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의 종교정책으로부터 본 "삼자"적 선교관
서언
1979년 삼자애국운동위원회(이하 "삼자"라 부름)가 다시 나오고 80년 중국기독교협회(이하 "교협"이라 부름)성립 된 후, 그들의 지도자들은 늘 국제회의에서 강연하거나 "천풍"등 출판물들을 통하여 그들의 문장을 발표하였다.
그들이 강조하는 중점은
1)"삼자"와 "교협"이 중국교회의 대표이다.
2) 복음을 전하는 주권은 중국교회에 있다. 즉 "삼자"와 "교협"에 속한다.
3) 외부의 어떤 단체도 중국교회의 생활과 공작을 간섭해서는 안되며 즉, 전도, 성경과 신앙서적 전달, 혹은 중국교회와의 접촉 등을 포함하여 심지어는 복음방송도 중국교회의 주권을 적의를 품고 간섭하고 존중하지 않는 행위로 본다.
그리고 "삼자"와 "교협"은 한 방면으로는 사역자를 훈련시키고 목사와 전도인을 안수하며 그들을 여러 교회에 보내 사역을 시키면서 다른 한 방면으로는 가정교회의 전도인들과 여행전도자들의 사역을 금지하고 있다.
"삼자'의 이 표현은 두 가지 가능성을 갖고 있다.
1) "삼자"는 중국공산당의 종교정책을 신학적으로 변호한다.
2) 기독교들(삼자를 대표로 하여)이 사회주의 국가의 압력 하에서 생성한 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어쨌든 "삼자"의 지도자들이 일반신학이나 복음적인 신학서적 저술은 드물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문장과 강연을 통해 "삼자"의 복음전도에 대한 관점을 추리해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더욱 정확한 이해를 위해 우리는 전통신학이나 전도학의 입장에서 평론을 내리기보다는 더욱 넓은 각도에서, 즉 중국공산당의 기독교에 대한 관점에서 그 종교정책을 이해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중국공산당의 방법론으로 중국의 종교정책의 몇 가지 중점에 대해 의논하고 또 "삼자"가 이런 정책에 적합하게 만들어낸 전도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의논하며, 마지막으로 신학관점과 입장에 대해 평론하려고 한다.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보면 그들의 반 기독교적인 전통은 그들의 반제국주의 적인 정책에서 기원되었다. 지금 중국의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태도는 4개 현대화 정책과 연관되어있다.
4개 현대화 실현을 위해 중국은 모든 인민들이 네 가지를 견지할 것을 요구한다.
1) 맑스 레닌주의 모택동 사상을 견지해야한다.
2) 무산계급독재(최근 민주독재로 고침)를 견지해야한다.
3) 공산당의 영도를 견지해야한다.
4) 사회주의 길을 견지해야한다.
그 외 중국공산당의 최고지도자들은 중국은 반드시 사회주의 단계를 거쳐서만이 공산주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과도시기, "통일전선"의 원칙적인 운영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과 원칙운용의 대전제 하에서 '삼자'의 전도에 대한 관점은 네 가지 원칙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4개 원칙은 모두 중국공산당의 종교정책에서 시작했다.
1) 반제국주의 강령에서 연장된 격리원칙
2) 당의 영도 최상으로부터 연장된 기독교인 애국의 원칙
3) 통일전선정책의 연장인 중국인민 인정의 원칙
4) 사회주의 노선의 연장인 신자와 불신자의 융합의 원칙
1. 반제국주의 격리원칙
중국공산당은 서방나라들을 제국주의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반제국주의적인 전통에 따라 "삼자"도 아주 소극적인 전도의 원칙을 만들어냈는데 바로 중국교회를 서방과 해외교회와의 직접적인 관계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다.
1.1 중국공산당의 기독교에 대한 관점
맑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는데, 그 뜻은 종교는 과학으로 해방되지 못한 무지한 인민들이 붙들고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레닌은 종교에 대해서 특히 기독교는 제국주의자들이 인민을 마취하는 아편이며 그들로 하여금 각성하여 싸우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 중국에서 반 기독교사상은 후자의 지배를 받는다.
제2차 전국대표대회(1922년 7월)를 진행한 후 중국공산당은 반종교투쟁에 종사한다. 이 투쟁은 바로 "반제국주의 투쟁"의 일부분이었다. 중국공산당은 기독교를 제국주의의 중국침략의 선봉이라 제소하였다. 그러므로 반제국주의는 바로 반기독교이다. 1922년에서 1927년의 반기독교운동에서 제일 소리 높였던 것이 바로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외국선교사를 축출하고 교육주권을 빼앗고 신도들로 하여금 외국선교회를 탈퇴하고 혁명에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압력을 피하기 위해 많은 중국교회들은 외국선교회를 탈퇴하여 자립적인 교회를 설립하였다.
1.2 삼자의 50년대와 오늘의 반응
1950년 7월 28일, "삼자" 발기인 오요종은 기독교선언 한편을 발표하였는데 그 선언의 표제는 "중국기도교가 신중국건설 중 노력의 도경"이였다. 선언의 목적은 바로 중국교회를 서방제국주의 공제 하에서 해방하려는 것이었다. 모든 기독교 지도자들이 문건에 싸인하여 이 선언의 입장을 지지함을 표시하고 서방제국주의나라들과 관계를 단절하기를 원함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삼자" 비서장 심덕용의 관점에 의하면 오요종이 "삼자"에 대한 공헌은 주로 이점을 일찍이 예견했다는 것이다.
1980년 9월, "삼자"와 기독교협회연합회의 페막식에서 조복삼은 총결을 지었는데 지난 32년 중, "삼자"는 두 가지 일을 했는데 하나는 기독교가 중국인민의 일부분이 되게 한 것이고 둘째는 기독교들이 제국주의 식민주의 수중에서 이탈한 것이다.
50년대 "삼자"는 격리목적을 위하여 중국역사에서 제국주의의 죄악을 폭로하여 중국교회에 대한 제국주의의 영향력을 제거하였다. 오늘 "삼자'는 똑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어떠한 외국선교사나 선교회의 침투를 엄격히 금지하고 그들의 이전에 중국에서 설립한 교회나 교우들과 어떠한 사역상의 접촉을 금지하며 그들은 해외화교와 화교교회들에 대해서도 똑 같이 대한다. 총체적으로 그들의 목적은 중국교회를 "제국주의"와 격리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만약 자유내왕을 허락한다면 기독교는 중국에서 또다시 "양교(洋敎)"로 취급당하고 제국주의에 의해 이용당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모든 이런 시도는 "삼자"에서 적의를 품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광훈도 여러 차례 지적하였는데 국외에서 중국으로 복음을 전하려는 거동은 오직 기독교에 부끄러움만 가져올 것이며 복음의 문을 닫아버릴 것이다. 동시에 해외에 일부사람들이 진정으로 그렇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중국교회의 전도와 교회설립의 특권을 견지하여야한다.
"삼자'지도자들은 오늘의 중국교회를 1949년 이후 제국주의 공제 하에서 해방된 것이라고 형용한다. 그리고 "교협" 부비서장 한문조는 이 이일은 "삼자"가 이룩한 것이며(한문조는 1997년후 기독교협회회장을 담임하고 있다.) 이로서 중국에서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삼자의 목전의 사명은 중국교회를 해외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하고 중국교회의 모든 사역은 중국교회에 속해야하며 중국교회는 자체의 책임과 주권이 있다. 해외인사들을 "삼자' 관방의 허가를 받기 전에는 전도와 모든 다른 활동들을 진행해서는 안 된다.
1.3 "삼자"격리정책의 해설
"삼자"가 해외인사들이 중국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막는 이런 태도는 그들의 격리정책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신학적으로 이런 선교와 그리스도의 대사명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해석하는가? 정광훈은 3가지 방면으로 변론한다.
1) 중국교회의 자주성
"복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한다."는 관념은 서방사상의 색채를 띄고 있어 인간의 본성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응당 복음에 외국적인 색채를 가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한다. 중국교회가 만약 사람들과 교통하려면 반드시 토착화를 실시해야한다. "삼자"의 중요한 사역중의 하나가 바로 중국교회의 토착화와 자주성을 증강하는 것이다.
2) 교회의 지방성
정광훈 주교의 견해에 따르면 교회의 자주성과 지방성은 아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교회의 지방성을 신약성경에서 교의중의 하나의 중요한 부분이다. 정광훈은 온 세상의 교회는 3가지 필수적인 특성이 있는데 바로 지방성, 국가성과 특수성이다. 중국교회가 그 특성을 유지하고 발휘하고 온 세계신도들의 교류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삼자"는 보호벽을 건설하여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지 않는 교류를 방지해야한다.
3) 느헤미야적인 건축과 보호
정광훈은 중국에 복음을 전하는 행동은 "삼자"의 지난 30년간의 노력의 결과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삼자"의 성과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이런 행동들을 배척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정광훈은 "삼자"를 느혜미야에 비유하는데 느혜미야는 예루살렘성을 건축할 때 한편으로 건축하고 한편으로 전쟁을 했는데 이는 외적의 침해와 방해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반제국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왜 "삼자"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해외인사들의 중국 내에서의 선교를 반대하는지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1.4 복음주의가 "삼자"격리신학에 대한 비판
목전 "삼자"가 해외에서 중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중국공산당의 '반제국주의" 전통에서 출발하였다. 1920년 교회는 제국주의와 연관이 있다고 고소되었고, 교회는 외국과의 모든 관계에서 이탈하고 결단함으로써 답변을 하였다. 이런 장기적인 격리는 중국공산당의 정책과 적합한데 바로 더욱 쉽게 중국교회를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삼자는 교회의 계속적인 고립을 요구하고 정광훈은 교회의 자주성, 지방성, 특수성에 근거하여 이런 고립정책에 신학적인 답변을 준다. 이 답변의 일부분은 그 정책상의 도리가 있으나 신약교회의 교의와는 부합되지 않는다. 주로 아래 몇 가지 관점이 있다.
1) 교회의 보편성은 중외의 자연적인 연결을 요구한다.
2) 교회의 합일성은 지체간의 영적인 은사의 나눔을 요구한다.
3) 교회의 복음성은 문화와 정치와 불신의 한계를 뛰어 넘어 복음을 전하여 만민이 주님이 제자가 되기를 요구한다.
4) 지방교회의 특수성은 복음을 전하는 특수성을 포함하지 않으며 많은 기독교의 모든 지체들이 협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다.
정광훈은 복음이 전해진 곳에 가서 전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맞는 얘기이다. 그러나 오늘날 복음은 중국의 모든 곳에 전국 13억 인민에게 전해진 것은 아니다. 동시에 '삼자"가 해외기독교인들과 국내의 독립적인 가정교회와 어떠한 영적인 연결도 금지하는데 이는 아무런 신학적 근거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자"의 대외 격리와 고립의 입장은 성경이 교회에 주는 교훈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반제국주의"종교정책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확정할 수 있다.
2 중국공산당이 지상인 기독교도 애국주의 원칙
당의 요구에 호응하여 모든 인민들이 당에 충성하게 하기 위하여 '삼자'는 기독교삼자애국주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 주목적은 사회주의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삼자"의 전도에 대한 이해도 사회주의에 충성해야한다는 영향을 받는다.
2.1 중국공산당의 영도를 견지한다.
12인민대표대회의 주요의정을 지배하고 새로운 헌법의 지도정신은 "4개 견지'이다. 그런데 중국공산당의 영도를 견지한다는 것은 "4개 견지'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다. 중국공산당이 모든 중국인민에게 충성을 요구한다면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기독교도들이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선결조건이다. 1982년 9월, 북경에서 진행된 "삼자"와 교협"확대회의에서 종교사무국국장 교연승은 "모든 애국종교조직은 응당 정치사에서 당과 정부의 영도를 받아야하며 당과 정부의 간부들도 응당 적극적으로 종교조직을 돕고 지지해야한다. 자기들이 스스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며 대신 해결해주어서는 안 된다."고 보고했다.
중국공산당의 기독교활동에 대한 영도는 당의 통전부와 국무원산하의 종교사무국을 통해 "삼자"의 지시에 하여 집행한다. 그러므로 매번 '삼자"와 "교협'에서 전국성적인 대회을 열거나 공작회을 열 때 면 통전부와 종교사무국의 고급간부들이 요청에 따라 출석하여 격려사를 하고 또 대회기간 중 그들의 강연을 공부하게 한다. 이런 사람들은 종교적인 회의에 참석하여 정부의 유관종교정책의 새로운 결정을 전하기 위해서이고 또 전국적인 정치운동의 새로운 중점을 전해가기 위해서이다. "삼자"가 이런 중요회의가 끝난 이후에 내린 결정과 정책은 늘 정부가 제창하는 정치운동의 새로운 중점을 포함하며 또 지지를 선포한다. 일반적인 기독교활동은 당이 반포한 원칙에 따라 진행하며 종교사무국의 감독을 받고 또 '삼자"의 지도자들이 집행한다. 예를 들면 최근 북경에서 진행한 "삼자"와 "교협"연합회의에서 종교사무국국장은 "삼정"을 발표했는데 "삼정(三定)"이란 교목사역에서의 3가지 규정이다.
1) 정점, 교회의 활동은 응당 지정된 지점에서 진행해야한다.
2) 정인, 지정된 교목인원에 의해 지도되어야 한다.
3) 정편, 교목사역은 반드시 정해진 구역에서만 진행해야한다.
회의가 끝난 후 지도원칙은 각성 각현에서 "전달"이 진행되고 집행되었다. 그리하여 83년 3월부터 "삼정"정책의 실행으로 인한 가정교회들과의 마찰의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2.2 삼자는 중국공산당과 사회주의를 지지한다고 선포했다.
삼자는 자원적인 기독교군중조직이라고 자칭하지만 그 지도자들은 공개적으로 그들의 애국사상을 발표하고 중국공산당과 사회주의를 지지한다. 정광훈은 이렇게 말한다. "애국주의는 우리에게 인민들이 이룩한 사회주의제도를 옹호하고 보위하고 남아있는 쓰레기를 청소하고 개진하고 완선화 하기를 요구한다." 똑같이 강문한도 중국의 기독교들은 애국적이고 그들은 중국공산당과 사회주의를 견고히 지지하고 "종교자유 방면에서 우리는 이미 정확정책을 회복하였으며 중국공산당도 관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전체국가는 사회주의 현대화의 공동목표를 위해 노력한다. 중국인은 사회주의의 시험이 아직 완선(完善)하지는 않지만 중국의 유일한 희망이다"라고 믿는다. 삼자의 지도자들은 늘 "천풍"잡지에서 기독교의 신분으로 그들은 중국공산당의 영도를 받아드리며 사회주의 제도를 지지한다고 발표한다. 그들은 오직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으며 사회주의는 인류역사사상 가장 완벽한 제도라고 주장한다.
삼자의 역할은 중국기독교인들의 애국을 영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공산당과 사회주의를 지지하며 당과 "삼자"의 지도자들은 늘 "삼자"조직의 계속적인 존재의 필요를 강조한다. "삼자"는 중국기독교인들의 당에 대한 지지를 상징하고 대표하기에 모든 "삼자"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자연히 반화, 반혁명분열주의자로 인정된다. 그리고 모든 복음적인 접촉과 중국신도들과의 접촉을 "삼자"를 통해 하지 않으면 모두 불애국 반화의 행동으로 취급한다.
2.3 애국주의와 복음전도
"삼자'의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중국공산당에 충성하는 신학변호는 지금까지 이르러 아직 완비하지는 않았고 오직 초보적 관념이나 이미 기독교도와 중국인민의 당대문화의 인정의 현상이 출현하였다. 이점은 우리가 3단계의 인정과 원칙상의 연구와 토론을 진행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기독교인의 애국표현의 2개 관념을 주의해야한다.
1) 교회는 먼저 꼭 인류를 사랑하는 교회여야 한다.
이는 정광훈이 제출한 것인데,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랑 안 에서 만이 진행이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늘의 사회주의 중국을 사랑해야한다. 특별히 국가가 현재 전력으로 인민들의 생활의 낙후한 상황을 개진하는데 있어서 교회가 먼저 지지해야 한다. 정광훈은 70년대 초기, 서방의 일부 새로운 신학개념들을 부정하면서 중국의 사회주의 개혁은 구원의 은혜이며 천국의 강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인류의 새로운 하나의 혁신이라고도 인정한다. 똑같이 그도 중국의 복음화와 사회주의 실패를 연결하는 사람들을 반대한다.
2) 교회는 인민들이 세속적인 일에 종사를 지지해야하고 이런 일들도 영적인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를 옹호하고 찬성하는 것이며 중국을 더욱 좋은 나라로 건설하는 것이다. 정광훈은 초기의 일부 중국교회 토착화의 사상가들처럼 그리스도는 문화의 조성자이지 문화의 파괴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복음주의의 평론
"삼자"의 사회주의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와 중국공산당의 영도에 대한 지지는 현재의 정황에서 가능하면 필요한 것 일수도 있다. 그러나 정권에 충성하는 것과(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것간의 선택에 대한 분별의 능력이 결핍하다. 그래서 "삼자'와 "교협"의 충성의 대상은 누구인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양자의 주권의 충돌이 있을 때 주님을 따라야하는 일에서 (예, 때를 얻으나 얻지 못하나 복음을 전해야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부정하였다.
이는 그들이 진정으로 충성하는 대상은 중국공산당이지 그리스도가 아님을 설명해준다.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는 사회에 언제나 선지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세계의 모든 곳에서 진리와 공의를 선양하는 것은 기독교회와 기독교인의 애국주의 본질이었다. 그리스도가 인류의 문화에 대해 한편으로는 은혜를 끼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심판을 하고 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가 문화의 조성자, 문화의 완성자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리스도의 문화역사에 대한 심판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역사와 문화의 주재로서 가져야할 지위를 박탈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삼자"의 잘못된 부분이다.
3. 통전정책과 인정의 원칙
당의 통일전선정책의 지도하에서 "삼자"는 일부 복음에 관한 관점, 화해와 간증을 발전시켰다. 이두가지는 "중국인민을 인정한다"은 원칙 하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3.1 통전종교정책과 "삼자"의 임무
현재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사회주의 단계에서 중국공산당의 종교에 대한 정책은 통일전선의 이론과 전술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 목적은 세 가지이다.
1) 종교가 지속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2) 종교활동에 대해서 어느 정도 용납은 하되 공제를 가한다.
3) 교인들을 연합하여 사회주의 건설을 지지하고 종교가 영향력 있는 나라들의 호감을 얻는다.
이런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당은 군중 속에서 무신론을 선전하며 교인들을 교육하여 자체적으로 종교를 버리게 하며 맑스 레닌주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사회주의건설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한다.
통전부, "삼자"와 기독교협회는 북경에서 열린 연합회의에서 이런것들을 자세히 해석하였다. 통전부 부주임 강평은 4가지 사명을 제기했는데 "삼자"와 "교협"이 기독교도들 중에서 추진하고 완성해야한다고 했다.
이 네 가지 사명은
1) 제국주의가 기독교를 이용하여 중국을 침략한 사실들을 지속적으로 폭로하고 신도들의 애국주의 사상을 제고하고 신도들로 하여금 반제국주의 운동에 참여하게 한다.
2) 당의 종교정책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당과 각급 정부를 협조하여 여러 가지 종교정책을 실행하고 정책의 선전과 실행을 잘 결합시켜 신도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다.
3) 종교의식과 종교감정상 광대한 교인들을 단결시켜야한다. 정당한 종교활동을 통하여 일부 "삼자"에 오해가 있고 이해를 잘못하는 교인들의 의심을 가셔준다.
4) 새로운 애국청년종교지도자들을 훈련시켜 그들로 하여금 당과 인민정부를 옹호하여 사회주의 길을 가며 그들을 이용하여 광대한 신도군중을 단결시킨다.
3.2 "삼자의 반응": 중국인민과의 단결
"삼자"와 기협은 당의 종교정책을 집행하는데 어떤 범위 내에서는 이미 일부성과를 얻었는데 바로 외국의 제국주의영향을 거절하고 제지하고 당의 종교정책을 전하고 신도들을 교육하여 "삼자"를 알게 하고 공동연구의 자료를 제공하고 설교집을 출판하고 더욱 많은 신학원을 개방하여 단기적인 훈련과정을 제공하는 등등이다. 그러나 그들이 중국기독교도들의 마음을 단결할 수 있는가? 이는 큰 의문이다. '삼자' '기협'의 영수들은 현재 더욱 노력을 하여 그들이 제창하고 추진하는 당의 정책에 신학적인 이론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정책의 목적이 모든 중국인민과 각 민족인민들을 단결하는 것이므로 '삼자'는 이 목적에 부합하여 기독교도는 '중국인민과의 단결은 모든 전도의 선결조건이다. 오직 기독교도들이 중국인민과 단결하여 그들과 일체가 될 때 야만이 서로의 교제가 있고 공동의 언어와 사상이 있고 이렇게 하여야만 그들은 중국인민에게 복음을 전할권리가 있다.
정광훈은 '삼자'는 이미 중국인민과 중국교회의 단결공작을 완성했으며 교회가 진정한 중국인민의 교회가 되었으며 사회주의 조국에 더욱 적합해졌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중국인민과 단결됨"을 증명하는가? 진택민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중국인민의 편에서는 것이며 사회주의조국의 편에 서는 것이며 중국인민의 공동사업을 위해 노력하여 사회주의제도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단결의 원칙이다. 조복삼은 "기독교의 단결은 바로 중국교회가 중국인민의 마음속에 뿌리내리고 중국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다. 정광훈은 한발자국 더 나아가 중국기도교도들은 사회주의의 성공을 위해 기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3.3 통전신학-말씀이 육신이 됨의 오해
신학자들이 보기에는 '삼자'의 통전신학은 말씀이 육신이 됨과 화해의 두 가지 관념에서 시작되었다. 이 두관념은 서로 연계된 것이다.
진택민은 1981년 카나다 몬테리올회의에서 강연하였는데 말씀이 육신이 됨의 관념에서 화해의 신학을 발전해냈다. 화해의 신학을 통해 전통신학의 믿음과 믿지 않음의 계선을 타파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중국기독교도들과 중국인민(비기독교인들과의 단결)을 위해 신학적 기초를 마련했다.
진씨의 이 논문은 집단을 접촉점으로 하였다. 진씨는 인간의 본질은 집단을 통해 표현되고 또 사회활동과 인간관계를 통해서만이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역사 중에서의 역사는 인류의 집단을 통해서 표현된다. 여기서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됨을 말하는데 그는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됨을 믿는데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진리이시고 우주적인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 인간의 집단 중에 거한 것이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전이 되었다. 모든 인류역사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큰 능력과 계획의 구체적 표현이 되었다. 이렇게 이 교리는 중국인에게 받아질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원사관을 주장한다. 역사는 하나의 통일체이다. 이를 세속적 역사와 구원의 역사로 나누는 것은 완전히 인위적인 것이며 억지이며 많은 사람들이 인정할 수 없게 한다.
속과 성은 절대적인 차별이 없다. 생활중의 모든 일, 모든 만남이 다 "성사"이다. 똑같이 소위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앎과 믿음, 율법과 복음, 진보와 하나님의 나라 등은 모두 연결시킬 수 있으며 통일시킬 수 있으며 하나의 정체로 만들 수 있다. 신과 사람이라는 이 두 초점을 중심으로 타원형의 신학체계가 구성이 되어 있는데 이를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를 원심으로 하고 인류사회를 원의 주위가 되는 원형체계로 개조할 수 있다. 이런 신학의 구조를 전통신학의 믿음과 불신의 차이에 응용할 때 진씨는 중국기독교도들은 이런 모순의 방해를 받지 말고 사회주의와 인민군중들의 생활의 최고 이익을 찾고 실현하는데 전력을 다해야한다고 암시한다. 그러므로 결론에서 그는 중국교회의 사명을 누룩에 비교한다. 이 누룩은 화목과 인간관계를 통하여 신의 나라을 위해 간증할 것이다.
진씨는 전통적 천주교의 주장을 반대한다. 바로 교회밖에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그는 만인구원론을 주장한다. 그는 "이상적인 교회는 이 세상의 모든 만민을 동포형제로 생각해야한다. 이전에 강조하던 교인 수를 늘이는 것을 전도의 목표로 하던 것을 지금은 중점을 교회와 인민을 관계를 완성하는 데로 옮겨왔고 신도들의 생활의 질량을 높이는 데로 옮겨왔다. 이전에 온 세상이 더럽고 나만 홀로 깨끗하다는 식의 자신의 의만 주장하는 의식은 점차 동정과 겸비, 사랑과 헌신정신으로 변하고 있다.
진씨는 교회와 일반인민간의 관계를 개진하려하고 신도들의 믿음과 생활의 품질을 제고하여 인간관계를 개진하는 관념을 교회 안에 가져오려고 한다. 진씨는 오늘의 중국교회의 사명은 바로 "화해"이다. 이전에 일반 백성들과 격리되었던 것이 지금은 응당 모든 중국인민들과 화해하여야하고, 하나님과 격리되었던 것은 하나님과 화해해야한다. 위에서 말하는 첫 번째 화해는 평면적인 화해가 아니고 종족간의 화해이며 인민과의 단결을 통해서 이루어져야한다. 그리고 "인민"이 단어는 응당 구체적이여야 하며 사회와 역사적 이중의의가 있어야하며 추상적인 철학자들이 사람에 대한 개념이 아니어야한다. 둘째로 수직적인 화해, 혹은 영적인 화해는 바로 사람과 신의 화해인데 꼭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인류의 기나긴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3.4. 통전성적인 전도학------간증식의 전도
내가 알기로는 "삼자"의 지도자들은 아직까지 전도를 제목으로 한 문장을 발표한 적이 없다. 전도에 대해 비교적 많이 말한 것은 1982년 10월 정광훈이 런던을 방문할 때 동방아프리카 연구원에서의 담화에서인데 제목은 "중국의 교회"이다. 여기서 비교적 많이 전도에 대해 말했다. 이런 편린에서 우리는 그들의 전도에 대한 개념과 이해를 수집할 수 있었다.
간단히 서술하면 아래와 같다.
1) 기독교의 주요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4대 현대화를 제고하고 모든 중국인민과 함께 4대 현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기독교도들은 역사의 주류에 헌신해야하며 주류를 떠나서 영적인 공작을 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오늘 중국교회는 4개 중요한 사명을 갖고 있는데 바로 예배, 배육, 인민의 복리에 대한 관심과 간증이다. 전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삼자"의 지도자들은 "전도'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도 있다. 심이반은 이렇게 말한다. "중국인민들이 복음을 접수하는 것이 중국교회의 기본책임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전도와 중국교회는 "삼자"창립의 원칙에서 창립한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2) 전도의 목적은 신도수의 증가가 아니라 신도를 개진하거나 개량하는 것이다.
"삼자"지도자들이 말하는 중국교회의 주요한 사역은 신자들의 생활의 품질을 제고하는 것이지 신도수의 증가가 아니며 그들은 전도는 장기성, 일반성, 지속성적인 것이며 문화안의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이 이런 과정에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한 모든 준비사역은 모두 전도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그들은 신도의 수가 계속 증가하리라고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재 있는 신도 수 만하여도 그들이 배양하기엔 벅차기 때문이다.
3) 전도는 나가서 전하는 것을 표시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20절까지 말하는 전도는 신도들의 생활과 일자리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삼자는 전도의 정상적인 장소는 신도들의 세상에서의 일자리와 거주하는 곳에서 견증하는 것이다. 땅끝까지란 바로 신도들의 거주하는 곳이다. 신도들은 자기가 거주하는 곳에서 주님을 위해 간증하고 그의 지체들을 설립해야한다. 그러므로 삼자는 성을 넘어, 현을 넘어, 문화를 넘어 하는 전도를 반대한다. '천풍'은 여러 편의 문장을 발표하여 사처에서 집회하는 농민들을 비판하였다. 문장은 이 농민들은 주의 일을 하려면 사처에서 집회를 해야하고 도처에서 주님을 간증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이로 인해 그들은 자기들의 "생산"에 지장을 주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4) 전도는 침략성적인 정형하에서 진행될 수 없으며 조용히 신도들의 참여와 생활로 진행하여야 한다. 정광훈은 우리의 출현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적인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것이 바로 전도라고 주장한다. 심이반은 이렇게 말한다. "이전에는 전도가 제국주의 침략의 엄호하에서 진행되었다. 현재의 신도들은 한 방면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한 방면으로 사람들을 사랑하여 인민들로 하여금 신도들의 이런 사랑의 표현에 의해 주 앞으로 나올 수 있게 흡인해야한다.
5) 전도의 성공은 사회주의의 실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도들의 사회건설의 참여로 달성해야한다. 사회주의 실현은 우리의 국가와 인민이 변화될 수 있게 한다. 반대로 우리의 성공의 여부는 우리가 이런 시험 중에서 인민과 단결할 수 있는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사회주의 건설에 참여하는가 하는 것이다.
3.5 복음주의의 통전신학과 전도학에 대한 비판
1) 진택민의 화해에 대한 주장은 신도와 비신도사이의 계선을 없애서 통전을 지지하는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제창하는 화해의 영역은 실제적으로 인류집단과 사회이지 그리스도안에서가 아니며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얻은 하나님과의 화해가 아니며 그리스도안에서의 사람과 사람사이의 하나됨이 아니다. 비록 그도 말씀이 육체가 됨의 개념을 응용했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는 "우주적인 그리스도"이며, 하나의 광범한 신학의 구조에 이용당했다. 이 광범한 구조 안에 신도와 비신도는 실질적으로 하나로 결합되었다. 이 신인 양점의 신학구조를 하나의 그리스도중심으로 개조할 수 있으며 인류사회로 원주가 된 원형체계로 개조할 수 있다. 그 의미는 인류사회는 화해의 영역이며 "사람 안에서"를 "그리스도안에서"로 바꾼 것이다.
진씨의 화해 신학이 죄와 십자가의 요소를 배제했으므로 그의 화해관은 어떠한 회개의 제사도 필요하지 않고 인간의 죄의 회개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야한다는 것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만약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가 아니라면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비록 "삼자"의 화해신학에서 인간과 신의 화해를 언급하지만 그러나 그것도 사람과 사람사의 방식으로 설명하며 아주 긴 인류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만 신과의 화해를 얻을 수 있다. 진씨의 화해신학은 성경중의 화해에 관한 교리를 떠나 있고 만인구원론의 착오보다 더욱 엄중하다. 이런 화해는 십자가가 없으며 부활도 없고 믿음으로 "아담에서 "그리스도안"으로의 전변의 확대도 없고 그리스도와의 연합도 없고 '그리스도안에서"가져오는 하나님과 인간의 진실한 화해도 없다.
2) 이런 정황하에서 '삼자'지도자들의 신학은 믿음과 불신을 구분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회개를 권고할 필요도 없고 불신에서 믿음으로 변화도 필요없다.
이런 교회는 신앙의 계선이 없고 사회의 군체 중에 용화되는 교회이다. 전통적인 전도관념은 전도자를 통해 주님을 믿게하여 교인수를 증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도와 비신도 사이에는 구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삼자'는 당의 지시하에 통전정책을 집행하며 신자와 비신자의 구별을 없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삼자의 이론가들은 결코 십자가의 복음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전도신학은 기실은 반(反)전도신학이다.
3) 같지 않은 삼자 신학자들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같지 않은 이론을 발표하는데 어떤 근거있고 유기적인 신학체계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동기가 사회주의 건설을 지지하는데 있다는데 동의한다. 그리고 성경의 관점을 견지하는 신도들에게 예수의 대 사명을 이행하지 않도록 권하고 있다. 그들이 공동으로 주장하는 것은 전도가 신도들의 직장에서 나타나야한다는 것이다. 그 뜻은 신도들은 그들의 삶과 일에서 그리스도를 간증하라는 것인데 이는 삼자관원들이 중국복음사역에서 허락하는 최대의 한도이다. 신약성경에서 신도들이 좋은 행위로 주의 이름을 전하라는 가르침도 있지만 먼저 믿음과 불신사이에 하나의 계선을 긋고 복음은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흑암의 나라"를 떠나 "광명의 나라"로 요청한다. 사실 성경 안에는 기타의 제목들도 있다 예를 들면 일반은혜와 롬13장 등인데 우리는 이를 가져다 신자와 비신자사이에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공동의 입장으로 발전 시킬 수 있다. 복음의 본질과 회개와 믿음을 희생하여 통전의 요구를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
4. 사회주의 융합의 원칙
4개 견지에서 네 번 째 부분은 사회주의 길을 가는 것을 견지하는 것이다. 이는 삼자는 반드시 신도들을 교육하여 그들로 하여금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하여야하면 그들을 이 길로 인도하여야 한다. 이는 하나의 정치적인 임무이다. 그러나 많은 신도들이 그들이 직장에서 이미 충분한 정치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응당 그들에게 영적인 양식을 공급해야지 정치교육을 진행해서는 안 된다. 삼자의 지도자들은 이런 사상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최근 그들은 중국특색이 있는 교회의 신학을 발전하기 시작했고 이런 신학을 통해 기독교의 공작과 사회주의 길을 하나로 융합시킨다.
20년대 초 기독교를 중국문화에 융합시키는 것이 줄곧 중국토착화교회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오늘 사회주의 중국에서 이런 융합은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융합이며 이로 인해 산생되는 중국교회의 신학은 최종적으로 "삼자"의 중국교회의 사명에 대한 인식을 결정하게 한다. 삼자가 만들어낸 융합은 기본상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서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융합이다.
이런 융합의 요소들은 어떤 것들인가? 하나의 진정한 중국교회는 어떻게 발전해야하는가? 아래 몇 개 부분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4.1 삼자는 기독교가 사회주의 중국에 더욱 적합하게 하기 위하여 중국 기독교신학은 응당 부단히 서방 반동적 신학사상을 제거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삼자는 현재 그들의 50년대에 발전시키신 신학토론을 검토하고 그들의 현재의 신학을 당시이 기초 위에 설립하고 있다. 이런 서방신학사상의 거침돌을 제거하고 새로운 신학제도를 창조하는 것은 중국의 환경에 더욱 적합한 방법이며 이미 '자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심이반은 "자전"은 자체로 나가서 전한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을 전하는 가이다. 그러므로 나가서 전하기전에 내용을 확정지어야한다.
현재까지 서방의 반동사상의 영향을 제거하고 나가서 전해야할 새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아무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와 중국인민, 중국사회, 중국문화를 융합시키는 신학방법은 아주 분명한 것이다.
4.2 "삼자"와"기협'은 사회주의 조국에 적합한 중국교회를 만들려고 한다.
그것은 목회, 배양, 숭배, 집회, 기도, 교회생활, 영성기초와 성장, 신도생활과 사역은 모두 신 중국과 삼자의 요구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삼자애국운동특색이 있는 신 교회는 낡은 기초 위에서 건설되고 있다.
우리는 잠시 기다려보련다. 도대체 어떤 새로운 중국신학과 새로운 중국특색의 교회가 나타날지를, 또 어떻게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융합시킬 것인지를. 우리는 현재 삼자가 큰 고생을 하는 것을 주의 깊게 보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신학은 성경신학자와 성경신학의 시험을 받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
1. 우리는 삼자의 전도에 대한 관점을 이해하려면 먼저 사회주의가 그들에게 주는 압력과 제한을 이해해야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모든 행동은 반드시 중국공산당의 종교와 종교정책에 대한 이해를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2. 삼자는 현재까지 아직도 하나의 완전한 전도에 대한 신학이 없다. 그러나 일부 삼자 지도자들은 말씀이 육신이 된 개념을 이용하여 새로운 화해와 단결의 신학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신학을 이용하여 통일전선정책에 신학적인 변호를 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을 계획을 위해 하나의 가짜 신학기초를 만들어 해외에서 국내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막고 국내신도들도 복음을 전하지 않게 권면하려고 시도한다.
3. 정치적인 이유로 인하여 타협신학을 발전시켜 신도들이 정치압력 앞에서 타협하게 만든다. 이 양자는 구별이 되는데 전자는 신학을 하나의 도구로 하나의 종교 권위적인 이론 기초로 보고 있고 신도들로 하여금 당의 종교정책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당의 이익을 위해서 섬기게 한다. 후자는 압력 하에서 정부의 요구에 신학적인 양보와 용납을 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현재 중국대륙의 현황에 대해서 전자가 후자보다 더욱 우세를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출처: 中國與 福音季刊 2001年 創刊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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