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선교민족의 뿌리와 사명

[스크랩] 한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 깨닫기 (3)

수호천사1 2008. 10. 9. 11:22

한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 발견하기 (3)
이것이 한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앞의 글에서 오랫동안 적성국으로 상종하지 않았던 중국과 우리나라가 수교를 맺어 국교가 정상화된 것은 하나님이 큰 뜻이었음이라고 썼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중국과 우리나라가 서로 수교를 맺어 국교가 정상화 되기 전까지 한국교회에는 기독교 역사에 유례없는 부흥과 성장을, 조선족들에게는 한민족의 순수한 옛 정서와 우리 글과 말을 잃어버리지 않고 간직하게 하셨다고 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숨은 섭리였다고 했다.

그렇다.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뜻은 일관되게 진행되어 왔다. 시대마다 일어났던 크고 작은 일들은 하나님의 계획하신 섭리가운데 궁극적 뜻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구체적인 시나리오였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이를 일찍부터 깨달았어야 했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따라 하나님께 붙들리바된 교회가 되었어야 했었다. 그랬더라면 1990년대 초까지 누렸던 한국교회의 큰 부흥과 성령의 충만한 역사는 오늘까지 간직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아니, 그 보다도 더 크고 놀랍게 부흥되고, 더 충만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그렇지 못했다. 엄청난 교회의 부흥과 성장으로 자만에 빠지고 말았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외형적인 모습은 비대해지기 시작했고, 내용은 점점 빈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하나님의 이 엄청난 섭리를 바르게 깨닫지 못함에서 비롯되어진 일이었다. 한국교회의 성장이 뒷걸음치기 시작하고, 한국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게 됨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음이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세계교회의 부러움과 존경을 받았던 한국교회는, 그만 속빈 강정과 같이 되어 세계교회로부터 은밀한 비웃음고 조롱을 받게 될 지경에 처했음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교회는 한 때 다가올 21세기에는 세계선교를 주도하게 될 교회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었다. 또한 한국교회의 위상은 앞으로 환태평양시대가 되면서 더욱 더 세계교회에 우뚝서게 되어 선교의 장자국(長子國)이 될 것이라고 큰소리치기도 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같이 호언장담하며 큰소리 치던 입들은 굳게 닫히고 말았다. 모두들 굳게 침묵할 뿐이다. 왜냐하면 세계교회는 이제 더 이상 한국교회의 큰 소리에 귀기우리거나 믿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 때 공허한 우울주의에 빠졌던 큰소리쳤던 한국교회의 위상은 흔들리게 되었고, 스스로 울리는 괭과리에 지나지 않았었음을 반증하는 결과가 낳고 말았다.

필자의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반론을 취하는 이들이 있으리라 여긴다. 한국교회에 대한 지나친 혹평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반론을 존중한다. 또한 필자의 이러한 견해가 절대적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으리라. 어찌보면 주관적인 현재적 깨달음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깨달음이 그릇된 판단에 기초한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반증에 의하거나, 스스로의 더 깊은 묵상 속에서 깨닫게 된다면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이 견해를 취소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필자의 견해를 이해하는 이들은 점점 많아질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에 우리나라와 중국은 오랫동안 굳게 빗장을 걸어 닫아두었던 활짝 열기 시작했다. 이 때에 비로소 양국간의 국교는 정상화되었고, 교역은 나날이 늘어 갔다. 이제 경제적인 측면으로만 보더라도 한국에 있어서 중국은 최대의 시장으로 부상되었다. 머지 않아 미국과 일본을 능가하는 수출입 대상국으로 바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 날이 결코 오래지 않아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만큼 한국과 중국의 교류는 지금보다 더 활발하게 이루어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교류는 인적, 물적 교류를 넘어 모든 관계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음을 발견해야 한다. 인류의 구속사적 역사 속에서 일관되게 진행되어진 하나님의 큰 뜻과 섭리가 중국과 우리나라의 관계속에서도 이루어져야 할 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을 위해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역할은 지대하며, 이를 위해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양국간의 국교가 정상화되었음을 한국교회는 깊이 깨달아야 한다. 물론 한국교회는 중국선교를 위한 영적 부담감을 많이 가지고 있다. 따라서 많은 선교사들을 현지에 파송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깨닫고 취한 일이 아니었음이 하나 둘 현지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그렇다. 한국교회는 주님의 뜻에 대하여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중국은 현재 정치적인 입장으로 인해 외국인 선교사들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의 신분은 비공식적이어야 하며 비공개적이어야 한다. 적법한 절차에 따른 공식적인 활동은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 중국을 찾는 이들이 가장 먼저 접근하게 되는 이들은 중국의 조선족이었다. 그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철저하게 준비해 오신 뜻에 부합된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에 진출한 이들은 엄청난 시행착오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한 시행착오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중국에 바람직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나쁜 영향력을 끼치는 위태로운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분명히 조선족들을 만나게 됨은 하나님께서 주신 절호의 기회였다. 오랜 세월동안 헤어졌던 동족간의 만남을 통해 [서쪽]을 향한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일로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룰 수 있는 기회로 활용될 수 있는 기회임이 틀림 없었다. 그러나 기회는 소실되어가고 있었다. 오랫만에 만난 동족간의 교류는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따라 작용하지 않고 서로의 불편한 만남으로 냉각되어 가기 시작했음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헤어졌던 한민족의 만남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서로가 서로를 크게 신뢰하여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동역자가 된 것이 아니라 점점 그들의 관계는 불신적 관계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상호 의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그들이, 서로 이질적인 관계로 전락된채 표리부동해지 시작했다. 울리는 소리는 크게 났지만 내실 있는 열매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엄청난 인력과 재원이 투자되었지만, 결코 효율적인 투자가 아니라 비생산적인 낭비가 되고 말았다.

왜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한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바르게 간파하지 못한 결과 때문이었다. 120년 전에 동시적으로 한편에는 [서쪽]을 향한 복음의 땅끝으로 전달되어지는 과정의 한 정점으로 복음을 받아 놀라운 부흥과 성장을 경험하게 하셨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에 이주시켜 5세대에 걸쳐 살아가는동안 철저한 중국인으로 변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한 때문이었다. 이를 진정으로 깨달았더라면 한인과 조선족의 관계가 어떠했어야 하고, 한인과 조선족이 함께 어떤 일을 했어야 하는지 선명하게 찾을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그 결과가 결국은 불편한 관계, 불신적인 관계를 조성하게 된 원인이 되었음이다.

이런 결과의 배경은 한국교회의 내부에서부터 발생된 일이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놀라운 부흥과 성장을 경험한 한국교회는 점점 오만과 아집으로 순수함에서 멀어져가고 있었음이었다. 이것은 1970년대부터 불어오기 시작했던 한국의 불길같은 부흥의 역사는 1990년대 초에 절정을 이루더니 급격한 쇠퇴의 길로 떨어지기 있었음의 이유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교회가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했음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교회의 외형은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1990년 대 초에는 교인이 1,000여명 정도만 모여도 큰 교회라고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교인의 숫자가 많이 모이는 교회가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1,000여 명이 모이는 큰 교회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최소한 10,000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래야 비로소 큰 교회라고 여겨졌으며, 이런 교회가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한국교회의 급격한 쇠퇴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많은 한국교회들이 앞다두터 교회건물의 대형화를 추구하기 시작했음이다. 마치 유럽의 중세시대에 건축되어졌던 공룡처럼 웅장한 건물들이 하나 둘 늘어가고 있었음이었다. 문화공보부에 보고되는 교단의 교세는 해마다 늘어나 1990년 대 초까지만 해도 교단을 초월하여 한국교회의 숫자는 3만개 정도에 불과했으나 2000년 대에 이르러 5만교회시대를 선언할만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도 중요한 이유의 하나였다.

어디 그뿐이랴. 우리나라에는 신학교의 숫자도 엄청나게 많다. 정부로부터 공식 대학교로 인준된 신학대학교의 숫자도 적은 수가 아니거니와, 크고 작은 교단들마다 각기 자기 교단의 교역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신학교의 숫자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 족히 1,000개는 되리라는 것이 결코 과장으로 여겨지지 않고 있다. 이렇게 많은 신학교에서 해마다 적게는 몇 명에서 많게는 몇 백명씩 졸업생들을 끊임없이 배출내고 있다. 그들 모두가 한국교회에 흩어지거나 세계선교를 위해 세계에 흩어진다고 생각하면 한국교회의 외형적인 위상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더 성장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될 뿐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다. 한국 전체교회들의 신자 숫자는 1990년대 초의 1,200만 성도로부터 서서히 감소하여 2003년 말 현재로 800만이 조금 못될 것이라는 언론의 보도를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엄청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분명히 한국교회는 1990년 대 초에 비해 엄청나게 성장한 것으로 보여지는 한국교회의 실체가 그 반대로 엄청나게 퇴보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음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한국교회가 800만명의 신자라는 것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많은 수는 2중3중으로 각기 다른 교회에 등록된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렇게 예상할 경우에는 한국교회의 전체교인의 숫자는 불과 600만명이 겨우 넘을 뿐이라는 주장이 터무니 없는 주장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지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교회는 자기적인 실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직도 한국교회는 과거 1970년대에 시작하여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경험했던 놀라운 부흥과 성장의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한국교회의 급격한 쇠퇴에 대하여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전히 외형적으로 커져가는 한국교회의 허구에 속아 결코 한국교회는 쇠퇴할 수 없는 교회라고 믿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음이 분명하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환상의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한국교회의 급격한 쇠퇴의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왜 한국교회가 이렇게 급격히 쇠퇴하여 퇴락하게 되었는 철저한 자기해부를 통해 원인을 분석하고 그 해결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얼마 못가서 중세시대의 유럽교회가 그랬듯이 역사의 뒷길로 소리없이 사라지게 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한국교회의 급격한 쇠퇴로 퇴락하게 된 이유는 분명히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이유는 20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21세기에 이르러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한민족의 사명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채 잘 감당하지 못함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믿는다. 이는 한국교회가 그동안 하나님의 [서쪽]을 향한 땅끝까지 이르는 선교의 역할을 올바르게 감당하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음이다. 이를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중국은 우리나라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지형적인 입장에서 인류의 역사 속에 섭리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필연적 섭리는 한국교회가 중국선교를 바르게 인식하고, 바르게 감당해야 했으나 그렇지 못함이 한국교회의 급격한 쇠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여겨짐이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필자의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여겨도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라. 성경에 증거되었고, 역사적으로 확실하게 증거된 [서쪽]을 향한 복음의 땅끝으로 증거되는 일은 필연적인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견해에 대하여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필자의 상기와 같은 견해이 피력은 "한국교회의 급격하게 퇴락한 이유는 한국교회가 중국을 직접적으로 선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직접적으로 중국을 선교하는 사명을 허락하셨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한국교회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반도의 작은 땅이다. 작은 반도의 땅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이 넓고 광활한 대륙에 흩어져 살고 있는 대륙인들을 직접 상대로 선교한다는 것은 오히려 불가능할 수 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이는 결코 우리 자신을 비하시키고자 함이 아니다. 사실을 사실로 인식하자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한민족을 [서쪽]을 향한 땅끝으로 증거될 복음의 일꾼으로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이미 120년 전부터 한민족을 대거 이주시켜 중국에 자리잡고 살게 하셨고, 그들로 하여금 4,5대에 이르는 세월을 지나 중국인이 되게 하셨음의 이유와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과 성장을 경험하게 하셨음의 이유를 간파했어야 했었다. 그랬더라면 한국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시대적인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를 바르게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렇지 못했었다. 중국과 수교가 시작되면서 선교를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을 중국에 보냈다. 그들의 대부분은 동북삼성으로 보내졌다. 그곳에는 우리와 말과 글이 통하는 한민족으로 동족인 조선족들이 집거하고 있음이 가장 큰 이유였으리라. 아무튼 첫 출발은 매우 좋았다. 어쩌면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바르게 파악한 듯 싶었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드러나는 결과는 그것이 아니었다. 동북에 파송되었던 그들이나 그들을 그곳으로 파송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일들을 하거나 그 일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한국교회의 그릇된 교파주의와 교권주의를 전파하는 데 더 열을 올리고 있었다. 더 나아가 물량주의를 동원하여 오만하고 강압적인 태도로 조선족 사회를 지배할 듯이 방자하게 행하는 부끄러움을 서슴치 않고 있었음이다.

혹자는 외곡된 시각으로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를 일방적으로 매도하지 말라고 경고할지도 모른다. 참으로 선의의 경고라면 받아드린다. 얼마든지 필자의 외곡된 시각의 논리일 수도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도 행여나 잘못된 개인의 견해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 염려하는 바가 없지 않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 분명한 이유가 하나 있다. 그것은 지금이라도 한국교회가 하나님께서 21세기에 한민족을 통해 이루시고자 한국교회에 부여하신 진정한 사명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인식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더욱 충성된 교회로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일 한국교회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기대감을 회복한다면 한국교회의 실제적인 부흥은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참으로  이 시대에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역할은 엄청나다고 믿는다. 그 사영은 오직 한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서쪽]을 한한 땅끝으로 증거되어져야 할 복음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민족으로 한국교회는 같은 동족된 조선족교회와 상호적인 협력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이런 협력관계는 지금까지 이루어졌던대로 한편은 지시하는 위치이고, 다른 한편은 그 지시를 따라 복종하는 일방적인 관계가 유지되는 한 회복될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상호적으로 대등한 관계속에서 상호적으로 눈높이를 맞추어야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그동안 경험했던 부흥과 성장의 노하우를 조선족교회에 전수하면서 그들을 중국인으로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진심으로 깨닫도록 지원하는 일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피차의 관계는 회복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참으로 하나님은 복음이 [서쪽]을 향한 땅끝까지 이르는 증인됨의 사역을 위해 한국교회와 조선족교회가 손을 마주 잡고 협력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결코 한인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중국인들의 정서를 조선족을 파트너로 하여 접근한다면 얼마든지 쉽게 접근이 가능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서로의 관계는 상대방을 깊이 이해할 때 증진된다. 또한 상대방을 이해하려면 상대방의 정서와 기질을 용납할 때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럴찐대 어찌 반도인이 대국인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를 고대의 사대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사고라고 생각하지 말라. 사람이 처한 환경적 여건은 그들의 기질을 다양하게 변화시키고 있음을 인정하라는 것일 뿐이다. 생각해 보라. 상대방을 이해하지 않고야 어찌 그와 더불어 좋은 선린의 관계를 맺고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인과 조선족의 선린적 관계를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해 오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중국에 조선족들을 이주시키사 그들을 중국인 되게 하심은 하나님이 뜻을 이루는데 소용되는 아주 엄청난 비밀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한인과 조선족은 서로 화합하여 동질성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동족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동반해야 할 동역자임을 서로가 인식하고 받아드리며 존중해야 한다. 한인들에게 주신 특별한 은총과 선물을 조선족들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조선족들은 조선족대로 하나님께서 섭리중에 중국에 이민시키사 중국인이 되게 하신 은총을 한국교회와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상호적인 공유만이 진정한 동역의 관계를 가질 수 있으며, 동역적 관계를 이루지 않는 한 진정한 화합은 불가능함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화합되지 않은 이들을 통해서는 아무 역사도 이루실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기대하심을 끝까지 따르지 못한다면 사명의 촛대를 옮기실 수도 있음을 경고로 받아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하신다. 그러나 그 뜻은 반드시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시어 이루심을 믿으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지 않으시고는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 물론 하나님은 얼마든지 직접 일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직접 일을 이루시지 않고 사람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심은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실 수밖에 없으셨던 이유가 여기에 있음도 깨달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가 겸허하게 그분의 뜻에 순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은 결코 오만방자한 사람을 사용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어 주께서 허락하시는 상대방과 마음을 같이하여 동역할 수 있는 사람을 사용하신다. 예수님께서 승천산에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 속에서 "증인이 되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증인이 되리라"고 하심의 이유를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자기적인 노력으로 이루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사로잡혀 이루어지는 삶에 대하여 말씀하심을 잊지 말라.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발견하게 된다면 중국의 조선족과 어떻게 동역해야 할 것인지를 깨닫게 되리라고 믿는다. 결코 우월주의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 낮아지며 주님께 사로잡혀 쓰임받는 선한 도구로서의 철저한 존재인식 속에 하나님은 크게 역사하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한민족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기대하심에 어긋남이 없이 성취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 하나님은 오늘도 한민족을 향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기다리고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

베이징에서 石一進 씀
20040625

출처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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