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장로임기제 도입에 대한 개혁신학적 탐구

수호천사1 2016. 2. 2. 21:05

한국 장로교회와 장로직:

장로임기제 도입에 대한 개혁신학적 탐구

 

 

<한글 초록>

이 논문은 한국 장로교의 장로직제의 실체와 그것의 교회사적, 개혁신학적 여부를 타진해 본다. 특히 한국 장로교의 장로직제 나아가 장로교 치리회가 개혁신학적 혹은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제네바 교회 치리회(Consistory)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분석한다. 이상의 탐구를 통해 우리는 한국의 장로교 정치 구조가 칼빈이 시도한 치리회 제도의 정신과 얼마나 부합하지 않는지를 확인할 것이다. 장로회 제도에 대한 이러한 개혁신학적 탐구를 통해 이 글은 장로 임기제의 법제화를 요구할 것이다. 한국 장로교가 영향 받았다는 미국의 장로교에서는 이미 대부분 장로 임기제가 실시되고 있는 사실에서 우리가 계속 종신제를 유지시키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다 할 것이다. 물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장로 종신직이 시행되고는 있지만 이는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교회의 자치권을 확보하기 위한 실용적 목적에 따라 도입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가 모범을 삼기에는 논리적 근거가 희박하다. 오히려 한국의 장로 종신직은 다분히 한국 문화의 산물인 것으로 동네 ‘어른’ 장로의 복사판인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한국의 유교적 문화적 개념에 따라 한국의 장로 종신직이 유래하였다고 볼 때, 임기제로 고치는 것은 거부할 명분이 없다고 하겠다. 특히 개혁신학의 유산을 물려받은 한국 장로교로서는 칼빈의 제네바 교회 치리회 구성 목적 및 그 운영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칼빈이 제네바 교회 치리회 제도를 만든 목적 중 하나는 목사든 장로든 1인 혹은 1개 조직의 권력 집중화를 막는 것이었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위해 제네바 교회 치리회 의원 중 장로 임기를 (연임이 가능한) 1년으로 정한 것이었다. 치리회의 효율적 운용을 위해 칼빈이 장로 임기제를 실시한 것과 같이, 한국 장로교 역시 장로 임기제를 실시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이 글의 논지를 지지하는 전제 조건으로 칼빈이 제안한 바와 같은 목사의 자격과 그 지위에 대한 철저한 제도적 검증, 관리, 감독 장치 설치를 제안한다. 장로의 임기제 도입은 이와 같은 목사에 대한 제도적 견제 장치의 개설을 전제한다.

주제어: 칼빈, 교회 치리회, 장로직제, 종신직, 임기제, 한국 장로교

논문투고일:2012년6월28일. 수정투고일:2012년8얼11일. 게재확정일:2012년8월15일.

 

 

1. 서론

 

이 글은 한국 장로교의 장로직제 나아가 장로교 치리회가 개혁신학적 혹은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제네바 교회 치리회(Consistory)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한국의 장로교 정치 구조가 칼빈이 시도한 치리회 제도의 정신에 얼마나 가까운지를 평가할 것이다. 장로회 제도에 대한 이러한 개혁신학적 탐구에서 우리는 한국의 장로교가 시급히 갱신되어야 할 장로직제와 관련하여 헌법 개정을 요구할 것이다. 장로 임기제의 법제화가 그것이다.

칼빈이 제네바 교회 치리회(Consistory) 제도를 만든 목적 중 하나는 목사든 장로든 1인 혹은 1개 조직의 권력 집중화를 막는 것이었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위해 제네바 교회 치리회 의원 중 장로 임기를 1년으로 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모든 장로교 헌법은 장로를 (일반적으로 장로 피택 후 70세까지의) 종신직으로 명문화하여, 장로회가 갖는 대의 정치 이념의 실종, 이로 인한 교인의 재신임권의 원천적 봉쇄가 불가피하도록 하였다. 이는 궁극적으로 장로가 갖는 권한의 장기적 독점 체제를 합법화시킴으로써 장로의 권한 남용이 가능한 구조를 만들게 하였다. 한국의 장로교는 신자들을 조사, 감독, 출교까지 내리는 권징의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해 일반 신도들이 검증을 수시로 하도록 하는 장치를 아예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논문은 의도적으로 장로의 권위와 치리회 회원으로서의 권한을 폄하하거나 위축시키고자 작성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글의 논지를 지지하는 전제 조건으로 칼빈이 제안한 바와 같은 목사의 자격과 그 지위에 대한 철저한 제도적 검증, 관리, 감독 장치 설치를 제안한다. 앞으로 논의 할 바이지만 제네바 목사들이 제네바 교회 치리회의 검증 대상이 되어 구체적으로 권징이 가능하게 하였던 제도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장로의 임기제 도입은 이와 같은 목사에 대한 제도적 견제 장치의 개설을 전제한다. 위의 논지를 전개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한국장로교의 장로직제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이어서 칼빈의 제네바 교회 치리회를 분석한 후, 장로임기제의 개혁신학적 의의를 탐구하도록 할 것이다.

 

2. 한국 장로교의 장로직제: 비판적 평가

여기서는 한국 장로교의 두 장로직제는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의의가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한국의 장로교 정치에 영향을 미친 서구의 장로 직제를 비교하면서, 오늘의 한국 장로교 장로직제를 냉정하게 평가하고자 한다.

 

2.1. 한국 장로교의 두 장로직제와 치리회 구성

한국 장로교는 두 장로직제를 교회 헌법에 규정해 놓았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규칙』 1905년판 제3조 (직원) 2항에서 “쟝로는 두 가지니 강도함과 치리함을 겸한 쟈를 흔히 목사라 칭하고, 다만 치리만 하난 쟈를 쟝로라 하나니, 이는 셩찬에 참예하난 남자라야 되나니라”라고 명문화한 이래, 두 장로직제는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평신도 장로의 경우, 1905년판에서는 간단하게 그 직무에 관해 설명한 이후, 1922년판부터는 장로직의 기원과 권한에 관한 내용을 신설 보완하였다. 1922년판 헌법 제5장(치리장로) 제1조(장로의 설립)에서 “律法時代에 敎會를 管理하난 長老를 設立함과 같이 福音時代에도 牧師 外에 敎會를 治理하난 者를 擇立하였나니 즉 治理長老니라” 고 규정된 것이 그것이며, 이후 지금까지 위 내용은 거의 변함없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다만 1922년판 이래로 오늘날까지 장로교 교단에서는 (여러 교단으로 갈라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두 장로의 항존직, 곧 실제로는 종신직을 규정함으로써 비록 장로가 교인에 의해 선거로 선택되지만 임기제를 고려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였다. 장로의 항존직 명문화와 더불어 1930년판부터는 장로가 목사와 “동일한 권한”을 갖는 것으로 발전시켰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 측의 경우에는 다른 주요 장로교 교단과 달리 이 조항을 지금까지 거의 그대로 남겨두고 있다. 이는 한국의 유교적 계급주의가 한국인에게는 사회적 삶이었던 20세기 초에 목사와 장로의 평등적 구조를 명문화한 것이어서 더욱 인상적이라 하겠다.

아울러 한국 장로교는 치리회를 구성하여 교인을 다스리고 책벌하며 성례를 집행하도록 하였다. 1930년판부터는 교인에 대한 치리의 필요성과 더불어 치리회의 성질과 성격을 규정하여 당회는 물론 노회와 총회의 치리회를 구성하게 하고 치리가 개인이 아닌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치리회에 의해 시행된다는 것을 명시하였다. 특히 치리회의 권한이 마태복음 18:15-20에 근거하여 주어진 것이며 사도행전 15:1-32에 따른 그리스도의 법의 순종적 행위임을 밝힘으로써 치리회의 활동이 신적인 성질의 것임을 천명하였다. 다음과 같은 1930년판 장로회 헌법 제8장 4조의 내용이 이를 잘 증거한다.

교회 각 치리회는 국법상 시벌을 요하는 권이 없고 (눅12:2-14, 요 18:36), 오직 도덕과 신령상 사건에 대하여 교인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순종케 하는 것뿐이니 (행 15:1-32), 만일 불복하거나 부법한 자가 있으면 교인의 특권을 향유치 못하게 하며, 성경의 권위를 보장하기 위하여 증거를 취합하여 책벌하며 교회 규례와 정치를 범한 자를 소환하여 조사하기도 하며, 본관할하에 있는 교인을 소환하여 증거를 제출케 할 수도 있으나, 최중한 벌은 교리에 패역한 자와 회개치 아니한 자를 교회 중에서 출교할 뿐이니라(마 18:15-20, 고전 5:45).

한국의 장로교에서는 3개의 치리회 모두 목사와 장로로만 구성하게 하였다. 당회에 관한 규정에서도 당회의 조직 요건을 “지교회 목사와 치리 장로”에 국한하였다. 특이한 것은 1971년 통합 측에서는 당회 조직 구성원 중에 담임목사 외에 부목사도 당회의 조직에 필요 요건으로 수정 제정한 것이다. 당회 조직에 담임목사로 제한시키고 있는 합동 측의 경우와 대비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2.2. 장로직제의 민주주의적 의의

이상과 같이 한국 장로교가 처음부터 두 장로 제도에 맞추어 목사와 장로를 동등하게 만들었으며 교회 신도들에 대한 권징과 관련하여 한 사람에게 그 권한을 부여하지 않고 치리회 곧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모임의 결의에 따르게 한 것은 오늘날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민주적 제도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는 전제군주제도와 유교적 하향식 계급제도에 익숙한 한국인에게는 파격적인 교회 정치 구조였다. 아울러 치리를 권력행사로 보기보다는 신도들을 회개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신령한 법에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이러한 일은 자칫 권력 남용에 이를 수 있음을 경계하였다. 이는 곧 치리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종으로서’ 시중드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여 중세 시대의 교황제의 부작용을 경계하였음을 분명히 하였다. 장로교의 치리권 행사는 중세의 교권주의적 횡포와는 다른 것임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의 장로교가 두 장로 제도를 초기부터 제도화시키고 치리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도록 법제화한 것은 아마도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들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미국의 장로교는 1788년 뉴욕 총회에서 그 정치와 권징의 형식에 있어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결의를 반영하여 두 장로 제도를 받아들였고 각 교회는 이 두 장로들(목사와 치리장로)에 의한 치리회를 구성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교회 정치 제도에 익숙한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 장로교 교회 정치의 발전에 관여하는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2.3. 한국 장로교 당회의 비민주성

하지만 한국의 장로교회들이 민주적 제도에 걸맞은 견제와 균형이 조화를 이루는 교회 치리회 혹은 개 교회의 당회를 운영하고 있는지는 회의적이다. 한국 교회 분쟁의 중심에 항상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당회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 분쟁과 관련하여 인터넷 검색을 시도하면 거의 90%이상이 목사와 장로 사이의 긴장과 다툼에서 비롯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 분쟁의 요인 중, 목사의 권위주의적 목회가 가장 큰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목사의 독점적 권력 행사는 당회라는 정치 체제 정신에 부합하지 못하여, 교인들과 장로들 마음속에 잠재적 불만을 심어 놓아 늘 잡음이 일어나도록 만들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장로들에 대한 교인들의 비토권이 보장되지 않아 이로 인한 장로의 무제한적 권한이 형성하게 하는 등, 장로 역시 독점적 권력 행사 집단이 되도록 하였다. 한국의 장로교 제도는 이론적으로는 민주적이지만 실천적으로는 감독제 혹은 교황제와 비슷할 정도로 1인 혹은 1개 집단의 독점적 권력이 행사되게 하였다. 한국 장로교 치리회 제도의 이론과 적용의 실제가 차이를 보이는 것은 부끄럽지만 인정해야하겠다.

왜 한국의 장로교 정치는 그 제도와 시행이 모순적인가? 물론 교회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면서도 지금까지 한국 정부와 국회, 국회 안에서의 여당과 야당 사이에 거친 말이 오가고 폭력이 다반사인 것은 아직도 민주 시민 의식과 역량이 부족해서이다. 한국의 정치사 역시 극심한 긴장과 극단적 분쟁, 그리고 분열의 삶은 한국 정치의 현실이라 해도 과하지는 않을 듯싶다. 한국 교회의 분쟁과 분열 역시 같은 레벨임은 어쩌면 자연스러운지도 모르겠다. 이는 아마도 한국인의 남에 대한 지배 의식의 정도는 다른 나라 사람 보다 강해서 그럴 것이다. 한국, 일본, 중국의 대학생 심리 검사 결과가 보여주듯이 한국인의 강한 지배성이 갈등과 분쟁을 늘 잠재하게 만들어 그것이 언젠가는 쉽게 폭발하게 하기 때문이다.

한국 학생이 남녀 모두 지배성이 강하고 사회적 성취능력이 강하다는 것은 개성이 강하며 타인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심성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감성이 높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흐르는 경향성이 강하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일본이나 중국 학생들보다 낮게 나타난 사교성, 행복감, 사회적 성숙성, 자기통제력 그리고 자기현시성은 개인의 심리 내부에 존재하는 자기통제와 관련된 것들로 자기의 통제와 성숙이 한국 학생에게 부족하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자기 통제가 상대적으로 덜 성숙한 우리의 기질이 아마도 오늘 한국 교회의 당회 안에도 역시 잘 드러나지 않는가 한다. 이것은 산이 77%인,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농토나 택지 비율이 최하인 나라에 살게 된 이유로, 밀집성이 과도하게 조성된 것에 연유할지 모르겠다. 이러한 밀집성은 우리로 하여금 생존본능을 자극하게 하여 집단의 획일성과 권력의 중앙 집중을 낳게 하였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권력의 1인 독점 혹은 1개 집단의 권력 집중을 가져오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강박 의식, 즉 타인의 지배에 대한 불안과 경계심이 우리로 하여금 피해의식을 형성하게 하고 공격적 성향을 지향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선지배 강박 관념이 목사와 장로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킨 것일 것이다. 이러한 한국 장로교 교회 분쟁에 대한 심리적 분석은 이정도로 하고, 이제 우리의 장로교의 비민주성을 다른 나라의 교회 정치 형태와 비교하여 그 실상을 살펴보자. 미국이나 스코틀랜드 나아가 우리가 집중 논의할 칼빈의 개혁신학적 교회 정치 제도와 비교하면 한국의 장로교 정치가 얼마나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4. 미국과 스코틀랜드의 장로직제

미국의 장로교는 유럽의 기독교 국가와 달리 국가의 도움이나 보호를 기대하지 않았다. 칼빈의 제네바 시는 교회를 보호해야할 의무를 지녔고 교회는 이를 당연히 요구하였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정교 분리 정책, 자유와 평등사상이 시민 사회에 지배적 이념 구조로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미국 장로교는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여야 했고 이를 실제적으로 가능하게 하기 위해 민주적 평등 질서에 기초하여 장로교 정치 제도를 만들었다. 이런 이유로 미국 장로교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영향으로) 두 장로 제도가 신설되는 것 외에 목사와 장로들에 대한 일반 교인들의 선택권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민주적 질서에 기초하여 목사와 장로 그리고 신도들 사이의 굳건한 연합에의 기틀을 마련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교회를 발전 성장하게 하는 정치 제도를 건립하였던 것이다. 실례로, 교회는 도덕적 권위와 자정의 능력을 배양하기위해 미국 장로교는 교회에 의회 민주적 절차를 적용하였다. 미국의 장로교가 장로들에 대한 임기제를 오래전부터 실시한 것이 그것이다. 이 제도를 통해 신도들의 지도자 선택권 행사를 적극적으로 개진함으로써, 자신들에 대한 장로들의 치리권이 제도적으로 독점되어 권한 남용이 가능하지 않도록 하였던 것이다.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종교적 박해 아래 형성된 것이 특이하다. 즉, 당대의 국가는 교회에 대한 영향력의 행사 혹은 적극적 지배를 의도하였기 때문에 교회는 국가의 교회 간섭에 맞서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존 낙스(John Knox, 1514-1572)를 비롯한 개혁주의 목사들은 교회의 배타적 치리권 행사를 목적으로 장로교 정치 제도를 만들어(『제1치리서』『First Book of Discipline』, 1560)에서, 국가가 교회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교회의 치리는 목사, 장로, 집사들에 의해 시행하게 하였던 것이다(1581년에 『제2치리서』『Second Book of Discipline』에서는 집사가 치리회 구성에서 제외되었다). 존 낙스는 두 장로 제도를 법제화하면서 『제1치리서』에서 1년의 장로 임기제를 정하였다. “1년마다 장로 투표를 한 것은 오랫동안 직책을 맡아 일하다보면 교회의 자유를 남용할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이 『제2치리서』에서 종신직으로 규정 변경을 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종신직의 탄생은 교회의 자치권을 효과적으로 얻기 위한 실용적 조치에 기인한 것이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장로직이 평생직이 되었고 안수례로 임직을 받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변화에는 실천적인 이유가 있었다. 즉 교회가 왕의 지배하에 들어갈 위험에 처해 있어서 교회를 국가 권력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할 필요를 느꼈[었던 것이다].” 한편, 목사에 대한 감독권을 강화함으로써 1인 목사의 독점적 권력 행사가 불가능하도록 하게 하기도 하였다. 『제1치리서』에서 집사도 치리회에 포함시킬 정도로 교회 안에서의 직분의 평등성은 매우 파격적이었으므로, 목사에 대한 견제를 강화하는 전통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2.5. 미국과 스코틀랜드의 장로직제와 한국 장로직제의 차이

한국 장로교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미국 장로교와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우리의 장로교 장로직제와 두 가지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된다. 비록 두 장로직제를 공동으로 수용하고 있기는 하고, 장로의 종신직이 외형상 스코틀랜드의 후기 장로교 전통과 같기는 하지만, 두 장로직제에 대한 미국과 스코틀랜드의 장로직제의 목적 혹은 동기와는 차이가 있다.

첫째로 미국과 스코틀랜드의 장로직제는 종교(기독교)국가로부터의 간섭과 상관관계가 있었다. 즉, 미국은 교회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법적으로 불가능하였지만, 기독교 신앙을 위해 피난 혹은 이민 온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으므로 어떤 세속 권력이든지 외부의 세력으로부터 교회가 완전히 자유롭기를 희망했었고, 스코틀랜드의 경우에는 국가의 통치자가 교회의 수장이 되려는 것을 막고 교회의 자유를 추구하였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정치적 특수 상황으로 인해 교회는 외부의 간섭을 제한하고 교회의 자치적 치리권 행사를 위해 두 장로직제를 시행하였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자유와 평등 정신에 입각하여 장로 임기제도가 도입되기도 하였다. 비록 스코틀랜드는 장로 종신직을 택했어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역시 이 제도는 이러한 교회 보호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주의하여 볼 필요가 있다.

반면에 한국의 장로교는 미국과 스코틀랜드에서와 같이 범 기독교권 국가가 교회의 수장이 되려하지 않았고, 국가로부터의 간섭을 우려하여 장로교 정치 제도를 만들지도 않았다. 장로교 직제는 주로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주입된 것이다. 애초부터 한국의 장로교회는 단순한 종교적 박해나 외부로부터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장로직제를 만들려는 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장로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연합을 통한 자치권 구축을 목적으로 구성된 장로직제를 생각할 기본적 지식과 감각을 원천적으로 가질 수가 없었다. 그저 선교사가 전해준 제도를 도입할 뿐이었다. 여기에 한국에 이미 부락 마을이나 심지어 불교에서도 지도자격으로 존경받는 나이 많은 스님을 ‘장로’(‘長老’)라 일컫던 관습과 이런 장로제에 익숙한 우리의 습관에 비추어, 장로를 교회의 ‘어른’ 정로로 생각한 점이 덧붙여졌다. 당연히 한 번 ‘어른’이 된 장로는 결코 ‘어린 자’의 지위로 낮아지지 않고 죽을 때까지 ‘어른’이므로, 교회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가 관습적으로 생각한 장로는 ‘영원한’ 장로가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신직 어른’ 문화는 한국의 사회적 삶으로 고착된 유교적 서열주의 혹은 계급주의의 산물이기도 하여, 한국 교회에 도입된 ‘장로’ 직분은 자연스럽게 최고 지위의 신분이 된 것이다. 그리고 계급주의 제도가 그렇듯이 한 번 얻은 지위는 죽을 때까지 거의 신분 변동이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장로교의 종신직 장로 제도는 장로교회사적으로도 정당성을 지지받지 못한 것으로서, 장로교 제도 정신을 왜곡시킨 다분히 한국의 유교 문화적 산물이라 할 것이다.

한국의 장로교의 장로직제가 교회사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왜곡되었다고 보는 것은, 성경에도 없고 미국과 유럽 교회에서도 없는 ‘원로’ 목사, ‘원로’ 장로, ‘은퇴’ 목사, ‘은퇴’ 장로, ‘권사’, ‘서리’집사, ‘권찰’ 등의 신분제적 직분이 공존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아마도 새롭게 개발된(?) 이러한 직분들은 한국 특유의 호칭문화가 한 몫을 했을 것이다. 한국에는 성과 함께 호칭이 함께 언급하는 문화를 갖고 있었는데 이는 유교적 문화가 얼마나 강하게 교회 안에 내재하는지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교회안의 직분 호칭은 유교적 신분 계층 개념의 영향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 교회의 직분은 거의 계급화 되어, 집사에서 장로 혹은 권사로 임직되는 것은 ‘승진’ 혹은 ‘영전’을 의미한다는 정서가 상당부분 한국 교회 안에 내재화 되었다고 하겠다. 장로직제는 물론 한국의 직분제도는 ‘섬김’ 보다는 ‘신분 상승’으로 구도화 되어 전 교인의 ‘간부화’를 낳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장로직제는 이러한 전교인 간부화의 정점에 서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인 것은 장로교회에만 장로가 있지 않고, 장로교가 아닌 침례교를 포함한 한국의 거의 모든 다른 교파에서도 장로 직분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한국의 장로는 유교적 ‘어른’으로, 교파를 떠나서 한국의 모든 교회의 최고 높은 신분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미국과 스코틀랜드의 두 장로직제는 1인 독점 혹은 1개 조직의 독점을 경계하려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이는 앞으로 살펴볼 칼빈의 제네바 교회 치리회의 정신과도 부합되는데, 한국의 장로교는 실제로 이러한 권력 독점 체제 방지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앞에서 살핀 대로 한국 장로교의 장로는 ‘어른’이기 때문에 견제 받을 생각도 안하여 종신직 타이틀을 지금도 고집하고 있고, 상당수 목사 또한 스스로 영적 권위자 혹은 영적 아버지로 생각한 나머지 나이가 어려도 장로 못지않은 ‘어른’으로 행세하여 치외법권적 권한 행세를 즐기려 한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목사는 교황적 지위에 있으며, 장로들로부터는 물론 교인들 모두에게서 견제 받는 것을 불허하고자 한다. 여기서 비로소 한국 교회의 분쟁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는 것이다. 서로 ‘머리’되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장로교는 서구의 장로교 정신을 왜곡시키고 있다. 아니, 왜곡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 서구의 장로교회는 목사 1인 독점 권력 체제도 불가능하게 하는 철학이 보편화되어있고 그 장치가 제도화되어 있으며, 장로 역시 임기제를 통해 권력 남용과 독점이 불가능하도록 교인의 견제를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개혁신학적 (칼빈의) 장로직제

 

한국 장로교회가 개혁신학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장로직제와 관련하여 개혁신학 특히 칼빈의 교회 정치론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회의적이다. 이에 우리는 칼빈이 의도한 장로 직분 제도 시행과 장로들과 함께 구성한 치리회의 성격을 연구함으로써 한국 장로교의 장로직제와 확연하게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3.1. 제네바 교회 치리회(Consistory)의 역할

칼빈이 제네바에서 평신도 장로들을 세워서 이들과 함께 치리회를 구성하였던 핵심 동기는 신도들의 참된 신앙 회복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이 나라 사람들을 포함한 유럽 국가는 기독교 국가여서 시민이 모두 교인들이었다. 여기서 문제는 관료든지 일반 사람이든지 이름만 신도들인 사람들이 교인으로서 행세한다는 것과,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실정법적으로도 처벌받을 이들이 거룩한 성찬식에 참여한다는 것이었다. 칼빈의 눈에는 특히 이러한 방탕한 자들이 성찬에 공공연하게 참여하는 것이 성찬 모독이요 조롱행위인 것이어서 어떻게 해서든 권징하여 출교까지도 고려해야 했었다. 성찬론이 매우 큰 문제여서 이를 해결할 교회의 법원과 같은 제도적 장치를 칼빈은 구상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 제네바는 스위스에서 가장 부패하고 타락한 도시였다. 칼빈이 제네바를 개혁하기 전의 도시는 도박, 술취함, 방탕, 합법적 매춘, 어린아이 매매 행위 등이 만연했던 수치스러운 기독교 국가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교회다운 기능은 새롭게 회복되어야 했고 성찬에 대한 신성 모독적 행위는 근절되어야 했다. 그래서 제네바 시 당국의 재청빙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칼빈은 제네바의 영적, 도덕적, 실정법적 범죄를 청산하기 위해 이러한 “나쁜 그리스도인”을 권징하고 치리할 제도적 장치를 세울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 장치가 바로 제네바 교회 치리회(Consistory)였다. 교회다운 표시를 재건하기 위해 칼빈은 장로의 기능을 인정하고 장로의 협조를 구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장로직제는 철저하게 신앙의 개혁과 참 교회의 기능 회복을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제네바 교회 치리회는 ‘참된 기독교인 만들기’가 그 동기였던 것이다. 따라서 제네바의 치리회는 교인의 성화를 위해 도입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치리회를 통해 신도들이 교회의 하나 됨을 저해하는 부도덕한 언행과 사회법에 저촉되는 범죄의 자리에 앉지 않도록 하였던 것이다.

당시 치리회는 오늘의 교회 경찰 역할을 하였다.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거룩한 신적 교훈을 멸시하거나 도전하는 행위, 도덕적 타락과 방탕한 삶 그리고 도박과 성범죄 등 제네바 시민들, 아니 제네바의 ‘가짜’ 교인들을 매주 소환하여 조사하였다. 범죄 행위의 증거가 드러나면 정도에 따라 권면을 하고 수찬정지를 명하며, 최고의 권징으로서 출교까지 결정하는 일을 하였다. 또한 교인들의 범죄 행위가 실정법에 저촉이 되면 관계 당국에 고발하여 실형을 받게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치리회 활동은 단순히 범죄 행위자 처벌에 목적을 두는 ‘휘두르는 칼’은 아니었다. 이 영적 권한은 군주가 갖는 칼의 권리와는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순전히 종교적 이유가 전부였다. 타락한 제네바 시민의 신앙 훈련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회가 실형을 선고할 권한은 없었다. 겸손한 마음으로 부도덕한 신앙인들을 회개하게 하도록 권면하여 신앙을 회복시키고 참된 교인이 되어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성찬 앞에 스스로 부끄럽지 않도록 돕는 일이었던 것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칼빈이 볼 때 성찬론이 큰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치리회를 통해 가짜 그리스도인들로 인한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는데 용이하도록 하였다. 권징의 신실한 시행이 이루어지면서 제네바 시는 점차 거룩한 도시로 변모하면서 점차 성찬식을 거행하는데 있어서 문제의 소지가 제거되었던 것이다.

 

3.2. 교회 치리회의 기원

제네바 교회 치리회는 칼빈이 창안하지 않았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마틴 부쳐(Martin Bucer, 1491-1551)가 시행하던 교회 치리회로부터 배웠다. 평신도들이 포함된 이 치리회에서 교인들의 신앙 훈련을 주관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칼빈이 처음에 제네바에서 목회할 때 장로들에 대해 언급한 사실이 없다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제네바로 돌아온 이후 장로직제를 세운 것으로 보아 스트라스부르그의 치리회 효과를 제네바에서도 기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이는 부쳐야말로 장로교의 설립자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부쳐 이전에 이미 장로교 형식의 직제의 흔적 혹은 배아 형태나 유아기적 형식이 발견됨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오에콜람파디우스(John Oecolampadius, 1482-1531)가 장로직제를 기반으로 하는 치리회를 구성하여 실시한 바가 있다는 점, 그리고 15세기 중반 이후에는 보헤미안-모라비안 형제들에 의해 목사와 장로가 함께 다스리는 교회를 구성하였다는 것이 그 실례이다. 더욱이 고대 교회에서조차 이미 1인이 아닌 다수에 의한 교회 치리가, 즉 장로회 정치가 시행되었었다. 고대 교회에서는 “한 사람이 [권한을] 잡고 마음대로 행사한 것이 아니라 장로회의 수중에 있었다”고 칼빈은 확신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이 장로직제적 치리회 구성과 활동의 당위성을 고대 교부들의 장로교회적 정치론에 호소하였다는 점, 곧 장로직제를 통한 교회 치리회의 출발을 놓고 반드시 부쳐의 장로교 목회에 기반을 두지 않은 점은 인상적이라 하겠다.

물론 분명한 것은 장로제 직분을 종교 개혁자들이 공통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비록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칼빈이 장로회를 창조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아마도 장로회 정치 제도를 교회 역사에서 재발견하여 가장 활발하게 교회에 성공적으로 적용하였던 것임에는 틀림없다고 하겠다.

칼빈이 교인들의 신앙 개혁을 위해 교회 치리회를 구성할 때 민감하게 생각한 것은 혹시 있을지 모를 교권의 남용 문제였다. 치리회를 통해 교회 갱신을 도모하면서 칼빈은 암브루시우스 이후 성직자가 치리회를 독점적으로 운영한 이래 교황제의 폐해가 시작되었고, 교황제는 각종 부패와 타락의 온상을 제공하였으므로, 제네바에서의 치리회는 당연히 목사의 독점적 권한으로 운영되는 조직은 상상할 수 없었다. 물론 목사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교황제를 반복할 기회를 허용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칼빈은 제네바의 치리회 제도가 성직 계급의 독재는 물론 장로들의 독재도 허용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를 제도화하기 위해 칼빈은 먼저 목사의 교권 남용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는 장로 12명을 선택하여 줄 것을 제네바 시에 요구하였고, 아울러 목사에 대한 강력한 검증과 견제 지침을 “제네바 교회 규정”에서 상당히 자세하게 많은 분량에 걸쳐 제시하는 한편, 장로에 대해서는 1년 임기제를 의무화하여 교인들로부터 지속적으로 신뢰를 얻도록 장로직의 남용과 권력 독점을 견제하는 장치를 만들어 놓았다. 임기제를 실시하게 한 이유는 칼빈이 12명 장로가 그 직책에 적합한지를 지속적으로 살피는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기제를 통해 장로는 불신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장로의 연임이 불가능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아울러 치리회의 재판권을 세속 권력으로부터 독립시켜, 교회의 자율적 통치 근거를 확보하였다. 다만 제네바 교회 치리회를 주관하는 의장이 시정부 관료가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칼빈의 의도에 배치되는 것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적어도 교회 치리회는 교회의 자치권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장하지 못하게 할 것에 대해서는 우려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 관료는 치리회 시작할 때 시정부의 상징 지휘봉을 들고 입장하기도 하여 시정부와 칼빈 사이에 긴장 관계를 갖게도 하였다. 하지만 칼빈은 거의 말년에 이러한 정부의 지배를 의도하는 표식을 들고 입장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치리회는 교회가 주관하는 것임을 주지시켰던 것이다.

한편, 칼빈은 치리회 구성에 필요한 장로직제를 교회사적 근거에만 의존하지 않고 성경적 가르침에도 호소하고 있다. 두 장로제를 디모데전서 5:17에 근거하여 제시하였고, 다스리는 장로의 필요성을 제안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칼빈은 장로직제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다소 모호한 태도를 취하였다. 성경에서 장로와 목사를 하나의 직책으로 부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즉, 성경이 말하는 장로는 ‘목사 아닌 장로’가 아니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장로의 회가 신약에서도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 조직은 장로들만이 아닌 감독도 같이 있었다는 것, 나아가 성경에서는 1인에 의해서가 아닌 투표로 선택된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구성되었다는 점, 등을 강조하면서, 치리회 구성에 있어서 투표로 선출되는 장로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교회의 다수 통치는 고대 교회에서도 발견되는 바, 제네바에서의 치리회는 다수에 의한, 그리고 평신도 장로들을 포함한 조직이어야 함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칼빈은 세속 정치는 물론 교회 치리회에 있어서도 역시 개인이 아닌 다수에게 권위를 부여해야 한다고 항상 믿었다. 장로직제에 대해 칼빈이 성경에 호소한 점이 다소 모호하긴 하였지만, 분명히 성경에 ‘다수에 의한 통치’가 있었으며 교회사도 이를 증거하고 있고 또한 칼빈이 늘 염두에 둔 ‘1인 독점’의 권력 집중 즉 교황제와 같은 독재적 권한 남용을 경계하였다는 것 등에 기초하여 교회의 장로직제의 타당성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3.3. 치리회의 머리와 장로 임기제

따라서 칼빈은 교회에서의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임을 강조해야 했다. 치리회의 의원들은 목사든 장로든 이들의 권한 남용 행위는 원천적으로 근절되어야 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만 ‘하나의’ 감독일 뿐, 나머지는 도구로만 사용되는 것임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런 의도에서 칼빈은 성직자와 장로를 견제할 장치를 제시하였던 것이고 그것이 제네바에서 그대로 실시되었던 것이다. 누구도 그리스도를 대신할 ‘대행자’는 없는 것이며, 따라서 목사들 사이의 단독 지배도 허락할 수 없었다. 칼빈에게는 독재 지배 체제의 교회 정치 구조를 띤 어떤 제도도 수용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적 감독제는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만 머리이고 목사를 포함한 다른 모든 부분은 지체 혹은 일부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몸’ 비유에서와 같이, 칼빈은 교회 안에 다양한 은사를 가진 직분이 있는 것이며, 이 중에 다스리는 장로 제도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다만 교회의 하나됨, 연합을 이루기 위해 혹은 교회의 평화를 위해 감독 혹은 목사의 리더십을 허락한 것이고 장로는 목사의 목회활동을 보충하는(complementary) 사역자로서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관여하는 교회 치리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머리임에는 분명하지만, 실용적인 면에서 목회자 권위와 그 리더십은 인정받아야 했다. 칼빈은 목사가 평신도 위에 있는 자로 판단하고 이 리더십에 대한 신도들의 순종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칼빈은 반복해서 평신도 위에 있는 목회자의 권위를 주장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토란스(T. F. Torrance)가 말한 바와 같이 칼빈이 장로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은 일부분 옳다. 왜냐하면 스코틀랜드에서 발전된 장로교는 완전 민주정치 제도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민주적 정치 제도와 귀족정치를 혼합시킨 교회 정치 제도를 제안하였기 때문이다. 교인들의 선택권에 따라 선출되는 장로직제를 발전시킨 면에서는 의회민주 정치 제도와 같지만, 목사의 권위 존중과 목사의 장로 후보 선택권이 전제된 교인의 장로 선택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귀족정의 성격이 반영된 것이다. 실제로 매년 2월에 어떤 장로를 교체할지에 대해 칼빈이 제일 먼저 낙점을 하곤 하였다. 성경이 말하는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딤전 5:17)라는 말씀이 있듯이 교회의 목사가 교황제와 같은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는 한, 목사의 지도적 권위를 보장하는 것은 성경적이었다. 칼빈은 이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목사의 권위를 평신도가 따라야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성직 제도를 옳게 보시고 온갖 가능한 방법으로 그 위엄을 칭찬하시는데, 이는 성직이 우리 사이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으며 심지어 가장 훌륭한 일로 인정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할 데 없이 훌륭한 찬사로,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눅 10:16)....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성령과 의와 영생을 제공하는 일이므로 교회 안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한다(고후 4:6; 3:9). 이 구절들과 그 밖의 유사한 구절들의 뜻은 성직자들을 통해서 교회를 다스리며 유지하는 방식, 곧 주께서 영원히 제정하신 이 방식이 우리들의 무시와 멸시 때문에 폐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완전 평등주의에 따라 칼빈의 목사 권위 존중을 비판하는 것은 성경에도 위반되고 교회의 신앙 교육 훈련에도 비효율적일 것이다. 위의 『기독교 강요』 본문에서와 같이 칼빈은 성직자 중심의 교회 치리를 의도하였던 것이다. 칼빈에 대한 비판은 4직분 곧 목사와 교사, 장로, 집사의 사역이 목회자와 평신도의 협력 사역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목사가 말씀과 성례를 책임진다면, 치리는 장로가 그 책임을 갖는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래서 치리회도 장로들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인데, 종종 칼빈을 포함한 목사들이 치리회에 관여하게 되어 장로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고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치리회를 장로들이 중심이 되도록 칼빈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초기에는 장로 숫자가 목사보다 더 많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장로의 견해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지 모르나, 점점 해를 거듭하면서 칼빈이 장로 숫자는 처음과 같이 12명 그대로 두었지만 목사 숫자는 1542년에 9명이었다가 1564년에는 19명으로 더 늘렸음을 볼 때 칼빈은 교인 권징에 있어서 목사의 역할을 중시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빈은 다수의 의한 정치, 평등한 목사회를 지지하는 것 외에 목사직의 제한적 권위를 인정한 것, 목사의 권징을 제도화시킨 것 등을 감안할 때, 치리회에서 목사의 숫자가 장로보다 많다는 것이 목사의 독점적 권한을 의도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하겠다. 제네바 교회의 “제네바 교회 규정”에서 ‘목사의 의무’, ‘목사 검증’, ‘목사의 선택’ 등의 항목에 걸쳐 목사에 대한 권징 장치를 상세하게 법제화시킨 것을 볼 때, 우리는 칼빈이 교황제와 같은 목사의 1인 독점적 권한은 절대로 용인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장로의 경우 역시 교권 남용의 주체가 될 수도 있기에 칼빈은 장로에 대한 검증 절차 혹은 견제 장치를 마련하였다. 장로가 갖는 권한 역시 목사 못지않게 상당하며 그 권위와 치리회에서의 권한 행세 자체가 신적인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장로의 자격 요건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칼빈이 장로의 권한을 성경에 호소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마태복음 18:3-27에 의거하여 장로는 베드로에게 허락된 열쇠를 가진 자라는 것이 그것이다. 장로직제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치리회에서의 장로의 활동은 신적인 권한 행세이어서 교인은 목사 못지않게 장로에게도 순종해야 하는 것이었다. 신적인 위임을 받은 장로는 교인의 도덕적 문제를 감독할 권한을 갖게 되며 치리회에서의 재판권 행사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로직제의 당위성은 실제 투표에 의해 선출되며 임기제를 통해 유지되는 것이어야 했다. 제네바 시 소위원회에서 장로 후보자를 결정하고, 이후 소위원회에서 2명, 60인 시의회에서 4명, 그리고 200인 시의회에서 6명 등 총 12명을 200인 시의회에서 최종 결정하였다. 이들 장로는 모두 1년의 임기로 일하였다. 매년 2월에 이들 12명의 장로들은 재신임 여부를 교인들로부터 결정을 받게 되어, 1년 더 임기를 얻게 되거나 아니면 탈락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임기제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실제적으로는 교인들에 의해서만 투표로 실시되는 것은 아니었다. 목사회와 소위원회에서 인정된 자들 중에서 교인들이 투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장로 선출 혹은 재신임 투표 방식은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칼빈이 선호한 귀족제와 민주제의 혼합적 산물이었다. 그래서 1561년에 장로를 선출할 때에는 목사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일이 필수적인 절차가 되었던 것이다(이것은 칼빈이 제네바로 두 번째 청빙 받았을 때 1541년에 제안되었으나 무시되었던 제도였다). 이러한 2단계의 장로 선출 방식이 제안된 것은 장로의 치리회 활동 혹은 교인 권징 행위는 목사의 치리 행위에 보조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즉, 장로는 치리회의 사역에 있어 실제적으로 중심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장로 정치, 혹은 제네바 교회 치리회는 칼빈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회복하고 교인의 신앙 개혁과 교회 개혁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러한 신학적 대의를 제안한 목사의 철학이 치리회의 정신을 이끌어가는 것은 당연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목사들 모두는 장로들 12명에 의해 도덕적으로 검증받도록 되어 있어서 실제로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 제도에서와 같이 견제와 균형의 틀을 유지하였다. 목사들도 문제가 있게 되면 모두 조사 대상이 되어 권징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4. 장로 임기제: 개혁신학적 장로직제의 회복

 

한국 장로교가 칼빈의 개혁교회의 후예인 구미 선진 장로교회에게서 장로직제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매우 유교적 계급주의 성격의 장로직을 고집하는 것은 개혁신학적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미 장로임기제가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 교회에 몇몇 사람들에 의해 전달된 바 있지만 아직도 이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아마도 현재의 계급적 장로직을 즐기고 있어서일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바와 같이 장로 종신직 제도는 교회사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그 정당성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국 장로교회 교단들에게 장로의 임기제를 수용하여 법제화하기를 주문한다.

 

5.1. 장로 임기제의 개혁신학적 의의

한국의 장로교가 개혁신학적 장로직제를 회복시켜야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치리회의 기능이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또한 목사든 장로든 신종 ‘교황제’의 권한 집중을 견제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칼빈 당시 부패하고 타락한 제네바 교인들과 같이 오늘날 역시 한국 교회에 ‘가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과, 이들에 대한 정당한 치리를 통해 신앙의 개혁이 일어나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 개혁이 이웃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교회와 교인들 때문에 동네가 깨끗해졌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이다. 아울러 권위주의적 1인 독점의 목사 혹은 영원한 ‘어른’으로서 장로 종신직 역시 이러한 개혁신학적 지침에 따라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지체 의식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도록 제도화해야 할 것이다.

장로 임기제는 칼빈 신학에서 인간의 전적인 무능, 부패, 연약함 때문에 어떤 인간도 적절하게 통제되지 않으면 타락할 소지가 있음을 염려하여 제시되었다. 인간의 “의지는 죄의 속박을 받아 노예 상태에 빠졌으므로 선을 향해서 움직일 수 없으며, 더더욱 선에 전력을 다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 대한 신학적 이해에 따라 모든 인간은 권력 독점에의 유혹에서 벗어나도록 교회 조직의 정비가 필요한 것이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중세의 교황제에서처럼, 권력의 독점과 이로 인한 성직자들의 타락과 부패, 그리고 시민들 모두에게 이르기까지 부정부패로 얼룩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욱이 칼빈이 제네바로 다시 돌아간 것은 교인들의 타락과 방탕으로부터 신앙의 개혁을 도모하려는 목적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개혁의 주체들이 권한의 남용을 가져올 조그마한 여지라도 남겨둘 수 없는 제도를 구상하였으며, 이러한 장치가 실효를 거두도록 목사에 대한 철저한 견제와 장로임기제를 실시하였던 것이다. 장로임기제는 대의정치의 실현을 도모하여 교인들의 견제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권한과 자유를 남용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나아가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겸손하게 직무에 최선을 다하게 하는 장로의 개인적 경건 훈련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장로 임기제는 궁극적으로 개혁신학적 치리회의 취지를 부활하게 하여 치리회의 효과적 운영에도 기여할 것이고 나아가 목사와의 긴장의 강도를 감소시키면서 교회의 하나됨을 이루게 하는 데에도 일정부분 역할을 하게 할 것이다. 장로 임기제를 한국 장로교에 도입시키는 것은 한국 교회의 건강성을 회복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5.2. 장로 임기제의 당위성

하지만 한국의 장로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장로는 한국 기독교 초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70세 은퇴를 조건으로 하는 종신직을 갖는다. 한국 장로교회는 이론적으로 35세에 장로가 되면 무려 35년 동안 아무런 견제를 받지 않고 계속 당회라는 치리회의 회원으로 일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의 장로교회에서는 한 번 장로가 되면, 비록 신도들로부터 객관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경우에라도 그 사람은 신도들에 대한 ‘감시자’ 또는 ‘다스리는 자’로서 지내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무릇 장기적으로 권한이 보장된 조직이 여간해서는 권력의 독점적 구조를 낳지 않기란 어렵다. 그리고 그런 구조가 부패하지 않기도 여간 힘들지 않다. 장로를 중심으로 하는 배타적 권력 그룹이 있는 한, 목사의 직무를 ‘보충하는’ 역할로서의 장로직제를 제안한 칼빈의 의도는 무시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교회의 지체의식도 사라지게 하여 교회 안에 하나됨을 이루게 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목사와의 대립 구도를 고착화시키고 긴장을 고조시키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교회의 분쟁의 중심이 되도록 만든다. 한국 장로교회는 이런 의미에서 개혁신학적 장로교 정치제도를 정착시킨 칼빈의 의도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하겠다.

오히려 한국 장로교는 칼빈의 제네바 교회 보다 영적으로 장로와 목사를 같게 만든 스코틀랜드 장로교나 평등사상이 강조된 미국 장로교의 영향을 더 받았다. 하지만 미국 장로교는 대부분 이미 장로 임기제를 실시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제네바에서처럼 처음에는 존 낙스가 임기제를 실시하였으며, 심지어 낙스가 죽은 후 멜빌이 제2치리서에서 장로 종신제를 명문화한 이후에도, 스코틀랜드 교회는 75년 동안 계속하여 1656년까지도 임기제를 실시하였다는 것,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장로 임기제를 재고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 등을 보더라도, 치리회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서는 장로 임기제가 적극적으로 지지를 받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고 하겠다. 만일 스코틀랜드에서 마저 궁극적으로 장로 임기제를 실시하면, 한국만 장로 종신제를 실시하는 나라로 남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종신직 장로직제는 개혁신학적이지도 않고, 미국적이지도 않으며(일부 교단에서는 여전히 종신직을 고집하나 PCUSA 교단을 포함한 거의 대다수는 그렇지 않다), 심지어 스코틀랜드적이지도 않다. 후자의 장로직제와 같다고 강변할지 모르겠으나, 이는 앞에서 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국가 권력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교회의 하나 되어야 했던 국가의 교회 지배권에 대한 저항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이는 한국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한국의 경우 국가가 교회의 일에 대해 간섭을 하지도 않는데 굳이 스코틀랜드처럼 교회의 자치권을 보호하기 위해 종신제 장로를 세웠던 것은 아닌 것이다. 한국 장로교의 종신제적 장로직제는 어떤 경우에도 정당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다.

아직도 한국의 장로교 교단들이 장로의 종신제를 임기제로 헌법을 수정하는데 주저한다면, 장로 임기제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들이 다수인 것으로 나타난 여론 조사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미 상당수의 장로와 목사 그리고 평신도들은 장로의 종신제가 낳은 여러 폐해를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여전히 장로 임기제 불가론을 주장한다면 이는 아마도 한국의 신분제적 권한 독점과 권력의 향유를 즐기려는 자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자일 것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의 종신직 장로직제는 유교적 계급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장로 임기제의 법적, 제도적 수용은, 이미 서론에서 전제한 바와 같이 목사에 대한 실질적 견제 장치 역시 법적, 제도적으로 설치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의 하나됨과 교인들의 신앙 인격 변화를 이루고 교황적 권한의 독점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목사의 모범적인 검소한 삶과 도덕적 우위성이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다. 고대 교회는 이를 실시하였으며 감독은 검소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아울러 칼빈 역시 성직자들이 재산과 권력에 있어서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영위해야 할 것을 주문하였다. 이러한 목회자 윤리 의식을 칼빈은 “제네바 교회 규정”에서 적극적으로 반영하였다. 이 규정은 목회자에게 부과하는 치리를 범죄와 악행의 성질에 따라 달리 적용하되, 목회자가 짓는 죄목을 (1) 목회자에게 용납될 수 없는 18가지 죄목 사례들, (2) 형제적 충고를 받게 되는 경우의 16개의 악행들, 그리고 (3) 교회법에 대한 반역 행위와 교회 질서에 순종하지 않는 규정 위반 사례들 등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고 이 규정에 저촉될 때에 목회자가 형제적 충고로부터 시작하여 실형도 받고 목사 면직도 가능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만큼 목회자의 높은 영적, 도덕적 수준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를 주관하는 자로서 누구보다 모범적이어야 위임받은 권한이 효율적으로 시행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치리회를 통해 교인의 신앙 인격을 성숙하게 할 자로서 평신도 장로들에게는 물론, 교인들 앞에서도 당당해야 했던 것이다.

 

6.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 장로교의 장로직제의 실체와 그것의 교회사적, 개혁신학적 정당성 여부를 타진해 보았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한국 장로교의 장로직제, 특히 장로의 종신직 제도는 서구의 선진 장로교회들의 것과 다름을 확인하였다. 한국 장로교가 영향 받았다는 미국의 장로교에서는 이미 대부분 장로 임기제가 실시되고 있으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는 처음에는 장로 임기제를 실시하다가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교회의 자치권을 확보하기 위한 실용적 목적에 따라 장로 종신직이 도입되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기독교 국가인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장로 종신제를 선례로 제시하는 것은 그것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부당하다 할 것이다.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경우에서와 같이, 한국 장로교 초기의 지배국인 일본이나 해방 후 우리나라가 교회를 간섭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가로부터 교회의 독립을 위해 장로 종신직을 만든 것이 아니며, 또한 지금도 그러한 이유로 장로 종신직 제도를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우리는 두 나라 어디에서도 한국 장로교의 장로 종신직의 근거로 삼을만한 명확한 단서가 발견되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 있다. 오히려 한국의 장로 종신직은 다분히 한국 문화의 산물인 것으로 동네 ‘어른’ 장로의 복사판인 것이다. 한 번 어른이 된 분이 중간에 어린 신분으로 격하되지 않는 것처럼, 한 번 장로는 영원한 장로인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한국 문화적 개념이 아니고서는 한국의 장로 종신직 유래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하겠다.

아울러 개혁신학의 유산을 물려받은 한국 장로교로서는 칼빈의 제네바 교회 치리회(Consistory) 구성 목적 및 그 운영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신도들의 신앙 개혁을 위해 구성된 치리회이므로 당연히 칼빈의 정신에 충실하려는 장로교라면 이점을 중시하여 치리회가 올바르게 운영 되어야 하고, 이러한 치리회의 효율적 운용을 위해 칼빈이 장로 임기제를 실시한 것과 같이, 한국 장로교 역시 장로 임기제를 실시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목사를 포함한 모든 신도들을 권징할 수 있는 치리회 곧 당회와 노회 그리고 총회는 신도들로부터 견제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구비하여야 함은 물론, “제네바 교회 규정”처럼 실제로 권징 사례가 가능할 정도로 구체적인 권징 규정 절차와 활성화가 가능한 기구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치리회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치리회 의원인 장로는 독점적 권한 행세와 자유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임기제를 통해 정기적으로 피택되어 임명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 안의 각종 분쟁과 분란 그리고 교회 분열은 당회 정치가 그 중심에 있는데, 만일 지금보다 목사도 쉽게 견제 받을 수 있고, 장로 역시 임기제를 통해 교인들로부터 견제를 받으며 겸손하게 섬김의 일을 할 수 있을 때, 어느 정도 한국 교회는 자정 능력을 보일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한국 교회 갱신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ABSTRACT>

Korea Presbyterian Church and the Organization of the Eldership: A Reformed Study of the import of the term office in Eldership

Moon Sang Kwon(Westminster Graduate School of Theology, Korea)

This paper analyzes the organization of eldership in Korean Presbyterian churches and asks if it coincides with the ecclesiastical, Reformed, and biblical substantiation. Especially it concerns how it or Presbyterian consistory in Korea corresponds to the Reformed or the Genevan Consistory under the leadership of John Calvin(1509-1564). Through these studies, can we recognize that the organization of Korean Presbytery is far from the ethos of Genevan church in the ministry of Calvin. Reading the organization of eldership in view of Reformed tradition, we demands the legalization of the term of an elder. We do no justify ourself the life tenure of an elder in view of that the presbyterian churches in U.S.A., which has had an effect on Korean Presbyterian churches, already execute the term office of an elder. It is true that the Presbyterian churches in Scotland implement the system of the life tenure of an elder. However, we need to consider that it was made in practical purpose to secure the autocracy of the church from the intervention of the state. In this sense, it is not the model for Korean Presbyterian churches. Rather, the life tenure of an elder in Korean churches is the product of Korean culture, namely the copycat of the elder as a ‘senior’, a respected person only because of the ages, living in the neighborhood. Recognizing that the life tenure of elder in Korean Presbyteian churches originates from the Korean Confucian social custom, we have no justification to reject the revision from the life tenure to the organization of the term of an elder. The term system of an elder should be, of course, brought alongside of the institutional check of the ministers, as in Geneva.

Keyword: Calvin, Church consistory, the organization of eldership, life tenure , term office, Korean Presbyterian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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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문상(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대학교)/한국개혁신학회 논문집 제 35권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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