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鄧小平) 시대와 중국 기독교
1982년 9월 1일, 중국공산당은 베이징에서 <제12대 전국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대회의 주제는 ‘사회주의 현대화건설’의 새로운 국면을 창조하자는 것이었다. 이 대회에서 덩샤오핑은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임명되었고, 새로 증설된 중앙고문위원회 주임으로 취임하였다. 이로써 덩샤오핑은 명실공이 군사위원회의 주석과 함께 대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그의 ‘사회주의 현대화건설’이라는 개방정책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에 따라 중국교회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번 호에서는 덩샤오핑 시대에 중국정부의 종교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와 정책을 살펴보고, 기독교가 이러한 변화 속에서 어떻게 적응하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중국 정치의 대전환
<제12대 전국대표회의> 개막식에서 덩샤오핑은 ‘경제건설’은 80년대 중국 국민의 3대 중요임무 중의 하나임을 강조하고 ‘4대견지(四大堅持)’를 제창하여 앞으로 당의 활동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가 제창한 ‘4대견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행정과 정치체제를 개혁하여 간부의 혁명화(革命化) · 년소화(年少化) · 지식화(知識化) · 전문화(專門化)를 추구한다. 둘째, 사회주의 정신문명을 건설한다. 셋째, 경제와 기타 모든 영역에서 사회주의를 파괴하는 범죄활동을 제거한다. 넷째, 당풍과 조직을 정돈한다.
본 회의에서는 후야오방(胡耀邦)을 총서기에 임명하고, 덩샤오핑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임명하였다. 또 중앙고문위원회와 중앙기율검사위원회를 증설하고 덩(鄧)과 천윈(陳雲)이 각각 주임으로 취임하였다.
1983년 10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2대 제2차 전국대표회의>에서 덩(鄧)은 ‘정신오염 제거운동’ 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정신오염은 자산계급 사상과 계급투쟁, 낙후된 부패사상들을 전파하는 행위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업과 공산당의 지도층에 대한 불신임을 전파하는 행위이다.” 라고 정신오염에 대해 정의를 내리면서 그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였다. 이로써 중국공산당은 ‘정신오염 제거운동’ 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당원들의 숙청운동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덩샤오핑의 지도체제를 강화하기 시작한다.
신헌법(新憲法) 제정
1982년 4월 27일 중국정부는 신헌법 초안을 발표하여 여론을 살핀 후, 그해 11월에 <제5대 전국인민대회 제5차 회의>를 개최하고 새로운 헌법을 정식 통과시켰다. 신헌법은 모두 138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래와 같은 특색을 가지고 있다.
1. 이 헌법은 공산당 집권 후 최초로 발표 된 1954년의 헌법 정신과 방향을 회복하고자 한다.
특히 4인방에 의해 제정된 1975년의 헌법과 화궈펑(華國鋒)에 의해 반포된 1978년의 헌법에는 ‘무산계급 집권’을 강조하였으나, 신헌법은 ‘인민민주 집권’ 이라고 수정하고 있다. 이는 1966년 이전의 공인(工人) 영도를 기초로 한 ‘인민민주 집권’의 헌법정신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개혁파들의 확고한 의지를 알 수 있다. ‘인민민주 집권’은 사유재산을 일부 인정하고, 법률 앞에 모든 인민들이 평등하다는 특색이 있다.
2. 신헌법에서는 통전정책(通戰政策)을 재강조하고, 당외 인사들의 광범위한 정치참여를 요구한다.
이와 같은 정책의 변화 속에서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고 <정치협상회의>의 역할이 중시되며, <인민대회>의 권력이 한층 확충된다.
3. 신헌법 서문에서는 중국공산당의 ‘4대견지’를 합법화하였다.
‘4대견지’는 신헙법의 중심사상으로 중국 내에 자본주의 사회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모든 의지를 소멸시키고, 공산당을 제외한 어떠한 정치단체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덩샤오핑 시대의 강력한 사회주의 정치노선을 분명히 하고 있다.
4. 신헌법 제2장 35조에 인민의 종교 자유문제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 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은 종교 신앙의 자유가 있다. 어떠한 국가의 기관, 사회단체와 개인도 인민들의 종교 신앙을 강요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종교의 신자와 불신자를 차별해서도 안 된다. 국가는 정상적인 종교 활동을 보호해야 하며, 어느 한사람도 종교를 이용하여 반혁명 활동을 하거나,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인민들의 건강을 해치며, 국가 교육제도를 방해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종교단체와 종교 활동은 외국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정부가 국민의 신앙과 불신앙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는 것은 과거의 헌법에서도 언급하고 있었지만, 신헌법에서는 정부가 정상적인 종교 활동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 특이하다. 소위 말하는 정상적인 종교 활동은 정부에 등록된 8개 종교단체나, 그 부속기관에서 정부의 허가를 받은 활동을 말한다. 정부에 등록된 8개 종교단체는 중국불교협회(1953), 중국이슬람교협회(1953), 중국도교협회(1954), 중국 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1954), 중국 기독교협회(1980), 중국천주교애국협회(1957), 중국천주교교무위원회(1980), 중국천주교주교단(1980) 이다.
중국정부는 신헌법 35조에 대해 당기관지『홍기(紅旗)』를 통해 상술하고 애국종교단체의 국가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아래와 같이 강조하고 있다.
1. 종교와 당을 협조하여 종교자유 정책을 실행한다.
2. 신도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도와 애국사상과 사회주의 의식을 강화한다.
3. 신도들을 조직하고 지도하여 정상적인 종교 활동에 참여하도록 한다.
이 문장에서 “모든 종교단체는 당과 정부의 지도를 받아야 하고, 모든 종교 활동도 종교사무국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명백히 강조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종교 활동은 반드시 애국종교단체가 관리하는 장소에서 진행해야 하며, 이것을 어겼을 경우 ‘반혁명’ 활동으로 간주함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삼자회> 와 <천주교애국회>의 허가를 받지 못한 가정교회는 모두 불법 종교 활동으로 간주되었다.
중국정부는 비공개로 당 간부들에게 배포된 내부문서에서 아래의 8가지 비정상적인 종교 활동을 규정하고 있었다.
1.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에게 종교사상을 관수하거나, 혹은 어린이를 종교 활동 참석을 강요하는 행위,
2. 정치, 교육과 결혼 등을 간섭하는 행위,
3. 생산 활동이나 사회질서를 방애하는 행위,
4. 헌금을 빙자하여 경제적인 착취와 사기행위, 그리고 국민 건강을 해치는 행위,
5. 회사의 재산을 이용하여 종교 활동을 하는 행위,
6. 이미 폐지된 종교의 봉건제도나 착취제도를 회복하고자 하는 행위,
7. 외국에 예물을 강요하거나 받는 행위, 그리고 홍콩과 마카오 등에서 선전 자료를 받는 행위,
8. 자유롭게 노방전도를 하는 행위.
중국공산당은『홍기』를 통해 당원들은 반드시 국외의 적대적인 종교단체들의 침투에 대응할 것과 종교단체 지도자들에게 해외교회와 종교단체들이 중국 내의 종교 활동을 간섭, 복음전파, 성경반입, 종교서적 배포 등의 활동을 저지해주도록 적극 당부하였다.
삼자교회의 대응정책
<중국 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와 <중국 기독교협회(이하 양회)>는 1982년 9월 19일부터 24일까지 베이징에서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 중국공산당 통전부 부부장 장핑(江平)과 국무원 종교사무국국장 챠오롄성(喬連升)이 참석하고 각각 연설을 발표하였다. 그 중 장핑이 발표한 연설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종교계 인사들은 단결하여 사회주의 현대화의 새로운 국면을 위해 분투하고 반드시 ‘애국통일전선’을 발전시켜야 한다.
2. ‘종교 신앙 자유정책’을 관철하되 종교 신앙 문제는 국민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에 종교는 국가의 정무나 교육 그리고 혼인문제들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
3. 삼자애국의 길을 견지하고 외국의 지배를 받지 말아야 한다. 중국 기독교의 “삼자애국운동”은 세계 각국의 기독교계와 특별히 제3세계 기독교계의 관심을 받아 국제사회에 광범한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대외우호 활동가운데 삼자의 입장을 견지하여 외국 기독교의 적대세력을 경계하고, 중국 기독교에 대한 침투와 통제를 엄격히 규제해야 한다.
4. 신도들에 대한 광범위 단결을 쟁취하고 반제국주의의 “삼자애국교육”을 강화하며, 종교정책을 선전하고 실천한다. 당과 정부를 옹호하여 사회주의 현대화를 이룩하는데 모두가 단결한다.
5. 종교 활동은 반드시 헌법과 법률을 준수하여 사회주의 신생활에 적응해야 한다. 설교내용이 사회주의의 제도와 원칙에 위배되지 않아야 한다. 종교 활동의 규모, 시간, 회수가 지나치게 확대되지 않도록 규제한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보면 중국정부의 통전정책이 종교계까지 확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모든 종교계인사들이 당과 정부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를 이룩하자고 하는 정부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회의에서 삼자회의 비서장인 천더롱(沈德溶)은 양회의 업무상 실제로 많은 결점이 존재하고 있다고 시인하였다. 그가 지적한 중요한 결함은 다음과 같다.
1. 삼자의 재교육과 교회내부의 단결에 대한 노력이 부족했다.
2. 신도들을 보살피는 목회 활동의 균형이 상실되어 모 지역에서는 신앙과 교회활동에 혼란 현상이 일어났다.
3. 각 지역 위원들과의 유대가 긴밀하지 못했다.
4. 신도와 목회자들에 대한 애국애족의 사상교육과 실례들을 수집하고 선전하는데 미흡한 점이 많았다.
9월 24일 양회의 확대회의가 끝나는 마지막 날 결의문을 채택하였는데, 결의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계속해서 삼자의 기치를 드높이고, 애국애교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덕이 되도록 평소의 목회활동과 교회생활을 더욱 심도 있게 강화하고, 특히 젊은 목회자 배양에 각별한 주의와 관심을 갖는다.
2. 전국 기독교 신도들에게 “사회주의 현대화건설”에 모두 참여 하도록 호소하고, 전 기독교가 이에 동참한다.
3. 기독교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고, 병을 고치며, 교인들의 건강을 해치고, 재산을 착취하며, 부녀들을 농간하고 민중을 미혹하며, 사회의 생산과 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행위들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중국 기독교는 그들과 완전히 교류를 단절한다.
4. 국제교류를 강화하는 동시에 해외의 반동세력들을 경계하여, 기독교의 명목으로 반화사상(反華思想)을 산포하거나 침투하려는 행위들을 제지한다.
양회의 확대회의 이후에 양회는 회의 결의내용들을 실천하기 위한 일환으로 “삼정(三定)” 정책을 채택하고, 이를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삼정”은 “정편(定片)”, “정점(定點)”, “정인(定人)” 으로, “정편”은 성직자들은 마땅히 자기가 책임지고 있는 교회에서만 종교 활동을 해야 하며, 활동 지역을 함부로 이동하거나 변경해서는 안 된다. “정점”은 모든 종교 활동과 집회는 반드시 지정된 교회와 집회 장소에서만 거행해야 한다. “정인”은 신도들의 종교 활동은 교회의 담임자나 추천을 받은 자의 책임 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 삼정정책은 국무원의 종교사무국에서도 적극 지지하여, 후에 중국정부가 종교를 관제하고 가정교회를 견제하는 중요한 표준이 되었다.
중국 기독교는 정부의 통전정책의 일환으로 정상적인 종교 활동을 적극 보호하고자 하는 상황에서 삼자교회의 영향력과 세력이 한층 증가되었다. 이 시기에 새롭게 개방된 삼자교회가 250-500개소에 이르며, 83년 말까지 100만 본의 성경을 인쇄 출판하여 신도들에게 보급할 예정이었다. 삼자교회의 기관지인『톈펑(天風)』은 기독교는 중국정부에 협조하여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소식들을 계속해서 기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헌법에 규정된 종교정책을 마땅히 옹호하고, 교회가 단결해야 하며, 미신 행위 등을 적극 배제하여,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에 이바지 하자고 호소하였다.
이러한 기사의 내용들은 삼자교회 내부보다는 가정교회에 대한 호소와 권면으로 볼 수 있다. 중국 기독교는 삼자교회와 가정교회로 분립해서는 안 되며,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를 건설하는 목표에 하나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기적을 추구하는 신앙보다는 국가와 사회에 유익이 되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결론
베이징에서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2대 전국대표회의>에서 정치 실권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사회주의 현대화건설”이라는 새로운 경제개방 정책을 적극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중국은 덩샤오핑의 체제 아래 온 국민이 단합하여 국가의 대업을 완성하자고 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중국 기독교도 새로운 정치 환경과 국민 단합의 여론이 고조되어가는 분위기속에서 가정교회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을 삼자교회에 영입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선 헌법과 당의 각종 정책에서 정상적인 종교 활동을 충분히 보장해 줄 것을 보장하고, 양회를 통해 단합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애국애족의 전제 하에 모든 중국교회가 하나가 되어 정부가 추진하는 “사회주의 현대화건설”에 참여할 것을 각 교회에 간곡히 호소하였다. 양회의 이러한 노력으로 왕쩐(王鎭)등 일부 소수 목사들이 삼자교회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삼자교회와 가정교회 사이의 오래된 오해와 갈등은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강인규/ 대만 중원대학교 교양학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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