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스크랩] 이런 말씀들을 문자 그대로 수용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수호천사1 2015. 4. 11. 18:19

이런 말씀들을 문자 그대로 수용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박경은  |  0117669763@nate.com

 

이런 말씀들을 문자 그대로 수용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신학적, 해석학적 필터링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10:36~37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성경=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본문의 내용들이 모두 문자 그대로 우리들의 삶에 아무런 여과의 과정도 없이 수용되거나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의 내용들은 우리가 사는 시대와 아주 다른 시대에 우리가 모르는 언어로 기록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와는 전혀 다른 지역에 살던 고대의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사용하던 문자로 기록한 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아무리 성경저자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본문을 기록했다고 할지라도 본문의 일차 독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더구나 일차 독자들에게 주어졌던 말씀의 의미가 문자 그대로 오늘날의 우리를 향한 말씀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적, 해석학적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성경본문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아무런 이의 없이 우리들의 삶에 적용할 수도 없거니와 설령 적용한다고 할지라도 실천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본문은 성서저자가 사용했던 고대어의 번역이기 때문에 번역과정에서의 오류들을 비롯한 각종 걸림돌들이 본문 안에 개입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본문에 대한 신학적이며 해석학적 필터링을 통하지 않은 채 ‘성경=하나님 말씀’이라는 “맹신적 책자 신앙”에 천착되어 “성경본문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기면 본인의 믿음에 대해 스스로 만족할지는 모르나 그 결과는 뻔해집니다. ‘실천할 수 없는 내용’으로 범벅이 된 고대 종교문학으로 남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실천하지도 못할 말씀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지요. 백날 떠들어야 행하지도 못할 말씀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습니까? 성경말씀을 전한다고 해 봐야 설(說) 풀이만 될 뿐입니다. 실천이 안 된다는 것은 결국 실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일 뿐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성경=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생각에만 한정되어서 창세기부터 계시록 끝 절까지 모든 문구들이나 구절들에 대해 아무런 신학적, 해석학적 조명도 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기보다는 반드시 주해의 과정을 통해 본문의 일차 의미를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밝힌 후, 그 일차 의미가 오늘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성경과 그리스도인”의 역학관계 속에서 적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가족들 버리고 예수 믿어라?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마10:36~37의 말씀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마10:36은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말씀합니다.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37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 믿는 것에 식구들이 방해가 되면 다 버리라는 뜻인가요?

   마5:44에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입장에서 볼 때 가족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이겠지요? 그러나 10:36~37에서 그런 뜻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10:36~37의 말씀이 들어 있는 문맥의 흐름 속에서 볼 때 정말로 이 말씀의 뜻이 ‘가족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면 마10:21의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미래형으로 되어 있으니 앞으로 그런 일이 발생하면 믿음의 사람들은 더욱 더 가족을 사랑해야 할 것이라는 뜻인가요?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혼한 사람들은 모조리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까? 말씀대로 안하고 이혼했으니까.... 아니면 같이 살면 사랑할 수 없어서, 원수와 함께 한 지붕 아래에서 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니까,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원수지간이 되려고 이혼했다고 봐야 하나??

   이와 같이 본문말씀들은 액면 그대로 쉽게 수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본문내용=기록된 문자들 모두 영감받아 기록된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생각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이 불가한 고대유물의 말씀’으로 남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백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면 10:36~37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마태복음 저자가 살던 당시의 ‘박해상황’을 전제해야 합니다(17절). 마태복음 저자는 예수를 그리스도, 오시리라고 예고되었던 메시아, 바로 그 분이 오셨다고 고백하면서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있던 마태교회의 교우들을 위해 본문의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로 말미암아 가족이 해체되는 지경에 놓여 있던 당시의 교우들을 향해 예수로 말미암은 신앙지조를 강조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10:34의 ‘예수 오신 목적’의 역설적인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얼핏 읽으면 ‘싸움 붙이기 위해 왔다는 뜻인가?’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검은 잘라내는 도구이므로 ‘갈라짐’, 혹은 ‘분열’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로 말미암아 생긴 극단적인 분열상황을 연상할 때 본 구절이 좀 더 잘 이해됩니다.

   마태복음이 기록되던 당시에 예수로 말미암은 ‘분열’이나 ‘갈라짐’ 현상으로 인한 가족 간의 갈등상황 및 유대교인들과의 첨예한 대립현상이 심각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작게는 예수를 믿는 믿음의 문제로 가족 간에 불화가 생기고 크게는 사회공동체 안에서 유대인들과의 갈등현상이 증폭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예수로 인한 가족들 간의 갈등과 대립은 불화의 정도를 넘어 증폭된 다툼의 결과로 칼부림이 일어나 실제로 ‘목숨을 잃기도 했던 현상’이 초래되기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39절b 참조). 그 만큼 예수로 말미암아 생긴 가족들 간의 불화가 의외로 대단했었을 것이라는 분위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 마태교회 공동체에 소속된 그리스도인으로 남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교회에 소속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된 덕목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것(38절 참조)’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박해상황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그리스도인으로 남는다는 것은 순교자의 삶을 사는 것으로 인정될 수 있었습니다(39절). 그런 각도에서 10:34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정지작업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의미로 새겨질 수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정체

   이런 이해를 갖고 10장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면 ‘박해상황 속에서 예수를 배신하지 않는 믿음’이 주제임을 볼 수 있습니다(10:33 참조). 그 믿음은 절대로 ‘입으로만의 믿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예수를 배신하지 않는 구체적인 행동’이 그 믿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나타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행동하는 믿음’은 크게 두 가지의 영역으로 대분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끝까지 견디는 인내입니다(22절).

   박해의 상황 속에서 예수의 이름을 배신하지 않는 믿음은 인내로 나타납니다(22절). 그 인내는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는 행태들이 자행된다고 할지라도(21절) 변질되지 않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견디며 예수를 배신하지 않고 여전히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 그것이 진정으로 신앙인의 ‘믿음’을 표징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인내는 마냥 참기만 하는 문자적 ‘견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희망’이 바로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희망이 23절에 나타나는 재림주 기대입니다. 그러므로 박해상황을 견뎌내는 인내가 없다면 그것은 재림주를 포기하는 것일 뿐이므로 도무지 참다운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박해상황을 이겨내는 믿음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 재림주를 기다리면서 박해상황을 견뎌내는 믿음이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둘째는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입니다(26절).

   마태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양이 이리들 사이에서 사는 것과 같았습니다(10:16). 웬만한 믿음이 아니면 그런 상황을 버텨내기가 어려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무엇보다도 두려움이 박해상황을 견디지 못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렵다고 해서 그 상황을 버텨내지 못하면 ‘배신’이고 ‘배신’이면 ‘행동 없는 믿음’일 뿐입니다. 상황에 겁을 먹어 두려워하면 상황을 견디지 못하게 될 것이고 견디지 못하면 예수를 포기하는 현상만 도출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믿는다고 입으로만 웅얼대는 것은 참다운 믿음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이 진정성 있는 믿음이라면 십자가의 고난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넉넉히 감내하신 예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38절). 그러기 위해서는 상황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에 합당한 참다운 믿음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합니다(28절a).

   아무리 죽음의 위협을 받는다 할지라도 참새보다 귀한 그리스도인의 생사여탈권은 박해자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박해자의 생명 역시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자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를 부인한다며 예수께서도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33절).

   이런 흐름 속에서 36절을 보면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의 뜻과 21절의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의 의미, 그리고 37절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의 말씀이 주는 “역설적인 강조점”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38절의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가 지향하는 마태복음의 목표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행함이 있는 실천의 믿음이란?

   마태복음은 예수의 제자였다가 예수를 배신한 가룟유다의 최후를 사도행전과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27:5↔행1:18). 성경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에 사고체계가 눌려 있었을 시절에 신심이 매우 두꺼웠던 사람들은 이 두 기록을 조합하여 가룟유다가 목을 맨 끈이 끊어지는 바람에 떨어져서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오게 되었던 것이라고 주장했었습니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무슨 끈으로 목을 맸길래 목을 맨 줄이 끊어져 곤두박질을 했다고 보았던 것인지....

   분명한 사실은 마태복음 저자는 가룟유다의 죽음을 “자살”로 보고 있고 사도행전 저자는 “사고사”로 봤다는 점입니다. 자살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행위이므로 마태복음의 맥락에서 본다면 예수를 부인하는 것은 은총으로 받은 구원의 선물을 스스로 반납하는 자살행위와 같은 짓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마태복음 저자가 전하는 구원의 은총과 관련하여 ‘행동하는 실천의 믿음’이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끝까지 담대하게 갖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는 사회적 박해상황이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우리의 사회생활 속에서 우리의 믿음이 진정성 있는 믿음으로 드러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이 말씀의 적용차원에서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성서본문의 상황과 우리의 삶의 정황이 다르기 때문에 “인내와 담대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행동으로 증명하는 삶의 모습”이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의심할 수 없게도 참다운 믿음은 ‘입발림 신앙’, ‘말만 많은 죽어버린 믿음’이 아니라 마치 봄에 새싹이 나오는 것처럼 생명의 능력이 용솟음치는 현상적인 믿음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면 현재의 박해 없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생동감 넘치는 꿋꿋한 믿음, 생명력이 약동하는 담대한 믿음의 현상을 강력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현재의 상황 속에서 우리의 믿음이 생명력을 발하는 산 믿음으로 증험되길 소망합니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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