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성경읽기라고요?
2014년 5월 9일자 모 조간신문에
어느 목사님이 쓴 '인문학적 성경읽기'란 제하의 글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글의 요지는
비기독교인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다 보면
한결 같이 기독교 교리의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며 아집적인 주장들로 인해
허심탄회한 대화나 교제를 나눌 수 없을 뿐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독불장군식의 태도에 혐오감을 느끼게 되며
급기야 상존할 수 없는 자들로 여겨져 결국 안티 기독교인의 대열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당 글을 쓰신 목사님의 생각은
작금의 기독교가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불신과 반목과 충돌로 인해 안티 기독교/기독인을 양산하기보다는
해결책의 일환으로 '인문학적 성경읽기'의 방식을 통해
상호간 성경 이해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켜 보자는 제안입니다.
그렇다면 '인문학적 성경읽기'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해당 글을 쓰신 목사님은 지면 상에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성경읽기' 앞에 놓인 '인문학적'이란 수식어를 통해
글을 쓰신 목사님이 어떤 관점으로 성경을 읽어야 할 것인 지를
충분히 암묵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문학이란 인문과학의 준말로
사전적 정의는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철학, 문학 따위 등 정신 과학의 총칭이라고 기술합니다.
한 마디로 인간의 존엄성 회복과 가치관의 증대 및 문화적 교양의 발전을 통해
이상적인 정신세계의 확립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인본주의)의 태동은
중세 서양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신본주의의 반동으로 나타난 학문이요 사상체계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이상의 관점을 고려한다면
해당 기사에서 '인문학적 성경읽기'란
성경을 성경이 자증하고 있는 영감된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로 읽음으로
기독교에 국한된 경전의 범주에 제한시키지 말고
인간 저자에 의해 기록된 도덕/윤리/철학적 도서의 관점에서 접근함으로
모든 사람들이 보편타당하게 수납해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는
명심보감 수준의 책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관점으로 이해됩니다(필자 생각).
성경을 이처럼 영감된 계시서가 아닌 인간 이성의 산물로 이해하고 수납하게 될 때
그것이 성경에 대한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이해와 공감대를 형성시킴으로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데 일조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런 결과는 장기적으로 안티 기독교/기독인의 감소와
상대적으로 기독교세의 점진적 증가를 가져오는 긍정적인 효과로 기대할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반면에 성경에 대한 인문학(이성)적 접근은
상대적으로 성경에 기록된 수 많은 이적과 기사와 언약적 말씀과 사건들의 본의가 이성적으로 재해석됨으로
성경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계시성의 결핍과 부인까지를 초래할 위험성을 아주 배제할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천상지향적이고 종말론적인 신본주의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인간의 현세적인 행복과 성공과 필요를 채우는 인본주의 신앙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상존하게 됩니다.
이런 양상은 이미 21세기 현대 교회 속에서 자유주의 신학과 신앙이라는 모습으로 현존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인본주의가 팽배되고 만연돼 있는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란 두 신앙적 명제를 두고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를 심각히 고민해야 할 시점에 서 있디고 봅니다(갈 1:10).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따르는 계시의존적인 신앙입니다(롬 10:2-3, 마 7:21-23).
인간의 뜻을 추구하는 자의적 숭배신앙이 아닙니다(마 6:33).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관의 성격은 보편타당하지 않습니다.
제한적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택자들에 국한됩니다(엡 1:4-6, 마 1:21, 요 6:37-40, 행 13:48).
이런 이유로 21세기 현대교회는 양자 택일의 기로에 서 있는 셈입니다.
과거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우상 숭배적 신앙이 만연해 있었던 아합 왕 시대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분연히 일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과 바알 중 하나를 택하라고 일갈했습니다(왕상 18:21).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삼아 약속의 땅 가나안 지경을 정복해 가는 과정에서
이제 생을 마감해할 즈음에 이른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고 선언하며 유명을 달리 했습니다.
기독교는 전 인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기초한 십자가의 복음의 공효는
모든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을만큼 능력과 효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공효가 구체적으로 미치는 대상은 '자기 백성'들에게 국한된다는 게 성경의 지적입니다(마 1:21, 요 6:37-40)
이런 이유로 복음은 선택적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복음 앞에서 인류는 믿는 자와 불신 자로 양분됩니다.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며 불신 자는 정죄를 받게 됩니다(마 16:15-16).
이상의 사실을 고려하면
모 목사님이 제안한 이성에 기초한 인문학적 성경읽기가
성경 이해에 대한 보다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불러옴으로
결과적으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에 가로막힌 오랜 반목과 불신과 혐오감의 장벽을 헐고
상호 간의 소통에 어느 정도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서로서 성경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계시적 목적(딤후 3:15, 엡 1:4-6)에
얼마나 부응할 수 있는 지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의구심을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성경은 계시서입니다.
이성이 아닌 믿음으로만 이해되고 수납되는 영적 경전입니다(담후 3:16, 벧후 1:20-21).
따라서 전인적인 믿음의 고백 여부에 따라 구원 여부가 좌우된다(요 1:12, 3:16, 5:24, 엡 2:8-9)는 사실을 고려하면
인문학적(이성적) 접근을 통해 성경이 많이 읽혀지고 이해의 공감대가 확대됨으로
혹여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해소되고 상호 소통의 장이 확대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바 복음의 본질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라는 회의적인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더구나 인문학적 성경읽기를 통해 성경을 접근하게 될 때
가장 심각하게 대두되는 문제 중 하나는
성경이 유일하게 제시하고 있는 구세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본질상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신인(神人, God-Man, 임마누엘/마 1:21-23)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라는 한 인간으로 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세인들이 이해하고 있듯이 4대 성인 중 한 사람으로서 말입니다.
계시성이 이성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성적 관점에서 신성이 배제된 인간 예수는
더 이상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할 유일한 구주의 자격을 상실하게 됩니다.
인간 예수는 제아무리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본질상 하나님 앞에서 죄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롬 3:10).
그러므로
인문학적 접근을 통해 시도된 성경읽기는
비록 독자층을 확장시키고 소통의 기회가 확대되는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라도
성경을 이성의 산물로 해석함으로 계시성이 사라지게 되고
계시성이 배제된 성경은 더 이상 구원의 지침서가 아닌
윤리/도덕/철학 교과서 수준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선의적인 방안 모색이
혹여라도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본의를 약화시키고 성경의 정체성을 왜곡시킬 수 있다면
현실적인 필요를 위해 성경이 말씀하는 본질을 쉽게 외면할 수만은 없지 않겠는지요.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sky blue
'복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오직 믿음(Sola Fide) (0) | 2017.02.01 |
---|---|
[스크랩] 설교자를 위한 인문학적 성경 읽기 ? (0) | 2017.02.01 |
[스크랩] 성경의 계시와 사람의 지혜가 혼합될 수 있는가? (0) | 2017.02.01 |
[스크랩] 영생이란 무엇인가? (0) | 2017.01.24 |
[스크랩] 교회는 종교극장이 아니다! (0) | 2017.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