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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설교자를 위한 인문학적 성경 읽기 ?

수호천사1 2017. 2. 1. 22:32

설교자를 위한 인문학적 성경 읽기 ?

 

 

국내 인문학 열풍에 따라 성경마저도 인문학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가 말한 상품 개발에 미치는 인문학의 영향력을 소문으로 접한 이후에 일어난 일이나 인문학 열풍이 실제로 인문학의 필요를 어필하기보다는 유행으로 그치는 감이 없지 않아 씁쓸하다. 취업률에 밀려 인문학 과목들이 대학에서 자리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 역시 상품 가치로 환산되고 있다는 증거다.

인문학이 경제 생산에 기여할 때 비로소 사람들은 그것에 의미와 가치를 둔다는 말이다. 대학에서 인문학은 사라져도 인문학에 대한 대중들 관심이 높아지는 까닭은 분명 정상적인 현상은 아니다. 대중화된 인문 교양서들과 스타 강사들 때문이지 결코 인문학 자체 때문은 아니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런 식의 인문학 열풍이 점차적으로 인문학적 사고와 삶에 기여할 것을 기대하며 관심을 기울였으나, 수요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결국엔 돈을 벌기 위함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보며 만족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인문학 강의에서 우리는 인문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보다는 사람들 눈과 귀를 자극할 수 있는 예능인으로 변신한 스타 강사들만 만날 뿐이다.

인문학이 진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문학적 지식이 아니라 인문학적 물음과 대답을 얻는 사유 과정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인문학적 사고는 결코 지식을 안다고 해서 습득되지 않는다. 사실이나 현상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또 상이한 대답을 두고 전개되는 토론으로 오랜 시간을 두고 숙성되는 것이다.

 

작금의 인문학 열풍은 스타 강사들을 동원하여 인문학 지식을 나열할 뿐이다. 지식 형성 과정에서 전개되는 사고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인문학적 성경 읽기, 가능한가?

성경을 인문학적으로 읽는 것은 필요할까? 그것은 가능한 일인가? 하나님을 증거하는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앎으로써 삶의 교훈을 얻는 것을 겨냥한다. 성경은 하나님과 그분의 속성과 뜻 그리고 행위와 관련해, 곧 신학적으로 읽는 것이 마땅하다. 설교와 조직신학의 관계를 말할 때 필자는 무엇보다 신학적인 성경 읽기를 강조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인문학적 성경 읽기는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일이며 또한 기독교 신앙에 전혀 무관한 일일까? 그렇지 않다. 다른 어떤 신학 분과보다 조직신학은 인문학적 성경 읽기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문제는 양자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다.

무엇보다 설교라는 것이 청중의 공감적인 이해를 겨냥하기에 소통을 위해서라도 설교자에게 인문학적 성경 읽기는 필요하다. 성경의 세계와 청중의 세계는 너무 다르다. 시기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특히 세계관에서 차이가 심하다. 이 차이를 메꾸기 위해 청중을 성경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가장 흔한 방법이다. 각종 성경 공부는 청중이 자신의 세계와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는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왜 청중을 움직이려만 할까? 설교자는 설교를 위해, 달리 말해 두 세계의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중들이 들을 수 있도록 전하려고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사람이다. 두 세계의 차이를 극복하려 청중을 움직이기보다는 먼저 설교자 자신이 두 세계를 분별할 뿐만 아니라 상호 관계에 대한 분명한 견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교회 내 성경 공부가 불필요하다는 말로 곡해하지 말기 바란다. 설교자가 먼저 성경이 제시하는 세계와 관련해 청중과 청중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때, 강단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커진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설교자는 인간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때 두 세계의 공통점과 차이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청중 자신과 청중의 삶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그리고 인간으로서 성도들이 일상에서 마주하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다.

인간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상관관계를 통해 지혜가 더 풍성해진다는 것은 칼뱅의 지론이기도 하다. 그는 <기독교 강요> 첫 권 첫 장에서 지혜 습득은 두 가지 방향에서 이뤄진다고 보았다. 하나는 계시로 얻는 하나님 지식이고(via positiva), 다른 하나는 인간 이해다. 이어서 인간을 아는 지식은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부정의 방법(via negativa)을 통해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아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어떠한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앎으로 인간을 마주하고 있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칼뱅 전통에 따른다 하더라고 인문학적 성경 읽기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볼 수 있겠다.

 

인문학은 어떤 학문인가

인문학적 성경 읽기란 무엇일까? 먼저 인문학은 인간과 인간이 경험하는 세상에 관한 이해를 추구하는 학문이다. 전통적으로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인문학으로 여겨 왔다. 학문의 분과가 나뉘면서 인문학은 인간과 인간의 세계 경험 및 세계 이해와 관련한 모든 학문을 일컫는다.

 

과학도 세계와 인간 이해를 추구하지만 인문학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대상을 보는 관점과 사유 방식 차이 때문이다. 최근 두 학문 분야의 융합 혹은 통섭을 추구하는 연구들이 많이 진행되고 있지만, 결코 학문이 분화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통합 연구는 필요하지만 하나로 분류할 수는 없다. 영역이 너무 많이 세분되었고 또 방법론이 다르기 때문이다.

과학의 결과물을 인문학적 연구에 사용할 수 있다. 인문학적인 연구를 과학 연구에 기여하는 범위에서 사용할 수 있으며, 과학자 글이 과학뿐 아니라 인문학적인 관심을 일으킨다. 인문학자 글이 인문학자와 과학자 모두의 관심을 끌기도 하지만, 영역 구분을 무시하고 연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과학이 인문학적 사유 방식과 연구 방식을 사용한다거나, 인문학에서 과학적인 사고와 연구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같은 대상을 두고 연구를 한다 해도 방법에서 현격한 차이가 나고 또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에서도 차이가 있다.

 

인간을 연구한다 해도 인문학은 인간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말과 생각과 행동 그리고 그 결과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과학은 인간 그 자체를 연구한다. 세상에 대한 연구 관심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단순한 연구 결과물로서 지식 내용이면서 그것의 기초로 인문 사상이며 또한 방법론이다. 인문학은 사상적으로 휴머니즘을 기초로 하며, 방법적으로 합리적 사유를 매개로 하고, 사유의 대상으로 인간과 인간세계의 현상을 취한다. 결국 인문학적이라 함은 인간과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와 관련한 사유를 가리키면서 또한 사유 방식의 합리성을 추구한다.

 

성경을 인문학적으로 읽는다 함은 성경을 읽으면서 인간과 관련해 인간과 세계의 이해를 지향한다는 말이며, 이에 관한 사유에서 소통 가능한 방식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근본적으로 기독교 인간학과의 관계가 밝혀질 필요가 있는 말이긴 하다. 기독교 인간학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과 인간의 세계 경험을 아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인간학은 신학의 한 주제이기에 기본적으로 하나님 사상을 전제한다. 반면 인문학은 그렇지 않다. 인문학적 성경 읽기는 한편으로는 인문학과 신학의 대화로 볼 수 있고, 한편으로는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과 인간의 세계 경험을 성경을 매개로 이해하거나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방법으로 연구하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인문학 범위가 너무 광범위해 모든 것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인문학이 기본적으로 휴머니즘에 기반하기에 신학자로서 설교자는 비판적 관점을 놓칠 수 없다. 인문학적 성경 읽기를 위해 필요한 일은 최소한 인간과 인간의 세계 경험과 세계 이해를 위한 질문과 문제의식을 숙지하는 것이다. 이는 교양 필독 도서 등을 참조해 습득할 수 있다.

최근에는 문학과 역사와 철학 분야뿐 아니라 과학 교양까지도 권장되고 있다. 인문학적 성경 읽기를 위해 그만큼 많은 영역에 관심을 갖고 독서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인문학적 성경 읽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식 내용이 아니라 지식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토론되고 검증되었는지 그리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아는 것임을 명심하자.

 

인문학은 성경 읽기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을까? 타 학문과 신학의 관계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정당화 과정의 문제다. 타 학문의 결과들이 신학자의 관심을 유발하고 또 신학에 인용된다고 해서 신학적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신학적 지식이 되려면 신학적인 정당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신학적'이라 함은 주제가 신학적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정당화 과정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융합, 통섭 혹은 학제 간 연구가 활성화되면서 타 학문 분야 지식을 아무런 신학적 정당화 과정 없이 신학 지식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신학의 정체성을 흐리게 하고 혼합화를 유발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에 반드시 지양해야 한다.

 

'인문학적 성경 읽기'의 장단점

인문학적 성경 읽기 과정에서 포인트는 '인문학적'에 있지 않고 '성경 읽기'에 있다. 인문학적 성경 읽기는 성경을 읽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에 불과하다. 성경을 다른 관점으로, 혹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인문학적 사고와 지식과 그 영향들을 참고하는 것이지 성경을 인문학 대상으로 삼는다는 말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인문학은 하나의 질문의 형태로 모습을 갖는다. 인문학적인 사고는 인간과 인간의 세계 경험과 관련해 질문을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대답될 수 있는 질문이어야 한다. 인문학적 성경 읽기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성경에서 찾는다. 간혹 성경을 통해 질문을 제기하고, 질문을 인문학에서 찾는 경우들을 보게 된다. 특히 예화를 인용하면서 많이 실천되고 있는데, 이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인문학적 성경 읽기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과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오류이다.

사실 성경에서 제기된 질문은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이런 경우 인문학은 성경에서 유래한 복잡한 질문이 대답될 수 있는 질문으로 바뀌는 과정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럴 때 설교를 듣는 청중과 소통할 수 있다. 대답이라고 내놓은 것이 청중에게 이해될 수 없다면 허공을 치는 설교가 된다.

 

신학적 성경 읽기는 신학적인 주제와 신학사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성경을 읽는다. 이것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도 처음에는 새롭게 들리겠지만,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 온 사람에게는 식상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설교자의 인문학적 성경 읽기와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설교는 새로운 관점으로 성경과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달리 말해 인문학적 성경 읽기는 오랜 신앙생활에서 이미 익숙해져 식상하다고 여겨지는 설교에 새로운 자극일 수 있다. 전혀 다른 관점에서 성경을 조명함으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신앙에 새로운 톤을 부여할 수도 있다.

 

넓은 범위의 연구 영역과 방대한 양의 도서를 생각할 때 인문학적 성경 읽기를 강조하는 것은 설교자들에게 지나친 부담감을 안겨 주는 일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인문학적 성경 읽기는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먼저 성경 본문에서 사용된 소재와 주제에 유념하면서 시작할 수 있다.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창세기 1장을 예로 생각해 보자.

창세기 1장은 오히려 과학적 성경 읽기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고대 근동 지역 신화와 인간 이해와도 비교할 수 있다. 설교자는 이럴 때 하늘과 땅과 인간을 이해하는 고대 근동 지역 신화를 참조할 수 있다. 창조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접하게 되는데, 매우 유사한 내용을 발견할 것이다.

이들 신화와의 차이점과 유사점 비교는 창세기 본문의 독특성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창세기 기록은 다른 신화들과 왜 다를까 묻는 질문을 얻을 수 있으며, 바로 이 질문에 대해 창조론 관점에서 대답을 줄 수 있다. 이 대답을 설교 내용으로 삼아도 된다. 때로는 메시지 형성에도 참조할 수 있다.

설교 본문의 주제가 확정되면 설교자는 주제 연구를 한다. 이때 주제와 관련한 인문 서적들을 참고할 수 있다. 주제와 관련된 문제, 논점, 주장을 살펴보면서 성경 주제와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고려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성경이 대답할 수 있는 인문학적 질문을 찾거나 혹은 성경 주제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한다. 성경 질문을 인문학적 지식으로 대답하는 것은 결코 인문학적 성경 읽기가 아니다

 

최성수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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