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회 발전 중의 조선족의 역할과 공헌
김병호/중앙민족대학 교수
1) 중국(항일)혁명 중 조선족의 역할과 공헌
중국의 조선족은 이주해온 19세기 말엽부터 중국반제반봉건투쟁에 참가, 업적을 쌓기 시작해 중국의 혁명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항일전쟁의 승리와 중화인민공화국 건립을 위해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1) 제1, 2차 국내혁명 중 조선족의 역할과 공헌
중국의 구민주주의 혁명시기, 식견있는 조선인은 손중산 선생을 따라 청왕조 전복투쟁에 헌신하였다. 1920년 홍범도, 김좌진의 지휘하에 조선인 혁명대열은 풍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제국주의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조선인은 반제반봉건투쟁에서 강인하고 비타협적인 투쟁정신을 발휘하였다.
1921년 중국공산당 창건이후 중국의 조선인은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 반제 반봉건적 민족민주 혁명투쟁에 참가하였다. 중국의 그 유명한 북벌전쟁기간 중 200여명의 조선청년들이 참가, 전투 중에 여러 차례 공적을 쌓았다. 1924년 중국공산당의 협조하에 손중산이 건립한 황포군관학교 제1기에서 7기까지 교관과 학생 중 200여명의 조선인들이 있었다. 1927년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 있었던 난창(南昌), 광조우(廣州) 봉기 중 조선인이 각각 200여명과 150여명이 참가, 중국공산당이 자기들의 군대를 창건하는데 공헌을 하였다. 이후 중국공산당이 징강산(井鋼山)혁명근거지를 창건하는데서도 투쟁 중 조선청년들은 자신의 피와 땀으로 헌신하였다.
1927년 10월 3일과 1928년 9월 2일 연변 龍井지역의 조선군중들은 기세높게 반일시위를 벌여 일본제국주의의 위세에 타격을 주었다.
1928년 2월 중국공산당은 연변조선인들 중에서 최초의 중국공산당조직, 즉 龍井村지부를 건립하였다. 이후 당 조직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반일본제국주의 시위, 폭동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20년대 말 만주지역의 공산당원은 2000여명까지 발전하였고 그 중 조선인이 90%이상을 차지하였다. 1930년 9월까지 연변지역은 중국공산당당원과 중국공산주의 청년단원 1000여명을 보유하였고, 5000여 명의 조직화된 군중이 있어, 충분히 영향을 미치거나 영도할 수 있는 군중이 5만여 명에 이르렀고, 또한 200여명의 유격대와 300여명의 적위대를 보유함으로서 全 동북 혁명역량에 있어 가장 유력한 지역으로 부상하였다.
1931년 9.18 사변 이후 중국인민 특히 동북지역 각 민족의 인민은 분분히 항일에 나섰으며, 적극적으로 유격대를 조직하는 등 무장세력들은 항일투쟁을 진행했다. 항일투쟁의 큰 흐름속에서 동북의 조선민족은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1931년 말 남만주지역에서 중공 磐石中心縣委員會의 영도하에 이홍광은 7명으로 구성된 다거우두이(打狗隊) 즉 적위대를 구성, 그것을 기초로 하여 1932년 4월에서 5월에 걸쳐 양군무(楊君武)와 협동으로 두 차례의 봉기를 일으켰고, 6월에는 이홍광을 대장으로 30여명의 대원 중 절대다수를 조선족으로 하는 “磐石工農義勇軍 ”을 건립하였다. 이는 동북지역에서 최초로 성립된 항일무장세력 중에 하나였다. 그 후 양정우는 省위원회와 磐石中心縣委의 인민혁명군을 적극적으로 건설하라는 지시에 근거하여, 磐石工農遊擊隊를 기초하여 海龍유격대와 연합하여, 1933년 9월 18일에 이홍광을 참모장으로 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獨立師를 정식으로 성립하였다. 獨立師시기 조선족은 불과 성원중의 4분의 1에 불과했지만 이 師의 영도역량과 핵심역량은 모두 조선족이었다. 실제운동을 지배했던 당원이 홍군 중에 약 60명이 있었고 排長급 이상 간부가 약50명 있어, 도합 110명이 있었으며, 그 중 조선족이 거의 반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34년 3월, 1軍獨立師黨委員會 결정을 근거로 이홍광은 항일연합지휘부를 창립하기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많은 일들을 수행했다. 이홍광의 준비로 1934년 4월 1일 만주에서 정식으로 이홍광을 참모장으로 하는 항일연합군 총지휘부가 건립되었는데 이 항일군세력은 4000여명까지 확대되었다. 이로부터 인민혁명군제일군사령부는 항일연합군총지휘부의 영도핵심이 되었다. 1936년 1월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 동북항일연합군이 건립되었으며 이홍광이 참모장을 역임하였다.
남만지역에서 당의 영도하에 조선족과 한족 등 각 민족의 인민은 1932년 봄에서 1933년 여름을 전후로 조선족 한족 공동거주지역에서 磐石玻璃河套와 紅石粒子를 중심으로 일백여 리에 달하는 유격근거지를 건립하였다. 1933년 10월 이후 조선족, 한족과 기타 민족 및 인민혁명군독립사는 전투대원을 이끌고 柳河, 蒙江, 通化의 교차지역인 河里, 那爾轟, 老禿頂子 (恆仁, 本溪, 淸源의 교차지역), 老嶺 등 근거지를 개척하였다.
그밖에 1933년 여름이전에는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 조선족을 중심으로 구(區)와 촌(村)의 소비에트정권 혹은 농민위원회를 건립하여 工農專政의 정권기능을 수행하였다. 1933년 여름이후 남만유격대 근거지에서는 현(縣), 구(區), 촌(村)의 인민혁명정부가 건립되었다.
동만지역에서는 동만특위와 각 현위원회의 구체적인 영도하에 조선족을 중심으로 항일무장세력이 건립되었다. 1932년 봄 金哲을 대장으로 한 왕칭유격대가 건립되었다. 또 朴吉을 대장으로 한 옌지유격대가 건립되었고, 1933년 봄에는 박동근이 대장을 담임하고 박길이 政委을 담임하는 옌지현유격대대로 개편됨으로써, 세력은 130여명까지 확대되었다. 1931년 겨울 훈춘(琿春)에 별동대가 건립되었고, 1932년 9월 임청을 대장으로 한 훈춘유격대가 건립되었다. 1932년 봄 화룡(和龍)현의 개방구(開區), 대구(大區), 핑강구(平崗區)에 유격대를 건립하였고, 1933년 초 장승한을 대장, 차동위를 政委로 하여 대원이 80여명에 이르는 유격대대로 개편되었다. 1933년 10월의 통계에 따르면 동만 4개 현( 延, 和, 汪, 琿 )유격대는 200여명에 달했으며 1934년에는 900여명에 달했는데7) 대원은 주로 조선족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동만유격대의 전투는 100여 차례 달하며 적군의 토벌을 격퇴하였다. 中共滿洲省委의 지시를 근거로 中共東滿特委는 1934년 3월 동만유격대를 동북인민혁명군제2군독립사로 확대개편되었다. 1935년 2월 延吉, 和龍, 汪靑, 琿春의 각 유격대는 결국 제1, 2, 3, 4단 독립사로 확정되었다.8) 제2군 全군은 1200명으로 그 중 75% 이상이 조선족 당원이거나 공청단원, 노동자, 농민으로 편성되어 있었다.9) 1936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확대·개편되었으며 전군은 2000여명으로 그 중 조선족이 반수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인이 1, 3 사(師)사장(師長)을 담임하고 있었다.
동만지역 조선족은 당의 영도하에 유격대와 협조하여 1932년 11월에서 1933년 4월까지의 기간동안 조선족 집단거주지역인 延吉縣 왕우고우(王遇溝), 하이란고우 (海蘭溝), 스런고우(石人溝), 워이즈고우(葦子溝), 화룡현의 위랑춘(漁浪村), 우푸동(牛腹洞), 왕칭현의 시아오왕칭(小汪淸), 가야허(嘎呀河), 야오잉고우(腰營溝) 그리고 훈춘현의 황고우(荒溝), 엔통리즈(煙筒粒子) 등지에 근거지를 건립하였다.11) 1936년을 시작으로 조선족으로 구성된 부대 제2군 4師와 6師는 장백지역의 조선족, 한족 및 각 민족의 인민과 연합하여 장백산 유격근거지를 개척하였다. 1, 2軍 중의 조선족 한족 전투성원이 단결하여 화덴(樺甸), 징위(靖宇), 멍쟝(蒙江), 창바이(長白), 콴덴(寬甸), 헝런(桓仁) 등 縣의 깊은 산 밀립지 안에 수십 개의 비밀 주둔지를 지었다.
이 밖에도 1933년 여름이전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 만주의 朝·漢인민들은 동만근거지 내에서 소비에트정권과 농민위원회를 건립하여 공농전정의 정권기능을 수행하였다. 1933년 여름이후 동만유격대 근거지내에서 현(縣), 구(區), 촌(村)의 인민혁명정부가 건립되었다. 북만지역에서 1932년 5월 饒河中心縣委員會의 영도하에 최석천(조선인), 이학복(조선인)는 饒河조선족집단거주지역에 유격대를 건설하고, 이것을 기초로 하여 1934년 7월 이학부를 사장(師長)으로 하는 동북항일연군 제4군 제2사로 개편하였다. 1936년 11월 2사는 이학복를 군장(軍長)으로 동북항일연군 제7군으로 확대·개편되었다. 1933년 6월 이복림(조선인), 이계동(조선인)은 항일무장세력을 건립하기 위하여 의용군 손조양부대에 가입하여 동년 10월 10일 이복림을 당지부서기로 하는 珠江반일유격대를 성립하였다. 이 유격대를 기초로 하여 1934년 6월 이부림을 당위원회 서기로 한 동북항일유격대 하동(哈東)支隊로 개편되었다. 1935년 1월 하동지대를 근거로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이 성립되었다. 1934년 2월 김근(조선인), 김백만(조선인)은 밀산(密山)유격대를 건립하였고, 10월 밀산(密山), 饒河유격대와 이연록의 항일동맹군은 항일연군 제4군으로 개편되었다. 1933년 탕옌(湯原)유격대를 건립하기 위해 탕옌중심현위원회서기인 배치운, 서광해 등 조선족들은 중요한 공헌을 했다.
북만지역에서 조선족, 한족의 인민은 珠河의 三股流를 중심으로 한 유격근거지, 湯原縣의 푸싱툰(富興屯),시베이고우(西北溝), 거취(格區) 등 유격근거지, 그리고 饒河지역 바오마딩즈(寶馬頂子)유격근거지를 건설하였다.
종합하면, 동북항일연군 11개군 중에는 모두 조선족 전사들이 있었고 그 중 1, 3, 7군은 조선족 전사들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1936년 초에서 1937년 근 2년 동안 東北抗日聯軍은 일본군과 僞軍을 상대로 천 차례 이상의 전투를 전개하였고, 동북 항일연군 전성기에는 45000여 명까지 발전하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동북항일연군은 근 14년의 항일전투 중 모두 183700에 달하는 적을 사살하였다.
이 시기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 중앙혁명근거지는 제1차 소비에트대표대회( 1931년 11월 )을 열어《중화소비에트공화국헌법대강》,《중국내 소수민족 문제에 관한 결의안》15) 등 중요문건을 토론, 통과시켰다. 이 대표대회의 대표 중 두 명의 소수민족 대표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조선족대표 최정무였다. 1934년 10월 중국 공농홍군은 세상을 진동시킨 2만5천여 리에 달하는 장정을 시작했고, 30여 명의 우수한 조선족 자제들이 이 역사적인 장정에 참가하였다.
(2) 항일전쟁시기 조선족의 공헌
1937년 7월에서 1945년 8월까지의 항일전쟁시기에 조선족인민은 항일전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동북항일연군 중 조선족장병들은 용감히 적을 죽이고 공을 세웠다.
1938년 하반기 중국관내 항전은 서로 대치단계에 직면함으로써, 동북항전은 고난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1940년 봄에 이르러 - 일본육군 총수의 22%에 달하는 - 동북 일본관동군은 70만 명으로 증가하였고, 동북항일연군의 병력은 3만여 명에서 2000여명으로 감소함으로써, 동북항전은 더욱 어려운 단계로 진입하였다.17) 이러한 상황하에서도 조선족 인민의 항일전투는 부단히 지속되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1938년 10월 東北抗日聯軍第5軍婦女團과 第4軍女戰士는 우스훈(烏斯渾)강에서 적에게 공격받아 8명의 여전사가 적에 의해 포위되었다. 그녀들은 배수진을 치고 적에게 맹렬히 저항하였다. 총알이 떨어졌고 적군은 몰려와서 그녀들을 생포하려하였다. 그러자 그녀들은 의연히 우스훈(烏斯渾)강으로 뛰어듦으로서, 중화 女兒의 폭력과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혁명정신을 드높이고, 중국 각 민족인민의 항일전쟁사상 영광스런 한 페이지를 남겼다. 강에 뛰어든 8명의 여자 중 안순복, 이봉선은 조선족 영웅이었다.18)
1940년 3월 25일 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19)은 화롱현 홍치(紅旗)강 지류인 다마루고우(大馬鹿溝)강 북쪽강변에서 일본의 전전(前田)경찰토벌대를 매복·공격하여 130여 명의 일본경찰을 사살함으로써, 역사상 홍치(紅旗)강 전투로 기록되었다.20) 일본군 통계에 따르면, 1939년 6월에서 12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과 일본군이 276차례의 전투를 벌여 578명의 적이 사살되었는데, 그 중 200여 차례의 전투는 조선족 전사가 다수인 제 2, 3방면군이 공격한 것이었다. 1940년 6월에서 12월까지 그들은 적과 443차례의 교전을 벌여 다수의 적을 사살하였다.21)
1940년 4월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12支隊는 허형식(조선족)등의 영도하에 무란(木藍)현 다칭고우(大靑溝)리에 있는 三河店의 괴뢰경찰大隊와 괴뢰자위단의 일부에 타격을 가해 20여 명을 사살하고, 장총 50여 개, 총알 3000발을 획득하고, 주둔지 가옥을 불태웠다. 가을에는 후란(呼蘭)강을 건너 자오동(肇東), 자오위엔(肇源), 자오조우(肇州) 등 3자오 지역에 원정함으로써 반일운동이 고조에 달하였다. 첫번째 전투로는 핑러(平樂)鎭을 공격하고 일군과 위만군, 위만경찰 50여명을 사살하고, 50여 개의 장총과 권총, 현금 300여 위안 그리고 황금 17근을 획득하였으며, 부대 식량공급의 어려움을 해결하였다. 12월 8일 자오위엔(肇源)縣城을 공격하여 보다 많은 것을 획득하였으며 3자오(肇), 안다(安達), 타이캉(泰康) 등지의 1개월여의 활동에서 적과 4, 5차례의 전투를 통해, 크고 작은 도시 10여 곳을 공격하여 200여명에 달하는 부대로 발전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3자오 공격이며, 그 영향은 막대하였다.22)
동북항일연군제1로군 제2, 3방면군은 1940년 가을부터 소련변경으로 이주를 시작하여 야영훈련을 진행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소부대 활동을 전개하였다. 부대는 600여명으로 그중 다수는 옌지조선족이었다. 그들은 1941년에서 1945년사이에 여러차례 연변의 루어즈고우(羅子溝), 티엔바오샨(天寶山), 카이샨툰(開山屯), 차즈고우(茶子溝), 훈춘(琿春), 엔지(延吉), 투먼(圖們) 등지를 공격함으로써, 日軍 초소를 습격하고 일본군 군사시설을 파괴하였으며 적의 상황을 정탐함으로써, 반일단체활동의 회복과 건립을 전개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소련군대의 동북해방을 위해 확실한 정보제공을 하고 일본제국주의의 소멸을 위해 공헌을 하였다.23)
종합하면, 조선족인민은 1931년 9월에서 1937년 6월을 포함한 14년 동안의 항일투쟁 중, 10여 만의 조선족 인민이 참전을 하였으며, 수만을 헤아리는 조선족 열사가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연변지역의 조선족열사는 3026명에 달했고 연변지역 항일열사의 96.8%를 점하고 있었다.24) 조선족인민은 항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막대한 대가를 치루었으며 불멸의 공헌을 하였다.
(3)해방전쟁시기 조선족의 공헌
1945년 일본 투항 이후 중국은 해방전쟁시기로 진입하였다. 조선족인민은 수청(肅淸)東北地區土匪의 무장과 국민당군대 반대 등 중국해방전쟁에 투입하였다. 해방전쟁시기 동북해방구의 조선족 청장년들 63000여명이 인민해방군에 참가하였고, 10여만 명이 지역무장조직에 참여하였으며, 수십만 명이 擔架隊와 運輸隊를 조직하여 전선을 지원하였다.25) 연변, 무단(牡丹)강, 쏭(松)강, 통화(通化)지구의 지역부대 중 2만여 명 조선족은 중국인민해방군의 야전부대에 편입되었다. 제4야전군의 164, 166, 156사는 조선족 전사를 위주로 구성되었다. 이 부대는 창춘(長春) 쓰핑(四平) 등의 해방전쟁에 참가하였고, 또한 유명한 해방전쟁 중의 3대 전투중의 하나인 랴오션(遼沈)전투에도 참가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중국 남부지역까지 돌아 海南島까지 참전함으로써 전 중국의 해방을 위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26)
연변의 6개 현은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입대인원이 52000여명에 달했고, 이 중 조선족이 85%를 차지하였으며, 123000여명은 공안부대 무장민병대 등 지방무장대오에 참가하였는데 이중 조선족이 10여만 명을 차지했다.27)
遼寧省 조선족 인구는 10만명이 채 되지 못했지만 해방전쟁시기 입대한 조선족 청장년은 8753명에 달했다.28) 환인(桓仁)현의 경우 조선족 3000여 가구 중 2100여 명의 청장년이 입대했으며,29) 吉林省의 창바이(長白)현의 경우 1947년 3000여 명의 청장년이 입대하였는데, 이것은 전체노동력의 36.6%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하이롱(海龍)현 조선족 농민 2524가구 중 760여명이 입대하였다.30) 리우허(柳河)현은 조선족 군인가족 782가구 중 1578명이 입대하였고31) 융지(永吉)현 쑤앙허(雙河)진은 168가구 중 170명이 입대하였다.32)
송지앙(松江)성 조선족187151명 중, 12644명이 참군을 하였는데, 이것은 全省 조선족인구의 6.8%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무단지앙(牧丹江)市에서 참군한 조선족 청년은 552명이었으며, 하이린(海林)현 조선족 4263개의 가구 중 2057명이 참군하였고, 우창(五常)현 민러(民樂)촌 조선족 403가구 중 260여 명의 청년이 참군을 하였다. 1947년 닝안(寧安)현 조선족 청년이 참군한 수는 1335명에 달했다.33)
조선족인민들은 앞을 다투어 전선을 지원하였다. 쏭지앙성(松江省) 12000여명의 조선족인민이 전시근무를 하여 전선을 지원하였으며,34) 옌지 5개 현에서 민공(民工)에 참가한 수는 302,300여 명에 달했고, 19,000여대의 차량과 3,720여 부의 들것들이 지원되었다. 이들 民工 중에는 3,434명이 공을 세워 상을 받았다.35)
해방전쟁시기 수천 명의 조선자제들이 목숨을 바쳤다. 쏭지앙성 조선족 병사 중 521명의 열사가 있었으며,36) 연변조선족 병사 중 3,041명의 열사가 있었다. 많은 조선족 병사들이 공적을 세워 표창을 받았다. 연변에 적을 둔 조선족 병사 중에는 “김성범전투모범연(連)” 등 많은 전투영웅집단이 출현하였으며, 또한 특등공신 한국화, 일급영웅 김천덕 등 290여 명의 전투영웅이 출현하였다.37) 헤이륭장성 우창(五常)현 조선족 전사위주로 편성된 중국인민해방군 47군 28사 82團 3營 강빠리엔(鋼八連)은 혁혁한 공을 세워 전군이 英雄集體의 칭호를 얻었고, 헤이륭강으로부터 延吉, 遼寧, 河北, 河南, 湖北, 湖南, 四川 등 8개성에서 전투를 수행했다. 특히 리아오션(遼沈)전투에서는 헤이샨(黑山)방어전투에 참가하여 수백 명의 적을 용감히 사살하고 150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군장비 94개를 획득하였다. 연(連)전체 127명의 전투요원 중 한 명의 전사가 적어도 2차례의 작은 공적을 세운 것 이외에 126명 전사들은 모두 큰공을 세웠으며, 그중 20여명이 2차례의 큰공을 세웠고 1排 3班 부반장 최성걸은 3차례의 큰공을 세워 ‘英雄排’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38)
(4) 보가위국(保家衛國)전쟁시기 조선족의 공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헤이륭장성의 수천 명의 조선족 청장년들이 참군·참전하였다. 그 중 무단쟝(牡丹江)시 535명, 하이린(海林)현 1743명, 닝안(寧安)현 146명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천명이 넘는 군공작인원, 예를 들어 번역, 운전, 민공, 기술원, 간호원 등이 있었다. 그중 하얼삔시 102명, 무단쟝시 200명, 닝안현 178명 등이다. 22000여 명이 국내 전시 근무에 참가하였는데, 무단쟝시, 하이린(海林)현 신안향((新安鄕) 그리고 하얼삔시 조선족인민은 전쟁을 위해 - 당시의 화폐단위로 - 각각 87420000원, 2.7억 원 그리고 12232원을 헌납하였다.39) 1950년 겨울에서 1951년 봄까지 군에 참가하겠다고 신청한 옌지 조선족 청년은 거의 전부였다. 옌지 5개현 5천여명에 가까운 조선족 청년들이 참군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같은 시기 5740명이 군을 돕는 공작대, 변역, 간호, 운수, 운반, 운전 등 통해 참전하였다. 그 중에는 완전히 조선족이 조성한 공작대가 1770명, 병역이 2155명에 달했다. 또한 십만명의 민공이 국내에서 전쟁과 관련된 업무에 종사하였다. 연변인민은 전쟁을 위해 - 동북 화폐 단위로 - 97.9억 원을 헌납하였다.40) 이 전쟁 중 희생된 각 민족의 자제들은 6911여명으로 그중 조선족이 98%를 차지하고 있었다.
2) 동북지역 개발과 건설에 있어서 조선족의 공헌
(1) 논(水田)개발과 벼심기
조선족이 동북각지로 이주한 이후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근검하였으며 황무지를 개척하여 논을 개발하였는데, 이것은 중국북방지역 농업역사상 창조적으로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었다. 조선족농민이 빠르게는 1848년 延吉省 훈(渾)강 유역에서 벼를 실험적으로 심었으며, 1877년에는 옌지에 벼를 심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대자연을 상대로 불굴의 정신과 지혜로 반복적인 생산실천을 통해 한냉한 기후극복과 서리가 내리지 않은 짧은 기간동안 벼를 심는 방법을 모색하고 동북 특종의 벼를 개량·배양하였으며 동북 각지에 논의 면적을 확대시켜 나갔다. 특히 1933년 조선족 농민은 북위 50도 55분인 헤이륭강 연안지역인 아이후이(愛琿)와 쑨커(遜克)지역 일대에 시험적으로 벼를 심어 성공을 함으로써,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50도 이북 지방에 실험적인 벼심기에 선례를 남겼으며 벼재배 역사상 하나의 기적을 창조해냈다.41)
동북지역의 벼 시험재배가 성공함에 따라 조선족 분포지역 역시 강(河) 유역을 따라 확대되었고 경지면적 역시 날로 늘어났다. 통계에 따르면 1921년 전 동북의 논 경작면적은 48000여 헥타르에 이르는데, 1928년에는 125000여 헥타르까지 확대되었고 그중 80%이상이 조선족이 개간·경작한 것이다.42) 1934년에는 동북지구 총 인구의 3.3%를 차지한 조선족의 벼생산이 동북 총 벼생산량의 90.1%를 차지하였다.43)
연변지역 조선족의 시험적인 벼생산의 성공은 하이란(海蘭)강 유역의 뢰이덴(瑞甸)평원과 롱징(龍井)남부 다짜오동(大敎洞)을 시작으로 샤오포어동(小佛洞), 사오우다오고우(小五道溝),사오쉬면리(小許們里), 지띠(吉地) 등으로 점차 확대되었다.44) 옌지지역 수전 즉 논의 면적은 1911년 100日耕45), 1918년 810헥타르, 1919년 1182.7헥타르, 1920년 6450시앙(垧)(연변4縣), 1926년 8103시앙(垧)(연변 4현)에 달했다.46) 1918년 이후 연변지역은 쌀의 자족을 실현시켰을 뿐만이 아니라 여분치 까지 갖게되었다. 연변지역은 당시 동북 논농사의 가장 집중적인 지역중의 하나였다.
헤이륭쟝성 조선족의 벼실험 재배의 성공은 19세기말에 있었다. 1867년 이미 일부의 조선족 농민들은 러시아 옌하이(沿海)주 일대 헤이룽장 지류인 파비에라(法別拉)강, 다공(大公)강유역 및 우윈(烏云), 쑨위(孫吳), 아이후이(璦琿) 등지로 이주하여 우선 수렵위주로 생활하다가 점차 황무지를 개척 벼를 재배하는 식으로 정착해 나갔다. 1887년 여러 가구가 러시아로 이주해 로오허(饒河)현 샤오지야(小佳)강 소작지 저지대에서 황무지를 개척하고 벼를 심었다.47) 통계에 따르면 1930년 헤이륭쟝성 논개발 면적은 1.5만 무에 달하였으며 1944년에는 160만여 무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거의 조선족 농민이 개발 경작한 것이었다.48) 1944년에 헤이륭쟝성 각 현 중 논에 벼를 재배하는 것이 비교적 많은 현은 다음과 같다. 아청(阿城)현 5636 시앙(垧), 우창(五常)현 10329시앙, 주허(珠河)현 4360시앙, 이란(依蘭)현 6332시앙, 미샨(密山)현 8285시앙, 옌소우(延壽)현 9302시앙, 팡정(方正)현 3330시앙, 통허(通河)현 4196시앙, 닝안(寧安)현 14925시앙, 무링(穆稜)현 3389시앙, 탕위엔(湯原)현 4358시앙, 화추안(樺川)현 4014시앙, 롱지앙(龍江)현 3892시앙, 허리(鶴立)현 4724시앙, 지닝(鷄寧)현 7438시앙 등.49) 오늘날 헤이륭쟝성 조선족인구는 전체인구의 1.3%를 차지하고 있지만 조선족이 경작하는 논의 면적은 전체성 경작면적에서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것으로 벼의 생산량은 총생산량에 45%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동북3성 130여만 헥타르에 해당하는 논을 볼 때 자연적으로 조선족이 동북의 개발건설에 있어 엮어낸 역사적 공헌이 연상되어질 수 있다.
이 밖에도 연변지구의 밭 개발에 조선족은 또 다른 공헌을 하였다. 연변은 구릉지대로 상당히 많은 지역이 메마른 땅이었다. 이 지역에 최초로 들어온 함경북도 조선인들은 밭을 다루는데 능했다. 때문에 연변지구 초기 개발에 있어서 밭을 개발하는 경우가 비교적 많았다. 1894년 청왕조의 통계에 따르면 연변에는 5990호의 한민(韓民)이 있었는데 그들의 경작지는 25501.52시앙에 달했다.50) 조선족이 연변지역의 밭과 논 개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2) 광산자원의 개발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족 중 일부는 동북지구 광산자원의 개발과 철로 등 건설에 참여하였다. 이중에 연변의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고자 한다.
19세기말 연변의 텐바오(天寶)산 은광은 동북지구의 최대의 은광이었다. 1893년 이 은광의 매일 생산량은 700-800량에 달했으며, 광공이 500여명이 있었고 그중 절반이 조선인들이었다. 이 광산의 주인은 동시에 라오토우고우(老頭溝) 석탄광을 경영하였기 때문에, 조선광공들이 석탄광산 개발시에 땀과 피를 흘렸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옌지현 위수추안(楡樹川) 화리(華利)석탄광산, 쓰런빤(四人班)의 쓰런빤 석탄광산, 허롱(和龍)현의 우잉동(五英洞), 투샨즈(土山子), 난샨동(南山洞) 등 석탄광산, 그리고 바이차오고우(白草溝) 철광 등은 모두 조선족, 한족, 만주족 인민이 공동 개발한 것이었다. 연변지역 여러 곳의 금광 역시 조선족, 한족, 만주족 인민이 공동으로 개발한 것이다. 그 중 네 곳의 금광업주는 조선인이었고, 광공 역시 조선족 위주였기 때문에 이들 4곳 광산은 조선족이 개발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0년대 초의 통계에 따르면 연변에는 모두 3000여명에 달하는 금광 광공이 있었는데 그중 조선족이 80%를 차지하였다.51)
일본제국주의는 중국침략에 박차를 가하고 동북지구 경제자원을 착출하기 위해 적지 않은 철로를 보수 혹은 건설하였다. 대다수의 조선족들이 착출되어 철로보수 혹은 건설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중동철로, 치엔투(天圖)-투머지앙(圖們江)변 철로, 길림과 둔화(敦化)를 연결한 지둔(吉敦)철로, 牡丹江과 圖們을 연결한 무투(牡圖)철로, 차오양추안(朝陽川)과 카이샨툰(開山屯)을 연결한 차오카이(朝開)철로 그리고 롱징(龍井)과 칭따오고우(靑道溝)를 연결한 칭다오(靑道)철도 등의 건설과 보수에 조선족 인민이 땀과 피를 흘렸다.52)
(3)동북혁명근거지의 건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한 이후 동북조선족 지역은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 무장도적떼를 숙청하고 악질지주와 투쟁하는 청비반패(淸匪反霸)운동, 토지개혁, 민주정권건립, 생산력회복과 발전, 사회질서안정과 정돈, 참군·참전, 전선지원 등 다방면으로 동북근거지 건설공작을 진행함으로서 해방전쟁의 승리와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을 위해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주로 조선족 사병으로 조성된 연변경비대는 1945년 12월을 시작으로 근 5개월에 걸처 엔지(延吉), 허롱(和龍), 왕칭(汪靑), 안투(安圖) 등 4개현의 토비(土匪)을 박멸하여 4000여명의 지방도적떼를 사살 또는 생포하였다.53)
연변 각 민족 인민은 또한 일본 잔여 세력을 소멸하는 일제앞잡이를 청산하는 반간청산(反奸淸算)투쟁을 전개하였다. 1946년 4, 5월 기간동안 롱징(龍井), 왕칭(汪淸), 옌지 등의 현에서 군중대회와 심판대회를 개최하고 악질 일본특무와 앞잡이 등 죄가 있는 자 37명을 공소심판하고 진압하였다.54)
연변지역에 토지개혁이 진행되고 조선족에게 평등하게 토지분배 취득권이 승인됨으로서 그들에게 지권(地權), 인권(人權), 재권(財權)이 부여되었다.55) 1948년 봄 엔지(延吉), 화룡(和龍), 왕칭(汪靑), 훈춘(琿春), 안투(安圖) 등 5개 현에서 총 가구수의 75.6%에 해당하는 116681호의 농민가구 중 총 인구의 76.38%에 달하는 549961명이 총 경지면적의 81.16%에 달하는 173292시앙(垧)의 토지를 공동으로 분할받았는데, 이는 개개인당 평균 4.5-7.5무(畝)에 달하는 토지를 분할받은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토지 분배시 조선족의 특성이 잘 고려되어 다수의 논을 더 분배받게 되었다.56)
연변지역의 토지개혁 운동 중 당정건설공작이 병행되었고 다수의 조선족 당원과 간부들이 배양되었다. 1949년 1월의 통계에 따르면 옌지에 공산당원은 5244명이 있었으며 그 중 조선족 당원이 3834명이었는데 이는 총 당원수의 73.1%를 점하는 것이었다.57) 그리고 촌급 간부4651명 중 조선족이 79.7%, 구(區)급 간부 중에는 조선족이 83.9%, 현 구(區)급 영도간부221명 중 조선족은 59.3%를 차지하고 있었다.58) 이것을 통해 우리는 연변의 조선족인민이 최초의 정권에 진정한 주인이었으며 이에 의해 민주근거지 역시 공고한 각급 인민정권이 성립되었음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헤이륭쟝성에 조선족전사들이 조성한 무장세력은 주로 다음과 같다. 하얼삔(哈爾濱)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 600여명, 조선의용군 제3지대 359여(旅) 5단(團) 3영(營) 600여명, 무단강군구 14단 3영, 15단 3영, 4단 3영 및 警衛團 3영, 牡丹江 보안단 2영, 合江군구 1단 2영, 헤이륭강 군구 경위단 1영, 緩東군 分區 목릉(穆稜)현 조선독립영,동북민주연군 후로(護路)군 1단 등.1) 그들은 무단강에 있는 적보안사령부의 무장을 해제시켰으며 국민당 특무대, 적 잔여세력 그리고 토비(土匪)들이 일으킨 1946년 牡丹江 5.15 반혁명폭동, 1946년 하얼삔 8.28반혁명폭동을 진압하였으며, 무란(木蘭), 통허(通河), 동싱(東興), 팡정(方正), 옌쇼우(延壽), 샹즈(尙志) 등의 현 소재지를 해방하는 전투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한 철로변의 토적들을 숙청하고 철로를 보호 원활하게 소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헤이륭쟝성의 토지개혁 중 조선족 빈농과 한족들이 똑같이 토지 가축 농기구 가옥 생활도구 등을 분배받았다. 송지앙(松江)성 40548 가옥의 조선농민은 53938시앙의 논(水田)을 분할받았는데, 이는 가옥평균 1.33시앙, 개인평균 0.29시앙에 달하는 것이었고, 크고 작은 가축 20800여 마리와 마차 10700대를 분할받았는데, 이는 개인당 평균 가축 1마리, 4가구당 우마차 1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2) 옌수(延壽)현은 2275호의 조선족이 살았는데, 경작하는 토지는 모두 59120무(畝)에 달했는데, 그중 4500여 무만이 조선족 농민의 개인소유로 되어있었다, 토지개혁이후 전 현의 조선족이 1956호에 71570무의 토지가 분배됨으로서 원래 자기 소유토지의 15.6배나 늘어나게 되었다. 인민정부는 토지증서를 발행하여 토지소유권을 조선족 농민자신에게 귀속시켰다.3)
헤이륭쟝성 역시 기본적인 토지개혁이 완성된 후 보편적으로 민주정권건설과 조선족 간부육성공작을 진행하였다.
1945년 일본이 투항한 이후 헤이륭쟝성은 대대적으로 조선족 군정간부를 훈련·배양하였다. 예를 들자면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中共松江省委員會의 위탁을 받아 샹즈(尙志)현, 하일삔시 등지에서 여러 차례 조선족 군사간부와 지방 간부 훈련반을 열었고, 1945년 11월에서 1948년4월까지 2년 반의 기간에 걸쳐 - 여성간부들을 포함해 - 조선족 군사간부와 지방간부 1560여명을 배출해냈다.4) 그중 1946년12월 말에서 1947년2월 말까지 샹즈현 허동(河東)향에서 있었던 제1기 북만지역 조선족간부훈련대대 학습인원 400여명은 주로 흑령강, 송(松)강, 허(合)강, 모단강, 길림, 내몽구 등의 성과 지역에서 온 이들이었다. 1946년 8월에서 1947년 3월까지 하얼삔 마지아고우(馬家溝)에서 있었던 제2기 학급인원 410여명은 3개중대로 나뉘어 1중대 140여 명은 군사간부로 2중대 150여 명은 지방간부로 3중대 120여명 전부는 부녀간부로 편성되었다. 1947년 4월 1일에서 9월 3일 까지 하얼삔 다오리(道里)에서 있었던 제3기 학습생 280여명은 주로 하얼삔시와 尙志, 옌수(延壽), 팡정(方正), 통허(通化), 마언(巴彦), 우창(五常), 수이화(緩化), 칭안(慶安),아청(阿城), 탕원(湯原) 등의 현에서 온 이들로 역시 3중대로 나누어, 1중대 100여명은 군사간부로, 2중대 100여명은 지방간부로, 제3중대 80여명전부는 부녀간부로 육성하였다. 1947년 2월에서 1948년 4월 하얼삔 마즈고우(馬家溝)에서 있었던 제4기 학습생 390여명 또한 3개중대로 나누어 1, 2중대 270여명은 전원 군사간부로, 3중대 120여명은 전부 지방간부로 육성되었다.5)
통계에 따르면 1949년 헤이륭쟝성 각급 조선족 간부는 900여명이었다.6) 조선족 집단거주지역인 동령(東寧)현 싼차코우취(三岔口區), 하이린(海林)현 신안취(新安區), 탕위엔(湯原)현 탕왕취(湯旺區), 버리(勃利)현 지아리취(江麗區), 지동(鷄東)현 지린취(鷄林區), 샹즈(尙志)현 허동취(河東區) 등 지역의 당간부들은 절대다수가 조선족 간부가 맡고 있었다. 조선족 거주가 비교적 작은 수이렁(緩棱), 칭안(慶安), 티에리(鐵力), 수이화(緩化) 등 12개 현 역시 210여명의 조선족간부가 배정되었는데, 그 중 촌급 간부가 177명, 구(區)급 간부가 21명, 현급 간부가 12명이었다.7)
해방에 따라 자신의 정권을 건립한 헤이륭쟝성 조선족 인민은 힘을 다해 경제를 발전시키고 해방전쟁을 지원하였으며 인민정부를 공고히 하고 전 중국의 해방을 위해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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