 보이면서, 정부가 하지 못하는 민간외교의 사역을 잘 감당하였을 뿐 아니라, 중국교회의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간 한국 선교사들의 활동이 무계획적이며, 물량 중심으로 이루어진 데다가 일부 선교사들의 자질부족이 빚은 신뢰감의 상실, 지나친 한국교회화 등으로 인해, 현실적으로 상당한 난관에 처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선교의 첫번째 문제점은 무계획성에서 비롯된다. 중국 이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한국교회에서 파송되는 선교사의 대부분이 현지의 문화나 법제는 물론 현지 언어를 전혀 습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파송되고 있는 형편인데, 이것은 영국의 O.M.F를 비롯한 유수의 선교단체들이 중국에 파송되는 선교사를 5년 이상 훈련시켜 선발하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에는 중국복음선교회와 중국어문선교회에서 중국선교사를 위한 교육과정이 개설 되었고, 한국전문인선교훈련원(G.P. T.I)과 한국오엠국제선교회(Operation Mobilization) 등에서도 전문적인 선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훈련을 실시하고 있어, 앞으로는 선교현장에서 일어나는 시행착오를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둘째는 지역 편중화 현상이다. 한국 선교사의 대부분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비롯한 동북 3성의 조선족 주거지와 북경의 대학가에 밀집해 있어서 중복 투자라는 비판과 함께, 실제 복음의 소식이 필요한 내륙에는 접근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대학과 현지생활 속에서 중국어를 어느 정도 익힌 선교사들 가운데 새로운 사역지를 찾아나서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으며, 대륙선교회처럼 사역의 중심을 아예 서북부의 이슬람지역과 남서부 산악지역의 소수민족으로 전환한 경우도 있어, 지역 편중화의 문제 또한 선교의 연륜이 쌓이면서 점차 해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셋째, 선교사들 간의 갈등과 선교지에서 나타나는 교파주의 문제이다. 한국교회의 선교활동은 교파세력의 해외확장이라는 시각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보편화되어 있어서, 선교현장에서도 교파주의의 이식화현상과 선교사들의 경쟁양상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단일 교단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이러한 일들을 중국교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뿐아니라, 일부 파렴치한 성도들의 경우에는 물질적 이익을 얻기 위해 한국 선교사들의 경쟁심을 이용하기도 한다. 중국의 대표적 조선족교회인 ○○교회의 건축을 둘러싸고 한국의 대형 교단, 교회들이 보인 과당 경쟁은 그 좋은 예이다. 이같은 현상을 우려한 재중 한국인 선교사들이 금년 2월 싱가폴 한인교회에 모여 회합을 갖고, 화합과 상호 협력을 통한 중국선교의 활성화를 다짐한 것은 이제 한국교회의 선교활동이 한결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도 물량주의나 성과위주의 선교활동, 일부 선교사의 자질문제 등이 중국선교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하지만, 이것은 중국선교만의 문제점이 아니고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전반적인 문제점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이해되고 대책 마련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2) 향후 중국선교의 전망
오늘날 한국교회는 중국선교를 추진함에 있어서 N.C.C.에 속한 진보적 교회들이 '3자교회'와 제휴한 공식적인 종교활동에 관심을 두고 있는 반면, 보수교단의 교회들은 '3자교회'를 부정하고 '가정교회'와 연결하여 그들을 도우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3자교회'는 선교에 용이하고 합법적인 활동이 가능한 데 비하여 신학적·교리적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며, '가정교회'는 신앙의 뜨거움은 있으나 실체 파악이 어려울 뿐 아니라 정부에서 불법적 집단으로 인정하는 바람에 선교활동에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프로젝트(Project)를 이용한 선교방법이 많이 시도되고 있는데, 중국측 입장에서는 전문기술과 자본을 끌어들일 수 있는 이점 때문에 이를 쉽게 용인하는 경향이 있고, 한국측에서는 보다 안정된 위치에서 중국 민중들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 방법 역시 아직 자본주의적 경영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중국의 현실에서 상당한 위험부담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초창기 한국에 복음이 전래될 때 그러하였고, 세계 교회사에 나타난 선교의 역사들이 그러하듯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역사는 항상 불가능 속에서 가능함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수의 명령대로(마태복음 28:18∼20) 최선을 다한 끊임없는 도전의 역사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기독교 역사관의 특징이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밝혀내는 데 있는 것"처럼 중국사에 나타난 기독교의 모습들을 교훈삼아, 중국과 중국인들을 이해하며 그들의 생활의 정신적 물질적인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지혜를 모아 접근해 간다면, 지난날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겪었던 엄청난 박해와 시련의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그것은 중국의 급격한 변화가 궁극적으로는 종교정책에도 영향을 끼쳐, 더욱 자유적이고 개방적인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6. 맺는 말
한중관계는 5,000년 민족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시대에 따라 때로는 서로 대립하고 전쟁하였으며, 때로는 화해하고 공존하는 방법을 통해 함께 발전해 왔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두 나라의 평화적 관계를 지속시켜준 것은 바로 '조공'을 매개로 한 사대외교였다. 천하사상에 젖어있던 중국인들에게 명분을 주는 대신, 정치적 주권과 경제적 실리를 얻는 이 사대외교는 한동안 한중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전형(典型)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건국에 따른 정치적 이유와 화이론적 성리학의 성행은 사대외교를 사대주의로 변질시켜 양국 간의 관계를 실질적인 종속관계로 만들었으며, 이러한 관계는 일제의 강요에 의해 강화수호조약이 체결되는 1876년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양국은 2차대전의 종전 이후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냉전구도 속에서 적대관계로 맞서게 되었고, 특히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과 특수한 남북한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양국의 대립관계는 1980년대들어 시작된 중국의 개방정책으로 상호 간에 경제적 필요성이 증대되자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는데, 양국 간의 교역량 증가와 함께 인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과거의 적대관계는 동반자적 관계로 변모되어 국교의 수립으로까지 발전하였다.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이러한 역사적 환경 속에서 중요한 현안관제로 등장하고 있다. 선교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중국정부는 한국교회의 선교활동을 불법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데 반하여, 선교를 지상과제로 삼고 있는 한국교회의 입장에서는 12억의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는 절대적 명제 때문에 중국 선교의 폭을 점차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중관계의 중요성이 증대되면 될수록 부각되어지는 중국선교 문제는 장래의 바람직한 양국관계 정립을 위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역사적 과제이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에는 몇가지 점에서 새로운 자세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다.
첫째, 중국의 법제를 정확하게 이해하며, 가능한한 그들의 법도를 존중하는 준법정신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중국의 현행법이 규정하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 가능한 선교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둘째, 한국교회가 중국선교의 주체가 되려는 욕심을 버리고, 중국교인들로 하여금 중국선교의 주체가 되게 하고, 한국선교사들은 조력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할 수 있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셋째, 물량주의적 선교 자세를 지양하고, 인간적인 신뢰감을 조성하는 일이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과거 서양인들이 그러하였던 것과 같은 우월의식을 버리고, 중국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며 중국인들의 심령을 사랑하는 순수함을 견지하여야 한다.
이같은 선교자세가 선행될때 중국선교문제는 한중 간의 외교적 현안에서 탈피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양국민에게 신뢰감을 조성하여 바람직한 한중관계 정립에 도움을 주며, 나아가 중국을 그리스도화하는 데 유용하게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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