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중국지식인이 기독교를 대하는 태도와 인식
중국 지식인들은 지난 백 년 동안의 정치적 변동을 경험하는 가운데 기독교를 대할 때마다 정치와의 갈둥으로 인하여 진정한 대화와 인식을 갖추지 못하였다. 지식인들이 냉정하고도 이지적인 태도로 기독교를 인식하게 된 때는 아마 5.4시대와 80년대의 시기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 두 시기는 중국문화에 대해서 전반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점이 있지만, 지식인들이 기독교를 대하는 태도와 인식은 현저한 차이가 있다.
중국 지식인들은 사회에서 줄곧 선각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사회, 문화의 건설 사업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올 발휘하였다. 따라서 막중한 책엄을 지니고 있는 지식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취하고 있는 태도는 기독교의 발전과 퇴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현대 중국 지식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와 인식을 소개함으로써 일반인들의 관 섭과 주의를 환기하고자 한다.
五.四지식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
1916년 康有爲는 재차 글올 올려 孔敎를 설립하여 국교로 삼아 문화 및 사회질서를 유 지해야 한다고 제창하였다. 그의 제의는 즉시 蔡元培, 陳獨秀, 易白沙, 吳虞 등과 같은 지식인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고, 아울러 孔敎를 토론하고 기타 종교를 토론하는 데까지 발전되어, 당시의 지식인들이 기타 종교에 대한 의견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胡適은 不朽로서 종교를 대신하였고, 蔡元培는 美育으로서 종교를 대신할 것을 제의하였고, 吳稚暉는 사회주의로서 종교를 대신하고자 하였다. 朱執信은 심지어 선동적인 “耶穌是什麼東西"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1920-21년 사이에 소년중국학회에서는 ”종교와 현대사회는 서로 용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한 차례 광범위한 토론올 전개하였고, 아울러 관계된 내용을 연속 삼회로 <少年中'國〉에 연재하였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일반적으로 종교는 불합리성, 비과학성, 미신올 고취하는 것이 무지몽매한 시대의 산물이며 사회의 진보를 방해하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아울러 그들은 종교가 과학, 예술 그리고 인문정신으로 대치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지식인들은 종교가 “사상을 억압하고, 개성을 속박하며, 진취성을 저해함으로써 사회에 대해서 오직 해로움만 주고 이익이 없으며, 도리어 사회진보의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들은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 아니며 인류의 미래에는 종교가 설 땅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1923년 과학과 인생관 논쟁이 전개되었을 때, 종교문제가 다시 제기되어 토론되었는데, 논쟁결과 몇몇 지식인들이 마음 속으로 과학을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지식인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좋지 못한 복잡한 감정올 지니고 있기 쉽다. 기독교는 군함, 포화, 불평동조약과 어깨를 나란히 한채 중국으로 들어왔으며, 기독교가 중국에서 향유한 특권과 관민사이에서 야기한 충돌은 청말 이래의 많은 지식인들로 하여금 민족주의와 문화주의에 기초하여 기독교를 반대하게 하였다.
그러나 5.4 시기의 지식인들은 민족감정올 벗어던지고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로써 기독교를 평가하였다. 총괄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두 가지 표준으로 기독교를 평가하였다.
1. 이성.과학에 합당한가?
2. 중국이 부강해지는 목표를 실현하는데 도웅이 되는 가?
결과적으로 기독교 교리가 과학이성에 부합하지 않으며, 용도적인 면에서 ?때도 중국의 부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단지 과학과 민주만이 중국올 혹암과 무지함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신문화 운동의 지도자들, 가령 진독수, 호적, 오추휘, 소년중국학회 구성 원들은 모두 과학주의자였다. 그런데 그들에게 있어 한 가지 모순된 사실은 기독교 문명의 산물인 과학과 민주는 용호하면서도 기독교는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현대 지식인들이 보는 기독교
49년 신중국이 성립되자 공산당의 지도아래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중국인들 가운데 당원은 종교신앙을 가질 수 없었고, 지식인들은 마르크스 사상의 영향을 받아 유물론적인 관점으로 우주, 인생의 모든 현상을 해석하였다.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고, 사회진보와 계급투쟁에 대해서 결코 도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혁명정서를 약화 시킨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79년 이후의 개혁개방 물결에 따라서, 서방사상이 휩쓸려 들어와 점차 개방되면서 80년대의 지식인들은 5.4 시기의 지식인들에 비하여 종교의 가치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그들이 종교에 대해 갖는 태도에 있어, 몇 가지 방면의 현저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 하였다.
종교의 가치를 인정
80년대의 지식인들은 종교의 사회, 문화에 대한 적극적 공헌을 인정하였고, 종교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여서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구호는 더이상 보편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종교의 윤리도덕 내용이 사회주의 사회에 있어서 긍정적인 도움올 준다고 생각하였다.
1985년 상해사회과학원의 蕭志恬은 “試論我國宗敎同社會主義社會協調問題”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종교와 사회주의를 대립시키려는 논조를 극력 반대하면서 말했다. “어떤 신자을은 나라를 사랑하고, 법올 잘 지키고 매우 진취적이펴, 당의 교육외에도 동일한 종교신앙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지식인들이 종교와 역사문화의 연관성을 주시하게 되었다. 그들은 종교가 사회발전을 방해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문화릎 더욱 풍부하게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그들은 어떤 민족의 문학, 시가, 미술, 음악.., 심지어 철학, 도덕, 사회풍속, 생활방식의 발전적 역사에 이르기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시작부터 종교와 혼연일체이며, 이후에도 상호침투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만약 종교를 문화연구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 거부한다면 이는 자기의 시야를 제한하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오랫동안 경제로써 사회발전의 유일한 동력을 삼았던 경제결정론 관점에서 벗어나 종교가 세계를 구성하는 세 층면(문명의 물질생산. 조직제도와 사상관념)과 상호보완의 관계가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만약 인간과 세계를 연구하려고 한다면 종교를 연구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려고 한다연, 반드시 가지각색의 인생관과 세계판을 연구해야 하는데, 그 중에 이러한 정신적인 내세관념이 포함되어 있고, 자아를 초월하여 초월자와 화해일치하려는 욕망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선교사의 공헌을 인정
지식인들은 개방적인 태도로써 종교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해서도 깊은 인식과 연구를 하게 되었다. 개혁개방의 완화된 분위기 아래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대립된 국면은 점차 완화되었고, 기독교도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침략 무기라는 외투를 벗어버리고 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 었다
또한 과거 십여 년 간 지식층이 가지고 있던 기독교 인식에 다방면의 길이 열렸다. 뿐만 아니라. 國務院의 간부들의 기독교 이해를 돕기위해 개설한 교육반외에도, 일부 省市자치구의 사회과학원파 고등 교육기관에서 종교연구기구(즉, 상해, 사천, 운남, 신강 둥)를 건립하였다.
중국 사회과학원 연구생부에서는 각각 1978년과 1983년 부터 석사와 박사학위의 기독교 연구생을 모집하기 시작 하였으며, 북경대학 철학과에서도 1982년부터 기독교 연구생을 모집하고 있다. 그 외에도, 많은 기독교 연구 논저와 역서가 출판되어 서방 문화사조를 소개할 때 그 내용 속에 기독교가 많이 언급되었 다. 이 때문에 지식인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객관적인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감정이나 주관에 의한 평론에 치우치지 않게 되었다.
중국 기독교사를 평가하는 가운데, 지식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가장 분명하게 반영해주는 것은, 이 전에는 서양 선교사가 중국에 와서 선교한 것은 문화침략이 거나 혹은 자본주의적 식민활동이라는 지식인들의 인식이 강렬했으나, 최근 십년간 지식인들의 기독교 선교활동에 대한 평가가 크게 바뀌어졌다는 것이다. 耶蘇會없 전도사가 중국에 온 것에 대한 평가를 보아도, “당시 자본주의 식민지 활동의 한 조직 성분이다”라고 생각하는 의견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중국과 서양 사이에 문화교류를 촉진하여, 역사상 중요한 영향을 남겼다”라고 인정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회의 전도자가 中西문화교류에 중대한 작용 즉“중국올 위하여 많은 과학인재를 양성하였다”는 점올 강조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예수회 전도자가 중국에서 선교한 공로를 인정하게 되었고, 그 신앙 범위가 정당한 선교활동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초기 식민주의 침략과도 무관하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河j陽〉의 작자들은 利馬竇가 중국에서 선교한 것에 대해서, 과거 상당 기간 동안 그를 “서방문화 침략의 도구”로 취급한 것은 불공평하다고 평가하였다. 중국에서는 과거에 지겸(인명)이나 구마라십(인명)과 같은 인도 전도자에 대해서는 높은 지위를 내려주면서 어째서 이러한 “西方高僧”에 대해서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가 ?
이것은 아마 두번째 외래 문화의 충격에 대해서, 중국은 이미 과거 漢唐과 같은 기상과 아량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선교사의 중국 선교활동에 때해서 과거 학술계에서는, 그들이 종사한 활동을 총칭하여 문화침략으로 보았는데, 최근 학자들은 선교사의 구성원이 매우 복잡하고 배경 또한 달라서 문화침략이라는 단어로 선교사의 모든 활동을 개괄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지 않다고 말한다. 게다가 문화사상과 학술 영역 가운데 본래 침략과 반침략이라는 말은 없으며, 문화침략이라는 용어를 제기한 저변에는 중국 문화에 대한 國粹思想과 中體西用의 보수경향이 깔려있는 것으로, 중서문화 교류와 세계조류를 무시함으로써, 전세계적인 의식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선교사가 서양학문을 전파한 것과 그 영향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 이견이 존재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는 다음과 같이 선교사의 공헌을 긍정하고 있는 점도 있다. 선교활동이 중국인들로 하여금 근대과학을 알게하고, 특별히 교회학생들이 중국근대 역사 전진을 추진하는 사회역량의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다는 점이다.
선교사의 문화활동의 추진과 영향력으로 인하여, 중국은 최초의 근대과학체계, 근대신문, 출판체계, 근대교육체계의 모형올 건립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중국의 근대화운동올 촉진하고, 봉건적인 중국이 자본주의의 발전궤도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긍정적 역할을 했읍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지식인들이 기독교를 보는 태도와 평가는 개혁개방 이전에 비하여 현저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기독교가 서방문화에 끼친 공헌을 인정한다.
5.4시대 지식인들이 서양사상을 옹호하면서 기독교를 거부하였다면. 80년대의 지식인들은 일반적으로 기독교와 서양문화와의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서양문화는 기독교 문화라고 말 할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 사상이 유럽의 문화, 철학 그리고 심리의 각 방면에 침투하고 있고, 그 영향력이 현재까지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서양문명의 변천과정을 광범위하게 또한 다양하개 이해하려면 기독교를 반드시 연구해야 한다. 劉小風과 許紀霖은 서양학문에는 두 가지 전통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하나는 고대회랍이고, 하나는 히브리로서, 서양학문은 이 두 종류의 문화가 흔합되어 있는데, 애석하게도 근대 사상가들이 서양학문을 연구함에 있어 오랫동안 히브라의 전통을(기독교정신의 전통) 소홀히 함으로써 하나의 심각한 편차를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 결과는 피해를 입었 다 하지 않더라도 역시 애석한 일이다.
<宗敎與世界>총서의 편집자인 何光滬는 기독교사상에 대해서 칭찬을 보내고 있는데 <現代基督敎思想>의 중역본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上書가 몇년 전에 번역되었올 때 머릿속에 다음과 같은 한 마디가 떠올랐다.“이처럼 풍성하고도 깊은 사상 앞에서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는 또한 <紅樓夢> 가운데 買府의 연회의 풍성함으로써 기독교 사상의 풍성함을 거지가 연회의 자리에 앉아서“단지 고개를 숙이고 얻어 먹느라고, 어디 말할 여유가 있겠는가?"라고 비유하고 있다.
즉, 기독교가 唐대부터 중국에 전파된 이래로 평민들이 성대한 연회에 자리하지 못하고 줄곧 보잘 것 없는 식사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개탄하면서, 이 때문에 기독교의 진미는 결쿄 내보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송에서 청에 이르기까지 사상통제가 점차 엄격해지는 환경하에서, 그 대부분의 기간 동안 자유스럽게 진리를 드러낼 수 없었고, 이후에는 서방 식민지 확장의 의미가 섞이고, 또한 태평천국 지도자의 봉기적 명분이라는 외투를 쓰기도 하였으나, 민국 이래로 그 본래의 맛올 식별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많지 않았다.
何光滬는 〈基督敎與文化>의 중역본 서문에서 기독교는 서양 문화의 神이라고 평가하 면서 “만일 서양철학을 공부하면서 그 속의 기독교를 무시한다면, 이는 그 모양은 알지만 그 정신을 모르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독자들이 반드시 종교를 믿지는 않을지라도 종교가 문화 속에 끼친 영향과 작용에 대해서 이해해야 하며, 종교가 문화를 이해하는관건임을 강조하 였다.
기독교를 참조하여 중국 전통문화를 비판한다.
현대의 지식인들은 기독교가 서양사회의 제도, 문화의 근원임올 인정할 뿐만 아니라, 중국 현대화과정 가운데 기독교가 무시할 수 없는 작용을 발휘하였음올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기독교 사상을 참조로 하여, 중국 전통 문화의 심층으로 파고들어가, 비판과 반성을 시도하고, 중국전통문화의 심층으로 파고들어가 비판과 반성을 시도하고, 중국 전통문화의 결점과 약점을 도출해 내었다.
山東大學 중문과 강사인 高旭東은 〈生命之樹與知識之樹>, <孔子精神與基督精神>에서 중서문화의 차이를 비교하면서, 서양문화를 참고로 하여 중국문화를 반성하고 중국문화운명의 미래를 예견한다. 서양은 회랍과 기독정신의 영향 아래, 지식의 나무를 선택하고, 과학기술과 개척정신올 육성하였다. 반대로 중국은 유교, 불교, 도교의 영향아래 생명의 나무를 선 택하여, 안락을 향유하고 지식을 추구하는데 필요한 인내를 포기함으로써, 과학이 낙후되고, 결과적으로 제국주의 침략과 민족생존의 위협에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불굴의 인내정신으로서 고난을 헤쳐나가는 민족 정신의 결핍이라는 결과를 가져다 준 것이다. 이것이 바로 十年浩劫(문화대혁명에 의한 10년 간의 대재난)이 생겼던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하고있다.
반봉건 전통에 힘올 쏟아 ‘全般西化’를 주장한 지식인 劉嘵波와 서방 문예이론, 미학, 신학의 연구에 힘올 쏟았 던 지식인 劉小風은 모두 기독교 사상을 참조로 하여 중국 유가 전통의 인생관을 비판하였다.
그들은 「人格萬能王義」전통의 영향으로 인하여 중국이 수천 년 봉건통치를 유지하긴 하였으나, 지금까지도 여전히 자유, 민주적 정신을 펼쳐내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
劉嘵波는 89년에 <中國知識分子與政治>. <狂妄必遭天責>의 두 편올 발표하였는데, 여기에서 중국 봉건 독단 통치가 유지되어 온 원인은, 주로 중국 전통 문화가 人格全能意識올 표방한 것에 있다고 분석하였다. 그는 이러한 ‘사람에 대해 긍정적으로는 人格狂盲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인격의 無所不知, 無所不能을 절대적으로 믿고, 자신의 결점과 한계를 무시한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통치자의 自我無限化를 형성하였고, 도덕인격으로서 정치제도를 대신하고 제도상의 개혁을 시도하지 않게 되었다. 유효파는 서방 사상의 참조 아래, 도덕인격만능론의 치명적 문제는 사람들에게 착오에 대해서 반성능력올 결핍하게 하고, 자아비판 정신을 무디게 한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중국인은 고난 후에도 여전히 둔감해 있는데 반해, 서방인의 원죄감은 그들로 하여금 항상 내면 세계의 죄악, 연약함, 죄책감올 직면하게 한다. 중국인의‘樂感’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내면 진실올 직시하지 못하게 하여, 중국 지식인들은 여태껏 인류나 자신이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올 인식하지 못하였다. 서양인들에게는 절대적인 하나님이 있어서 참회나 속죄를 할 수 있으나, 중국인에게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여태껏 참회나 속죄를 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유효파는 서양사상의 참조 아래 크게 잘못하고도 자각하지 않고, 망 령되이 행동하고도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중국문화의 치명상이라고 지적하였다. 류소풍은〈拯救與逍遙>, <走上十字架上的眞理〉라는 책에서, 需家 人性觀의 영향으로인하여 세 가지 방면의 문제가 나타났다고 지적하였다.
(1) 유가의 人性自足, 천인합일사상, 무턱대고 거만하게 행동하게 하며, 天命올 자처하여 天行道를 대신하고 인간의 죄악을 무시함으로써 역사상의 모든 재난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2) 인간의 존재근거에 대해 집과 국가를 가치본위로 삼음으로써 인간의 개체 인격올 박탈하였다.
(3) 초경험의 가치를 배제한 후에, 반성과 비판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이상 세 방면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것이 중국 봉건 사회가 길어진 원인이 되었다. 유소풍은, 기독교의 인성관이 비로소 사람에게 합리적인 지위를 부여하고, 잘난체 하게하지 않으며, 개체인격의 독립가치를 인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유지하여 준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기독교는 젤대적이고 초월적인 하나님이 가치근원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 정권에 대해서 비판올 전개할 수있다.
게다가 유소풍은 인간의 독립가치와 존엄을 인정하고, 현존 제도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 이 두 가지 특징이 바로 민주정치 건립의 기초가 된다는 점도 인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을 중심으로 해야만이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질 수 있고, 인류의 계약이 비로소 진정한 약속과 보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오직 기독교 정신만이 민주실현의 가능성올 보장할 수 있다고 보았다.
89년 학생민주화 운동과 밀 접한 관계가 있는 지식인들은 기독교가 민주와 불가분의 관 계가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遠志明은 TV 드라마인 <河陽>의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일찍이 없던 학생운동에 참여한 바가 있고, 후에 해외로 망명하였다. 미국국회 조찬회의에 한 차례 참가한 후에, 그는 기독교 사상에 대해서 더욱 깊은 인상을 갖게 되었다.
그는“人治와 法i治, 尊制와 민주”사이의 정치제도의 배후에는 다른 문화 연원이 숨겨져 있으며, 민주와 기독교 신앙은 和諧一致라는 사살올 발견하였다. 민주제도와 인권 이념의 성립 기반이 되는 것은“하나님이 영원한 정의로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리 박혀 있으며, 민주, 인권, 평등의 힘의 원천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사람에 대한 罪性과 한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독단의 뿌리이고, 사람의 죄성과 한계를 까닫는 것이 민주의 기 원”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중국 지식인들이 민주제도를 위하여 투쟁함에 있어서, 만약 기독교의 초월적 신앙을 기초로 하지 않고, 또 이런 깊고 방대한 종교 정서가 없다연,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았으면 있을수록 민주로부터는 더 멀리 떠나 있게 된다.”그는 현재 중국의 민주화 과정과 기독교의 대대적인 발전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董眞海도 민주정치와 기독교 신앙의 밀접한 관계를 갈이 지적하고 있다. 그는 89년 중국 학생 민주운동을 지켜본 후, 학생 지도자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해외에서 전개하고 있는 민주운동이 현재 곤경에 직연하고있는상황에 대해, “운동권 인사들은 민주정치와 기독교의 내재 관계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해외 민주운동의 곤경은 주로 인간성의 약점에 비롯되고 있다. 즉 민주운동의 지도자들이 아직 진정한 민주풍토를 양성하지 못하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아 분쟁을 조성하고 있다.
동진해는 민주운동의 달성은 삼권분립의 민주정치제도를 건립하는 것 외에도, 민주 정치가 지니고 있는 심오한 정신기초를 깊이 연구해야 하며, 인간성의 기본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실행가능한 방법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동진해는 기독교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수 있다고 깊이 믿고 있기 때문에 “서양 세계에서 생활하고 있는 해외 민주운동의 지도자들이 만약 서양문화와 정치 주류의 초석이요 골간인 기독교(성경)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어찌 대륙 백성들에게 서양사상을 전할 자격이 있겠으며, 또한 정신 역량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라고 강조하고 있다.
맺음말
이상의 소개를 통하여 현대 지식인들이 객관적인 태도로써 기독교를 인식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기독교의 서양문화에 대한 공헌올 인정했으며 선교활동이 중국사회에 끼친 공헌올 인정하고 있고, 아울러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 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중국 전통문화의 심충구조를 해부하면서 그 결정과 부족을 비판하고 있다.
기독교는 중국문화 변혁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고, 지식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호감과 문화인 크리스천 집단이 출현함에 따라서, 아직까지 싹트지 않고 있는 능력이 장래 중국 본토의 복음화와 중국문화의 재건에 끼칠 영향은 전작하기 곤란할 정도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모리슨(1007) 이전에 기독교는 이미 세 차례 중국에 전해졌으나, 모두 결실을 맺지 못하였고, 정권이나 정책의 변화에 따라 바람과 구름처렴 흩어졌으니, 이 모든게 중국문화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원인이다. 현재 격동의 시기를 맞이하여 중국문화가 새로이 출구를 찾으려고 할 때에, 중국 지식인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새로운” 이해와 체험을 하고 있다. 크리스천과 지식인들, 특히 신자인 지식인들이 역사의 기회플 포착하고, 미래의 중국문화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고, 기독교가 중국땅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함께 분투해 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中國與敎會 97기」 중에서)
번역 안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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