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학 강의
최갑종 교수
제 1강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엄밀한 의미에서 성경을 읽는 자는 원하든 원치 안하든 모두 부분적으로 성경의 해석에 이미 참여하고 있다. 그 누구도 성경해석의 과정이나 참여 없이는 성경을 읽을 수도, 성경을 이해할 수도 없다. 우리가 한글 개역개정판 성경을 읽든, 한글표준번역판을 읽든, 공동번역을 읽든, 영어성경 New International Version(NIV)을 읽든, New Revised Standard Version(NRSV)나 New American Standard Bible(NASB)을 읽든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한글번역이든, 영어번역이든 이미 번역자 자신의 이해와 해석의 과정을 거친 성경본문을 읽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다.1)
예를 들면, 로마서 3:25절에 나오는 헬라어 iJlasthvrion을 우리말 개역개정판은 “화목제물”로, 표준판은 “속죄제물”로, 공동번역은 “제물”로 각각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반면에 영어번역성경인 NIV, NRSV는 똑같이 “a sacrifice of atonement”로, NASB는 “a propitiation"로 번역하고 있다. 로마서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는 헬라어 savrvx을 우리말 개역개정판과 표준판은 거의 “육신”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공동번역은 동일한 단어를 로마서 1:3절의 경우에는 “인성(人性)”으로, 다른 경우에는 “육체”로 번역하고 있다. 영어성경의 경우 NRSV, NASB는 savrvx를 "the flesh"로 번역하고 있으나, NIV는 로마서 1:3절에 있는 savrvx의 경우는 “human nature"로, 8:3절 하반절의 경우는 “sinful man"으로, 그러나 그 밖의 대부분의 경우에는 “sinful nature"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로마서 3:25절을 “화목제물”로 번역한 본문을, 어떤 사람은 "속죄제물"로 번역한 본문을 접하게 되는데 두 단어의 의미가 서로 같지 않다. 로마서 1:3절을 “인성”으로 번역한 것과 “육체”로 번역한 것의 의미가 동일하지 않으며, “the flesh"나 ”the sinful man"이나 “the sinful nature"도 각각 그 의미가 동일하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미 번역자의 선택과 해석을 통하여 결정된 성경본문을 접하고 있다.
헬라어원문성경이나 히브리어원문성경을 읽는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헬라어나 히브리어의 단어나 문법이나, 문장구문에 대한 기존의 지식이나 이해 없이는 헬라어나 히브리어원문성경을 읽을 수도, 해석할 수도 없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헬라어나 히브리어 사전, 그리고 문법책이나 문장구문에 대한 해설집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를 들면 저명한 Bauer2)나, Liddell-Scott3)나, Kittel4)의 헬라어사전들을 비교해보면 동일한 단어나 동일한 문장구분에 대한 해석이나 설명이 저자나 편집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전이나 책을 집필한 당사자의 헬라어단어나 구문의 이해나 해석이 정확하게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일한 원문성경 본문에 대한 주석가들의 해석이 동일하지 않는 경우도 이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바울서신에 여러 번 나오는 pivstew" jIhsou` Cristou(갈 2:16x2; 로마서 3:22,26; 에베소서 3:12; 빌립보서 3:9) 구문에 나오는 속격관계를 어떤 속격으로 볼 것인가에 관하여 학자들의 의견이 서로 다르며, 속격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pivstew"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어떤 사람들은 pivstew" jIhsou` Cristou를 목적속격으로 보려고 하는데 이 경우에 pivstew"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가리킨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pivstew" jIhsou` Cristou를 주격속격으로 보려고 하는데 이 경우에 pivstew"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순종)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모든 헬라어사전이나 문법책도 일종의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우리는 누구든지 이러한 해석의 전(前)이해를 가지고 원문성경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이해하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가 한글 번역성경을 읽든, 영어성경을 읽든, 헬라어나 히브리어성경을 읽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 해석의 산물을 통해서 성경을 접근하고 이해함으로써 해석의 바다로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해석자가 해석의 성경의 한 작은 본문을 해석의 대상으로 선택하든, 더 큰 단락이나 문단을 선택하든 일차적으로 그 성경본문의 저자가 그 본문을 통해서 그 본문을 접하게 되는 첫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며, 그리고 왜 그것을 말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며(과거에 초점), 나아가서 그 본문이 해석자 당사자와 해석을 필요로 하는 오늘 우리 시대의 독자들이나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나 메시지가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다(현재에 초점).5) 따라서 성경을 해석하려는 자는, 그가 설교준비를 위해서든, 성경해석의 숙제를 위해서든, 그가 선택한 성경본문의 역사적 배경, 곧 성경저자와 독자들의 역사적 정황을 조사하여, 왜 이 본문이 주어지게 된 필요성을 밝혀내어야 하며, 그 다음 성경본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단어, 문장구조, 문맥, 성격 등에 대한 문학적 조사를 통해 성경본문 자체의 의미와 의미전달의 방법을 밝혀내어야 한다.
우리가 성경해석을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모든 해석학이 그러하듯이, 출발부터 두 가지를 전제하고 있다. 하나는 해석의 대상인 “성경”과 그리고 해석하는 당사자인 “나”(우리)이다. 해석의 대상과 해석자 이 두 가지를 전제하지 않고는 성경해석이 불가능하다. 이 것은 결국 모든 성경해석은 이 두 가지 전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자. 즉 양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즉 해석의 대상인 성경과 해석자인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그 자신의 성경관, 인간관과, 그리고 양자를 서로 어떤 위치에 두느냐, 어떤 관계로 보느냐에 따라서 성경해석의 방향이나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 가지 모델을 예상할 수 있다.
첫째는 해석의 대상인 성경을 해석자보다 우위에 두고, 해석의 대상이 해석자를 통제하는 즉 “성경>해석자”의 모델이다. 이 모델을 선호하는 사람은 대부분 스스로 자신을 정통 복음주의자나 보수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성경에 대한 높은 견해, 곧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된, 그래서 모든 면에서 오류가 없고,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경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든지, 의심하거나 따지지 말고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하신 말씀으로 무조건 믿고, 그대로 순종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경은 시대와 공간과 문화를 초월한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있지, 그 성경본문이 언제, 누구에 의해, 누구를 대상으로, 무슨 목적으로 기록되었으며, 어떻게 기록되었으며, 그 성경본문을 기록한 저자나, 그 성경을 본문을 처음 접하게 되는 독자들의 역사적 상황(시대적, 문화적, 언어적,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이 어떠하였는가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한편으로 성경에 대한 지대한 경외심과 성경말씀에 대한 적극적인 순종을 강조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때때로 그 성경본문이 자신들의 주장이나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성경본문의 가르침을 간과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4:34절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다”와, 디모데전서 2:12절의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의 경우 본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소위 여성안수반대의 결정적인 성경본문으로 삼는다. 하지만 동일한 성경본문인 고린도전서 11:11절,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라”와 갈라디아서 3:28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의 경우, 이 본문들이 남자와 여자의 차별 없는 동등성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6:20절의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마태복음 5:29절의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마태복음 5:42절의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와 같은 성경본문의 경우 이를 문자적으로 지키지 않는다.
둘째는 첫 번째 모델과는 정 반대로 해석자를 성경 위에 두고, 해석자가 해석의 대상인 성경을 통제하는 “성경<해석자”의 모델이다. 첫 번째 모델이 주로 정통적인 보수주의자와 복음주의자들이 옹호하거나 선호하는 모델이이라고 한다면, 성경해석자를 성경 위에 두는 이 두 번째 모델의 경우는 주로 진보주의자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옹호하거나 선호하는 모델이다. 이들은 대부분 성경에 대한 낮은 입장을 취하는데, 성경이 신적인 특성을 가진 책임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감된, 그래서 오류가 없는 신적인 계시로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성경을 하나님을 향한 다양한 사람들(이스라엘민족을 포함하여)의 종교적 체험이나 고백으로 보며, 역사적, 문화적 제약성과 과학적 오류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이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특정한 시대에 살던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영적 체험이나 고백 및 인간실존의 반영이기 때문에 성경은 그 시대의 문화에 매여 있으며, 따라서 성경은 모든 면에 있어서 시대나 문화를 초월하는 권위와 가치를 지닐 수 없다.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경본문 자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성경본문이 오늘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에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 있어서는 성경이 윤리적이거나 종교적인 문제에 관해서 말할 때와 과학과 역사에 관하여 말할 때가 모두 동일한 권위를 지니고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이들은 창세기의 창조기사나 홍수심판의 기사나 출애굽기에 나오는 10가지 재앙이나 홍해가 갈라진 내용들을 정확한 역사적 기록으로보다 일종의 신화적 고백으로 본다. 신약에 나오는 각종 이적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죽은 자를 살리신 일, 물위로 걸어가신 일, 부활 등은 과학적으로 입증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에게 있어서 성경 내용의 진위여부를 결정하는 당사자는 성경자체가 아니라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는 인간의 경험이나 이성이다.
셋째, 성경과 해석자의 관계에 있어서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훼손시키거나 종속시키지 않고 각자의 특성을 최대한도로 살리면서 양자를 상호보완하고 대화하는 관계로 보는 “성경⇔나”의 모델이다. 이 세 번째 모델은 한편으로 성경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서 무오(無誤)하며,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하나님이 선택한 다양한 시대와 문화권에 살던 사람들을 통하여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임을 전제한다. 즉 성경의 신적(神的)요소와 인적(人的)요소의 양면을 동시에 받아들이며, 성경의 저자가 한편으로 하나님이심과 또 다른 한편으로 사람임을 인정한다. 이 모델은 복음주의적, 개혁주의적 성경관을 견지하는 사람들이 선호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모델을 지지하는 자들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신구약 성경 전체가, 그 내용과 구성에 있어서,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믿는다. 동시에 이들은, 마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의 역사세계에 오신 것처럼, 모든 성경은 그 내용과 구성에 있어서 인간 저자를 통하여, 인간의 언어와 역사와 문화와 종교와 사상의 세계를 수단으로 하여 주어졌다는 사실을 믿는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 모든 성경은 超역사 혹은 無역사적, 無문화적, 無인간적이지 않고, 오히려 각각 고유한 역사적, 문화적 특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창세기와 시편과 이사야서가 각각 다른 시대의 저자와 독자와 배경과 문학적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마태복음서와 바울서신과 요한계시록이 각각 다른 저자와 독자 및 시대적, 문화적 배경과 양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한편으로 모든 성경이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한다하더라도, 또 다른 한편으로 모든 성경은 일차 적으로 특수한 시대의 저자를 통하여 특수한 시대의 사람들에게 특수한 목적을 위하여 쓰여 졌다는 사실을 약화시켜서는 아니 된다고 본다.
이들에게 있어서 성경자체가 가지고 있는 신적요소와 인적요소, 성경의 원 저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경의 특성과 인간저저로부터 오는 성경의 특성은, 마치 예수님의 신인양성(神人兩性)의 인격적 특성이 그 어떤 순간에도 분리되거나 혼합되지 않으면서 서로 완전히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것처럼, 서로 유기적으로 통합되거나 결합되어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또한 사람의 몸을 입고 성육하신 역사의 인물로서 특정한 시대와 문화에 사시면서 배고픔과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체험하신 것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또한 사람의 언어로 기록되었으며, 특정한 시대와 문화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역사의 한 인물로 보거나, 그 반대로 역사의 인물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만 보는 것은 예수님을 정확하게 보는 것이 아닌 것처럼, 성경을 신적인 특성만을 주장하면서 인적인 특성을 부인하거나, 그 반대로 인적인 특성만을 주장하면서 신적인 특성을 부인하는 것은 다 같이 성경을 정확하게 보는 것이 아닌 것으로 본다.
성경을 해석하는 자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세 가지 모델 중에서 어느 하나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 이 세 가지 모델 중에서 우리는 어느 입장에 설 것인가? 필자는 세 번째 입장이 성경 그 자체의 기원과 내용과 형식에 일치하는 가장 바람직하며, 성경을 바르게 접근하고 해석할 수 있는 해석학적 틀을 제공해준다고 본다. 이 세 번째 입장은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는 영감 된 말씀이기 때문에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하여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보며, 성경이 말씀하면 인간은 겸손하게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외하며, 가감 없이 믿고, 순종하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 입장은 성경의 어떤 내용들이 해석자가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여길 때에도 그 문제점을 성경 자체에 두지 않고 오히려 해석자의 이해의 능력의 부족, 곧 인간의 이성의 한계에 둔다. 그리하여 성경이 성경해석의 주도권이나 열쇠가 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6) 왜냐하면 인간이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오염되고 훼손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인간의 이성(지성), 도덕성, 종교성도 오염되었고, 죄의 영향 아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입장은 한편으로 성경이 가지고 있는 인적 요소, 이를테면, 언어의 한계성, 성경 저자나 독자들이 매여 있는 시대와 문화의 제약성, 각 성경의 문학적 장르와 특성들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각 성경을 접근하고 해석함에 있어서 그 성경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장르, 수사학적 특징, 저자와 독자들이 처한 역사적 정황과 그들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고려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 자체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성경의 원 저자는 성령 하나님이시며, 성령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 곧 성경은 그 자체 해석권을 가진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성경의 신적 저자인 성령께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에 각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하더라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외하고, 성경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겠다는 겸손한 자세를 취할 경우 얼마든지 성경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3번째 모델의 입장에서 볼 때 성경을 해석한다는 성경을 접근할 때 우선적으로 해석의 대상인 성경자체가 가지고 있는 신적요소와 인적 요소의 양면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동시에 성경의 해석자인 인간의 피조성과 제한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한쪽을 다른 것에 종속시키거나 배제하지 않고 양쪽을 인정하고, 양쪽의 특성을 그대로 살린다. 그래서 성경의 신적 저자가 성경의 인적 저자를 통하여 하신 성경말씀의 의미나 메시지를 듣거나 찾기 위해 해석의 대상인 성경 자체가 갖고 있는 언어의 특성과 의미, 문장의 구문, 그 본문이 주어진 시대적, 문화적, 종교적 상황, 저자와 독자의 형편을 충분히 살핀다. 동시에 해석자인 자신의 피조성, 죄성, 한계성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겠다는 겸손한 자세에서 성경의 원저자인 성령께 의존한다.7) 이것은 결국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해석자가 해석의 대상을 대화의 상대자로 인정하고 신뢰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해석의 대상이 해석자를 대화하고 신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을 의미한다.8)
성경해석이 가지고 있는 바로 이와 같은 양면성이 비(非)성경해석과 근본적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한편의 시나 소설을 해석하게 될 경우 해석자는 성경해석의 경우처럼 그 시나 소설의 언어, 그 시가 본래 주어진 시대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 저자와 독자들의 정황을 고려한다. 그러나 그 시나 소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경외심은 물론, 해석자의 피조성, 한계성,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의존 등은 고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해석자가 해석의 대상을 적극적으로 통제한다. 어떤 의미에서 성경해석은 해석자가 해석의 대상인 성경본문으로부터 성령을 통하여 신적 메시지나 의미를 듣고, 믿고, 순종하려는 수동적인 자세를 갖고 있다고 한다면,9) 비성경해석은 오히려 해석자가 해석의 대상을 통제하고 의미나 메시지를 가져가거나 생산하는 능동적인 자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경본문의 본래 상황인 반면에, 후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독자나 해석자의 현재 상황이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해석은 우선적으로 해석자가 그 성경 본문을 주신 하나님의 역사 속으로, 즉 하나님께서 인간저자와 독자들을 통하여 주신 그 세계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들으려고 한다. 그런 다음 이 메시지가 오늘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으며,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질문한다.
제 2강
성경해석에 있어서 문학적 장르의 중요성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성경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이 주어졌을 때의 문학적 양식, 곧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성경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문학적 장르에 대한 이해(理解)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의 역사적 배경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재구성하는 것도 어렵지만, 성경본문은 지금 우리가 여기서 얼마든지 정확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성경의 문학적 장르에 대한 이해가 깊으면 깊을수록 성경해석은 싶고, 객관적이고, 바르게 진행될 수 있다. 반대로 성경에 대한 문학적 장르에 대한 이해가 빈약하면 빈약할수록 그 사람의 성경해석이 주관적이거나 독단적이 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해석의 대상인 성경의 특성에 따라 성경을 접근하고 해석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뜻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그 사람에 대한 내 자신의 선입감이나 주관적인 판단을 보류하거나 배제하고, 우선적으로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이해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 사람을 나의 삶의 세계로 일방적으로 끌어 들여 그 사람을 평가하고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도 내가 그 사람의 삶의 세계로 들어가서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나이, 성별, 고향, 교육적 배경, 환경, 가정배경, 직장, 친구, 종교, 취미생활 등에 대한 선 이해가 필요할 것이고, 그 사람이 자신을 내개 알려주는데 귀를 기울여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 사람을 나와 똑같은 인격을 가진 자로 알고 그 사람을 사랑하고 수용하려는 열린 자세를 가져야할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성경의 문학적 장르이해는 바로 성경에 대한 경외심과 함께 열린 자세로 각 성경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문학적 특성에 따라 그 성경을 접근하고 이해하려는 것을 뜻한다.
성경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개신교는 구약 39권, 신약 27권 모두 66권으로 되어 있는 성경을 정경(正經)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을 그 내용과 문학적 특성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10)
구약성경(39권)
모세오경 5권(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역사서 12권(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혜미야, 에스더)
성문(혹은 시가)서 5권(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선지서 17권
대선지서 5권(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소선지서 12권(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신약성경(27권)
복음서 4권(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역사서 1권(사도행전)
서신서 22권
바울서신 13권(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일반(혹은 공동)서신 8권(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 1서, 요한 2서, 요한 3서, 유다서)
예언서 1권(요한 계시록)
이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한권의 책이지만 좀 더 내부적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66권이나 되는 많은 책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66권의 책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계시라는 측면에서 하나님께서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한권의 통일된 성경책(the Bible, or the Holy Scripture)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내용과 기록의 과정과 구체적인 독자 면에서 보면 성경은 적어도 40명 이상이나 되는 많은 저자들이, 여러 다른 시대에 걸쳐, 예를 들면 모세오경은 약 주전 1500년 전에, 요한 계시록은 약 주후 100년경에, 여러 다양한 문화와 환경에 살던 독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알고 있는 언어로, 구약의 경우에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다니엘서와 에스라서 일부)로, 신약은 코이네 헬라어로, 그들에게 익숙한 문학적 양식(장르와 구문)으로 기록하여 전수하였다.
이처럼 성경의 역사적인 형성과정 면에서 보면 성경은 하늘에서 직접 기록되어 땅에 떨어진 책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시대에 살았던 인간저자들과 다양한 시대와 문화에 살던 다양한 사람들(독자)에게 다양한 문학적 양식을 통하여 주어진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도 구약성경을 말하면서 종종 “모세가 말하기를”, “이사야가 말하기를”, “다윗이 가로되”라고 하면서(마 19: 8; 막 7:6, 10; 10:3; 눅 4:17; 24:27), 구약 성경의 인간 저자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신약의 경우 베드로는 바울의 서신들과 관련하여,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섰고”(벧후 3:15)라고 말하면서, 바울서신의 바울저작권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이 원저자(原著者)임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모세든, 이사야든, 마태든, 바울이든 얼마든지 인간저자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인간저자와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통하여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럼으로 하나님이 주신 방법대로 성경을 접근하고 해석한다는 것은 정당하고 필요하다. 만일 누가 하나님이 주신 이와 같은 방법을 도외시하거나 고려하지 않고, 성경을 통해서 오늘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직접 들으려고 한다면, 어떻게 보면 그것이 가장 적절하고 신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방법을 무시하는 것이며, 오히려 자신의 생각을 성경에 가져가서 마치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처럼 착각하게 할 수 있는 위험스러운 것이다.
각 성경의 특성에 따라 각 성경의 본문을 접근하고 해석하려는 것은, 마치 시(詩)는 시가 가진 특성에 따라, 수필이나 소설은 수필의 특성에 따라, 한 인물을 생애를 보여주는 전기(傳記)나 다큐멘터리는 그 고유한 특성에 따라 접근하고 해석하려는 것처럼, 율법서는 율법서의 특성에 따라, 예언서는 예언서의 특성에 따라, 사가서는 시가서의 특성에 따라, 역사서는 역사서의 특성에 따라, 비유는 비유의 특성에 따라 접근하고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를 소설이나 다큐멘터리처럼 접근하고 해석해서는 아니 되는 것처럼, 예언서를 역사서처럼, 시가서를 율법서처럼, 서신서를 비유처럼 접근하고 해석하여서는 아니 된다. 그렇다면 각각 고유한 문학적 특성을 가진 성경을 어떻게 접근하고 해석할 것인가?
(1) 율법서
구약성경의 첫 부분에 나오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다섯 권의 책을 가리켜, 흔히 “율법서”, “토오라”, 혹은 “모세오경”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내용을 중심으로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다섯 권이 실제로 모두 율법의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율법의 내용은 주로 출애굽기 20장부터 신명기 33장에 수록되어 있다. 창세기는 창조와 인류의 타락, 아브라함의 선택과 그 후손인 이삭, 야곱, 요셉 등의 역사와 삶의 여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출애급기 1-19장까지는 모세의 출생과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백성의 출애급사건의 여정을, 민수기는 이스라엘백성의 광야생활과 가나안땅 정복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 출애굽기 전반부, 민수기는 그 내용과 서술양식 면에서 볼 때 율법서라기보다도, 오히려 역사서나 네러티브(이야기)에 가깝다. 하지만 해석의 기본 틀에 있어서는 모세오경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을 통한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과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을 말하고 있는 창세기와 출애굽기 전반부를 고려하지 않고는 출애굽기 후반부와 레위기에 나타나 있는 각종 율법의 내용들을 이해하기 어렵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과 가나안정복을 말하는 민수기를 고려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과 삶을 재규정하는 신명기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세오경인 율법서 어떻게 접근하고 해석할 것인가?
창세기 17장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남자들)은 영원한 언약인 할례를 행할 것을 지시하고 있고,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여러 가지 절기를 지킬 것을 명령한다. 하나님은 유월절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출 20장)을 위시하여 여러 가지 제사법, 성막법, 도덕법, 사회법, 생활법규를 말씀하셨다. 예를 들면,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때리거나 저주하면 반드시 죽일 것과(출 21:15, 17),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를,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 것(보응)을 명하고 있다(출 21:24-25).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줄 경우 이자를 받지 말 것과(출 22:25), 토끼, 돼지, 네 발 가진 짐승 등 정결치 못한 것은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레 11장).
우리는 구약에서 말씀한 이 모든 율법과 명령들을 그대로 지켜야 하는가? 십계명은 지켜야 하지만 그 밖에 제사법이나 절기등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윤리에 관한 법은 지켜야 하지만 성막에 관한 법, 제사장에 대한 규례, 음식에 관한 법등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왜 어떤 것은 지켜하고, 어떤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그 기준은 누가 만들며,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께서 율법을 성취하였다고 하였을 때 그 율법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사도 바울이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율법으로부터 자유하였다고 말할 때 그 율법의 법위는 어디까지인가? 단순히 제사법에만 한정되는가? 사도 바울은 당대 일부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그들이 지키고 있는 할례, 유대절기, 모세의 율법 등을 이방인들에게 지킬 것을 요구하였을 때 이를 끝까지 반대하고 저항하였는데 왜 그렇게 하였는가? 우리는 구약에 나타나 있는 율법을 어떻게 가르치고 설교할 것인가?
언약적 전망(Covenantal Perspective)
율법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항중의 하나는 율법서에 나오는 모든 내용을 종체적으로, 그것이 선(先)율법의 내용인 네러티브이든, 율법자체이든, 후(後)율법의 네러티브이든, 언약적 전망에서 접근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즉 창세기를 위시해서 모든 율법서는 근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와 언약을 체결하시고, 언약의 대상인 사람(이스라엘)에게 언약의 내용을 의무사항으로 지킬 것을 요구하시고, 언약을 지킬 경우 축복을, 언약을 어길 경우 심판과 저주를 내릴 것을 약속하시고, 그것을 언약적 의무를 지켰을 경우 실제로 축복과 평안을, 언약적 의무에 불순종할 경우 심판과 저주를 내리셨다는 “언약의 관점”(covenantal perspective)에서 접근하고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신구약성경전체를 언약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해석하여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특별히 성경의 첫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율법서를 접근하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이것은 필수적이다.
창세기는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요셉 등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의 선조들과 맺은 많은 언약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당사자의 선택, 언약체결, 언약을 맺은 당사자의 의무사항, 언약의 준행여부에 따른 축복 및 저주와 심판 등의 패턴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먼저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다음(先 選擇)(창 1:26-27), 아담에게 복을 주시고(창 1:28-30), 그리고 동산의 모든 실과를 먹을 수 있는 축복과 함께 언약의 당사자의 의무사항인 선악과를 먹지 말 것을 명하시고, 따먹어 불순종할 경우 죽음의 심판을 약속하셨다(창 2:17).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을 불러 선택하시고,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고(창 12:1-3), 그를 통해 후손과 큰 민족이 형성될 것을 약속하시고(창 15:1-6; 17:1-8), 언약의 당자자로서의 의무사항인 할례를 행할 것을 명하셨다(창 17:9-22).
이와 같은 언약적 전망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직접 주신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출애굽기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출 2:24).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10가지 재앙을 애급 땅에 내리시고, 출애급사건(유월절의 희생과 홍해의 갈라짐)을 통해 이스라엘백성을 바로 왕의 압제에서 구원해 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출애굽기 20:1-2절에 있는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다”는 말씀을 하시고 십계명을 위시한 다양한 율법을 주셨다.
따라서 율법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맺으신 그 언약을 따라 먼저 이스라엘백성을 찾으시고, 구원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행위에서 출발한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백성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다음, 이스라엘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하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율법은 처음부터 선택과 언약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이나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 먼저 주어진 선택과 언약백성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삶의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다. 말하자면 율법은 언약백성의 의무사항인 것이다. 이 의무사항인 율법을 준수하면 언약에 약속된 축복을 누릴 수 있지만, 율법을 어기고 불순종할 경우에는 저주와 심판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의 성도들인 우리들도 구약의 이스라엘백성들처럼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사항에 놓여 있는가? 그래서 율법을 지키면 축복을, 율법을 어길 경우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되는가? 신약의 저자들도 율법을 언약적 전망에서 보는 점에서는 구약의 저자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신약의 저자들은 율법을 접근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구약의 이스라엘백성들과는 다른 언약적 전망, 곧 이스라엘백성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확립된 새 언약의 전망에서 접근한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율법의 중개자였던 모세의 직분을 옛 언약의 직분, 혹은 정죄의 직분, 죽이는 직분으로, 사라져가는 영광의 직분으로 규정한 반면에, 자신의 직분을 새 언약의 직분, 의의 직분, 살리는 직분, 영(성령)의 직분으로, 더 큰 영광의 직분으로 본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선택과 출애굽사건이 가져온 구원의 축복과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약백성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였다. 오히려 불순종하고 죄를 지었다. 그래서 그들은 축복 대신 율법이 가져오는 정죄와 심판과 저주를 자초하였다. 율법이 줄기차게 그들에게 지켜야 하는 명령과 의무를 요구하였지만, 그 의무사항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죄의 세력을 저항하고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다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언약백성의 의무사항인 율법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나라를 잃어버렸고,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구약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백성들이 율법을 어겨 언약의 의무를 지키지 못하였음에 불구하고, 언약을 체결하신 하나님은 언약을 폐기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언약에 내포된 구원의 약속을 완전히 철회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가져 올 새로운 언약을 만드셨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새 언약”이다. 이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계시되었지만 이미 구약의 예레미아와 에스겔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31:31-33절에서 새 언약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역시 에스겔 선지자도 37장 24-28절에서 새 언약을 화평의 언약으로 규정하면서 이렇게 예언한다(역시 겔 36:22-28절 참조):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잡혀 간 여러 나라에서 인도하며 그 사방에서 모아서 그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하게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 모두에게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수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땅에 그들이 거주하되 그들과 그들의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에 거주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 가운데에 있으리니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을 열국이 알리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실패한 언약을 다시는 실패하지 않는 새 언약으로 대체하셨다. 그 자신의 거룩한 삶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옛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한 모든 요구를 대신하여 완전하게 지키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만찬에서 성만찬을 제정하시고, 자신의 희생적 죽음을 상징하는 잔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눅 22:20)고 말씀하셨다. 이 새 언약은 옛 언약의 무조건적인 폐기에 기인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백성이 실패하였던 모든 언약적 의무사항과 그 결과인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시고, 성취하심으로 세워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17-18절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도 로마서 10: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선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성취자이며,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는 모든 자에게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어떤 주석가는 이 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의 역할이 끝났음을 뜻하는 것으로, 즉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율법은 어떤 형태이든 그것이 제사법에 관련된 것이든, 윤리적인 법이든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또 다른 어떤 주석가는 이 말을 예수 그리스도가 본래 율법의 목적과 절정이었으며, 그 목적과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11)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성취자”이라는 말과 그가 “율법의 마침”이라는 말 가운데는 ‘끝’과 ‘목적’, ‘불연속선’과 ‘연속선’의 두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율법이 성취되었고, 끝이 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백성은 물론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대신하여 모든 율법을, 그것이 제사적 율법이든, 윤리적 율법이든,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모두 성취하셨기 때문이다(롬 8:3-4).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더 이상 구약의 이스라엘백성들처럼 율법의 의무 아래 있지 않고, 오히려 율법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었다. 이 해방은 제의적 율법뿐만 아니라 윤리적 율법도 포함한다. 바울이 율법이 더 이상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 성령이 가지고 있는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칭의나 성화의 수단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둘째, 구약의 율법이 신약의 크리스천들에게 여전히 유효하고, 지켜져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모든 요구사항을 지키심으로 율법의 본래 목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원리로, 곧 율법을 신자에게 있어서 “생명과 성령의 법”(롬 8:2), “그리스도의 법”(갈 6:2)으로 새롭게 회복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크리스천이 구약의 이스라엘백성의 경우처럼 율법과 관련하여 똑같은 위치에 서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어떤 경우에서든 율법은 더 이상 저주와 심판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리고 율법은 더 이상 신자에게 있어서 명령법의 대상으로 임하지 않는다.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명령법의 대상은 율법의 행함이 아닌 오히려 사랑을 행하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곧 율법의 최고 목표인 사랑을 하게 되면, 그리고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실현된 사랑의 반사요 성취이기 때문에, 자연히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 되고(롬 13:8; 갈 5:13-14), 성령을 따를 때 성령은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율법의 성취인 이 사랑, 곧 십자가의 사랑을 구현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관계없이 옛 시대의 세력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은 여전히 죄와 사망의 법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대신하여 모든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셨다. 그래서 이제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으로써가 아니라, 구속받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삶을 위한 생명과 성령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모형론적 전망(Typological Perspective)
율법서를 접근하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두 번째 중요한 것은 “모형(예표)론적 전망”(typological perspective)이다. 이 “모형론적 전망”은 언약론적 전망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언약론적 전망에서 옛 언약은 새 언약을 통해서 성취가 되고, 새 언약에서 그 본래의 의미가 완전히 나타난다고 보는 것처럼, 모형론적 전망은 구약의 율법뿐만 아니라, 구약의 중요한 내용과 사건들이 신약에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서 그 본래 의미가 보다 구체적으로 들어난다고 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모형론적 전망은 구약의 중요한 사건들을 구약 그 자체의 문맥이나 관점에서 보다도 신약의 관점에서 그 본래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보려고 한다.
예를 들면, 모형론적 전망에서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신 사건(창 3:21)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의 구원과 회복을 미리 예표(豫表)한 것으로,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바친 사건(창 22:3-13)을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제물로 내어준 사건의 묘형으로, 출애급사건을 통한 이스라엘백성의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을 통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의 모형으로, 율법서에 나타난 모든 제사법은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의 모형으로, 이스라엘의 성막은 신약시대 교회의 모형으로 본다. 이처럼 모형론적 전망에서는 구약에 나타나 있는 중요한 사건이나 말씀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구약 그 자체에서 찾기보다도 신약에서 찾으려한다.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율법을 위시하여 여러 사건들에 대한 모형론적 접근과 해석은 이미 신약의 저자들 가운데 나타나 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저자는 예레미아 31:15절에 나타나 있는 라마에서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은 예수님이 탄생하였을 때 헤롯 왕이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아이를 죽여 아이의 부모들이 애곡하는 것의 모형으로(마 2:18), 선지자 요나가 삼일동안 물고기 배속에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삼일 동안 무덤에 있을 것을 미리 보여준 모형으로(마 12:40) 보고 있다.
고든 디. 피와 더글라스 스튜어트가 공동으로 집필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언약론적 전망과 모형론적 전망에서 우리가 구약의 율법서를 읽을 때 가져야 할 지침들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1. 구약의 율법을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영감된 말씀으로 생각하라.
구약의 율법을 당신에게 직접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생각지 말라.
2. 구약의 율법을 옛 언약의 기초요, 그러한 까닭에 이스라엘 역사의 기초로 생각하라.
구약의 율법을, 그것이 특별히 갱신되지 않았으면 새 언약 가운데 있는 기독교교인들에게 구 속력 있는 것으로는 생각지 말라.
3. 구약의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공의, 사랑, 그리고 지고의 표준들을 생각하라.
하나님의 자비는 표준들의 엄격함과 대등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4. 구약의 율법이 완전하다고는 생각지 말라. 그것은 기술적으로 전 포괄적이지 않다.
구약의 율법을 패러다임(모범)으로 생각하라. 그것은 광범위한 상황이 예상되는 행동들에 대 한 예들을 제시한다.
5. 구약의 율법이 선지서들이나 신약에서 자주 인용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율법의 정수(십계명과 두 개의 대강령)는 선지서들에서 반복되며 신약에서 갱신되었음을 기억 하라.
6. 구약의 율법은, 순종할 때 더 많은 복을 가져오는, 이스라엘의 은혜로운 선물임을 알라.
구약의 율법을 백성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임기응변적이고 귀찮은 규율들의 일단으로 생각지 말라.12)
기독론적 전망(Christological Perspective)
구약의 율법서를 언약론적, 혹은 모형론적 전망에서 접근하고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은 결국 구약성경을 기독론적 전망에서 접근하고 읽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언약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하고 있고, 모형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신약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율법의 성취자임을 밝혀셨고(마 5:17), 이사야 61장의 예언이 자신의 사역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강조하셨으며(눅 4:16-21),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 결국 예수님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임을 주장하셨다(눅 24:27, 44). 그리고 “성경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요 5:39)이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성경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태도는 율법서를 위시하여 전체 구약성경은 신약의 관점, 특별히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며,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고 해석하여야 함을 보여준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단 맥카트니, 찰스 클레이튼의 공동 저서인 [성경해석학]은 이렇게 요약한다.
(1) 성경의 목적은 구속사적이다. 즉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서 완성하신 자기 백성의 구속이다. (2) 이 전체적인 구속사역과, 그 결과 그것을 자세히 말하고 있는 성경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 특히 그분의 죽으심, 부활 그리고 승천이다. (3) 하나님이 의도하신 이 구속사역의 적용, 즉 성경의 적용은 이 시대에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이다(p. 57).
맥카트니, 클레이튼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약을 기독론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누가복음 24장에서 본 대로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공생애동안 구약을 인용하셨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셨다(예를 들어, 마 22:41-45). 나아가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설명하시며, 그분의 관점에서 볼 때 구약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암시하셨다(p. 62).
사도 바울도 이점에 있어서 예외가 아니다. 바울은 율법서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전체를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으로 접근한다. 그는 로마서에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그의 아들에게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셨다고 말하고 있으며(롬 1:2), 모세가 광야에서 물을 낸 신령한 반석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으며(고전 10:4), 모세의 글의 원래 의미를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수건이 주님(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갈 때 벗겨져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고후 3:15-16).
이처럼 예수님과 그리고 바울을 위시한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을 그리스도 중심 혹은 기독론적 전망에서 접근하고 이해하였다고 한다면 이것은 구약에 대한 우리들에게 중요한 실례(實例)가 된다. 예수님과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을 그렇게 해석하였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들의 해석이 참되며 바른 해석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뛰어 뛰어넘어 갈려고 해서는 아니 된다. 설사 그들이 구약본문을 부분적으로 변경하였을 지라도 우리는 그들의 해석을 거부할 수 없다.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13) 구약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보고 설교하여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14)
제 3강 네러티브(Narrative)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구약성경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신약성경도 예외가 아니지만, 문학적 형식은 “일종의 이야기체 서술”로 번역할 수 있는 “네러티브”(narrative)이다. 창세기, 출야굽기전반부, 민수기, 여호수아, 삿사기, 룻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상,하, 역대상,하, 에스라, 느혜미아, 에스더, 다니엘, 요나, 미가 등 적어도 구약성경의 약 40%가 네러티브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구약성경의 약 반이 일종의 이야기체린 네러티브로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15) 예를 들면 창세기를 보면, 천지창조와 인간의 타락, 노아의 홍수심판, 아브라함의 선택과 그의 후손들인 이삭, 야곱, 요셉 등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출애굽기 전반부는 모세의 출생과 성장, 도피, 하나님의 부르심, 출애급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민수기는 이스라엘백성들의 광야생활의 이야기, 그리고 여호수아는 가나안정복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사사기는 기드온, 삼손 등 여러 사사들과 이스라엘 불순종과 하나님의 징벌, 이스라엘 민족의 회개와 하나님의 구원하심 등에 관한 이야기, 룻기는 하나님을 의지한 모얍여인 룻이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다는 이야기, 사무엘 상,하에는 사사이며 선지자인 사무엘에 관한 이야기, 이스라엘민족의 초대 임금 솔로몬과 다윗왕에 관한 이야기, 열왕기상,하, 역대상,하에는 솔로몬과 그의 성전건축에 관한 이야기, 살로몬 사후 이스라엘 분열의 역사와 아수로와 바벨론에 의한 멸망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에스라, 느혜미야, 학개 등에서는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백성들에 관한 이야기, 에스라와 느혜미야의 종교 및 시민사회 개혁운동, 제 성전건축 등에 관한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처럼 구약성경에는 한 개인에 관한 이야기, 한 가정에 관한 이야기, 더 나아가서 한 공동체와 여러 민족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왜 구약성경에는 이와 같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으며, 이 이야기들의 목적은 무엇이며, 우리들은 이 이야기들을 어떻게 접근하고 해석할 것인가? 구약성경의 상당한 부분이 이야기체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는(계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네러티브를 자신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계시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약의 수많은 네러티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우리는 구약의 네러티브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야기들이 개인, 가정, 공동체, 민족, 인류, 하나님 등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즉 개인에 대한 이야기들 배후에는 가정이 놓여 있고, 가정에 대한 이야기들 배후에는 민족에 관한 이야기들이 놓여 있고, 민족에 관한 이야기들 배후에는 인류에 관한 이야기들이 있고, 인류에 관한 이야기들 배후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 앞부분에 놓여 있는 천지창조, 아담과 이브의 창조와 타락, 노아의 가정과 홍수 심판, 바벨탑 이야기들 배후에는 항상 하나님이 서있다. 솔직히 말해서 천지창조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노아의 홍수와 바벨탑의 이야기 배후에도 항상 하나님이 서 계시며, 그분이 사실상 이야기의 보이지 않는 주인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패턴은 창세기 중반부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가정에 관한 이야기와 후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요셉과 그 형들에 관한 이야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창세기 후반부를 차지하는 요셉과 그 형들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자.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로 태어난 요셉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 그리고 자신의 꿈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받았다. 결국 그는 형들에 의해 종으로 팔려졌고, 애굽 사람 보디발의 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거부로 인한 모함을 받아 그는 감옥에 갇혔고, 감옥에 있는 동안 요셉은 아무도 해석할 수 없었던 애굽 왕의 꿈을 해석하여 줌으로써 마침내 에굽의 총리가 되었다. 애굽의 총리로 있는 동안 자신을 판 형들이 양식을 사로 애굽에 됨으로써 요셉은 형들을 만나게 되었다. 요셉의 형들은 애굽의 총리가 그들이 팔아먹은 동생 요셉임을 알고 두려워했으나 요셉은 형들을 안심시키며,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음을 아래와 같이 고백한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7-8).
이와 같은 요셉의 고백은 요셉의 파란만장한 한 개인의 삶의 역사는 요셉개인의 역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계승자인 야곱과 그 가정과 그 후손인 이스라엘민족에 관한 이야기로 발전하고, 그리고 그것은 세계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애굽 나라의 역사와 연결되고, 더 나아가서 인류전체의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곧 요셉의 이야기는 동시에 이스라엘민족의 근간인 야곱과 그 가정과 바로가 통치하는 에집트의 이야기이며,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민족을 통해서 인류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이라는 것이다.
창세기에 나타나는 요셉의 이야기는 우리가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네러티브를 어떻게 접근하고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지침을 제공해준다. 적지 않는 사람들이 구약의 인물에 대한 네러티브를 접할 때 마다 일종의 이상적인 모범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즉 아브라함이 이런 사람이고 그가 이렇게 하였으니 우리도 그렇게 하여야 하고, 요셉이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았으니 우리도 요셉처럼 하여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인물이나 사건들의 네러티브가 후대사람들에게 일종의 모델적 교훈을 주고 있다는 점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의 광야에서의 불성실한 생활은 “우리의 거울”(고전 10:6)과 “우리의 경계”(고전 10:11)를 위해 기록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의 삶을 통해, 요셉의 역경과 고난 가운데서의 승리의 삶을 통해, 다윗의 용기 있는 삶을 통해,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믿음의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도 그들처럼 생활하여야 겠다는 교훈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항상 잊지 않아야 할 것은 구약의 네러티브의 궁극적인 목적이 누구이며, 네러티브의 진정한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문제이다. 아브라함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모델이 된다고 해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생활하여야 하는가? 우리도 우리의 자녀를 산 제물로 바쳐야 하는가?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했다고 해서 우리도 그렇게 하여야 하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받쳤다고 해서 우리도 그렇게 하여야 하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동생의 딸과 결혼시켰다고 해서 우리도 그렇게 하여야 하며, 아브라함이 첩을 얻었다고 해서 우리도 그렇게 하여야 하는가?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도적하였다고 해서 우리도 그렇게 하여야 하는가? 요셉이 꿈을 꾸었다고 해서 우리도 그와 같은 꿈을 꾸어야 하며,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렸다고 해서 우리도 그렇게 하여야 하는가? 다윗이 물멧돌을 가지고 골리앗을 물리쳤다고 해서 우리도 그렇게 하여야 하며, 다윗이 자신의 부하인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하였다고 해서 우리도 그렇게 하여야 하는가?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우리가 결코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요셉 당사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약의 그 어떤 휼륭한 인물도, 이럴테면 아브라함도 야곱도, 모세도, 다윗도 실수와 허물과 험이 없는 완전한 모델이 아니다. 그들도 인간이 이었고, 우리처럼 실수하고 법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붙들었고,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셨다. 따라서 구약의 네러티브의 해석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표면적인 네러티브 그 자체의 스토리만을 볼 것이 아니라, 요셉이 그 자신의 삶의 배후에 서 있는 하나님을 알고 고백한 것처럼, 실제로 그 네러티브를 이끌어가고, 네러티브 배후의 주인공으로 서 계시는 하나님과 그의 사역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가 구약의 네러티브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과 그의 역사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구약의 네러티브는 기껏해야 윤리적 교훈을 담고 있는 도덕적 이야기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구약의 네러티브를 해석할 때 표면적인 이야기의 인물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모범적으로 설교해서는 아니 된다는 사실을 교훈해 준다.
구약의 네러티브는 한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나아가서 인류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진정한 역사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며, 모든 역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역사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역사에 개입하시며, 역사를 통하여 그분이 은혜로우신 분이신 동시에 죄를 미워하시는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분이심을 보여준다. 역사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역사이며, 이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역사,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역사, 곧 하나님은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는 용서와 축복을 내리시지만 계속 죄를 범하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심판을 내리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인물인 아브라함과 야곱과 모세와 다윗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거나 그 언약에 불성실하여 때때로 실수하고 넘어지고, 범죄에 빠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그 자신의 언약을 잊어버리거나 언약의 의무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에 관하여 신실하신다. 그런 점에서 구약의 네러티브는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그의 언약의 신실함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성실한 구원사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16)
우리는 그 실례를 사사기의 네러티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의 죽음(BC 1375) 이후 이스라엘 초대 임금 사울왕의 등극까지(BC 1050)의 약 300년간의 이스라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사사기는 연대적으로 기록되어 있다기보다도 주제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16-21장의 역사는 연대적으로 본다면 3-15장의 역사보다 선행한다. 사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 불신앙 및 사사들(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기드온,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의 실패의 역사를 보여준다. 즉 사사기는 죄, 노예, 탄원, 구원, 침묵의 사이클이 계속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그에 따라 징벌을 내리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징벌 가운데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돌아보시고 구원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불순종과 범죄에 빠진다. 사사기에는 타락, 심판, 회개, 구원등의 사이클이 적어도 7곱번 정도 반복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사기는 하나님이 보내게 될 진정한 사사이며, 영원한 왕이신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의 네러티브를 해석하고 설교할 때, 신약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네러티브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자체만을 보아서는 아니 된다. 성경의 네러티브를 접근할 때마다 우리는 네러티브 배후에 계시는 참된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보아야한다. 이 네러티브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계시하고 계시며, 네러티브에 나오는 사람이나 사건들을 어떻게 인도해 가시며, 그들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 가를 보고 들을 수 있어야한다. 네러티브가 단순히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이야기임을 보아야한다. 하나 하나의 작은 개별적 네러티브를 통해 하나님께서 더 큰 네러티브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며, 긍극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의 중심이며,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가를 보아야 한다.
1) 고든 디. 피, 더글라스 스튜어트 지음, 오광만 옮김,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서울: 성서유니온, 1994), 35: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본으로 읽고 있다는 사실은 곧 독자가 이미 해석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번역본으로 읽는 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독자가 번역자(들)의 의도대로 좌우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실제로 번역자들은 히브리어 또는 헬라어 원어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중에서 하나를 취사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2) W. Bauer, W.F. Arndt, F.W. Gingrich, and F.W. Dank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Chicago: Chicago Univerity Press, 1979).
3) H.G. Liddell, R. Scott, and H.S. Jones, A Greek English Lexicon (Oxford: Clarendon Press, 1996).
4) G. Kittell and G.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74).
5) 고든 피, 장동수 옮김, [신약성경해석방법론] (서울: 크리스천 출판사, 2003), 27.
6) 참고, 단 맥카트니, 찰스 클레이튼, 김동수 옮김, [성경해석학] (서울: IVP, 2000), 21: "사실 성경을 해석하는 열쇠는 성경이 우리의 전제들을 변화시켜 성경과 일치하는 해석의 틀이 되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7) Ibid., 42: “해석에서 죄 문제를 인식하면, 자신의 해석에 대해 깊은 겸손의 자세를 갖게 되고, 나아가 해석을 할 때 깨닫지 못할 수도 있는 죄성을 끊임없이 회개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이 때문에 야고보는 선생들에 대해 그토록 엄하게 경고했을 것이다(약 3:1.”
8) 참조, 윌리엄 클라인, 크레그 블롬버그, 로버트 하버드, 류호영 역, [성경해석학 총론]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7),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성령의 역할은 필수 불가결하다.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서영 메시지의 진리를 확신토록 해주며, 이들에게 그 진리를 따라 지속적으로 살도록 권면하고 필요한 힘들을 부여한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이 언어전달의 원리를 따라 성경본문을 해석해야 할 필요성을 대치시키지는 않는다.”
9) 클라인, [성경해석학 총론], 49: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본문의 의미를 왜곡시킬지도 모르는 우리의 모든 선입감과 선이해들을 철저하게 고려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의 목표는 (성경본문의) 원래의 수신자들이 듣고 이해했었을 그러한 성경의 메시지를 듣는 일이다.”
10) 유대교는
토오라 5권(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예언서 8권, 곧 전기 예언서 4권(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 후기 예언서 4권(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12 소 예언서), 성문서 11권(시편, 욥기, 잠언, 아가, 룻기, 애가, 전도서, 에스더, 다니엘, 에스라, 느혜미야,
역대기) 등 모두 24권을 정경으로 받아들인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경우, 신약성경에 있어서는 개신교와 동일하지만, 구약성경에 있어서는
역사서에 토빗, 유딧, 마카비서(1-4)를 첨부하고, 성문서에 솔로몬의 지혜서와 시락서를, 예언서에 제 1바룩서, 예레미야의 편지, 수산나,
벨라드라곤을 첨부한다.
11) 따라서
악트마이어, [로마서], 247은 지적은 정당하다고 하겠다: “그리스도가 창조자와 피조물 간의 관계에 있어서 율법의 처음 의도된 역할의
성취이며, 또 그 관계에 있어 율법의 주된 기능의 마침이 되는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느니라.’(4절)라고 말했을 때 이
두 가지를 다 의미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율법이 세워진 목표와 목적, 즉 하나님을 믿는 것의 목적인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게 되는 수단으로서의 율법의 마침이 되는 것이다.”
12) 피, 스튜어트,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227-228.
13) 맥카트니, 클레이튼, [성경해석학], 83: “만일 신약이 진정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리는 그 몰적뿥ㄴ만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저자들이 인가한 방법에서도 신약을 따라야 한다.”
14)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그레이다누스, 김진섭, 류호영, 류호준 역,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보라.
15) 피, 스튜어트,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09.
16) 피, 스튜어트,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10: “성경의 설화(Narrative)들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 세계에서, 또 그의 백성들 가운데서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고자 하는데 있다. 설화들은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우리로 하여금 그를 깨닫고 인식하도록 도와주며, 또한 그의 섭리와 보호하심의 면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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