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의 중국전입 및 연변조선족 집단거주지역의 형성
김병호/중앙민족대학 교수
1) 조선인의 중국전입과 조선족의 형성
중국의 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중국으로 전입한 조선인이 중국에서 장기적으로 생활하면서 정착하고 번성하여 형성된 것이다.
조선인의 중국으로의 전입은 일찍이 원·명시기에 시작되었고,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에 그 수가 많아졌다. 역사상 조선인의 전입과 유동은 현재 조선족의 분포구조; 즉, 연변을 중심으로 한 동북 3성의 조선족 거주지역을 형성시켰다. 현재까지 중국조선족 인구는 대략 200여만 명이다.
(1) 조선인의 초기 전입
중국의 봉건왕조와 조선반도의 봉건왕조는 역사적으로 교류가 잦았다. 중국 각 민족의 인민들과 조선인민들간에 오랜 역사동안 다양한 연계와 교류가 있었다는 것도 알려진 사실이다.
원나라 때, 중국동북의 遼沈지역에 적지 않은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史料에는������원나라 29년에 이르러 沈州에 고려, 여진, 漢軍의 萬戶府가 설립된������1)것에 관해 기재된 것이 있다. 원나라 시기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은 다수가 투항하거나 사로잡혀서 온 軍民이었다. 예를 들면, 원은 초기에 조선을 침략하였는데, 고려 麟州의 神騎 都領 홍복원(洪福源)은 서부의 40여 성(城)과 함께 원나라에 항복하였다. 1233년, 홍복원이 통솔하던 고려軍民이 遼와沈에 와서 거주하였다. 1234년, (그에게) 고려군민 1만호를 내리고 管領高麗軍民長官의 직위를 하사했다. 1261년, 按撫高麗軍民總管府로 바꾸었고 관할소를 遼陽에 설치하었다. 1263년, 원나라의 인질로 된 高麗王의 조카 王淳이 2천여 호의 고려 군민을 거느리고 沈州(현재 沈陽)으로 이주하였다.
明나라 때, 여러 경로를 통해 중국의 동북지역에 이주한 조선인의 수가 증가하여, 동북 遼東지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 明 天順8年(1464), 朝鮮 世祖 때 同知中樞院事 梁誠이 국왕에게 올린 변방의 폐단들에 대한 上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臣이 「遼東志」를 보니 東寧衛所에 속한 고려인의 수가 洪武年間에는 3만여 명이었고, 永樂年間에는 흩어져 있는 군인도 4만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지금은 遼東 戶籍의 3/10이 고려인이고, 서쪽으로는 遼陽에서 동쪽으로는 開州까지, 남쪽으로는 海盖州까지 모여사는 부락이 이어지고 있습니다.”2) 명조시기에 중국에 이주한 조선인 역시 폭력적인 강제하에서의 이민이 많았고, 또한 생활상의 핍박으로 중국의 요동지방으로 도망하여 온 朝鮮邊境民이 적지 않았다. 명조 洪武19년(1386년) 東寧衛를 설치하여 조선인을 배치하였고, 후에 또한 廣寧 등의 衛所에 조선인을 배치하였으며, 그 결과 조선인이 비교적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거주지역이 생기게 되였다.
後金(淸)이 興起된 뒤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에 잡혀 와서 중국의 조선인 수가 증가했다. 예를 들어, 1619년 薩爾滸전투에서 姜弘立이 明軍을 원조하기 위해 거느리고 온 5천명을 데리고 투항한 후 “ 모두 받아들여 보살핌을” 받았다.3) 1627년과 1636년, 皇太極이 명과 조선의 연결고리를 끊어 후환을 없애려는 전략적 고려에서, 두 차례 조선을 침략하여 많은 조선인을 잡아왔는데 그 수가 각각 4,986과 수만 명이라는 설이 있다.4) 당시 포로로 잡혀 온 조선인들은 대부분 滿洲八旗에 편입되었다. 淸朝를 따라 北京에 들어와 주둔하게 된 八旗 朝鮮佐領은 다음과 같다. “ 第一高麗佐領은 康熙34年에 구성되었는데, 花色에 속하는 고려 佐領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第一佐領를 만들어서 內務部 總管署領侍衛內大臣散秩大臣이 관리를 겸하도록 했다. 第二高麗佐領은 國初에 편성되는데 章達禮에게 관리하도록 했다. 第一鼓佐領은 국초에 편재되었고 金秉世에게 관리하도록 했다. 第十二佐領은 국초에 조선에서 귀순한 사람으로 편성되었다. 第十四佐領은 원래 국초에 조선에서 귀순한 사람을 半牛錄로 편성했었는데, 康熙33年 사람이 많아지자 정식 佐領으로 만들었다.”
淸初 이전에 중국에 이주한 조선인은, 전쟁 중에 투항했거나 포로로 잡혀 왔거나, 아니면 생계로 인해 자발적으로 도망해 왔건 상관없이, 당시의 사회환경․역사적 조건 그리고 인구규모 등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다른 여러 민족 속에 융합되었다. 극소수의 부분만이 신중국의 성립 때까지 유지되어, 신중국의 민족정책에 대한 관심으로 조선족의 민족신분을 회복했다. 예를 들어 현재 河北省 靑龍縣 八道河子鄕 塔溝村과 大丈子鄕 孟家窩鋪村을 중심으로 한 400여 명, 遼寧省 盖縣 陳屯鄕 朴家溝村의 300여 명, 遼寧省 本溪縣 山城子鄕 朴堡村․久才峪村․化皮村 등의 박씨 성을 가진 조선족은 그 조상이 명말-청초에 중국의 동북으로 이주한 중국 최초의 조선족 중의 일부분이다.5)
(2)1910년 이전의 조선인의 전입
현재 중국에서 생활하는 절대다수의 조선족의 조상은 19세기말부터 중국에 전입한 사람들이다. 이때부터 1945년 8월까지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910년 이전; 1910-1931년; 1931-1945년.
1910년 이전에 중국으로 전입한 조선인은 대략 26만 명 정도이다. 그들 대부분은 자연재해 혹은 국내 통치계급의 횡포 등의 원인에 의해서 청조말기부터 지속적으로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중국 境內에 전입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1881년 중국의 두만강유역은 이미 조선인에 의해서 12만여 무(畝)에 달하는 토지가 개간되었고, 이 토지에 의지해 생활하는 조선인이 만 명 정도였다.6) 1845년 조선 평안북도 楚山郡의 80호 농민이 중국의 랴오닝성(遼寧省) 통화(通化), 쿠안디앤(寬甸)의 휜강(渾江)유역에 이주하여 땅을 개간하여 경작하였고, 잇따라 헝런(桓仁), 싱징(興京), 안동(安東(丹東))등지도 조선농민이 농지를 개간하고 경작했다7). 일부분의 조선인은 먼저 러시아령의 연해지역으로 이동하고, 그 후 다시 헤이룽강(黑龍江)과 우수리강(烏蘇里江)을 건너 북만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1862년 러시아령의 연해 변방 지역의 조선농민 400호는 아무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였다. 1868년에 그들은 다시 헤이륭강을 건너서 愛輝현의 法別拉河口, 納金口子, 遜河 등지에 가서 땅을 개간하고 경작하였다8). 1896년, 沙俄는 《중-러조약》에 의거해 동북 만주에서부터 하얼빈을 경유한 大連과 綏芬河까지 가는 중동철로를 건설할 때, 대량의 러시아령에 있는 조선인을 징용하였다. 철로가 개통된 후에, 그 사람들은 철로를 따라 정착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에서 중국으로 전입한 조선인 일부는 淸정부의 정책과 조선정부의 요구에 의해서 조선에 돌려보내지거나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예를 들면, 1871년 寧古塔副都統관아에서 조선정부의 요구에 의해, 寧古塔부근으로 전입한 조선유민을 다시 조선으로 돌려보낸 것이, 454명에 달했으며, 그 밖의 조선유민은 사방으로 흩어졌다9). 또한 1890년에서 1894까지 淸통치자들은 조선인에 대해 剃髮易服(만주족처럼 머리를 깎고, 한복을 만주복으로 갈아입다), 編甲升科(일정한 규모로 호적을 편성하고, 황무지 개간의 우대기간 만료 후에는 다른 토지와 같이 세금을 징수)가 제일 극심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많은 조선인이 이런 횡포를 참지 못해서 조선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시베리아로 달아났다10).
이 시기 조선인이 중국으로 들어오는데, 주요하게 세가지의 길이 있었는데, 즉 하나는 조선에서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지역(지금의 遼寧省과 吉林省 동남부)으로 들어와서 점차 중 만주와 서만주 지역으로 퍼져 나가는 경로; 두 번째는 조선에서 두만강을 건너 연변지역으로 와서 점차 동만주와 중만주지역으로 퍼져 나가는 경로; 세 번째는 조선에서 러시아연해지역으로 들어간 후, 다시 헤이륭강, 우수리강으로 건너서 북만주지역으로 들어오는 경로이다. 헤이륭쟝성(黑龍江省)의 경우, 19세기 후반부터 사람들이 점차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이 조선에서 직접 건너오는 사람들이었고, 일부는 우선 吉林省이나 遼寧省, 러시아 연해주에서 다년간 떠돌다가 전입하는 경우였다. 19세기 말엽에는, 주요하게 세 갈래의 길을 통했는데 첫 번째는 조선 동북부 변경 함경북도 경흥, 경원 등지에서 두만강을 건너서 연변지역의 琿春에 와서 琿春에서 瑚布圖河,大綏芬河,大肚川河를 따라 東寧, 寧安, 海林 등의 현에 전입하는 경우였다. 두 번째는 조선서북부의 평안북도에서 압록강을 건너서 東邊道지역에 와서 輯安,寬甸,通化,桓仁,臨江,柳河,興京 등지를 경유한 후 헤이륭쟝성의 五常, 阿城, 濱江등지로 전입해오는 경우이다. 세 번째는 조선에서 우선 러시아 연해주로 들어간 후, 다시 헤이륭강동부와 서부변경지방으로 들어오는 경우이다.
(3)1910-1931년 사이의 조선인의 전입
1910-1913년 사이에 중국으로 전입한 조선인수는 40만여 명에 달했고, 1931년 중국동북에 조선인이 약 70만 명 정도가 있었다. 1910년 한일합방과 그 후 실행된 조선농민 토지 박탈과 농민에 대한 착취정책은 대량의 조선농민으로 하여금 고향을 등지게 했고, 중국동북지역으로 이동하게 하였다. 1930년, 헤이륭쟝성의 조선인은 44463명11)이 있었고, 남만주지역에는 조선인이 171871명12), 연변지역에는 395847명(1931년에는 406341명)13)이 있었다. 헤이륭쟝성의 4만여 명은 54개의 현14)에 분포되어 있었으며(참고 표2), 남만주지역의 17만 명은 安東과 通化지역, 奉天과 鐵嶺지역, 吉林과 長春지역에 분포되어있었다15). 연변지역의 40만 명은 연변 각 현에 분포하고 있었다.
이 기간 전입한 조선인수는 상당히 많았는데, 1910-1920년에 중국동북지역에 192540명이 유입되었고16) 1910-1926년에 중국동북에 유입된 조선인은 298940명이었는데, 그 중 북간도지역 이외에 유입된 인원은 171966명으로 유입된 총 인원 중에서 57.5%를 점하고 있었다17). 이 시기에 유입된 인원 중에, 조선 삼남지역, 특히 경상도지역의 인원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1910-1926년 사이 서간도 지역에 전입한 조선인 113440명중 원적이 경상도인자가 39614명이었고, 이것은 그 지역 조선인 총수의 34.94%를 차지했다18). 매년 중국에 들어오는 조선인은 대략 2만 명 정도로 유입이 많았던 해에는 7만 명에 달하기도 했으며, 유입인구가 2-3만명정도 되었던 해도 적지 않았다19).(참고 표1)
(表1)1910--1930年 만주 조선인 인구 증가 통계(단위:만명)
年度 |
人口 |
年增加人口 |
年度 |
人口 |
年增加人口 |
1910 |
105600 |
|
1921 |
488657 |
29230 |
1912 |
238403 |
132803 |
1922 |
515865 |
27208 |
1913 |
252118 |
13715 |
1923 |
528127 |
12262 |
1914 |
271338 |
19270 |
1924 |
531857 |
3730 |
1915 |
282070 |
10682 |
1925 |
531973 |
116 |
1916 |
328318 |
46248 |
1926 |
542185 |
10212 |
1917 |
337461 |
9143 |
1927 |
558280 |
16095 |
1918 |
361772 |
24311 |
1928 |
557052 |
18772 |
1919 |
431198 |
69426 |
1929 |
597677 |
20625 |
1920 |
459427 |
28229 |
1930 |
607119 |
9422 |
출처: 金炳鎬: 《中國朝鮮族人口簡論》,(中央民族學院出版社,1993),53頁。
연변지역으로 매년 유입되던 조선인이 제일 많을 때가 2만 5천명으로, 여덟 해에는 매년 1만 명 정도가 유입이 되었고, 두 해에는 매년 천 몇 백 명 씩 유출이 되었다.(참고 표5)
이 시기 동북지역은 세 번의 조선인 이민 고조기가 있었다. 즉 1910-1915년으로 6년 동안 모두 222718명이 이주했고, 이민수가 제일 많았던 해는 6만 명 이상에 달했다. 그 다음은 1917-1922년으로 6년 동안 모두 190666명이 이주했다. 세 번째 고조기는 1925-1928년으로 4년 동안 전체 65704명이 이주했는데 이주가 많았던 해는 2만 명이 넘었다. 연변지역을 보자면, 전입이 비교적 많았던 연도는 1915-1920년으로 6년 동안 모두 120380명이 이주했고, 1923-1926년 4년 동안 모두 53539명이 전입했다. 이 시기에 전입한 조선인 대부분은 安奉線 철로를 이용해 奉天(沈陽)에 와서 다시 撫順,開源,鐵嶺,吉林각지로 분산되었고 계속 또 撫順에서 興京,通河 방면으로, 開源에서 海龍, 柳河 방면으로, 吉林에서 華甸 등 방면으로 확산되었다.
지역 조선인의 약 10%에 해당하는 숫자였으며1), 조선인 입적수는 갈수록 늘어나기 마련이다. 입적하지 않은 조선인도 중국정부의 관리하에서 어떤 사람들은 토지소유권을 획득하기도 하면서 동북지역의 농업경제, 특히 벼 생산을 발전시켰다. 20년대 후기에 중국에 전입한 조선인은 중국공산당의 지도와 협조하에 일본제국주의와 중국봉건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시작하였으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후(이전까지 조선인이 적게는 15%, 25만명, 많게는 20%, 35만명 이상이 중국 국적에 가입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중국공산당의 민족평등정책의 지도와 인도하에 중국에 남은 조선인은 다른 민족들과 같이 토지를 분배받았다. 토지를 분배받는다는 것은 중국국민이라면 마땅히 갖는 권리로 이것은 조선인이 중국국민의 사회적 지위를 취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약하면, 중국에서 장기의 생산생활과 투쟁속에서 조선인은 점차 중국의 여러 소수민족들 중의 하나로 되면서 조선족이 형성된 것이다.2)
2) 연변조선족 집단거주지역의 형성
백여 년 동안의 조선족이 중국에 전입된 과정속에서 연변은 점차 조선족의 최대 집단거주지역이 되었다.
연변은 1910년부터 중국에서 조선족인구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 되었다. 다른 연도별 연변조선족 인구수가 중국조선족 인구수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아래와 같다.
(표 4) 연변조선족인구가 전국 조선족인구에 차지하는 비율
年度 |
中國朝鮮族人口 |
延邊朝鮮族人口 |
延邊朝鮮族人口所占比 % |
1910 |
260000人 |
163000人 |
62.7% |
1922 |
515865人 |
323806人 |
62.7% |
1930 |
607119人 |
382405人 |
63.0% |
1936 |
854411人 |
474333人 |
55.6% |
1939 |
1065523人 |
529193人 |
49.7% |
1944 |
1658572人 |
636733人 |
38.0% |
1949 |
1110657人 |
529000人 |
47.6% |
1953 |
1120405人 |
551025人 |
49.2% |
출처: 1910年和1953年 통계 숫자는 金炳鎬 著《中國朝鮮族人口簡論》,(中央民族學院出版社,1993)의 53、63頁에서 인용하였고;1922-1949年 통계 숫자는 金鐘國 主編,《黨的民族政策與朝鮮族》,(延邊大學出版社,1998),第21頁에서 인용하엿다. 김종국 저서중 이 5년의 숫자는 본 논문의 숫자와 같지 않은 것이 있다. 여기에서 이 숫자를 인용하는 것은 단지, 연변조선족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연변에 왜 중국조선족의 최대 집단거주지역이 형성되었는가?
(1) 연변지역의 자연 지리조건에서 보면
중국과 조선의 경계를 이루는 강인 두만강은, 발원지에서 상류 백리 정도는 강폭이 좁고, 伏流가 있어서 출입이 쉽다. 특히 겨울에는 하류의 일부분만 제외하고는 전부 얼기 때문에 출입이 더욱 쉬워진다.
두만강 북측, 즉 연변지역은 크고 작은 지류가 64개가 있고, 크고 작은 분지와 평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토지가 비옥하며, 개간·경작하기에 좋고 정착하기 쉬운 조건이다.
연변지역의 개간이 가능한 토지는 많으며 중국으로 전입한 조선농민에게 큰 흡인력이 있었다. 청나라시기에 연변은 기본적으로���산에 진입을 금지시키고 울타리를 쳐서 봉쇄한���지역에 속했기 때문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여기의 옥토는 기본적으로 개간이 안되어 있었고, 대체로 원시지역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청나라 관원 吳祿貞이 연변을 답사한 후에 말하기를 ���동북성의 부의 근원은 길림에 있고, 길림의 부의 근원은 남부에 있으며, 특히 옌지(延吉)은 가장 유명한 지역이지만, 세상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하였다3). 연변의 이러한 상황은, 첫째로 청나라의 봉쇄정책과 두 번째로는, 봉쇄가 풀린 후에는 중국내륙과 상당히 떨어져 있고, 또 哈爾巴嶺,張廣才嶺,老爺嶺 등의 높은 산으로 막혀있어서, 관내의 漢族유민들은 대부분 주인이 없는 옥토가 광활한 길림지역에서 발을 멈추었다. 이러한 상황은 대량의 조선인이 전입하게 한 조건을 제공했다. 다른 측면에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長白,臨江,輯安 등 압록강 중상류지역은 거의 땅주인이 없었다. 경작이 가능한 토지가 총면적의 14%4)밖에 안되는 이 지역은 일찍이 함풍황제 통치기간(1851-1861)에 대량의 한족 유민에 의해서 개발되었다. 1869년 鳳凰城邊門은 남으로 旺淸北門까지 그 사이에 이미 개간지가 57.6만 무가 있었고, 인구도 10만 명에 달했다5). 1877년, 변방 각 현의 장부에 올라있는 땅은 180.3만 무였다6). 1910년 전에는, 奉天省의 경작 가능한 토지의 90%가 개간이 완료되었다7).그래서, 압록강 중상류지역에 있는 奉天省에서는 더 많은 조선인전입자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고, 그래서 전입자의 대다수가 두만강북쪽으로 건너가 연변지역으로 들어갔다.
(2)조선국내의 상황에서 보면
조선왕조 통치계급의 폭정과 부패는 조선인이 중국 동북지역으로 전입하게 한 한 원인이었다. 당연히, 두만강 남쪽의 조선인 대부분은 강을 건너 근처 연변지역으로 들어갔다.
조선의 심각한 자연재해도 조선인이 어쩔 수 없이 중국 동북지역으로 건너가게 한 중요한 원인이었다. 조선북부는���산이 높고 계곡이 깊은 지세로, 조금만 비가와도 큰물이 고여 흘러내릴 수가 없어서 늘 재난이 뒤따르는 황폐화된 땅이었다���.8) 1860-1970년까지 11년 간 조선 북부지역은 5번의 큰 재해가 있었고, 대량의 재난민은���나무를 베서 배를 만들어 식솔을 이끌고 강을 건너���서 ���땅은 있지만 사람이 없는���9)동북지역으로 전입했다. 1869년과 1870년에 함경도에서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굶주린 백성이 앞다투어 짝을 지어서 間島와 琿春방면으로 넘어가서, 강변의 산야가 거의 모두 경작되어지고 있었다“.10) 1870년과 1871년은 함경북도의 호구수가 53601호가 감소되었는데, 바로 대다수가 두만강 북쪽 연변지역으로 전입했다고 말할 수 있다11).
조선은 일본군국주의에 침략을 받아서 조선의 반일지사와 인민은 할 수 없이 고향을 떠나 중국동북과 관내지역으로 이동해서 새로운 항일투쟁 장소를 찾기 위해 물색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은 무수한 조선인민으로 하여금 반일운동으로 일어서게 했고, 일본군국주의의 혹독한 진압을 받았다. 망국의 조선인민은 어쩔 수 없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야 했다.
(3) 중국국내 상황으로 보면
중국의 변경수비 역량이 약했고 중국정부가 봉쇄를 열고 개간정책을 실행한 것은 대량의 조선인이 중국으로, 특히 연변지역으로 전입하는 유리한 조건으로 되었다.
청나라의 조선과 접하는 국경의 관리가 허술했는데, 두만강 동쪽 琿春일대에 주둔하던 병력으로 말하자면 1714년에���琿春에 정해진 병사 수���는 150명이었고, 1752년에는 250명이었고, 1860년에는 300여 명이었다12). 이러한 병력으로 서쪽의 嘎呀河에서부터 동으로 태평양까지 관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요한 임무는 해안 변경을 지키는데 있었고, 그래서 당시의 진입금지도 한계가 있었다. 1891년, 두만강 북부연안을 아무르의 ���佐領“에서 관할했을 때도, 단지 277가구만이 있었고13), 변경수비 병력도 부족해서 진입을 금지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실정은 조선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널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다.
청나라는 동북을 봉쇄시킨 후, 八旗官兵의 기지로 된 넓디넓은 바꾼 후 동북의 토지를 경작하자면 그래도 장정들을 고용해야 했다. 왜냐하면 한 세대의 만주족의 旗地도 수십, 수백, 수천 헥타르에 달했기 때문에 당시 ���旗인 한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경작해도 1년 동안 150무(畝)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고���14),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고용인을 써야 했다. 고용인은 주로 관내에 있는 한족유민과 중국에 들어온 조선인이었다. 그래서 관변에서는 중국으로 건너오는 조선인에 대해 엄격하게 검사하고, 잡아서 돌려보내는 것이 현지에서는 잘 되지 않았고, 다른 민족들은 조선이민자들을 어느정도 보호해 주었다.
淸정부의 19세기 70-80년대에 취했던 압록강, 두만강 북안의 진입을 허용한 정책과 1885년에 취했던 두만강 북부지역을 넓이 40-50킬로, 길이 700리의 구역을���韓人 개간지”로 만든 정책으로, 대량의 조선인이 ���합법���적으로 중국동북지역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고, 특히 비교적 집중적으로 연변지역에 들어와 정착하게 된 관건적인 조건이 되었다. 19세기 중엽, 청 정부는 내외적으로 어려웠는데, 1840년의 아편전쟁, 1851년의 태평천국혁명으로 청 정부의 기반이 많이 흔들려서 동북의 봉쇄정책에 관심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이 시기 관내에서 온 한족 유민과 조선에서 온 유민은 이미 압록강, 두만강 북쪽에 토지를 개간해서 농업생산을 하고 있었고, 봉쇄정책은 이름만 존재하는 정책이 되었다. 이 시기 청 정부는 러시아, 영국 등 서구열강이 중국동북 지역을 침략하려고 하는 것을 고려하여, 잇따라 동북의 봉쇄정책을 풀고, 사람을 모아 땅을 개간하게 하는 등 일련의 중요한 정책을 취했다. 1875년 淸 정부는《盛京東邊間曠地開墾條例》을 반포하고, 그로부터 通化,集安,桓仁,興京,寬甸,長白 등 동변도지구에서 사람을 모아서 개간을 하였다. 1881년 청정부는 두만강 북쪽의 봉쇄를 풀고,���백성들이 생업에 안전하게 종사 할 수 있도록 하고, 개척지를 제공하여 부유하게 하고������변방으로 이민을 추진하는 정책���을 실행하였고15), 琿春開墾總局을 설립해서 관리하였다. 1883년 3월 청나라와 조선이《奉天朝鮮邊民貿易章程》(즉���중강무역장정“ )을 체결하였고, 1883년 6월에는 《吉林朝鮮商民貿易地方章程》(즉 ���會寧 통상장정���)을 체결하여, 압록강, 두만강지역의 남북변방 주민들이 언제든지 교역이 가능하도록 함으로써16), 조선인의 전입을 촉진하였다. 특히 1885년 청정부는 두만강북부 광활한 지역을 조선인 전용의 개간구역으로 만들어, 대량의 조선변민에게 연변으로 들어오게 하고, 연변에 조선족이 집단거주 할 수 있도록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1890년에서 1894년까지 연변당국은 조선인이 개간한 땅을 측량하여 1894년에 조선 전입민에 대해 ���사(社)를 세워 호구 편제를 하고, 그에 따라 이름을 올리고 땅세를 바치며, 局을 세워서 사람을 모아 개간한다“는 정책을 실행하였는데, 모두 4개의 堡, 39개의 社, 124개의 甲과 415개의 牌로 나누었다17).
(4)일본제국주의의 식민정책이 조성한 조건에서 보면
일본제국주의 식민 정책과 이민정책으로 중국동북지역으로 이민하거나 전입하는 조선인이 늘어나게 됐는데, 특히 많은 조선인이 연변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일본제국주의는 1910년에 한일합방을 체결하였고, 1931년 9・18 사변을 발동하여 중국동북을 침략하였다. 1932년에는 괴뢰정권 만주국을 세워서 사실상 중국동북지역을 점령하였다. 일본제국주의의 책략하에서 1931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이민회사설립계획》을 제정했고, 1932년에는《滿鮮농사회설립계획》을 제정하였고, 1933년 8월에 또다시 《조선인이민정책대강》을 제정해서, 1936년 8월에는 만주국괴뢰 정권과 조선총독부간에 협의가 체결되어, 공통으로《재만조선인지도강요》를 제정했다. 1938년 7월에는《조선농민관리강요》등이 제정되었다. 이러한 정책과 대책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과정중에 연변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비교적 많았고, 차지하는 비율도 컸다. 이것도 연변지역이 조선족집단거주지역이 된 주요한 원인이었다.
(5)연변지역의 반일투쟁의 상황에서 보면
20세기 10, 20년대에, 연변지역의 반일투쟁은 극렬했고, 감동적이어서 중국동북지역의 반일투쟁의 책원지가 되었다. 청말, 중화민국 시기에 연변지역의 조선족은 대부분 용정을 중심으로 한 벼농사지역에 집단 거주해 살면서 촌마다 학교를 세워 반일후손을 배양했다. 특히 용정에 東興, 大成, 永新, 恩眞 등의 민족 중학교를 세워, 대량의 민족 군정인재들을 배양함과 동시에 지속적인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반일 애국적인 조선의 지사와 전입민들은 더욱 연변지역에 모이게 하였다. 이것도 연변지역이 조선족의 최대 집단거주지역이 되게 한 중요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연변지역에서의 조선족 집단거주 상황은 어떠했는가?
1894년 연변조선인 인구는 20800명에 불과했으며, 동변도지역의 조선인 인구는 37000명에 달해서 연변조선인의 1.5배 정도였다.18)
1910년 연변조선인 인구는 109500으로 증가했고, 1911년 동변도 조선인 인구는 58950명으로 증가해서18) 1910년 중국경내 조선인 인구가 26만 명이었던 것에 따르면19), 연변지역 조선인 인구는 중국조선인 총 인구의 42%에 달했고, 동변도 조선인 인구는 중국조선인 총인구의 22%에 해당했다. 다른 통계에 따르면 당시 연변지역의 조선인인구는 163000명에 달했고, 당시 중국조선인 총 인구의 약62%를 차지했다20). 당시 연변지역 조선인인구가 조선인 전체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제일 커서 거의 반 정도를 차지했다.
1919-1926년에 중국동북으로 전입한 조선인은 298940명인데 그 중 연변지역에 전입한 조선인은 126974명으로 전입총수의 42.5%를 차지했고, 연변이외의 지역으로 전입한 조선인은 171966명으로 전입총수의 57.5%를 차지했다21).
우리는 1910년에서1933년까지 연변조선인 인구증가를 통계22)에서 보면 연변조선인 인구증가와 집단거주의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참고 표 5)
(표5) 1910-1930年 연변 조선인 인구증가 통계(단위: 인)
年度 |
人口 |
年增加人口 |
年度 |
人口 |
年增加人口 |
1910 |
163000 |
|
1926 |
368827 |
12811 |
1915 |
203426 |
40426 |
1927 |
382930 |
14103 |
1917 |
253961 |
50536 |
1928 |
381521 |
-1409 |
1920 |
307806 |
53845 |
1929 |
388366 |
6845 |
1921 |
323806 |
16000 |
1930 |
395847 |
7481 |
1922 |
322011 |
-1795 |
1931 |
406341 |
10494 |
1923 |
329391 |
7380 |
1932 |
415418 |
9077 |
1924 |
346194 |
16803 |
1933 |
454977 |
39559 |
1925 |
356016 |
9822 |
|
|
|
출처: 金炳鎬:《中國朝鮮族人口簡論》,(中央民族學院出版社,1993),53頁。
이 시기 연변으로 들어간 조선인은 1910년 이후부터 급증하기 시작했고, 몇 번의 이민고조가 나타났다. 통계숫자로 보면 연변지역의 이민이 비교적 많았던 연도는 1915년에서 1920년으로 6년 동안 120380명이 이민했고, 1923-1926년 4년 동안 53539명이 이민했다.
또 다른 통계에 의하면, 1910년-1936년, 연변지역의 조선인인구는 109500명에서 474333명으로 증가했고, 26년 간 364833명의 증가로, 매년 평균 14032명이 증가했다. 1911-1934년, 동변도지역의 조선인인구는 58950에서 65943명으로 증가해서, 23년 동안 6993명이 증가해 매년 평균 304명이 증가했다. 이 두 지역의 조선인인구수 평균증가수와 절대인구증가수의 대비가 선명했다.23)
1923-1926년은 연변지역 조선인 인구증가의 고조시기 중의 하나였다. 1922-1926년 사이에 중국연변, 東邊道 지역으로 전입한 조선인수에 대한 통계에서 연변지역과 東邊道지역의 전입인구의 비율이 3:1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참고 표 6)
(표6) 1922年-1926年 延邊、東邊道 지역 조선인 전입 비교 통계
年度 |
延邊 |
東邊道 |
東邊道(100%)대한 延邊의 비율(%) |
1922 |
5096 |
1610 |
504.6% |
1923 |
4450 |
1454 |
306.1% |
1924 |
6060 |
1935 |
313.2% |
1925 |
5121 |
1571 |
141.9% |
1926 |
12364 |
3610 |
342.5% |
合計 |
33091 |
10180 |
325.1% |
출처: 權立主編,《中國朝鮮族史硏究》(延邊大學出版社,1994),2
* 權立 主編, 同上書. 이 표의 숫자는 본문에서 인용한 본인 저작 중에 나온 숫자와 다르다. 여기서 이 표를 인용하는 것은 延邊과 東邊道지역의 조선인 전입인구의 비율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표7) 1930년 연변조선인이 동북지역조선인 총 인구 중 차지하는 비율
地區 |
人口(人) |
조선인 총인구중의 % |
延邊四縣 |
409402 |
65.1 |
東邊道地區 |
50545 |
8.0 |
奉天,鐵嶺地區 |
97169 |
15.5 |
吉林,長春地區 |
24157 |
3.8 |
北滿地區 |
44463 |
7.1 |
旅大地區 |
1747 |
0.3 |
其他地區 |
1000 |
0.2 |
總計 |
628483 |
100 |
출처: 金鍾國 主編:《黨的民族政策與延邊朝鮮族》,(延邊大學出版社,1998), 20頁。
1910년부터 시작해서 20년 간, 연변지역으로 전입한 조선인 절대수가 급격히 증가해서 상당규모의 조선인 집단거주지역이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1930년 전체 연변지역의 조선인 인구가 중국동북지역 조선인인구의 1/3을 차지했고(참고 표 7)24), 연변지역의 총인구수에서도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참고 표 8)
(표8)연변조선인이 연변 총 인구 중에 차지하는 비율
年度 |
延邊總人口 |
其中朝鮮人人口 |
朝鮮人人口所占比 % |
1907 |
100500 |
77000 |
76.6 |
1912 |
212320 |
163000 |
76.8 |
1918 |
362563 |
253961 |
77.8 |
1922 |
395858 |
323806 |
81.8 |
1925 |
400785 |
346194 |
80.4 |
1926 |
442365 |
356106 |
80.5 |
1930 |
508623 |
388366 |
76.4 |
출처: 金鍾國 主編:《黨的民族政策與延邊朝鮮族》,(延邊大學出版社,1998),20頁。
* 여기서 열거하고 있는 숫자는 본 문 중 본인의 저작에서 인용한 숫자와 5군데에서 가리키는 년도가 다르고,(1912、1918、1922、1926、1930-1910、1917、1921、1925、1929),두개 년도의 숫자가 다르다.
위의 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30년 연변지역에서 조선족의 초보적인 인구규모를 가지고, 총 인구중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조선족 집단거주지역이 형성되고 있다.
1934년-1936년 사이, 평균 매년 71462명의 조선인이 중국 동북지역으로 전입했고, 이시기 연변 5개 현의 조선인인구는 52388명이 증가했으나, 安東省의 조선인인구는 단지 1300명만이 증가했고, 奉天省 조선인 인구는 5476명이 감소되었다.25)
1937년-1941년까지는 ���집단이민���,���집합이민���의 형식으로 중국동북각지로 전입한 조선인수는 모두 73188명으로, 그중 연변 5개 현으로 전입한 사람은 32176명에 달해서 전입한 총인구수의 44%를 차지했다.26)
1938-1941년까지 ���분산이민���의 형식으로 중국동북지역으로 전입한 조선인은 모두 30172명으로 그 중 연변 5개 현으로 전입한 사람은 2911명이었고, 전입 총 인구수의 10%를 차지했다.27)
30년대 말, 관내로 전입한 조선인이 비교적 많아지면서 관내 조선인은 20만 명에 달했고, 그중 山海關에서 天津사이의 冀東지역에 10만 명이 있었고, 주요하게는 그 지역에 건설한 10개의 농장과 石家庄에 3만명정도가 있었다.28) 1940년에는 헤이륭장성의 조선인인구는 153357명에 달했고, 1930년의 48326명과 비교해서 10만 5천명이 증가했으며, 1935년의 87350명과 비교해서 6만5천여명이 증가했다.29)
1941-1944년 사이에 동북으로 전입한 조선인은 단지 64887명이었으나30) 1944년의 연변조선인인구(631733명)를 1939년과 비교하면 11만 이상이 증가해서,31) 당시 중국조선족인구 약 170만의32) 약 37%를 차지했다.
1949년에는 조선의 광복이후에 몇 십만의 동북의 조선인이 조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33) 중국의 조선족인구는 1100657명이었고, 연변조선족인구도 약 10만 명이 감소해서 529000명에 달했고, 조선족총인구의 47.6%를 차지했다.34)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성립되었을 때, 연변의 조선족인구는 연변총인구의 74%를 차지했다. 1953년 전국 제1차 인구센서스에서 연변조선족인구는 551025명이었고, 전국조선족 총인구의 49.2%를 차지하고 있었고35), 중국조선족인구가 집중되어있는 최대 집단거주지역이 되었다.
요약하면, 조선반도에서의 조선인은 일제의 침략과 국내통치, 자연재해 등의 원인으로 19세기중엽부터 중국에 전입하였으며, 특히 자연적 요소와 사회적 요소 등의 원인으로 많은 조선인이 중국동북의 연변지역으로 전입하여 규모가 비교적 큰 조선족 집단거주지역이 형성되었다. 이것들은 연변조선족과 전국조선족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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