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구약

[스크랩] 창세기 11장 원어해석

수호천사1 2018. 4. 14. 22:46

창세기 11장 원어해석



(11:1) 언어가 하나요(와예히...사파 에하트)

여기서 ‘사파’는 일차적으로 ‘입술’을 뜻한다. 직역하면, ‘그리고 하나의 입술이 있었다’이다. 언어는 의사전달의 수동적 수단일 뿐 아니라 그 안에 인간의 사고 방식과 사고의 내용까지를 규정하는 고유한 능덩적 기능까지 가진 인간들만의 고유한 문화 양식이다. 

 

말이 하나였더라(우데바림 아하딤)

이것은 ‘그리고’를 뜻하는 접속사 ‘우’와 ‘언어’로 번역되는 ‘다바르’의 복수형인 ‘데바림’, 그리고 바로 앞에서 ‘언어가 하나요’에도 나오는 ‘하나’를 의미하는 ‘에하드’의 복수형인 ‘아하딤’으로 이루어진 짧은 문장이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리고 하나들의 말들’인데, ‘하나’의 복수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동일한 말들’이 된다. 어떤 성경은 ‘동일한 어휘들’로 번역하기도 한다. 

 

(11: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와예히 뻬나쎄암 믹케뎀)

직역하면 ‘그리고 그들이 동편으로부터 떠났을 때의 일이었다’이다. 여기서 ‘옮기다’, ‘떠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나싸아’는 원래 기둥과 말뚝을 ‘빼내다’, ‘뽑아내다’, 그래서 ‘텐트를 걷어 출발하는 행위’를 표현한다. 그래서 이 단어는 한글성경에는 ‘떠나다’, ‘출발하다’, ‘발행하다’로 번역되었고, 특별히 출애굽의 여정을 설명하는데 가장 자주 등장하고 있다(민 33장에서만 42회 사용). 

‘동방으로’라고 번역된 ‘믹케뎀’은 ‘동편을 뜻하는 ’케뎀‘에 ‘~로부터’라는 뜻의 전치사 ‘민’이 결합한 형태로 ‘동편으로부터’란 뜻이다. 한글성경은 성경기자가 멀리 서서 사람들의 이주 경로를 보니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였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한글 성경은 ‘믹케뎀’을 단순한 방향으로 보고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해석하였다. 하지만 히브리 원문의 관점은 이와는 아주 다르다. 원문에서 성경 기자의 관점은 1인칭 관찰자 시점을,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중심의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케뎀’이 공간적으로는 ‘동편’을 의미하지만 시간적으로는 ‘먼 과거의 시간’, 곧 ‘옛날’, ‘태고’(시 55:20)를 의미한다. 이때는 창조의 때를 의미한다(시 74:12; 사 45:21,23). 한편 공간적으로 ‘케뎀’은 일반적인 방향을 의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특별히 본문에서와 같이 단순한 방향을 의미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이 단어는 창세기 1장에서 10장까지 모두 5회 나타나는데(2:8,14; 3:24; 4:16; 10:30) 모두가 에덴과 관계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해 동서남북, 이 모든 방향은 에덴을 중심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즉, ‘케뎀’은 에덴의 동편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케뎀’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하나님이 태초에 처음 창조하신 그 때의 에덴과 깊은 연관을 지니며 바로 그 에덴의 ‘동편’은 인간이 다시 돌아가야 할 본향의 문이 있는 곳이다. 따라서 ‘동편으로부터 떠났다’란 말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거하시는 에덴에서 동쪽으로 사람들이 멀어져 갔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당연히 에덴에서 더욱더 동쪽으로 멀어져만 가는 것이다. 

 

원어성경에서 말하는 ‘동편으로부터 떠났을 때’란 단순히 방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부터 멀어져 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단순히 공간적 거리의 멀어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멀어짐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은 결국 바벨탑을 쌓는 죄를 범하게 된 것이다. 

 

시날 평지를(비크아 뻬에레츠 쉬느아르)

‘시날’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위치한 바벨론 지역을 가리킨다. 

 

만나 거기 거류하며(와이므체우...와예쉐부)

직역하면 ‘그리고 그들은 발견했다...그리고 그들은 거하였다’이다. 원어성경은 그들이 발견한 사실과 거한 사실을 각각 독립적으로 묘사하며 그 일을 결정하고 행동에 옮긴 주체가 바로 그들 자신임을 밝혀준다. 

여기서 ‘발견하다’(‘마차)는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더불어 그 결과 ’찾아낸 것‘은 물론 ’찾아낸 것에 대하여 만족하는 것‘까지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거하다’(야솨브)의 기본 뜻인 ‘앉다’가 뒤따라 와서 삶의 안이함을 추구하는 그들의 생활 태도를 명백히 엿볼 수 있다. 

 

(11:3)서로(이쉬 엘 레에후)

직역하면 ‘저마다 그의 동료에게로’ 이다. ‘레에후’는 서로 뜻을 같이 하는 ‘동료’는 물론 사랑을 주고 받는 ‘연인’과 ‘친구’를 의미하기도 한다. 

 

견고히 굽자(웨니스레파 리스레파)

‘웨니스레파’는 ‘그리고’란 뜻의 접속사 ‘웨’와 ‘불사르다’란 뜻이 있는 ‘사라프’의 일인칭 미완료 권유형이 함해진 형태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그리고 우리들은 계속 불사르자’ 이다. 또한 ‘견고히’(리스레파)는 ‘~을 위하여’란 뜻이 있는 전치사 ‘레’와 앞서 설명한 ‘불사르다’, ‘굽다’(사라프)에서 유래하여 ‘불태움’, ‘불사름’이란 뜻이 있는 명사 ‘세레파’가 결합한 형태이다. 그래서 직역하면 ‘우리들은 불태우기 위하여 계속 불사르자’인 것이다. 바벨탑을 쌓는 데 있어 햇볕에 말린 벽돌이 아니라 불로 구워서 내구력이 매우 강한 벽돌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역청으로(웨하헤마르)

‘헤마르’는 ‘하마르’(끓이다)란 동사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아스팔트’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것은 팔레스틴의 사해 유역은 물론 바벨탑을 건설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도 상당히 많았다. 그들은 이러한 천연 아스팔트를 채취하여 끓임으로써 더욱 접착력을 높여서 바벨탑의 벽돌을 쌓는데 이용했던 것이다. 

 

(11:4)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니브네 라누 이르 우미그딸)

직역하면 ‘그리고 우리들이 우리를 위하여 한 도시 그리고 한 탑을 쌓으리라’ 이다. 하지만 접속사 ‘우’의 특별한 용법을 반영한다면, ‘한 도시 그리고 특별히 탑을 쌓으리라’ 고 ‘도시’보다는 ‘탑’이 더 강조된 문장이다.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웨로쇼 밧솨마임)

직역하면 ‘그리고 그것의 머리가 그 하늘들 안에 있게 하여’ 이다. 하늘이 복수형으로 표현된 것은 히브리인들이 하늘을 삼층천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늘에 닿게’ 하는 것은 과장법이긴 하지만, 하늘에까지 도달하려는 인간의 교만에 끝이 없음을 보여 준다.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마 11:23).

 

우리 이름을 내고(웨나아세 라누 셈)

직역하면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한 이름을 만들자’ 이다. 이는 그들이 바벨탑을 쌓은 첫 번째 이유가 자신들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함이었음을 보여 준다. 

 

흩어짐을 면하자(펜 나푸츠)

이는 바벨탐을 쌓은 두 번째 이유이다. ‘나푸츠’는 ‘산산조각나다’란 의미가 있는 ‘푸츠’의 미완료형으로서 계속하여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펜’은 ‘제거’, ‘방해’를 나타낼 때 쓰이는 말로 ‘~하지 않도록’으로 번역된다. 하나님의 언약, 즉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9:7)고 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제거하려는 시도이며, 또한 하나님 명령에 대한 방해이다. 

 

(11:5) 여호와께서 ...보려고 내려오셨더라(와예레드 예흐와 리르오트)

‘리르오트’는 ‘~하기 위하여’로 번역되는 전치사 ‘레’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세히 살피다’는 의미를 가진 ‘라아’가 결합된 형태이다. ‘강림하셨다’(야라드)란 표현은 여호와께서 인간의 눈에 보이게 직접 이 땅에 오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바벨탑과 관계된 사항들을 세밀히 살피시는 것을 실감있게 묘사하기 위한 ‘신인동형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표현이다. 위 표현은 사람의 모양과 성품과 행동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모양과 성품과 행동을 묘사하는 방법을 말한다. 

 

사람들이 건설하는(빠누 뻬네 하아담)

‘사람들’로 번역된 ‘뻬네 하아담’은 ‘그 아담의 아들들’이다. ‘노아의 아들들’로 표기하지 않고 ‘아담의 아들들’로 표기한 것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가지게 된 인간의 죄성이 홍수 이후에도 여전히 인간들 가운데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11:6)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헨 암 에하드 웨사파 아하트 레쿨람)

‘보라’(Behold)로 해석되는 ‘헨'으로 시작되지만 한글성경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그래서 직역하면 ’보라 그들 모두에게 한 족속 그리고 한 언어‘ 이다. ‘족속’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암’은 ‘합치다’, ‘같이 동여매다’란 뜻이 있는 ‘아맘’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동질성이 강한 집단’이란 의미가 강하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바벨탑을 쌓는 범죄에 동참하는 동질성도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같이 시작하였으니(웨제 하힐람 라아소트)

직역하면 ‘그리고 이것은 행하기 위한 시작이다’ 이다. 그러나 풀어서 번역하면,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하려는 것의 시작일 뿐이다’ 이다. 

 

그 하고자 하는 일을(콜 아쉐르 야제무 라아소트)

직역하면 ‘하고자 그들이 계획하는 모든 일을’ 이다. ‘하고자 하는’에 해당하는 ‘야제무’의 원형 ‘자맘’은 ‘심사숙고하다’란 뜻이 있다. 

 

막을 수 없으리로다(로 입바체르 메헴)

여기에는 ‘없으리로다’로 번역된 강한 부정어 ‘로’가 사용되었다. ‘메헴’은 ‘~로부터’를 의미하는 전치사 ‘메’와 ‘그들’을 뜻하는 3인칭 남성복수 인칭대명사 ‘헴’이 결함된 형태로서 ‘그들로부터’를 의미하는데, 한글성경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입바체르’는 ‘베어내다’, ‘울타리를 두르다’, ‘요새화 하다’와 같이 다양한 의미를 지는 ‘빠차르’의 미완료 재귀형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그들이 심사숙고하는 것이) 계속 베어내어지거나 금지되어지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11:7) 혼잡하게 하여(웨나벨라)

직역하면 ‘그리고 우리들이 혼잡하게 하자’ 이다. ‘혼잡하게 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빨랄’은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을 만들 때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는 것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되었다. ‘혼잡하게 한다’는 것은 마구 뒤섞어 구분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11:8)흩으셨으므로(와야페츠)

‘흩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푸츠’는 원래 ‘부수다’, ‘산산히 깨뜨리다’는 뜻이 있다. 

 

(11:9) 바벨이라... 혼잡하게 하셨음이라(빠벨... 빨랄)

바벨은 7절에서도 이미 ‘혼잡하게 하다’로 번역된 ‘빨랄“에 유래하였는데, ‘빨랄’이 ‘빨벨’로 바뀌었고, 이 말이 다시 축약되어 ‘빠벨’, 즉 ‘바벨’로 변화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 고대 근동의 오래된 자료를 보면, 바벨의 이름이 ‘신의 문’이란 뜻을 가진 ‘카딘기르키’로 나와 있다. 즉, 그들은 하늘에까지 닿아 신들이 있는 곳의 문에 도달하겠다는 교만한 의지를 가졌음을 반영하고 있다.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신”(고전 14:33). 

 

(11:13) 자녀를 낳았으며(와욜레드 빠님 우바노트)

직역하면 “그는 아들들 그리고 딸들을 낳게 되었다” 이다. 셀라는 에벨 외에 다른 아들들과 딸들도 낳았음이 분명하다. 

 

(11:18) 르우(레우)

‘친구’(38:12), ‘이웃’(출 11:2), ‘동포’(출 2:13) 등으로 번역되는 ‘레아’와 동일한 뜻을 갖는 이름이다. 이 이름의 뜻으로 볼 때 아마도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주변 사람들과도 화목한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11:19) 르우(레우)

‘르우’는 구약 성경에서는 창11:18, 19, 20절과 대상 1:25절에만 나오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밝히는 신약 성경에서는 눅 3:35에 또 한 번 헬라어 ‘라가우’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11:20) 스룩(세루그)

‘포도나무 싹’이란 뜻을 갖는 이름이다. 북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사루구 지역에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1:21)스룩(세루그)

‘스룩’은 나홀의 아버지로 아브라함의 증조부이다. 한편 ‘스록’이란 이름은 구약 성경에서는 오직 창11:20, 21, 22절과 대상 1:26절에만 나온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밝히는 눅 3:35에 단 한 번 ‘사룩’이란 이름으로 나온다. 

 

(11:22) 나홀(나호르)

‘거친 숨’, ‘콧김을 뿜음’이란 뜻의 이름이다. 아브라함의 형제 가운데도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진 자가 있으나 별개의 인물이다(26절). 

 

(11:23) 나홀(나호르)

스룩의 아들이며, 데라의 아비이고, 아브라함의 조부인 ‘나홀’은 구약 성경에서는 본장 창 11:22, 23, 24절과 더불어 대상 1:26에만 나온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밝히는 눅 3:34에 단 한 번 헬라어 ‘나코르’란 이름으로 나온다. 

 

(11:24) 데라(타라흐)

‘이주하다’, ‘체류하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11:25) 데라(타라흐)

나홀의 아들이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비인 데라는 구약 성경에서는 창 11:24, 25, 26,27, 28, 31절 및 수 24:2와 대상 1:26에만 나온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밝히는 눅 3:34에 단 한 번 헬라어 ‘다라’란 이름으로 나온다. 

 

(11:26) 아브람(아브람)]

‘아브람’은 ‘아비’, ‘조상’이란 의미가 있는 ‘아브’와 ‘높다’, ‘일어나다’ 등의 뜻이 있는 ‘룸’의 합성어로서, ‘높은 아버지’, 혹은 ‘존귀한 아버지’란 의미를 지닌다. 또는 ‘아버지는 높으시다’ 또는 ‘아버지는 존귀하시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이름은 후에 ‘열국의 아비’란 의미를 지니는 ‘아브라함’으로 그 이름이 바뀌어진다(17;5). 

 

나홀(나호르)

22절에 나오는 나홀과 이름은 동일하나 본절의 나홀은 그의 손자이다. 

 

하란(하란)

‘하란’은 ‘산’을 의미하는 ‘하르’에서 유래된 말로 ‘산의 사람’이란 뜻을 지닌다. 

 

(11:27) 롯(로트)

‘롯’이란 이름은 ‘가리우다’란 뜻이 있는 ‘루트’에서 유래하여 ‘숨겨진 자’, ‘애매한 자’ 등의 뜻을 갖는 것으로 추정된다. 롯은 아브라함과 동행하여 가나안에 들어왔으며(12:4, 5), 그의 후손인 모압족과 암몬족이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11:28)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알 페네 테라흐 아비우)

하란은 성경에서 살해되어 죽은 아벨을 제외하고 아비보다 먼저 죽은 아들로서는 처음 기록된 인물이다. 본문에서 ‘보다 먼저’로 번역된 ‘알페네’는 ‘~위에’란 의미가 있는 ‘알’과 ‘얼굴’이란 의미가 있는 ‘페네’의 합성어이다. 이러난 ‘알페네’는 한글 성경의 번역이 취한 바와 같이 시간적으로 앞선다는 의미도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의 면전에서’(레 10:3; 왕하 13:14)라는 의미도 있다. 

 

갈대아 우르(우르 카스띰)

‘우르’란 지명은 ‘불사르다’, ‘밝다’, ‘빛나다’는 뜻이 있는 ‘오르’에서 유래하여 ‘불’, ‘빛’이란 뜻을 지녔다. 그리고 ‘카스띰’은 ‘끼어들다’에서 유래한 말로 ‘갈대아 사람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갈대아 사람들이 살던 우르 땅’이란 의미이다.  그 이름이 ‘빛’이란 의미를 지닌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르’는 산물이 풍부하고 해상 교통과 육상 교통이 모두 발달한 고대 세계의 주요 도시이었다. 

 

(11:29) 사래(사라이)

이는 ‘지도자’, ‘통치자’ 등의 뜻이 있는 ‘사르’에 여성형 어미가 붙은 형태로 ‘공주’란 의미를 지닌다. 이로 보아 사라는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여인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사라가 ‘존귀한 아버지’란 이름의 뜻이 있는 아브라함의 이복 누이란 사실은(20;12) 사라 뿐 아니라 아브라함 가문 전체가 갈대아 우르에서 유복한 생활을 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밀가(밀르카)

‘왕’을 가리키는 ‘멜레크’에서 유래하여 ‘여왕’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나홀의 형인 하란의 딸이므로 나홀의 질녀인 동시에 아내인 셈이다. 밀가도 이복 오빠와 결혼한 사라와 마찬가지로 근친 결혼을 하였다. 후에 근친 결혼이 율법에 의해 엄격히 금지되었지만(레 18:9, 14) 당시까지는 허용되었으며 널리 행해졌다. 

 

이스가(이쓰카)

‘바라보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경계하는 자’란 이름의 뜻이 있다. 

 

(11:30) 임신하지 못하므로(아카라)

본문은 사라가 잉태조차 한 적이 없음을 밝힌다. '아카라‘는 ’뿌리를 뽑다’, ‘힘줄을 끊다’로도 번역되는 ‘아카르’에서 유래된 말로 사라에게 아이를 생산하는 능력이 전혀 없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11:31) 하란(하란)

하란은 바벨론 지역과 지중해 연안 그리고 팔레스틴과 애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북메소포타미아의 교통의 요지이며 상업의 중심지였다. 

 

(11:32) 데라는 ... 죽었더라(테라흐 ... 화야모트)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죽음을 기록함으로써 천지창조의 역사와 더불어 인간의 타락과 노아의 홍수 심판 및 홍수 이후 인간의 급속한 증가와 인종의 난어짐을 기록한 창세기 제 1부는 완전히 끝을 맺는다. 또한 11:30, “사라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는 선언도 이제까지 계속되었던 ‘족보’(톨레도트)가 완전히 절망적으로 종말을 고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다음 장은 창세기 제 2부의 시작으로서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한 구속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된다. ‘죽었더라’는 선언은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원역사’가 ‘죽었다’는 선언과 같은 의미이다.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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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왜왜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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