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은, 자연의 법칙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메시지라고 했습니다. 사계절이 순환한다든지, 모든 것이 생성되고 소멸한다든지, 자연이 끊임없이 자기 균형을 맞추려 한다든지 하는 법칙들은 그 자체가 인간을 향한 창조주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알아듣느냐 마느냐 복종할 것이냐 반항할 것이냐는 인간의 몫이겠지만, 그 몫을 자연이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파헤쳐 놓은 강물이 스스로 원래 상태로 복귀하려는 것은 그 의지가 꺾을 수 없는 '절대언어'에 따르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자연뿐 아니지요? 자세히 탐구해 보면 사회나 인간관계 같은 것들 역시 동일한 '절대적 원리'에 따르고 있습니다.
'절대'란 거기로부터 모든 삶의 양태가 하나의 맥락과 궤로 연결되어 통일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배타적인 게 아닙니다. 통일, 곧 하나로의 화해이고 일치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전인적 인격입니다. 그 메시지를 한 인간이 자신의 인격 안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 됩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메시지가 됩니다. 말도 없고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고 나타나지도 않지만, 그는 아는 겁니다. '이제 나는 알았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무엇을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이고, 인도하시는 길이라는 것을요. 그러니 그 방식을 따르고 그 인도에 부합하려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차분해져야 하고, 탐구심과 이해력과 집중력이 있어야 합니다. 파편화한 삶에 시달리면서는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주된 공부는 파편화한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탐구이고,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라는 게 얼마나 파편적이고 파행적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모두가 전체주의처럼 '아멘'을 외치는 공론화한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 나에게 말씀하시는 내 인생을 사용하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아멘' 하게 됩니다. 이게 선택받았다는 말의 의미일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에게 그의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와 복종이 요구되는 여정입니다. 그것은 '받아들임'과 '저항'을 동시에 요구합니다. 이 이해와 순종에 입각한 일관된 삶의 의지적 태도를 우리는 '근본주의(根本主義, fundamentalism)'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근본주의란 옷깃을 여미고 뭔지도 모르면서 거룩한 척 행동하거나, 제한적으로 종교적인 특별한 일에 헌신하라는 말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원리주의자들에게서 보이는 고립되고 배타적인 율법적 관념론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현존하는 나의 삶이 신(神)의 현존의 증거가 되느냐 하는 겁니다. '네가 지금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고 있느냐? 살고 있느냐?' 주장이 아니라 관념이 아니라 교리가 아니라 영감, 곧 삶의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무수히 느끼다시피 감동이 어찌 억지로 일어나나요? 억지로 감동한 척하면 그것만큼 추악한 일이 없을 겁니다. 그것은 자연에 따르는 게 아니니까요. 진짜 감동이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진실한 자각 가운데서 나오는 거지요. 진정한 감동에는 일관된 이성과 책임 같은 것이 따르지만 센티멘털은 '그때그때 달라요'가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우상들처럼 나타나 보이면서 기교를 부리지 않으십니다. 가령 사람이 영과 혼과 육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때, 영이 영을 자각 못하고 혼이 혼을 자각 못하고 육이 육을 자각 못하는 것처럼, 나의 삶이 신의 존재의 증거가 되는 종교적 감각은 쉽게 망각되고 무시됩니다. 특별한 영적 경험도 별로 도움이 못 됩니다. 인간의 이성과 욕망도 하나님을 알기를 거부하지만,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목소리 역시 집요하리만치 인간에게 무심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서두르시는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과묵하고 느리고 고요하지요? 축복일지라도 죄악일지라도 그 효과가 나타나려면 적어도 씨가 땅에 떨어져 싹트고 자라서 열매 맺는 시간만큼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효과가 나타날 때쯤 인간은 벌써 그 얘기를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이 그렇다고 서두르시는가? 아닙니다. 인간의 조급함과 하나님의 느림은 영원한 비협조 부조화입니다. 이게 안식일적인 노동입니다. (인간들은 안식일은 이해 못하고 안식일이 토요일이냐 일요일이냐를 가지고 싸우지요.) 세상은 언제나 이런 본래 자연에 따르는 근본주의적 헌신에 힘입어 치유되고 회복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하나님이 망각되고 무시되는 이유 역시 그 겸손하고 고요한 숨겨진 방식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언제나 간과되는 것이 '하나님'이고 '말씀'입니다. 우리가 입으로 '하나님'이라고 발음할 때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거기 계셔야하고, '말씀'이라 말할 땐 거기 하나님으로부터 울리는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 없이 그냥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 버리면 거기엔 하나님도 하나님의 말씀도 없이 다만 상징과 기표로서 의사 전달만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패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정작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우리는 성령(聖靈)을 상실하게 됩니다. 관용적 표현이란 빠른 소통에는 효과를 내지만 진정한 소통에는 걸림돌이 되는 경우들이 많지요. 서로가 말을 다 통했는데도 절대 통하지 않는 관계라면 어떻겠습니까?
이런 위험을 인식하면서 오늘날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설교)을 헤아려 볼 때, 거기에는 두 가지의 기능적 측면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목회적 측면이고 그 다음은 예언적 측면입니다. 목회적 측면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개개인에게 적용해서 교회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해 주는 일종의 종교적 서비스라고 할 수 있고, 예언적 측면은 이와는 달리 개개인의 이해타산을 초월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자체를 환기시키는 계몽적 사역입니다. 곧 실생활을 도와주려는 게 아니라 파괴하고 깨뜨려 제고(提高: 쳐들어 높임)하게 해 주는 기능입니다. 물론 목회에 일깨움과 가르침이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 주된 관심과 목표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수많은 목회자들을 '목회적 사역자' 혹은 '예언적 사역자'로 나누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사목(司牧)이라는 말도 쓰지만 예언과 목회는 목적이 사뭇 다릅니다. 본질적으로 예언은 아나키즘(anarchism)적이고 목회는 전체주의적이지요? 우열을 나누기 전에 이 둘은 자주 서로 충돌합니다. 왜 충돌하는 것이며 이 충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화해시켜야 할까요? 기독교인인 우리가 경전으로 믿는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바로 이러한 두 차원의 서로 다른 성경이 우리의 선입견 안에 존재함을 알아야 합니다. 목회만 있고 예언이 사라지거나, 예언만 있고 목회가 사라지거나 할 테지만 주로 나타나는 병폐는 목회만 남은 예언의 실종입니다. 그 증거가 신앙의 이 두 측면, 곧 개개인의 목회적 차원과 예언적 차원이 충돌할 때 그 원인과 의미를 묻고 화해를 모색하기보다 자기에게 좋은 쪽으로 해석해 버리는 경우들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목회적 측면 일변도로 말씀을 가공해 버리는 겁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보면 전투에 나가기 전 '주역'(周易)에 의지해 점을 친 기록이 자주 나옵니다. 흥미로운 것은 나쁜 점괘가 나오면 좋은 괘가 나올 때까지 다시 쳤다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피치 못할 전투를 앞두고 가장 길한 징조를 의지하겠다는 의미였을 겁니다. 매번 최후의 결전인 전장에서 오직 승리의 확신을 확보해야만 했던 지휘관의 실존적 고결함마저 느껴집니다. 그것은 결연한 이성이며 거룩한 종교성이겠지요? 운명에 대한 최후 복종이며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하려는 치열한 자세였을 겁니다.
신혼시절 아내와 아침시간을 큐티(QT) 나눔으로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주말에는 종일 큐티만 한 적도 많았습니다. 한 줄의 말씀이 도대체 어디까지 '나'라는 개인의 내면에 잇닿아 있는지를 시험해 보는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좀 신비화, 신화화하는 경우들이 있는 겁니다. 즉 그날 분의 본문을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할 때 그야말로 점을 치는 것 같은 태도가 발생하는 겁니다. 아주 그것을 추구했던 '옥스퍼드운동'이라는 캠페인이 있기도 했었습니다만, 이건 숭고한 본래 목적과 달리 아전인수(我田引水)의 해석으로 유치한 신앙을 길들일 수도 있습니다. 즉 자기 마음에 들어온 구절, 자기가 좋아하는 구절, 혹은 유리한 구절에만 매달리게 되는 겁니다. 나중엔 성경이 아니라 삶이 그런 식이 되겠죠? 말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우연성'이지만 결국엔 주관적 필요에 의한 '필연성'이 되는 겁니다. 거기에 부합하지 않는 구절은 거부하거나 대충 넘겨 버리게 되는 거지요. 바로 이런 태도가 긍정주의와 성공주의, 번영신학의 문제가 됩니다. 어째서 이런 태도가 나타나는 걸까요?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주권적 의지에 대한 몰이해(불신앙)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적으로 자기 편의주의적인 몰입과 도취가 개입되는 거지요.
둘째로 현실을 직시(直視)하고 그에 따르는 직면(直面)을 기피하려는 심리적 자기방어가 숨겨진 이유가 됩니다. 한마디로 어린아이 같은 환상 속에 살고 싶은 거지요? 현실을 직시하고 직면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단순히 긍정이나 부정의 반응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긍정과 부정의 양면을 다 직시하고 직면함으로써 그것(육)을 통찰하고 그 본질(영)을 뚫고 나가는 것이 진정한 긍정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기에게 닥친 어떤 문제나 사건 자체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기보다 그에 대한 회피 반응으로서의 긍정적인 태도만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러나 조금만 진실한 사람이라면 이 긍정이 부정의 다른 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결국 부정적인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겁니다. 회개도 이럴 때는 값어치가 없어집니다. 그건 그저 계속적인 왜곡과 속임일 뿐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종교적 태도로 발전하게 되면 일종의 기만이 라이프 스타일을 이루게 됩니다. 나쁜 것은 보지 않고 좋은 것만 본다는 것은 일면 건강한 측면이 있지만 거기엔 진실에 대한 뒤틀린 기만이 항상 따라오게 되는 겁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이미지가 위선을 넘어 기만적이 되었다는 데 여러분은 동의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강단이 남발하는 긍정의 메시지들은 부정적인 우리 사회와 우리가 놓인 현실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걸 믿음이라 하지만 실은 각자가 욥의 친구들처럼 자기들의 당황과 곤란을 감추느라 급급한 겁니다. 진실이야 어떻든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말씀을 자기 좋을 대로만 해석하는 겁니다. 회개와 개혁을 말할지라도 영감이 없습니다. 감동이 없으니 센티멘털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고,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령, 서울의 어느 대형 교회에서는 당회장 목사님의 오랜 파트너였던 재정장로가 비자금 문제로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아무리 의리부동한 세상이라지만 인간적으로 따지자면 목회를 지속할 낯이 없어야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심지어 자살이 아니라 병으로 사망했다고 거짓말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분의 장례에서도 예배가 드려졌겠고 설교가 있었겠죠? 어떻게 했을까요? 그 모든 것을 우리는 거짓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쩔 수 없는 믿음의 행위라고 해야 할까요? 판단하려는 게 아니라 묻고 싶은 겁니다. 예언이 사라지면 무엇이 남을까요?
최근 뉴스에 등장하는 자살 사건들을 보면, 상당수가 당사자들에게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교회의 장로며 안수집사였다는 칭찬인지 비꼼인지 모를 수사가 붙습니다. 고인들을 비난하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얼마나 마음의 궁지에 몰려 괴로웠으면 극단적인 자진을 결행했을까요? 동정이 갑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기독교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정한 희망이고 희망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겁니까? 긍정주의적인 번영신학은 잘 나갈 때는 자기 교리에 잘 들어맞습니다. 그러나 진짜 절망이라는 판단에 이르면 역설적으로 더 이상 진짜 희망이 없는 겁니다. 잘 나갈 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절망에 이르면 희망의 여지가 없는 이것이 그들의 진짜 신앙이었던 겁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죠. 천국에 못 간다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자신이 어떤 내용을 가진 신앙인인지를 안다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합니다.
셋째로 목회적 야망과 목표가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이유에 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구약성서와 신약 복음의 연속성과 차별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다(고린도후서 3:15)'고 말했지만, 이 목회적 목적이야말로 '모세의 수건'이 아니라 '욕망의 수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성경 말씀을 읽을 때 투명하게 그저 읽기만 해도 저절로 알려질 메시지도 이상하게 가려져서 보이지 않게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기독교인들은 지난 2,000년간을 이 책을 읽고 해석해 왔습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게 남아 있을까요? 그런데도 여전히 해석이 문제가 되고 설교가 문제가 되는 겁니다. 곧 그러한 수건 덮인 해석들이 끼치는 교회적 해악과 사회적 해악이 있습니다.
바른 메시지와 그 영향력을 차단시킨다는 겁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선전하고 광고하고 장사합니다만, 동시에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고 감추고 있는 진실을 드러내고 일깨우는 예언적 메시지를 차단하려 합니다. 이게 아이러니이지요? 가장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파하는 기독교인들이 어느 면에 가면 가장 말이 통하지 않는 부정적이고 편협하고 독선적이고 뻔뻔하고 폭력적인 사람들이 됩니다. 천국을 꿈꾸고 이야기하고 전파하는 그들이 세상을 조금만 낫게 바꾸자는 목소리에도 안면을 바꾸고 외면을 합니다. 문자와 교리를 강력히 주장하다가도 말문이 막히면 '무조건 믿어라, 불신자는 지옥행'이라는 무서운 무속적 신비주의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 신학적 불균형과 실천적 비일관성의 양면 자기모순을 지닌 게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보편적 자화상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의 그러한 개성적 성향들은 그대로 집단 전체의 성격이 되어 있습니다.
가령 작금의 대형 교회들은 각기 나름대로 성격상 하나의 인격과도 같은 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불가피한 일이지만 그것은 담임목사의 인격과도 부합합니다. 곧 그와 그가 풍기고 선포하는 유무형의 메시지(영향력)가 그 교회인 겁니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사랑의교회는 그대로 옥한흠 목사님이고 온누리교회는 그대로 하용조 목사님이며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그대로 조용기 목사님인 겁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사사들과 예언자들과 왕들이 구약성경의 서명(書名)을 장식하고 있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 외에도 구름같이 허다한 사례들이 많겠죠? 저는 그들의 차세대를 언급하고 싶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 소견에 그들은 일세대가 떠나간 잔여의 의미밖에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가봇(사무엘상 4:21)'입니다. 무시하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경험과 직관이 내리는 결론입니다.
저는 원칙적으로 교회를 세습한다거나 물려받는 목회 방식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런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가령 애플을 누가 물려받든 그게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저에게 교회란 한 사람의 목회자가 사라지면 후임자가 즉각 초빙돼 이어지는 그런 게 아닙니다. 백년 이백년 전통의 프리미엄을 누려 가며 번영을 구가해야 하는 기관도 아닙니다. 목자가 사라지면 양들은 흩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또 다른 누군가를 광야에서 세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예비해야죠. 그게 계승이고 승계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어떻게 거대한 콤플렉스(Complex)에서 찾겠습니까? 정말 그런 스승이 나타난다면 저는 대형 교회가 아니라 한국의 기독교인이 다 그에게로 모인대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기꺼이 그에게로 갈 겁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세계의 기독교인이 다 거기 모인대도 그건 저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광야의 사람을 기다려야하는 거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사라지면 우리 교회는 자연 해산하고 교인들은 각자 자기의 갈 길을 찾아가야한다고 봅니다. 그런 얘길 할 규모도 안 되어 말이 서진 않지만, 누구에게 물려주고 싶은 맘도 없습니다. 교회가 무슨 국가기관인가요? 혹은 기업인가요? 이익집단인가요? 가령 동학(東學·천도교)이 국가를 상대로 농민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왕성했었지만 왜 지금은 자취도 없어졌을까요? 탄압과 박해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최제우(崔濟愚, 1824~1864)와 최시형(崔時亨, 1827~1898)과 전봉준(全琫準, 1854~1895) 같은 지도자가 다시 나타나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록될 만한 예언자가 전무했던 몇 백 년의 기간도 있었습니다. 그때라고 목회자가 없었겠습니까, 사제가 없었겠습니까? 교황도 있었고 대주교도 주교도 보제도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그런 의미에서 세습이 교회의 당면 문제가 되는 교회를 저는 제 마음에 교회로 인정하질 않습니다. 제 말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습니다. 제 믿음과 양심이 그렇게 여긴다는 고백입니다.
이상 일별해 본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전반적 실태입니다.
1) 신앙의 목적에 대한 목회적 예언적 측면에 대한 몰이해.
2) 기복주의적이고 성공주의적인 긍정 일변 신앙의 기만성.
3) 1, 2항의 교회 체질이 공고화하고 사회화하는 과정의 영적 권능(영향력) 상실.
모순되게도 긍정주의 신학의 원동력은 콤플렉스입니다. 곧 두려움과 열등감의 역동이 자아도취와 과장된 성역으로서의 대형 교회를 태어나게 하는 겁니다. 출발하는 지점으로부터 벌써 과녁을 벗어난 것이죠? 따라서 대형 교회의 성장은 한국교회와 사회에게 모순의 비대함일 뿐이지 축복의 선물일 수가 없는 겁니다. 거기에선 하나님의 말씀인 예언은 실종되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이해를 가로막는 뻔뻔한 욕망의 예언이 '수제천'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2.
선지자 예레미야는 주전 627년경(요시야 13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유다 최후의 네 왕들의 시대를 살면서 약 41년간, 예루살렘 멸망 후에 이집트로 피체되기까지 예언자로 존재했습니다. 그는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자기 시대의 정치·종교 권력자들에게 저항했고 그로 인해 일생을 형극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는 성전의 수비대에게 매를 맞고 감금을 당했고, 매국노라 비난받았고, 온갖 음해를 받았고, 구덩이에 던져지고 시위대 뜰에 위리안치당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입으로 자기나라의 멸망을 선포했고, 침입자들의 학살과 난민과 포로들의 참상을 지켜보았고, 마지막엔 반역자라는 이름으로 죽임당했습니다.
만군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를 헛된 희망으로 채워 주는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라. 그들은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환상을 지껄이는 것이지, 야훼의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야훼의 말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쉴 새 없이 '너는 잘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완고하게 자신의 고집을 세우는 자에게 '너에게는 아무 재앙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들 가운데 누가 야훼의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으며, 야훼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은 적이 있느냐? 내가 보내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달려갔고, 내가 말해 준 적도 없는데 그들은 예언했다. 만일 그들이 나의 회의에 참석했다면, 그들은 나의 백성들에게 나의 말을 선포했을 것이요, 백성들로 하여금 악한 길에서 벗어나게 했을 것이다.
(중략)
나는 나의 이름으로 거짓말하는 예언자들의 말을 들었다.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꿈을 꾸었다!' 하고 그들은 말한다. 예언자들은 언제까지 자신들의 마음속에서 꾸며 내는 거짓말을 할 셈이냐? 바로 그들의 조상이 바알로 말미암아 나의 이름을 잊은 것처럼, 그들은 꿈 이야기로 나의 백성들로 하여금 내 이름을 잊어버리게 할 생각인 것 같다. 꿈을 꾼 예언자는 그 꿈이나 지껄여라. 그러나 나의 말을 들은 예언자는 그 말을 충실하게 전하여라.
(중략)
나는 나의 말을 훔치는 예언자들을 칠 것이다. 혀를 놀려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하고 말하는 예언자들을 칠 것이다. 내가 보내지도 않았고 그런 일을 맡기지도 않았는데, 거짓말과 분별 없는 짓으로 나의 백성을 빗나가게 한 예언자들을 나는 칠 것이다. 그들은 이 백성에게 조금도 이로울 것이 없다.
'이 백성 가운데 어느 누가, 혹은 어느 예언자가, 혹은 어느 사제가 너에게 '무엇이 야훼의 짐인가?' 하고 묻거든, 너는 '네가 바로 야훼의 짐이다. 내가 너를 던져 버리리라' 하고 야훼께서 말씀하신다고 대답해 주어라."
예레미야의 신학은 당시 유다가 처한 국제적이고 지정학적인 상황들 속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관제 예언자 학교나 제사장 학교에서 배운 게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시민들 속에서 한 사람의 시민된 입장에서 체험적으로 성숙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설교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여기서 당대의 예언자들, 사제들, 목사들, 교회의 지도자들을 하나님의 적이라 규정합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감언이설이고 자기 욕망의 발로에서 나온 것이고 백성들의 부패한 마음에 부합한 것일 뿐이라 질타합니다. 바로 그 이유로 백성은 그를 따르지 않았던 겁니다. 오늘날 자동차도 마다하고 지하철로 몰려가 대형 교회의 좌석을 메우는 평신도들은 거기서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요? 그들의 설교, 그들의 찬양, 그들의 기도, 그들의 헌금은 다 어디에 바쳐지는 걸까요? 당대의 예루살렘, 예수님 시대의 성전에는 종교적 선행과 프로그램과 사업들이 없었던가요? 예언이 사라지면 목회는 무의미해집니다. 하나님은 바로 너희가 나의 대적이고 짐이고 원수라고 하는데, 그들이 '예레미야'에 이런 글이 있는지조차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주 인간적인 고뇌와 고립감을 호소하고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모세로부터 이어져 온 예언자들의 반열에 서 있다는 자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대의 구태의연한 무수한 사목자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 오늘의 관점에서 보자면 비주류, 비타협, 그로 인한 고립과 고난, 거기서 더욱 강화한 간 그의 메시지들은 진정한 예언자로서 예레미야를 증거해 주는 기록들인 겁니다. 바로 이것들이 당대에 그가 거부당하고 그의 메시지가 배척받았던 증거들인 겁니다. 과연 이것이 우리 시대에 지시해 주는 복음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보라 한 민족이 북방에서 오며 큰 나라가 땅 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나니 그들은 활과 창을 잡았고 잔인하여 자비가 없으며 그 목소리는 바다가 흉용함 같은 자라. 그들이 말을 타고 전사같이 다 항오를 벌이고 딸 시온 너를 치려 하느니라 하시도다. 우리가 그 소문을 들었으므로 손이 약하여졌고 고통이 우리를 잡았으므로 아픔이 해산하는 여인 같도다. (6:22-4)
예레미야 예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심판의 기정사실화에 있습니다. 그는 선지자로 부름받은 그 첫 설교부터 멸망을 선포합니다. '너희가 회개하면 멸망치 않을 것이다(그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말하지를 않습니다.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게 아닙니다. 이미 틀렸다는 겁니다. 긍정주의적으로 좋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다 들어주신다는 게 아니라, 그렇지 않은 현실의 엄중함을 직시하라는 겁니다. 그게 기독교적 종말론입니다. 그 절망 너머에 죽음을 통과하여 하나님이 계신 것이지, 하나님은 상상하는 대로 자가 조정이 가능한 다변신 로봇이 아니신 겁니다. 따라서 세상이 자신만만하고 여유 만만할 때가 가장 위태로운 때입니다. 아직 기회가 있고 여유가 있으니 하면서 뒤로 미룰 때가 가장 어리석은 때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11:14)
우리는 이게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일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절대적 죽음만이 새로운 생명의 약속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이 시대에 만연한 긍정주의적 메시지들이 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침묵하실 때조차 끝없이 자기에게 유리한 말씀을 찾으려 성경을 뒤적이고 있습니다. 시인 김수영(金洙暎, 1921~1968)의 말처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마'는 겁니다. 끝내 모르는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진리의 빛을 받아 알게 된 사람은 더 이상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것은 여전히 자기의 진실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기만에 게으르게 타협하고 굴복하는 것입니다.
깨어나십시오. 기도를 드린답시고 눈을 감은 채 잠꼬대 같은 꿈과 비전을 보지 말고 눈을 떠 우리가 놓인 현실을 보아야 합니다. 특히 대형 교회라 불리는 교회의 성도들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절대언어'를 제고해 보아야 할 겁니다. 욕을 먹고 비난을 받으면서도 불명예를 감수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세례요한처럼 사도 바울처럼, 광야에 나와 보지 않고는 예루살렘이라는 콤플렉스의 콤플렉스가 보이질 않는 법입니다. 어찌 광야에서 울부짖는 사자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애완용 스피치같이 길들이겠습니까. 이 설교를 받을 만한 분들은 받으시고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그러나 '예레미야'에 이런 말씀이 있는 줄은 알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천정근 / 열린 교제와 깊이 있는 말씀의 공동체를 지향하며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에 주력하는 자유인교회 목사. 산문집 <연민이 없다는 것>(케포이북스, 2013) 저술. 모스크바국립대학과 동 대학원에서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학 석사(M.div.) 과정을 졸업했으며, 한독선연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논문으로 <1880~90년대 똘스또이 중편에 나타난 종교 윤리적 관점>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