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성경번역, 정말 필요하지만… 레이몬드 벤 류윈
• 또 다른 성경번역, 정말 필요하지만…
레이몬드 벤 류윈
We Really Do Need
Another Bible
Translation
0000000000000000 0000 0000 000- 레이몬드 벤 류윈
이 글은
Christianity Today, October 22, 2001, Vol. 45에 실린 “We really do need another
bible translation”을 허락을 받아 번역 사용한 것입니다. copyright ⓒ 2002 by Raymond C. Van
Leeuwen. Used by permission.
현대의 다수 번역본들은 훌륭하긴 하지만 성령이 실제로 말씀하신 것을 제대로
들려주지 못할 때가 많다. 번역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선물’이다. 그 몸의 지체들로서 우리는 성경적으로 사고하고 살아야 한다. 종교개혁이
교회에 성경의 갱신을 가져다 준 이후 성경의 많은 번역본들은 서방의 언어와 사상, 삶을 형성해왔다.
최근 새로운 번역본들이 많이 나옴에
따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 어려운 난해한 언어나 이질적 언어가 아닌 친숙한 현대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교회에는 큰 선물이었고 또 지금도 그렇다. 필자는 영예롭게도 뉴리빙역(New Living Translation, NLT)의 번역에 작으나마
공헌을 했다.
그러나 성경번역은 또한 ‘문제’이기도 하다. 각 번역본마다 원어를 불완전하게 나타내고 있고, 언어와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번역은 본질상 이를 극복할 수 없다. 번역이란 우리 인간과 오류 없는 성경 사이에 오류 있는 인간 해석을 끼워 넣는 작업이다. 이런 근본적
문제들이 모든 번역본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지난 60년 동안 성경번역이 늘면서 교회에는 새로운 문제들이 떠올랐다.
새로운 역본들 특히
NLT, NIV(New International Version), NRSV(New Revised Standard Version),
REV(Revised English Bible: New English Bible의 개정본), TEV(Today’s English Version:
Good News Bible이라 불리기도 함) 등은 모두 이른바 ‘역동적 등가(等價)’(dynamic equivalence) 번역 혹은 ‘기능적
등가’(functional equivalence: FE) 번역이라 불리는 이론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한 번역본들은 의도한 목적을 충실히 달성하고
독자들에게도 좋은 도움을 제공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필자를 포함해 다수의 언어학자 겸 번역자들은
‘기능적 등가 이론’이 번역의 유일한 모델이 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본다. (번역 자체는 그 이론보다 더 나을 경우가 많지만 그보다 못할 때도
있다.) 언어학자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쓰임새가 있는 여러 유형의 번역본이 교회에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기능적 등가 이론이 아닌 다른 또
하나의 현대 번역 이론에 의거한 번역을 주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지금까지의 현황
기능적 등가 이론과 거의 동일시되는
복음주의자가 한 사람 있다. 그는 지난 반세기 동안 전세계적으로 성경 번역 작업을 촉진하는데 그 누구보다 많은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유진 나이더(Eugene Nida)이다. 오늘날의 모든 번역가가 그의 작업에 영향을 받았다. 심지어 일반 분야의 번역가들도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의 이론과 번역 작업은 처음에 ‘역동적 등가’ 번역이라 불리다가 나중에 ‘기능적 등가’ 번역이라 일컬어졌다. 당신이 지난 반세기 중에
번역된 성경들을 읽는다면 십중팔구 나이더에게 영향 받은 성경을 읽게 될 것이다.
1940년대에 나이더와 미국성서공회는 번역선교사들을
위해 실제적 지침을 개발했다. 번역 선교사들 가운데는, 성경은 고사하고 문자조차 없는 부족들 속에서 일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 지침 가운데
하나는 설교자, 교사들과 거의 접촉해 보지 못한 사람들, 다윗 왕의 세계나 예수님, 사도들의 세계와 전혀 다른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이들은 번역을 하면서, 고립된 부족(部族)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보충해 넣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에 따라 원어가 말하는 정확한 내용이 설명조의 의역으로 바뀌는 경우도 종종 생겨났다.
(특정 독자들을 위한 쉬운 이해에 초점을
맞춘) 이런 유형의 번역은 제3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오랜 성경 교수와 설교 역사를 가지고, 신학교와 대학을 통해 지도자들에게 성경 및 성경 언어
교육을 시키는, 현대 서방에서도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영어권에서도 유사한 현상들이 발생했다. 20세기 들어, 비교적 오래된 영역본들은
점차 시대에 뒤지게 되고 특히 새신자들이 읽기에는 쉽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낙담해 성경 읽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사실, ‘구원의 능력’이 있는
성경, 현세에서 바른 삶의 지혜를 주는 이 성경을(롬 1:16과 딤후 3:15~17),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와의 접촉도 상실할 위험에 처했다. 성경이 없으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완벽하게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만이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무오하게 보여준다.
사회가 변하고 성경이 점차 이질적인 것으로 보임에 따라 성경을 보다 친근감 있게 만들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1940년대에 필립스(J. B. Phillips)는 그의 신약전서를 ‘현대 영어로’(결국에 이런 명칭이 붙었음) 출간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존의 영국 전통을 따라 성경에 대한 부연설명식의 해석적 읽기로, 성경에 보다 간결하고 함축적으로 언급된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고자 애썼다. 필립의 작업으로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다시 의역의 형태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무디출판사의 디렉터 케네쓰
테일러가 어느 날 자기 자녀들이 가족 저녁 식탁에서 성경을 경건하게 읽는 것 같으나, 성경에 대한 이해는 읽은 만큼 따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매일 기차를 타고 일터로 나가는 시간에 자기 아이들이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언어로 가족 흠정역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리빙바이블(Living Bible: 최종적 이름임)은 테일러의 자녀들에게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어렵지 않은 성경,
뜻이 통하는 성경을 갈망하던 수백만의 미국들에게 만족을 주었다.
필립스와 테일러는 둘 다 친숙한 설명식 언어로 성경을 다시 번역했다(기능적
등가 번역이 이런 방식을 모방한다). 필립스는 원어로 작업했으나 테일러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기능적 등가 번역의 길을 닦는 데 도움을
주었다.
기독교 번역 선교사이자 언어학자인 언스트오거스트 거트(Earnst-August Gutt)는, 번역의 목적 및 대상 독자에 따라
여러 유형의 번역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기능적 등가 번역도 그 중 하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독자들 편에서 자기가 보는 성경이 어느
유형의 번역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의역 혹은 이야기 성경은 많은 독자들에게 유용하겠지만 바른 번역이 아닐 수도 있다.
기능적 등가 번역(오늘날 대부분의 성경)은 이해를 보다 수월하게 하기 위해 성경의 언어, 이미지, 은유 등을 바꾸어 놓는 경우가 잦다. 진지한
연구를 위해서는 성경의 ‘타자성(他者性)’을 보다 투명하게 보여주는 번역이 독자들에게 필요하다. 성경의 말이 독자들에게는 일견하기에 이상하고
기이해 보인다 하더라도 성경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말하도록 허용하는 번역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우리와는 다른 ‘타자’시라면 우리는 주님이 그
말씀을 통해 이야기하시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의 ‘타자성’을 기꺼이 연구해야 한다. 성경의 목적은 예수님을 우리와 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처럼 만드는 것이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후사인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약속에 따라(행 2) 변화시키고 다른 존재로 만들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기꺼운 마음과 열성으로, 사실상 우리에게 이질적인 이 한 권의 책(성경)을 읽고자 노력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번역이 필요하다. 게다가 우리가 교회 그룹에서나 주일학교, 혹은 대학 교실에서 진지한 성경 연구에 임할 때도 이런 유형의 번역본이
필요하다. 기능적 등가 번역의 위험성은, 그 번역이 성경을 우리의 세계와 우리의 기대에 지나치게 맞춘다는 것이다. 또 성경을 길들이고
순화시키다보면 성경이 침묵하게 될 우려가 있다.
번역상의 난점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을 때 성경이 의미하는
바를 알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교실에서 교사들은 종종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가지고 어느 구절을 재번역해 히브리어나 헬라어가 말하는 문자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보다 직접적으로 학생들에게 보여준다. 기능적 등가 번역(즉 대부분의 현대어 번역)의 한 가지 문제는, 성경이 말한 것을 바꾸어
놓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성경의 의미를 추론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것이다.
몇 개의 현대 번역 구절들을 고전적이고 보다 직설적
번역(직역)인 흠정역 구절과 비교해보면 내 말의 요지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흠정역은 골로새서 3장9절에서 10절의 일부를 이렇게 번역했다:
“너희는 옛 사람을 그의 행위와 함께 벗어버렸다; 그리고 새 사람을 입었다.” 이 부분에서 흠정역은 헬라어에 대한 투명하고 직설적인 번역을
제공한다.
투명한 번역(transparent translation)은 원문이 말하는 내용과 원문이 말하는 방식을, 목표 언어(이 경우,
원어를 번역하는 현대의 자국어)가 허용하는 한 가장 근사한 단어 대 단어의 형식으로, 되도록 많이 전달해준다. 모종의 차이와 불완전함이
불가피하지만 말이다.
“옛 사람 … 새 사람” 여기의 영어 단어들은 헬라어처럼 단순 명쾌하다. 여기서 바울이 무엇을 말했는지는 명백하다.
그러나 바울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명백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에 따르면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 혹은 ‘그리스도 안에’
내포되어 있다. 현재 그리스도인들은 양 진영 속에서 불안한 삶을 영위한다. 골로새서 3장에서 “옛 사람”은 최초의 인간인(창 1-5) 아담을
가리키고 “새 사람”은 마지막 아담이자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골 1:15 롬 5:12~21 고전 15:45~50 엡
4:22~24).
이 구절에서 바울의 단어들 그 자체는 이해하기 쉽지만 그 의미에 대한 이해는 보다 많은 노력을 요한다. 그 의미는
골로새서 3장에서 발견되지 않는 배경과 정황(context) 지식에 의존한다. 필요한 배경 가운데 일부는 앞 단락에 주어져 있다. 정황의 문제는
보다 복잡하다.
바울은 2천년 전 오늘날과 다른 정황에서 이 글을 썼다. 그의 말이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도 연관되어 있는가? 그렇다.
인간은 서로 다른 수많은 상황(context) 가운데 살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바울의 첫 독자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다. 그들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 3:3). 그들과 우리의 특정 상황은 다를 수도
있지만 우리의 궁극적이고 공통적인 상황은 그리스도이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독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바울의 말의 의미를 추론하는 데 필요한 외부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 헬라어 지식이 있는
목회자들과 교사들에게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스터디 성경과 주석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더디고 힘들지만 직설적으로 번역된 성경 전체를 읽고
또 읽는 것이 가장 좋다.
새로운 기능적 등가 번역본들은 기록된 내용을 변경함으로써 배경과 정황의 문제를 우회하고자 한다. 이런 번역들은
바울의 말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라기보다 현대인들에게 이미 친숙한 의미를 찾아내려 한 것이다. 기능적 등가 번역의 역자들은, 바울의 말뜻이 그의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 새로운 의미가 독자들에게 영향을 주기를 희망한다. 두 의미가 기능상 동일하기를 원하지만 그게
생각만큼 쉽지만은 않다. 또한 은유를 추상어로 대체시키면 독자의 이해가 쉬워진다는 것도 보장할 수는 없다. 현대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번역본들이 오히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분한 이해 측면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번역자가 하는
일
성경 번역본들은 최선의 경우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풍요롭게 전해주며 원어를 읽는 이들의
이해까지도 풍성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번역이란 것은 본질상 어려운 작업이며 때로 불가능할 경우도 있다. 번역은 늘 타협하며 해석한다.
같은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을 수 있다. “돈이 말한다”는 표현은, 배심원단에게 뇌물을 준 사람이 사용할 경우 자랑거리로서의 의미를 지닐 수 있으나,
무죄한 희생자가 이 말을 사용할 때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래, 그래”(Yeah, Yeah)는 “예, 예!”라는 의미일 수 있으나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할 경우 “허튼 소리 하지마, 난 네 말을 믿을 수 없어”라는 의미가 된다. 청자와 독자는 필연적으로 발언의 의미를 추론한다. 혹은
이야기의 경우 사건의 의미를 추론한다.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의 많은 부분은 언어 그 자체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 어떤 사실들에 대한 지식에
의존한다.
본문이 발언하고 의미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추론하는 것, 이 양자 사이에도 간격이 있을 수 있다. 이런 간격들은 성공적으로
메워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때로는 그릇 이해하기도 한다. 오늘날 언어학자들과 번역가들 사이에서 번역의 이론과 실제에 대해 격렬한
토론이 일고 있다. 이해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가? 여기에 번역과 이해에 내포된 문제에 관한 필자의 소견을 제시할까
한다.
번역자의 가장 중요한 첫째 임무는 언어의 간격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 번역자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발언된 것을 영어로 발언할 수
있는 최선이 방법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도 간단하지 않다. 영어 단어들 가운데 헬라어나 히브리어 단어와 완벽하게 짝을 이루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예를 들어 ‘영혼’(soul)을 뜻하는 성경 단어는 히브리어로 네페쉬, 헬라어로 프쉬케이다. 불행히도 네페쉬는 또한
‘생명,’ ‘목숨,’ ‘욕망,’ ‘목,’ ‘사람’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우리는 인간만이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영혼은 불멸하고’ 예수님이
‘영혼을 구원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 어법에 따르면 인간과 짐승은 모두 ‘살아있는 네페쉬’이며 죽은 사람은 ‘죽은
네페쉬’이다. 성서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네페쉬 혹은 프쉬케를 구한다는 것은 ‘생명’ 혹은 ‘사람’을 구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이 흘리신 희생
제사의 피가 우리의 ‘생명’을 구속(救贖)하는 것은 레위기의 율법에 따라 “생명(네페쉬)이 피에 있기” 때문이다(레 17:11~14). 가장
훌륭한 번역자라 하더라도 히브리어나 헬라어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단어들을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한다.
이 문제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성경적인 구원은 피조물 전체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인’ 부분을 구원한다는 의미에서의 ‘영혼을 구원한다’라는 개념은
성경적이지 않다. 신약성경은 몸의 부활과, 하늘이 땅으로 임하는 새로운 피조계 속의 삶을 가르친다. 앞서 예시한 성경의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번역이 원문에서 말한 것을 간단 명료한 영어로 포착한다 하더라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은 그것이 오늘날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새 사람을 입으라”라는 말은 분명한 우리말이지만 바울의 말뜻을 이해하는 것은 좀 다른 문제다. 성경 배경 지식과
보다 넓은 맥락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바울이 말한 것에 의거해, 바울이 의미하는 것을 바르게 추론하기가 어렵다.
성경번역과 성경
전체로 읽기
우리 현대인들이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세계와 성경 안의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레위기는 전체적으로, 거룩함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기 위한 책이다(성결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레 11:44,45의 인용구)
레위기에 나오는 거룩한, 정한, 부정한, 피, 문둥병 등의 개념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삼손과 사자, 꿀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또 예수님이 문둥병자와 혈루증 있는 여인을 고쳐주신 사건에 대해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 거룩함은 ‘분리’ 이상의 것이다. 분리가 거룩함의 한 부분이긴 하지만 말이다. 거룩함은 우리를 하나님 및 인간과 접하지
못하도록 막는 그 ‘불결, 부정(不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거룩함은 하나님, 우리 자신, 이웃, 피조물과의 조화로운 상태를 의미한다(고든
웬함의 저서인 The Book of Leviticus [Eerdmans, 1979]을 참조하라).
구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실 수 있도록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출 29:45~46; 계 21:3). 우리는 하나님처럼 거룩해질 수 있다(레 19:2; 벧전
1:15~16).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임재하는, 출애굽기 말미의 사건은 구약성경의 오순절이다. 이 구약성경의 오순절 후에 나답과
아비후 사건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 대한 구약성경의 전조로 등장한다(레 10:1~11; 행 5:1~11). 두 사건은 모두 하나님이 구속
역사에서 중대한 새 출발을 개시하시는 마당에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대해 일으킨 죄악이었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이 도살되는 장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동물 제사가 동물에 대한 잔혹한 짓으로 생각될 것이다. 어떤 종족에게는 양(羊)이 없어서 양을 뜻하는
단어조차 없다. 그들은 대신에 돼지로 제사를 지낼 수도 있다. 하나님을 목자로 묘사하고 있는 성경의 그림은 양이 없는 부족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편 23편을 “여호와는 나의, 돼지 치는 자(pig-herd)이시니”라고 번역하는 것은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이것도 “목자”를 뜻하는 단어임)조차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말이 야훼의 왕 되심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호와는 나의 왕이시다. 여호와는 목자가 자기 양떼를 돌보듯이 나를 돌보신다.
돼지 치는
부족을 위한 성경에서 한 번역자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라는 세례 요한의 외침을 “하나님의 어린 돼지를 보라!”와 비슷한 말로 번역했다.
우선 이것은 요한이 말한 바가 아니다. 구약과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돼지는 성결과 거룩하신 하나님의 정반대 개념인 불결한 짐승으로 간주된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더러운 영들”을 돼지들 속으로 추방하신다(막 5:1~13). NIV는 종종 이를 “악한 영들”로 번역하는데, 이는 요점에서
빗나간 것이다. 양들은 여호와께 흠향되는 제물이지만 돼지는 의식적(儀式的), 상징적으로 혐오스런 동물이다. 이런 단어들의 경우에는 목표
언어(원어를 번역하는 자국어)에서 기능적 등가어로 간단히 번역될 수 없다. 설사 해당 문화에서 양이 제물로 사용된다 하더라도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목자, 양, 제사 등이 성경의 세계에서 어떤 것인지를 배워야 한다.
번역자의 작업은 가일층 어렵다. 어떤 이들은 양고기를
무척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양을 드리지는 않는다. 우리가 이런 구약성경의 이슈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라는
말씀의 의미도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이런 종류의 성경적 지식, 우리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이런 지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그런
지식 가운데 많은 부분을, “직설적” 혹은 “투명한” 방법의 좋은 번역에서 획득할 수 있다. 언어학자들과 번역 전문가들도 이런 방식의 번역을
점차 옹호하고 있다. 그런 번역에서는, 독자들의 이해를 용이하게 하는 것보다 원문에서 말한 내용(기록한 내용)에 충실할 것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성경의 표현들과 은유들을 일관성있게 번역하면 독자들은 성경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 혹은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있는가 등등, 성경의 통일성과 정합성(coherence: 서로 잘 들어맞음)을 보다 수월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원문이 신비롭고 모호하며
복잡하고, 또 풍부한 은유적 시사점을 내포하고 있다 하더라도, 혹은 우리의 감각에 이질적이며 충격적이라 하더라도, 이를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
직역은 ‘문제를 확정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기능적 등가 번역은 성경을 단순화함으로써, 본문을 보다 잘 이해할 때까지 본문과 씨름하려는
독자들의 노력을 방해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번역
기능적 등가 번역으로 인해 영어 독자들은 성경이 실제로 말한
바를 이해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솔직한 염려다. 우리에게는, 원문에 대해 보다 투명한 최신의 번역이 필요하다. 번역자의 임무가
원문에의 충실성과, 목표 언어에 의한 직설적 의미 제공, 이 양자 사이에서 어렵더라도 균형을 맞추는 것이라면, 원문에 대한 직역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이자 성경 교사로서 필자는, 목표 언어가 허용하는 정도까지 원문이 빛을 발할 수 있는, 보다 일관성있고 투명한
형태의 번역을 간청하고 싶다.
직역을 하는 번역자는, 성경의 일부 이질성에 의해 독자들이 도전을 받는다 하더라도, 원문의 세세한 면을
풍성히 포착하기 위해 심미적이고도 꼼꼼한 연구를 통해 목표 언어의 자원을 적절히 응용할 것이다. 성경은 상호 관련 언급과 암시, 관용구와 은유,
메아리와 모형 등을 통해 거대한 맥락의 의미를 창조해낸다. 독자들이 번역본에서 이런 유형의 성경 의미를 발견하도록, 성경의 번역자들은 대비
구절, 표현, 이미지들에 끊임없이 유의해야 한다. 이를 소홀히 할 때 본문의 실제적 의미 가운데 많은 부분이 상실될 수 있으며 종종 현대적
의미로 대체될 수도 있다.
직역은 의미깊은 은유들을 가능한 한 어디에서든 보존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이 은유들을 추상적 개념으로 바꾸어 놓지
않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 때문에, 그러한 은유들과 의미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에도 밝히 열릴 수 있다.
첫째, 성경은 주의깊은 독자들에게 자체의 핵심 용어들과 은유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중대한 표현들과 맥락들을 풍부히
되풀이하는, 아주 거대한 책이다.
둘째, 성경이 자체의 특정 문화 양식으로 묘사하고 있는 세상은 한 주님이 창조하시고 한 인류가
세세에 거주해온 한 세계이다. 그 세계의 역사와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의해 밝혀진다(고전 10). 이런 공통적, 포괄적 맥락
속에서 우리는 성경의 타자성에 관한 이해를 체득할 수 있다.
셋째, 성경 그 자체가 교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회의 이해를
도우라고 요구하며 주님은 그런 교사들을 공급하신다. 이는 개인적으로(예컨대 에디오피아의 내시처럼) 성경을 읽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빌립의 도움이 필요했듯이, 몸의 지체들이 다양한 은사로 서로를 도와야 한다는 뜻이다. 개인주의적 성경 읽기는 비성경적이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확신하지 못했을 때 타락했다. 그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해, 뱀의 말, 하나님의 말씀과 모순되는
말을 들었다. 하와는 어느 말을 따를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가 결정하기로 결심했다. 이스라엘처럼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은 다신적(多神的) 사회에서
살고 있다. 수많은 ‘신들’이 경쟁적으로 자기 말을 들려주며 각자가 길과 진리와 생명을 보여주겠노라고 장담한다. 물신(物神)과 바알, 돈과
섹스, 자아와 탐욕이 큰 소리를 지른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지 우리 모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선명하게 듣고 그대로 살도록 도와줄,
언어학자, 번역가, 설교자, 교사, 학자, 평신도가 교회에 필요하다.
신원하 교수
연세대 사회학과와 고신대
신대원 그리고 미국 킬빈신학교(Th. M.)와 보스톤 대학교(Ph. D.)에서 공부했고, 지금은 고려신학대학원의 기독교 윤리학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교회가 꼭 대답해야할 윤리문제들」등이 있다.
이상원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과(B. A.)와 동대학 신학대학원(M.
Div.)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대학원(Th. M.)과 미국 보스톤 대학교(사회윤리 전공)에서 연구했으며 네델란드 캄펜 신학대학
대학원(Th. D.)에서 기독교윤리를 전공했다. 지금은 총신대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교수로 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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