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선교민족의 뿌리와 사명

[스크랩] 한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 깨닫기 (1)

수호천사1 2008. 10. 9. 11:20

한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 깨닫기 (1)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과 성장의 이유를 찾으라.

한국교회는 1990년 대 초까지 가장 놀랍게 부흥되어 성장하였다. 한국교회의 이런 성장은 기독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로 기록될 사건이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지 불과 100여년만에 이루워진 부흥과 성장은 기네스북에 올려도 무방할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한국의 어느 곳을 가든지 그곳에는 교회당이 있다. 지붕에 세워진 빨깐 십자가 불빛은 한국의 밤하늘을 환상적으로 장식하곤 한다. 참으로 세계교회가 감탄을 했었다.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을 세계교회는 놀라워하며 부러워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여의도광장에서 대형집회가 자주 열렸다. 열릴 때마다 여의도광장은 한국교회의 성도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었다.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으려고 구름처럼 몰려드는 그들은 분명히 한국교회의 소망이기도 했었다. 이런 한국교회의 놀라운 모습들을 세계교회는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정말 그랬다. 어쩌면 한국교회가 불과 선교 100주년만에 일궈낸 기적임이 틀림없었다. 이런 기적에 의해 한국교회는 세계교회 속에서 자꾸만 위상이 높아지고 있었다. 많은 세계교회들이 한국교회의 성장비결을 배우려고 한국을 찾기도 했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놀랍도록 부흥되어 성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교회의 일부 탁월한 지도자들의 리더쉽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한민족이 가지고 있는 정서적인 뛰어난 종교심의 열정이 만들어 낸 열매일까? 그러나 이런 것들은 아무래도 생각해도 적법한 이유가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도대체 한국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성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한민족들은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의 백성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민족들이 살고 있는 나라는 동방의 한 작은 나라에 지나지 않는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조그만 땅 한반도가 한민족들이 조상대대로 터전을 삼고 살아왔던 땅이다. 그러면서도 한민족의 자존심을 대단했다. 그런 자존심은 한때 외곡된 민족적 자긍심으로 나타나 서양의 발달된 선진문화를 거부하는 쇄국정책을 펼쳤던 적이 있기도 했었다. 따라서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복음을 받아드린 것도 약 100여년 이상이나 늦었었다. 그런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무섭게 성장했다.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음이다. 과연 우리나라의 그 무엇이 한국교회를 이렇게 변하게 만든 것일까?

많은 학자들은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에 대하여 분석하고 연구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발표했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또 다른 학자는 저렇게. 그들의 분석과 연구의 결과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를 찾았음을 밝히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연구내용은 다양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되었다. 그 첫째는 한민족의 필연적 정서가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과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로 하여금 그렇게 되도록 도와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다. 과연 옳바른 결론이었다. 한민족의 종교적인 정서는 다른 나라의 종교적인 정서에 비해 월등하게 발달된 것만은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금상첨화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도와주셨다는 사실은 정녕 올바른 결론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확실하게 확인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 앞서 발표된 한국교회가 성장된 두 가지 이유는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얼마든지 당신의 뜻하시는대로 변화시키실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크게 부흥시키켜 성장하게 하시려고 한민족들의 정서를 오래전부터 종교적인 열정을 가지도록 발달시키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하나님께서는 유독 한국교회에 교회의 역사상 가장 큰 부흥과 성장을 허락하셨는가?"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복음주의 나라들도 일찌기 경험하지 못한 크고 놀라운 부흥과 성장을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숨은 큰 뜻이 있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숨은 그 어떤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100년 이상 늦게 전해진 복음이 그 위상을 높이 드러내게 된 이유를 발견해야 한다.

과연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크게 부흥시키신 근본 뜻은 무엇일까? 한국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은 이를 깊이 연구했다. 따라서 그들은 "한국교회에 크고 놀라운 사명이 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선택하셨고, 한국교회는 그 사명을 가당해야 한다"는 말도 한다. "21세기에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크게 사용하시고자 하시는 뜻이 분명히 있다"라는 것이다. 그럼데도 불구하고 저들이 말하는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사용하시고자 하시는 방법"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추상적이거나, 각양각색의 주장들이 난무할 뿐이었다.

과연 그럴까? 한국교회를 크게 부흥시키신 하나님의 뜻은 다양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은 자신의 깨달음을 실천하고자 부단히 노력해 왔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그들이 말하는 것에도 "과연 그럴 수 있다"라고 공감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석연치 않음이 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며 한국교회들이 펼치는 많은 사역들은 통일되지 못한채 혼맥상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질서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결코 혼란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일관성 있고, 통일적인 질서가 존재한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한국교회를 크게 부흥시키신 하나님의 뜻을 나름대로 찾아 실천하려는 개체적인 활동의 혼맥상을 바라보며 마음은 자꾸만 답답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딱히 "무엇"이라고 집어낼 수 없으면서도 "글쎄"라는 회의만 일어나는 이유는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크게 부흥시켜 성장하게 하신 진정한 이유를 찾기 위해 더 깊이 묵상하며 찾아야 한다. 역사 속에서 변함없이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역사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변함이 없이 일관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위해서도 질서를 따라 조금씩 진행하고 계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현재도 진행하고 계시는 역사의 과정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크게 부흥시키사 성장하게 하신 진정한 뜻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참으로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지금도 그 뜻을 이루시고자 변함없이 운행하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지금부터 약 10여년 전에 중국과 러시아 등 북방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중국의 동북삼성과 러시아의 연해주 일역을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많은 우리의 동족들을 만났다. 그들은 중국에서는 조선족으로, 러시아에서는 고려인으로 살고 있었다. 120여년 전부터 한반도를 떠나 이주하여 살기 시작한 한민족의 후예들이었다. 오랫동안 한반도를 떠나 살고 있는 그들은 아직도 우리 말과 글을 간직하며 살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들 속에서 신앙의 뜨거운 열기를 발견하였다. 한국교회에서 느끼는 그런 신앙의 열기가 아니었다. 더 순수하고, 더 뜨겁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적으로 이루어진 신앙이 아니라 과거 무신론의 무서운 강압정치시대를 겪어오면서 다져진 신앙의 뿌리가 있었음을 발견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왜 하나님은 이들을 남의 나라에 이주시켜 그 나라 백성이 되게 하셨을까?" "왜 이들은 오랜 세월을 이방의 땅에서 살면서 우리 말과 글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일까?" 궁굼증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점점 생각은 미궁으로 빠져들었고 결국 미스테리라는 결론이 유일한 궁여지책이었다.

그런 후 여러 해가 지나면서 중국과 러시아에 한민족이 이주하게 됨은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교회를 놀랍게 부흥시켜 성장케 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깊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음도 깨닫게 되었다. 그랬다. 중국과 러시아, 특히 중국에 조선족을 이주시키심과 한국교회의 엄청난 부흥에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물론 필자의 이러한 깨달음은 불변의 진리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 단지 주관적인 깨달음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를 관장하시어 운행하신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아 "필연"이라고 믿어질 수 밖에 없었다.

자. 이제 한국교회의 부흥과 조선족의 중국이주가 가지는 상관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기로 하자. 먼저 한국교회의 부흥에 대한 단편적인 이유를 먼저 살펴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단편적인 이유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한민족을 향한 필연적인 하나님의 뜻을 깊이 있게 상고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1990년 대 초까지 놀랍게 부흥되어 성장했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주신 한 가지 이유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역사하신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말씀을 한국교회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심이었다. 이 일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일관되게 계속하여 진행되어진 일이었다. 또한 이 일은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쉬지 않고 반복되어 진행되어질 일이기도 하다.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서쪽]을 향한 땅끝으로 복음이 증거되게 하는 일이다. 20세기가 끝날 때쯤, 하나님은 한국교회가 이 역할을 바르게 감당하기를 원하셨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은 바로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기회였음이다. 이 역할은 다가올 21세기에도 계속되어야 할 것으로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아주 중요한 역할이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동일하시다.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사람들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부단히 주관해 오셨다.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지금까지 한결같으셨다. 어떤 경우에도 변용되거나 바뀐적이 없었다. 항상 [서쪽]을 향한 땅끝으로 복음이 증거되는 역사는 이미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기록되어진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제 한국교회가 이 일을 계승하기를 원하셨고, 이를 위해 하나님은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과 성장을 선물로 안겨주심이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질서는 창조때부터 분명하게 나타났었다. 그러한 하나님의 질서는 한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인류를 사랑의 대상으로 만드신 하나님은 인류의 조상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곁을 떠날 때부터 그들을 다시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뜻을 세우셨었다. 그것은 [서쪽]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시고 계셨다. 따라서 [서쪽]을 향한 하나님의 일관된 질서의 운행은 이 땅에 오셨던 주께서 마지막 남기신 당부의 말씀에서 절정을 이루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께서 이 땅에서 마지막 남기신 당부의 말씀을 기억하는가?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후에 승천산에서 제자들을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만남을 가지셨다. 그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 내용으로 중요한 당부의 말씀을 남기셨다. 첫째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는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행1:4)는 이유때문이었다. 다음으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두 가지 당부하심에는 현저한 차이점이 있다. 첫 번째 당부하심은 한시적으로 시행할 것을 요구하심이었고, 두 번째 당부하시은 지속적으로 시행되어야 할 요구였다. 첫 번째 당부에서 주님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시며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시한을 정하심이었고, 두 번째 당부는 그 일이 이루어진 후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당부하심이었다. 따라서 두 번째의 당부하심은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음이었다.

우리는 주님의 두 번째 당부의 말씀에서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심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되라"와 "되리라"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즉 "되라"는 것은 자기적 의지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되리라"는 것은 자기적인 의지와는 무관하게 행동해 질 것을 암시하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복음의 증인은 내가 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되게 하심으로 되는 것 일뿐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주님의 일을 하려면, 먼저 자신의 의지적인 헌신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간구하며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고 성경은 약속하며 증거하고 있다. 문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후의 일이다. 이 때부터 성도는 성령에 사로잡혀 살게 된다. 더 이상 자신의 의지적인 헌신에 의한 삶을 살지 않는다. 오직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을 향하여 주님의 증인으로 진출할 수 밖에 없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필연적인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놀라운 부흥과 성장을 허락하신 진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20세기의 마지막 시대에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여 21세기에 온전히 사용하기를 원하셨음이었다. 일관되게 한 방향으로 계속되어진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기 위해 마땅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이 때를 위해 하나님은 120여 전부터 준비해 오셨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준비하심은 조선족의 중국이민사와도 맞물려 있음이었다. 그러므로 변함없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조용히 따라야 했었다. 자신의 의지를 포함하지 않고 순수한 열정과 철저한 순종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렇지 못했다. 어떤 특정한 집단의 의지와 결단, 또는 한 개인의 특별한 자발적 헌신의 욕구가 드려짐으로 작용을 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는 한국교회의 외곡된 열정이 하나님의 전적인 이끄심에는 조용히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것처럼 착각을 일으켰음이었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집단의 이기적인 목표나 특정한 개인의 목표가 하나님의 질서적인 섭리와는 상관없는 사역을 열정적으로 펼치고 있음이었다. 결국은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를 관장해 오신 질서의 하나님께서 세우신 뜻이 방해받기에 이르는 어리석은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 사실을 한국교회는 충심으로 자각해야만 했었다.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과 성장이 둔화되어지기 시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이었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정신 차려야 한다. 하나님의 질서적인 대 섭리에 겸허하게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에 주신 절대적인 과업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전방위적인 세계선교도 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과업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오직 한민족에게 부여하시고자 120여 년전부터 진행해 오셨던, 아니 그 훨씬 오래전부터 준비하셔서 한민족에게 맡기시고자 하신 근본 뜻을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찾아야 한다. 이것만이 한국교회가 다시 중흥될 수 있는 비결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원하시는대로 사로잡히는 한국교회가 되지 않으면 한국교회에는 더 이상 소망이 없음의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결코 중단될 수 없는 필연적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의 의지와 뜻은 과감하게 내려 놓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중단되지 않게 하라. 이것이 한국교회의 감당해야 할 절대절명의 사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회를 놓치기 전에 빨리 회복해야 함이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당면과제임도 잊지 말아야 한다.

베이징에서 石一進 씀
20040623

출처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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