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은 신앙과 상관없이 누구나 겪어
신앙인, 고통을 대하는 ‘태도’서 차이
고난과 복(福)은 삶에서 마주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이다. 인간은 삶에서 ‘고난’을 피할 수 없다. 또 누구나 ‘복’을 바라며 산다. 고난과 복을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그 종교의 성격이 드러나고, 그 사람의 신앙과 가치관이 드러난다. 오늘은 고난과 복에 대해 대화하려 한다.
고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사람이 사고를 당하면 당황한다. 목회자나 교회에서 직분을 가진 사람 중에는 큰병에 걸리면 교인들에게 알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은연중에 고난은 하나님의 벌이거나 진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앙의 상태에 따라 불행과 사고가 비롯된다는 생각은 인과응보적이다.
성경은 인과응보식 생각을 명백히 거부한다. 예수님은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이 더 죄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눅13:4). 인과응보적 생각은 쉽게 무속신앙의 형태로 발전한다. 즉 세상에서 잘되면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사고나 질병이 생기면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하는 것이다.
고난은 누구나 만난다. 신앙인이든 비신앙인이든 삶에서 겪는 사고, 질병, 경제적 어려움, 정신적 고통은 별 차이가 없다. 신앙은 사고를 막는 방편이 아니다. 신앙은 부적(符籍)이 아니다. 신앙이 있으면 불행을 막아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적신앙’이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도 고난을 겪었다. 그들이 신앙이 없어서 고난의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다.
물론 신앙으로 병에서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신앙을 병 치유나 행운을 위한 것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신앙을 얼마의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환원하는 것은 위험하다.
가끔 부흥사 중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 하거나 헌금을 안 하면 사고라도 당할 듯이 위협하는 사람이 있다. 이는 매우 잘못된 행위이고 사기꾼에 가깝다. 성경은 언제나 용서와 화해, 회개와 사랑을 말하지 협박하지 않는다. 성경의 하나님은 위협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세상에서 겪는 고통은 비슷하다. 사고도 당하고, 병도 걸린다. 가난으로 힘들어하고, 실연의 아픔을 맛보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으며 가슴이 메어진다. 고난과 고통에서는 차이가 없다. 차이는 고난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고난과 고통을 어떻게 이겨내는지에서 신앙은 진가를 드러낸다.
신앙인은 고난을 운명으로 보지 않고 고난으로 인해 좌절하지도 않는다. 불평으로 삶을 마치지 않는다. 고난을 최후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물을 줄 안다. 신앙인은 고난 중에도 감사를 말한다. 고통 속에서도 삶의 근원에 대한 긍정을 잃지 않는다. 신앙은 고난을 만날 때 빛을 발한다.
복을 빌다
복을 빌어도 되는가? 그렇다. 기독교는 축복의 종교다. 복을 바라는 것은 아무 문제 없다. 다만 복의 ‘개념’과 응답의 ‘방법’이 문제다. 인간이 행복을 위해 기도하거나, 아픈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복을 몇 가지 세상적인 안위와 직결해서 규정하면 기독교 신앙은 기복신앙이 된다. 이것이 문제다. 즉 복을 건강, 물질, 평안과 같은 몇 가지 항목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건강, 물질, 평안은 많은 복 중에 몇 항목일 뿐이다. 만약 복을 건강과 직결시킨다면 건강하지 못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자가 된다. 바울, 루터, 칼뱅과 같이 건강이 약했던 사람들은 복을 받지 못한 것이 되고 만다. 건강 여부, 물질의 다과(多寡) 여부가 축복의 척도가 될 수 없다.
또 자신의 방법으로 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 이는 기도응답을 오해한 것이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것으로 응답한다. 하나님의 응답을 열어두어야 한다. 복을 빌어도 좋으나 하나님의 방법으로 주시는 것을 받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복
복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다.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 있을 때 그것이 축복이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을 때 그 삶은 복된 삶이다. 숱한 믿음의 조상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구약의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가난했고 고난의 삶을 살았다. 예수님의 제자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지독하게 가난했고 고난도 많았다. 바울만큼 많은 고난을 겪은 사람도 드물다. 하지만 그들은 축복의 삶을 살았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건강, 물질, 평안은 모든 인간이 원하는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도 추구한다. 무속신앙에서도 원하는 것이다. 점을 치고 굿을 하면서도 건강, 물질, 평안을 바란다. 이는 기독교만의 독특한 ‘복’은 아니다.
예수님이 가장 기독교적인 복의 기준을 가르쳐주셨다. 산상수훈의 팔복이다. 여러분, 마태복음 5장 1∼12절을 소리내어 또박또박 읽어보라. 참으로 놀랍고 위대하다. 성경 외에 다른 곳에서 이런 복을 보지 못한다. 우리에게 복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제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복을 바라자. 우리 각자 자신을 둘러보며 복을 구하는 기도를 하자. 이웃에게 냉혹한 사람은 ‘온유의 복’을 구하라(마5:5). 불의를 보고 분노하지 못한 자는 ‘공의의 복’을 기도하라(마5:6). 고통받는 자를 외면한 사람은 ‘긍휼의 복’을 구하라(마5:7). 또 이 위기의 시대에 화해와 화평의 도구로 쓰임받는 복을 구하라(마5:9). 복의 대가는 크다. 당신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고, 하나님을 볼 것이며, 당신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허락될 것이다!
팔복이야말로 진정 기독교적인 복이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의 선조들은 모두 축복받은 자들이었다. 한국교회가 기복신앙으로 흘렀다. 세상적인 복을 바라는 교회가 되고 말았다. 한국교회가 진정 하나님의 복을 바라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김동건 교수 <영남신대 조직신학, 저자연락은 페이스북 facebook.com/dkkim222>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글쓴이 : 김종일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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