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신학

[스크랩]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4. 예수 그리스도:메시아] ① 어떤 예수?

수호천사1 2015. 1. 2. 22:11

기사이미지


기독교 정체성의 근간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기독교 신앙을 결정짓는다. 기독교는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유사한 종교적 전승을 가지고 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와의 결정적 차이는 예수님에 의해 갈라진다. 기독교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정초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에서 기독교를 ‘그리스도교’라고 부른다. 그만큼 예수님의 위치는 중요하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오늘은 역사적으로 나타난 다양한 예수의 이해와 잘못된 형태를 보려한다.

많은 예수들?

‘그리스도론’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체계적인 진술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대답이 그리스도론이다.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신약시대부터 있었다. 이 질문과 답변이 역사를 넘어 지금까지 연속된다.

예수님의 공생애때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이에 예수님이 이렇게 물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하나님의 아들 등의 대답이 돌아왔다. 실제 예수님은 한 분이지만 각기 자신의 생각에 따라 ‘예수’를 이해했던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오늘 독자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한다면, 독자들은 모두 정답을 맞힐 수 있을까. 여러분은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할 것이고, 바른 대답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여러분은 옳은 대답을 했다. 그러나 그 대답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무슨 의미인지를 다시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의미가 각기 달랐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들이 끊임없이 나타난 것이다. 기독교 주변에는 언제나 각기 자신의 생각으로 만든 수많은 ‘예수들’이 배회한다.

잘못된 예수 이해들

이제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예수님에 대한 대표적인 잘못된 이해를 보려한다. 기독교 초기부터 교부들, 신학자들, 교회 지도자들의 논의를 통해 몇 가지 잘못된 유형이 드러났다. 이런 유형은 과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늘도 여러 가지 변형된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있다. 예수님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세 가지 오해를 보자.

첫째, 예수님의 인간성에 강조를 두는 이해이다. 신학적으로 이런 이해를 ‘양자설’이라 부른다. 양자설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본다. 이런 이해를 가지면 예수님을 아무리 찬양해도 예수님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예수님은 결국 한 명의 위대한 인물이 될 뿐이다.

양자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유형이다. 성령이 임하거나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면 이런 예수는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위대한 인물이라고 해서 모두 ‘예수’가 될 수는 없다.

양자설은 오늘날 다양한 모양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실천을 강조하면서 누구나 ‘작은 예수’가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일종의 양자설이 될 수 있다. 물론 신앙의 사회적 실천은 중요하다. 그러나 실천을 통해 ‘예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 일부 신앙 집단은 예수를 ‘친구’로 부르면서 친근한 모습을 강조한다. 예수님을 은유적 차원에서 ‘친구’로 호칭하는 정도라면 문제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인간적 범주에 국한시키면 안 된다. 예수님의 인간성만 강조하면 예수님을 인간의 범주에 제한하게 된다.

둘째, 예수님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온 것을 거부하는 이해가 있다. 이런 사상을 가현설이라 부르는데 영지주의적 기독교에서 지지한 입장이다. 영지주의는 ‘구원’을 육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 본다. 영적인 것은 귀하고 육적인 것은 천하다. 전형적인 영과 육의 이원론적인 구조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저급한 ‘육체’를 가지고 성육신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가현설은 예수님의 존재를 신성한 물질이 유출한 것으로 본다. 그렇기에 가현설은 무엇보다 성경의 성육신 교리와 어긋난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도 온전한 대속적 죽음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에도 신자들 중에 가현설과 유사한 이해가 많다. 예수님의 인간성을 너무 낮게 보거나 영적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 예수님을 ‘영적 존재’만으로 간주하고 찬양한다. 구원은 언제나 육에서 벗어나는 영적인 것이고 육을 멸시한다. 가현설은 물질적인 것을 무시하는 만큼이나 현재의 역사도 경시한다. 역사는 의미가 없고 영적인 것만 사모한다. 이런 예수 이해를 가지는 교회는 역사 속에서 힘이 없다.

셋째, 예수님과 하나님을 동일하게 보는 인식이다. 성부 하나님이 직접 예수님으로 성육신하셨다는 이해이다. 이 유형을 양태론, 혹은 양태론적 기독론이라 부른다. 양태론은 하나님이 시대에 따라 모습만 다르게 나타났다고 본다.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의 구별이 없다. 구약 시대에는 성부로,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으로, 지금은 성령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이런 예수 이해는 일신론이 된다. 양태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성부 하나님도 죽는 이상한 논리가 된다(성부수난설). 일신론은 성경의 삼위일체 신관과 어긋난다. 오늘날에도 기독교의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유형이다. 다종교 사회에서 타종교에 비해 기독교의 유일신관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자신도 모르게 이런 주장을 하기도 한다. 혹은 해외 선교지에서 예수님을 토착신앙과 구별하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종종 있다.

다음 주부터 예수님의 존재,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인 하나님 나라, 구원의 범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다루겠다. 독자들은 이 주제들을 통해 그리스도론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김동건 교수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글쓴이 : 김종일목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