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필자가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허락받아 게시했습니다. 이 글에 약 90여개의 응원글이 달리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세습 목사의 변명]
(제목 그대로, ‘변명’이라는 말은 제가 생각했던 주관적 입장이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 점을 감안하시고 읽어 주시길... 이 글은 다른 사람을 향한 변명이라기 보다는 차제에 나 자신에게도 그 때의 일을 정리한다는 의미도 있다는 점을 밝혀 둔다. 글이 길어질 것 같은... 주의~!!!^^)
최근 감리교회 내에서 세습한 교회를 전수 조사한 리포트가 공개되었다. 그 안에는 내 이름도 들어있다. 그렇다. 나도 세습목사 중 한명이다. ...
최근 한국교회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촉각을 곤두세우며 바라보고 있는 어느 교회의 세습을 둘러 싼 담론을 보면서 한번쯤... 나 자신을 위한 변명의 글을 쓰고 싶었는데... 글이 길어질까 두려워서 여간해선 시작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에야 한번은 나 자신에게도 한번쯤은 나의 세습 역사에 대해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여겨져서 자판 앞에 앉았다.
아버지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 부모님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에 안양에서 교회를 개척하셨다. 당시 버려진 양계장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가마니 바닥과 창호지에 쓰여진 찬송가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그 후에 예배처소는 우리집 안방으로, 그리고 미군부대에서 사용하던 군용텐트를 집 마당에 쳐 놓고 예배드리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그 후 아버지는 목회를 시작하신 그 교회에서 30년을 목회하신 후 그 교회에서 은퇴하셨다.
아버지는 목원대학을 다니셨으나 졸업하지는 않으셨고, 젊었을 때 잠시 목회하시다가 사회에 나오셔서는 당진에서 고아원을 경영하셨고, 서울로 오셔서는 사업을 하시다가 망하셨다. 그 후 안양으로 이사와서는 어머니가 먼저 교회를 개척하셔서 1대 담임전도사로 계셨고, 그 후에 군소신학교에서 신학교 졸업을 득하신 아버님이 2대 목회자가 되셔서 교회를 섬기셨다.
아버님은 그래서 감리교회의 정회원이 못 되신 채 협동목사로 오랫동안 계시다가 은퇴를 2년 앞둔 시기에 간신히 정회원(감리교 식으로 말하자면 꼭지 떨어진 정회원)이 되셔서 안양지방에서 가장 오래 목회하셨으면서도 은퇴 전 마지막 시기에야 감리사 한번 하시고 은퇴하셨다. 그 당시의 협동목사는 목회자 세계에서 여러 가지로 인정받지 못하는 부류셨다. 그래서 설움도 많이 받으셨다는 이야기를 후에 선배 목사님들을 통해서 듣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래서 아버님은 내가 빨리 목회하기를 원하셨고, 안수도 빨리 받고 감리교회가 인정하는 연급이 빨리빨리 높아지길 그토록 원하셨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 | | ▲ 아버님이 목회하시던 모교회 |
감신대를 졸업하고 월드비전을 다니다가 성남에 꽂혀서 판자촌에서 공부방을 시작하면서 도시빈민들을 위로하는 목회를 시작했을 때에 아버님이 그토록 반대하시고 역정을 내신 이유도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큰(Big)목사가 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그랬던 아들이 13평 판자집에서 목회를 하겠다고 하니... 기가 막히셨을 법도 하다. 그래서 성남에서 개척시절, 아버지는 내게 한 푼도 지원하지 않으셨다. 나중에서야 월 5만원, 모교회에서 다른 교회들을 지원하는 금액과 같은 금액으로 새순교회를 후원해 주셨다.
새순교회 이후 서울의 교회로 부목사로 부임하여 3년차 섬길 때, 아버님은 이제 은퇴를 앞두고 계셨다. 그리고 내게 부목사로 와서 목회를 도울 것을 요청하셨다. 아버님 교회는 부목사를 둬야 하기도 하고, 또 아니기도 한 애매한 사이즈의 교회였다. 은퇴를 5년 앞둔 마당에 이제는 젊은 부목사가 와서 동역해 줘야 할 때였지만 아버님은 낯선 부목사를 두는 것에 대해 두려움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당시 주변에서 부목사와 담임목사와 갈등하는 교회도 많았고, 교회를 분열하고 따로 개척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많았기 때문이다.
아버님에게 부목 오라는 제안을 받고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그 때였던 것 같다. 당시 한국교회에서는 세습을 하는 교회들이 심심찮게 나오기 시작했고, 내가 아버지 교회의 부목사로 간다는 것은 곧 당연히 아버지 교회를 세습하러 가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버님 교회 부목사로 간다는 것 자체가 그동안 내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던 모든 삶의 신용을 잃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름대로 민중교회 운동을 하면서 기존의 교회와는 다른 새교회를 향한 꿈을 꾸어왔던 내게는 나 자신에 대한 <변절>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친구들과도 몇날 밤들을 새워가며 고민을 토로했었다. 어느 한 친구가 내게 직격탄을 날리는 조언을 해 주었다. “너는 외아들에다가 목사다. 앞으로 목사로서 아버지에게 효도할 일은 없을 것이다. 네 이미지 손상 받기 싫다고 그걸 거부한다면 너는 진짜 못된 자식이다. 아버지 은퇴하실 때까지 편하게 모시고 나중에 남들 보란 듯이 멋있게 그 교회를 나오면 될 거 아니냐?”
그 친구의 조언에 충격(?)을 먹고 모교회로 갈 것을 결심했다. 그러면서 몇가지 하나님과 약속했다. - 아버님 은퇴 후에는 절대로 아버님 교회에서 목회하지 않는다. - 절대로 아버님 은퇴 시에 내가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다. 평생 가난을 짊어지고 목회하신 아버님이 자식에게 교회 하나 물려주겠다고 평생 교회를 섬긴 것으로 폄하되지 않도록 내가 보호해 드리리라! - 나를 키워 준 모교회, 내 사랑하는 가족과 같은 분들이 계신 모교회가 든든히 서는 것을 모든 것에 우선순위로 둔다. 등등...
아버님 교회의 생활은 행복했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모교회를 떠나 30대 중반에 다시 돌아가 나를 길러주시고, 나를 가르치신 분들... 그리운 분들과 함께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정말로 행복했던 시기였고, 하나님에 내게 주신 기쁨의 선물이었던 때였다.
시간은 흘러 아버님은 은퇴하실 때가 되었다. 약속대로 나는 절대로 모교회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재차, 삼차 재확인시켜 드렸고 아버지는 결국 내게 교회를 물려 주신다는 것은 말도 못 꺼내시고 후임자를 찾으시기 시작하셨다.
아들로서 나는 아버님의 은퇴를 돕고 싶었다. 그런데 그 돕는다는 것이 다 아버님의 마음을 긁어 놓는 일이었다.
- 은퇴 후 모교회를 떠나세요. : 아버님, 생각해 보세요. 이 아들이 나중에 목회할 때에 30년동안 교회 개척하시고 은퇴하신 목사님이 떡~하니 자리를 지키고 계시면 어떻게 제가 맘껏 목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은퇴하시면 교회를 떠나셔서 그리 멀지 않은 수원의 큰매부 교회로 나가세요. - 공들여 세운 만안동산, 교회에 기증하세요. : 아버님이 사재를 털어 당진에 땅을 사셔서 <만안동산 청소년수련원>을 세우시고 매주 내려가셔서 잔디에 돋아난 풀 뜯으시고, 나무를 키우시느라 온 정성을 기울이셨는데... 아버님 생각에는 은퇴 후 그곳에 내려가셔서 수련원을 가꾸시면서 사실 꿈을 가지신 것 같았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은퇴 목사님이 그곳에 가 계시면 아무래도 모교회의 후임 목사님이 불편하실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또한 교회에 기증하시라 했다. (최근 들은 얘기지만 그곳을 교회에 기증하심으로 교회에서는 아버님에게 감사의 표시로 소정의 사례를 했다 들었다.) - 모교회로 오실 목사님을 청빙하는 일에 대해서도 장로님들에게 말씀드렸다. 아버님도, 또 장로님들도 어렴풋하게 암묵적 동의가 된 것은 오시는 목사님 교회로 내가 가는 것이었다. 그걸 알았기에 이렇게 말씀 드렸다. “모교회의 후임 목사님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 저를 완전히 배제하시고 이 교회에 오실 목사님이 좋으신 분인지만 생각하세요. 저는 어떤 교회로 가더라도 상관없으니 절대로 내가 갈 교회 생각이 후임목사님을 청빙하는 데에 변수가 되지 않도록 해 주세요.”
은퇴에 대한 아버님의 여러 가지 계획이 다 아들로 인해 틀어지고 막혔다. 아버님이 이렇게도 내게 말하기도 하셨다. “너는 아들이면서도 어쩌면 니 애비가 듣기 싫은 말만 골라서 하냐?” 당시에는 그것이 아버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었다해도 아들된 나로서는 아버님이 정말 멋있게 목회에서 은퇴하실 것을 꿈꿨고 그것을 도와 드리고 싶었다. (후에 아버님을 아는 목사님들을 가끔 만날 때마다 아버님의 은퇴를 두고 존경하고 칭찬하는 소리를 몇차례나 들을 수 있었고,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맞았다는, 불효한 내게 나름 위로가 되기도 했다.)
하나님께 기도한대로 아버님이 목회하시던 교회로 오시는 목사님 교회로 무조건 조건없이 가기로 한 결과로 이천시 면 단위에 있던 100여년의 전통이 있는 교회로 가게 되었다. 아버님도, 또 친구들도 고개를 갸우뚱 하시긴 했다. 내가 도시적 목회자 스타일인데 농촌지역의 전통있는 교회로 가는 것이 맞겠냐는 우려였다. 그러나 기도제목의 응답이라 생각했기에 정말 한치의 주저함 없이 그 교회로 가게 되었다.
목회 시작하면서 이런 약속을 하나님께 드렸었다. 어떤 형편, 어떤 상황에서든지 목회 임지에 가면 반드시 5년 이상은 목회하겠습니다. 라고... 농촌지역 교회에서 5년간 목회하다가 하나님과 약속했던 5년의 시한이 넘어가면서 속도가 느린 교회보다는 도시적 환경의 교회에서 열정을 불태우리라는 심정으로 공개청빙 광고를 보고 지금의 효성중앙교회에 부임하였다.
지금의 교회에 부임하기까지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이 참에 써 볼라 한다. 목회지를 이동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내게 주변에서 몇 차례나 이런 얘기를 들었다. 인천의 어떤 교회가 TD를 잘 섬길 수 있는 목회자를 청빙한다는 공고를 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런데 만나는 동기들마다 그 얘기를 내게 해 주는 것이었다. “정연수 목사, 딱 너를 찾는 교회더라.” 라고...
그래서 이력서 접수 마감 날...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그 당시 수술 후 병상에 있던 아내에게, “여보, 내가 이곳에 있으면 나를 불태울 수 없을 것 같으니, 나를 태워 버릴 곳으로 가려고 하니 그리 알어.” 라 말하고 마감 시간 직전 이력서를 발송했다. 이력서를 내면서도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어디 있는 교회인지, 지금은 교세가 어떤지... 정말 아무런 정보도 모르면서 원서를 냈다. 인천에 있다니까... 도시에 있는 교회이니 가서 열심히 목회만 하면 되겠지... 라는 생각이었다. 나중에 교회에 부임해 와서야 전임 담임자 이후 6개월 간이나 교회 담임자가 공석 상태였었고, 2명의 목사님들이 인사구역회에서 부임 결의가 안되어 못 오시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지금 생각해 봐도 ‘나도 참 너무했다...’ 라는 생각이 든다.
전임 목사님이 내가 이력서 낸 사실을 어찌 아시고 내게 전화를 하셨었다. 장로님들에게 내가 효성중앙교회에 청빙되도록 조언을 해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좋아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로서는 굳이 이 교회에 꼭 와야 할 필요가 100%는 아니었기에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전화 후 조금 생각한 후에 다시 전화를 드려서 말씀 드렸다.
“만일 목사님이 저를 도와 주셔서 제가 효성중앙교회에 가게 된다면 제 스스로가 하나님께서 이 교회로 나를 보내 주셨다는 확신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가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꼭 가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이 뭔가 수를 써서 교회에 부임하게 됐을 때에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괜히 왔나?’ 라는 생각이 들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보낸 곳이라면 아무리 어려워도 버티고 뚫고 나가야 하고요. 그러니 목사님이 이번 청빙 건에 아무런 도움을 안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 드렸다.
나름 후배들을 만나면서 자주 했던 이야기가 있다. “목사는 자존심으로 사는 것이다. 폼생폼사~!!! 우리는 폼에 죽고 폼에 사는거다. 호랑이는 굶어 죽어도 풀을 먹지 않는 것인데, 목사가 목사로서 가오가 죽으면 다 죽는거다.”
나는 훌륭한 목사는 못 된다. 내가 나를 너무 잘 안다. 난 멋진 목사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그나마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은 그냥 목사로서 멋있게 보이고 싶은 맘은 갖고 산다. 바리새인이라고 욕해도 할 말이 없다. 내 속에는 끊임없는 욕심이 솟아난다. 저절로 멋있게 포기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맨날 갈등하고, 또 아까워한다. 그러면서 아주 조금씩 멋있는 결정의 퍼센테이지가 늘어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1도씩이라도 간신히 방향을 틀어가고 있는 중이다.
아버지의 목회를 세습하면서 나는 아버지의 목회 정신도 세습했다. 내가 성남의 판자촌에서 목회한다고 했을 때에 완강히 거부하시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이게 다 아버지 때문입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천막치고 목회하는 것을 보았고, 우리 집이 찢어지게 가난한 것도 다 보고 배웠습니다. 그러니 내가 성남에서 목회하려고 하는 것은 다 아버지가 내게 가르치신 것이고, 그렇게 나를 키우신 것이니 아버지가 책임지세요.”
아버지는 효성중앙교회에 부임하자마자 돌아가셨다. 내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축도 한번 하시고 돌아가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도 그 후회가 들 때마다 가슴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뭉클하고 올라온다.
감리교회 세습 리포트에 내 이름도 들어갔고, 또 아버지의 이름도 그곳에 등재되었다. 나름... 아버님에 대해서 죄송스럽다. 평생 올곧게 목회하신 아버지, 협동목사로 설움도 많이 겪으셨으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으셨던 아버지, 그분의 이름이 그곳에 기재된 것이 못내 자식의 못남 때문이라 여겨져서 그 리포트에 적힌 아버지의 이름을 보면서 마음이 시렸다.
그러나.. 그 리포트는 잘 작성했다 생각한다.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일인데 작성한 목사님이 정말 많은 부담을 껴안으면서 그 일을 해냈다.
지금까지도 그런 마음이었지만... 이제 다시 한번 더 ‘빚진 마음’으로 돌아간다. 아버지 목회 덕에 나는 남들보다는 조금 더 앞선 출발점에서 목회를 하게 된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무언가 부탁해 오는 농촌교회, 개척교회의 요청에 대해 거의 거절한 적이 없다. 그것은 내 나름대로의 속죄의 마음이다. 목회 임지를 2번 이동했으니 지금의 목회는 정목사의 목회라고... 말해주는 분도 계시다. 고마운 말이지만 나는 그 ‘빚진 마음’을 잃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아버지 목회에 빚진 마음, 그리고 나의 사랑 첫 번째 교회, 새순교회의 가난했던 그분들에게 받은 사랑과 아름다운 추억에 대해 난 빚진 인생이라 생각하고 살자는 결심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쓰다 보니... 긴 글이었다.
사족 하나를 붙이고 싶다. 이 글을 홍천 시골에서 며느리와 단둘이서 교회를 지키며 목회하고 있는 아들도 읽었으면 좋겠다. 목사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어드벤티지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들이 더 고생하고 아래로부터 연단받기를 난 기대한다. 난 아들이 호랑이 새끼라 믿는다. 호랑이 새끼는 어디에 두어도 호랑이이다. 나도 기대한다. 아들이 나보다 더 훌륭한 목회자로 성장할 것을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아들에게 앞으로도 편파적으로 잘 해 주지 않으려고 애를 쓸 것이다. 아들 전도사가 잘 해낼 것이라 믿는다. 아버지 덕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밟고 지나가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혹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 계시다면... ^^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하단 인사를 드립니다. 조금 공감해 주시면 감사하겠고, 돌만 던지지 말아 주세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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