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교회와 선교역사
중국교회 얼마나 알고 있나?
석은혜
1. 들어가는 말
지금(1998년) 동남아시아 나라들이 IMF로 몸살을 잃고 있지만 중국은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 최근 중국은 아시아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국가들의 대대적인 통화 평가절하의 영향으로 수출감소를 기록했다. 이는 수출 시장과 상품구조가 비슷한 동남아 국가들의 평가절하로 중국 상품의 수출 경쟁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에 대한 이들 국가의 투자 역시 크게 위축되었다. 또한 이번 여름의 홍수로 인한 피해가 커서 금년도 경제성장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듯하다.
그러나 중국은 중미정상회담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들과 관계 확대를 위한 걸음을 바쁘게 하고 있고, 정치, 경제적으로 세계의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 영향력도 점차 확대되어 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 교회도 어려움 속에서도 계속적으로 부흥하고 있다. 많은 중국선교 전문가들은 중국 교회가 앞으로 21세기 세계선교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교회가 언제부터 존재하게 되었으며,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부흥할 수 있었는지와 현재 그들의 필요를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교회는 삼자교회와 가정교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 있다. 중국교회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삼자교회는 다 나쁘고, 가정 교회는 다 좋다는 식의 편견을 가지고 그들을 대할 수 있다.
중국 교회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존재하고 있는 교회로, 한국교회와는 다른 좀 특수한 상황이라는 것과 삼자, 가정 교회 각자 고유의 특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중국교회를 바로 알고, 바로 이해한 후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섬긴다면 중국선교에 있어서 많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2. 기독교의 중국 전래 역사
기독교는 635년 중동으로부터 들어온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을 통해 중국에 유입되었다. 경교(景敎)라 불리운 네스토리우스파는 고위층을 중심으로 210년간 전파되다가 845년에 있었던 당(唐) 무종(武宗)의 반불교도 박해시기에 소멸되었다. 781년에 건립되어 현재 시안(西安)에 전시되어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만이 그들의 선교적 노력을 증거할 뿐이다.
원(元) 왕조(1279-1368) 시기에 카톨릭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프란체스코회 선교사였던 몬테코르비노(John of Montecorvino)는 원나라의 수도에서 30년 동안을 선교 활동을 하며 지냈다. 그는 고아 소년들을 훈련시키 현지인 성직자로 세우려고 시도하였으나 많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중국을 복음화 시키려는 세 번째 시도는 명(明) 왕조(1368-1644) 말기에 예수회 소속의 신부였던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sis Xavier)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사비에르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숨졌으나 예수회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선교사들을 중국에 파송하였다. 그 중에 성공한 사람이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 신부였다. 그는 1582년에 중국에 처음 도착한 이후 18년 동안 많은 인내와 신중함으로 토착화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 1601년에 드디어 북경에서 따뜻한 영접을 받을 수 있었다. 1610년 마테오 리치는 사망하였고, 그가 보여준 우정과 서양의 과학적 지식을 중국 땅에 전해 준 공로 때문에 중국의 관리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584년에 천주교인이 단 세 사람이었는데, 1610년에는 2,500명, 1670년에는 27만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예수회는 중국인이 공경을 공경하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용하며 선교적으로 접근하고있었다. 프란체스코와 도미니쿠스회가 중국에 정착함에 따라 이 것이 ‘의례논쟁(儀禮論爭)’ 이 되어 이들 사이에 내적 갈등이 야기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중국황제와 교황 사이의 권위의 충돌로까지 발전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더 악화되어 급기야는 1724년에 강희 황제의 칙령이 공포되어 천문학자로서 베이징 정부에서 봉사하고 있는 소수의 예수회 과학자들을 제외한 모든 카톨릭 선교사들이 추방되기에 이르렀다.
3. 중국 개신교, 오늘이 있기까지
1807년 영국 런던선교회 소속이었던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이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중국선교를 시작하게 된다. 이는 중국선교를 위한 네 번째 시도이다. 당시 외국인은 중국에 들어갈 수 없었기에, 그는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카오에서 거주하면서 중국어 사전 편찬, 성경번역 등의 사역을 하였다. 그러나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중국은 남경조약(1842년)을 조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외국 선교사가 중국 연안 5개 항구(광저우, 샤먼, 푸조우, 닝보, 상하이) 범위 내에서는 전도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허드슨 테일러는 1854년에 중국에 첫 발을 내딛었고, 1865년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을 설립했다.
제2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천진조약(1858년)과 북경조약(1860년)을 체결하게 되었고, 이 조약에는 외국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전파할 수 있는 권리를 허용하는 조항이 있었다. 그에 따라 외국 선교회들은 많은 선교사들을 중국에 보냈고 전도, 학교설립, 병원설립 등의 사역을 했다. 이러한 선교사역의 형태는 중국이 공산화된 1949년까지 계속되었다. 중국의 선교사역이 활발해지면서 중국 현지의 전도 동역자도 양육 되기 시작했다.
1900년 의화단 사건인 반기독교 운동으로 2,000여명의 개신교 신자, 189명의 선교사와 자녀들이 순교를 당했다. 1911년 청 왕조는 손문의 민주주의 혁명에 의해 붕괴되었다. 민국 성립 후 기독교는 합법적 지위를 얻게 되어 복음이 더욱 널리 전파되었다. 신도들은 자신의 선교 책임을 느껴, 뜻을 세워 자립교회를 설립했다. 1918년 중국교회 지도자들은 중화내지전도회를 발기하였고, 최초로 중국인이 조직한 선교회가 생겼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중국의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신문화운동(New Culture Movemxnt)을 벌였다. 그들은 오직 과학과 민주주의만이 중국을 구해낼 수 있다고 믿고, 기독교를 미신적인 것으로 여겨 이를 거부하는 반기독교운동(1992년)을 일으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많은 자립교회가 건립되었는데 경전잉이 세운 예수가정, 왕명도가 세운 기독도회당, 위치만 리가 인도하는 소군교회 등이다. 교회는 핍박을 받았으나 끊임없이 성장하였다.
1930년대 교회는 더욱 서로간의 단합과 ‘토착화운동’을 중시하고 자치, 자양, 자전(삼자)을 강조했다. 삼자 정신은 적지 않은 중국신도들에 의해 인정받게 되었으며, 20, 30년대의 교회는 이미 서양적 색채에서 탈피하여 중국에 맞는 교회를 건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삼자는 다만 하나의 구호일 뿐이었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고, 1951년에 이르러서야 하나의 조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오요종이 주석이 되어 이 운동을 주도해서 서양교회 배척운동을 했는데, 서양 선교사들 배척 뿐만 아니라 서양교회와 무관한 자립교회 지도자인 위치만 니, 왕명도 등도 모두 투옥하였다. 1949년 당시 기독교인은 70만명 정도 였다고 한다.
1954년 7월 중국기독교 삼자 애국운동위원회가 정식으로 설립되었으며 가입치 않으려는 전도인은 모두 체포되었다. 목회자들은 모두 노동생산에 투입되었고, 예배드리고자 하는 신도들은 집회를 몰래하는 가정집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1955년 10월 정부는 삼자 이외의 어떤 기독교 활동도 불법이라고 선포하고 전국 교회를 대대적으로 합병하여 교회 숫자를 크게 감소시켰다. 상해에서 약 200개의 교회가 15개로, 북경에서는 64개의 교회가 4개로 합병되었다.
문화대혁명(1966-1976) 시기에는 삼자의 활동조차도 정지 되고 교회는 큰 핍박을 경험한다. 1976년 모택동이 죽고 문화대혁명이 끝이 나자, 1979년에 삼자교회가 다시 문을 열렸다. 이 삼자(자치, 자양, 자전)는 일찍이 중국교회에 존재하던 것이었기에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4. 중국의 종교정책,
1979년 중국의 강력한 개혁자인 등소평이 통치자가 되면서 중국 공산당은 제한적이나마 종교를 허용하는 종교정책을 채택하였다. 따라서 삼자애국운동위원회가 재건되었고, 종교사무국의 지도하에 당의 종교정책을 대행하는 일이 삼자회에 위임되었다.
문화대혁명 동안 중국공산당의 종교정책은 강제적으로 종교를 근절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76년 모택동의 죽음과 사인방의 몰락은, 앞으로 중국공산당이 실질적인 모든 분야에서 정책의 전환을 보일 것을 예고해 주었다. ‘경제적 실용주의’라는 말이 슬로건이 될 정도로 중국은 4대 현대화의 노선에 맞추어 그 정책의 방향도 재조정해갔다.
1980년대 후반에 중국공산당의 철학자들은 현재의 중국은 사회주의 초기단계에 있다고 천명했다. 따라서 당의 지도자들은 국가적인 우선순위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생산력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력이며, 우리가 가장 우선 해야 할 일은 인간 안에 있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기질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인들을 포함한 전 인민이 4대 현대화 작업에 자신을 폭 넓게 투자하도록 그들을 고무시키는 것이다.”
이들 지도자들은 중국 공산당이 종교를 근절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압력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견해는 오로지 고통당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만이 종교를 필요로한다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이 빈곤과 후진성의 문제 그리고 자연재해와 인간 생활고의 문제를 계속해서 가지고 있는 한, 몇몇 인민들이 종교에 의존하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오직 중국공산당은 어떻게해서든 인민 모두를 현대화 작업에 동원시키려고 했다.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 내에서, 종교는 당의 목적을 위해서는 때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조정될 수도 있는 하나의 현상이었다.
4대 현대화가 성취되면 종교는 결국 소멸하게 될 거라고 그들은 확신한 것이다. 중국은 1982년에 개헌을 했는데, 그 중 제36조에 “중화인민 공화국은 종교신앙의 자유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으나 현행 중국의 종교정책을 주관하는, “사회주의 시기의 종교문제에 대한 국가의 기본 입장과 정책에 관하여”라는 표제가 붙은 19호 문건에서 “공민은 신앙종교 자유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또한 불신앙 종교의 자유도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문건에서 “절대로 어떠한 사람에게도 종교를 강요할 수 없으며, 특히 18세 이하의 어린이를 입교시킬 수 없다.”는 등 신도의 활동을 제한하는 항목들이 있다.
이 문서에는 “정상적인 종교활동”과 “비정상작인 종교활동”이 존재하고 있다고 언급했는데 “정상적인 종교활동”이란 삼자애국운동위원회와 중국기독교협회 등 중국이 인정하는 애국적종교단체들의 감독하에서 행해지는 활동들을 의미한다.
정상적 종교활동을 좀더 풀어 설명한다면, 삼정정책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삼정(三定)이란 정편(定片-지정된 사역의 범위), 정점(定点- 지정된 교회), 정인(定人-지정된 사람)을 말한다. 이 새로운 정책은 가정교회 지도자들의 순회설교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한 정책이다.
삼정정책은 1983년에, 그것도 후반기에 보다 엄격하게 시행되었는데, 전국적으로 “반범죄 캠페인”을 전개하여 대대적으로 가정교회를 탄압했다. 이 박해로 어떤 가정교회는 삼자애국운동위원회에 가입했으나, 많은 가정교회는 지하로 잠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적 탄압은 계속되었지만 가정교회는 고난 속에서 영적으로 더 강해졌으며, 신자수는 계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으로 많은 외국인들이 중국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와 더불어 선교사들도 전문인으로 들어가 중국교회를 돕고 있다. 삼자원칙을 주장하면서 외국인의 활동을 규제해 오던 중국 정부는, 1994년 1월에 이붕 총리가 국무원령으로 “외국인 종교활동 관리규정”을 발표해 외국인들이 중국 내에서 활동규제를 문서화하였다. 중국은 계속적으로 종교정책을 법제화하여 외국선교사들의 활동을 규제하고 있으며, 사역을 하다 발각된 사역자는 벌금을 물리고 추방시키는 등 최근들어 더욱 강화하고 있는 추세이다.
5. 삼자교회와 가정교회
다시 삼자교회가 문을 열었지만, 어떤 기독교인들은 삼자교회의 정치적인 색깔을 인식하여 여전히 가정교회에 남아 있기로 했다. 이 때부터 삼자교회는 공산당과 연합하여 가정교회 및 가정교회 지도자들에게 삼자에 가입하도록 강요하거나 공안국에 고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현재 많은 삼자교회가 복음적인 교회로 변하고 있으며, 해외교회들도 ‘삼자교회도 하나님의 교회이다’라고 인정하면서 이들을 돕는 사역에 참여하고 있다.
중국 국무원에서 밝힌 <백서>에 의하면, 1980년대 이래 매년 회복되어 새로 건축된 교회가 6백여 개에 달했다. 1966년 말까지 인쇄된 <성경>의 발행 총수는 1천8백여만 권에 이르고 있고, 중국기독교협회가 1983년부터 편집 출판한 찬송가 <찬미시(讚美詩)>는 발행 총수가 8백여 만권에 달한다.
또한 현재 성도수는 약 1천만 명, 목회자는 1만 8천여 명, 예배당은 1만 2천여 개소, 간이활동장소(집회처소)는 2만 5천여 개소이다. 삼자교회는 계속 부흥되고 있는데 그 일 예로 베이징에 있는 총원먼(崇文門)교회의 주일예배를 보면 매주 마다 3천여 명이 참석하여 예배를 드린다.
그렇다면 현재 삼자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첫째, 여전히 지도자가 부족한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삼자교회는 천여 8백여 명의 목사가 있는데, 이들이 1천만 명 정도의 신도를 양육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정주(鄭州)에 있는 어떤 목사의 경우 그가 담임하는 교회는 한 곳이라 하더라도 동시에 100여 곳의 집회소를 돌아보아야 한다. 원래 맡겨진 설교, 양육사역 및 회의 등은 이미 빈틈없이 시간이 짜여져 있는데, 또 덤으로 각 집회소의 지체들의 필요를 돌아본다는 것은 너무나 힘이 들다고 말한다.
둘째, 삼자교회는 주일학교 발전에 어려움이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에서는 18세 이하의 청소년들에게는 복음을 전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삼자교회에 주일학교가 없다. 어떤 지방에서는 18세 이하의 청소년들은 주일학교에 나오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규정하고 있으나 어떤 지역에서는 주일학교가 있다. 최근들어 많은 교회에 주일학교가 세워지고 있다. 그러나 경험이 없기에 주일학교 교육을 어떻게 해야 몰라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셋째, 공개적인 전도대회는 가질 수 없다. 삼자교회의 어느 목사의 말에 의하면 개방 후 교회의 성장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일부러 전도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현재 신도들이 대부분 자기 스스로 교회를 찾아오고 있고 교회 내의 교인수가 많아짐에 따라 목사의 목회능력을 초과하고 있어 목회는 점점 힘들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 내의 전도집회는 필요치 않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삼자교회가 부흥하고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며, 하나님께서 중국의 영혼들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다.
중국선교 전문가들은 현재 중국의 기독교인 수가 8천만 명에 달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중국 기독교인의 80% 이상이 가정교회 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교회는 대부분 평신도 사역자들에 의해 인도되어 오고 있으며, 이들이 중국 기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82년 3월, 중국 종교사무국이 발표한 19호 문건에 의하여 가정교회는 정부와 삼자교회의 규제와 통제를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계속적인 복음 전파와 성장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었다. 그러나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가정교회 지도자들은 더욱 조직적이고 순교자적인 믿음과 신앙으로 전국에 걸친 복음 전파와 교회 확장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백성을 보존시키시고 자신의 목적을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와 성령의 놀라운 능력들이 각 지역에서 일어나고, 개별적으로 소그룹 기독교인 모임들이 발생하여 중국의 가정교회는 계속하여 성장, 부흥하고 있다. 가정교회는 주로 저장성(浙江省), 장시성(江西省), 허난성(河南省), 허베이성(河北省), 후베이성(湖北省), 산둥성(山東省) 등에 많이 있다.
편벽된 지역일수록 가정교회가 발달되어 있다. 중국의 비교적 편벽된 지역에는 일반적으로 한두 곳 정도 위임받은 소재지에만 삼자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래서 비교적 편벽된 작은 현(縣)이나 작은 도시(城), 작은 향(鄕)에는 삼자교회가 없기 때문에 자연 가정교회가 발달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가정교회는 형제회를 근거로 한 가정교회, 예수재림교에 근거한 가정교회, 참예수교회에 근거한 가정교회 등 약간 독특한 신앙 색깔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어떤 가정교회는 삼자교회에서 분열되어 나와 형성된 가정교회로 이런 교회는 매우 많다. 분열된 데에는 매우 많은 원인이 있는데, 예를 들면 의견의 불일치, 지도자의 권력다툼, 신앙의 견해차이 등등이다.
가정교회 역시 여러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사역자 부족이다.
가정교회는 지도자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들은 모여서 찬송 한 시간(부를 수 있는 곡도 극히 제한되어 있음), 기도 한 시간, 말씀을 나누기 보다는 간증식으로 돌아가며 교제하다가 모임을 마치곤 한다.
둘째, 이단이 성행하고 있다.
교회 역사상 교회가 크게 부흥할 때 이단 문제가 늘 따랐듯이, 중국 교회 역시 현재 크게 부흥하고 있는 가운데 이단 문제의 심각성이 계속 부각되고 있다. 중국 가정교회에 이단이 쉽게 침투 및 발생되는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중국을 주께로』, 98.9/10월호 참조).
가정교회는 복음전파에 상당히 열정적이다. 전도자들은 이 마을 저 마을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기도 한다. 도시의 그리스도인들이 때때로 복음 전파를 위해 시골까지도 간다. 가정교회는 평신도 운동으로 고난을 통하여 부흥되었으며, 그러한 부흥은 전도로 이어져 계속해서 복음이 흥왕하게 증거되고 있다.
6. 중국의 천주교의 부활
중국에 천주교가 다시 들어오게 된 것은 1842년이다. 1724년 강희 황제가 천주교를 철저하게 탄압한 지 약 100년 후에 이루어진 일이다. 위에 이미 언급한 대로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진 중국은 난징조약에 의해 5개의 항구를 개항하고 영국 상품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기독교 선교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개방하였다.
1858년 체결된 중불(中佛) 천진조약(天津條約)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5개 항구 외에도 중국 내지에 천주교 신부들이 들어가서 선교할 수 있었으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로써 중국 어디에서나 선교할 수 있고 천주교 교회를 건설할 수 있었다.
1870년 프랑스 천주교에서 천진에 세운 고아원에서 유아를 납치해 간다는 소문이 고조되어 중국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천진교안(天津敎案)이 발생하였다. 흥분한 군중들에 의해 프랑스 교회당, 고아원, 영사관저 및 영국과 미국의 교회를 불태우고 수빕명의 선교사와 외국인을 죽였다. 또한 1891년 안휘성, 강소성, 호북성 등지에서 천주교 교회당이 파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덕종 황제는 천주교 신부들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각지에서 계속하여 교난(敎難)이 발생하였다.
1900년 일어난 의화단 사건으로 25,000명의 카톨릭 신자들이 죽기도 했다. 그들은 서양 원수들을 멸하고 중국을 구하자는 것이었다. 19세기 말 중국에 있었던 천주교회의 선교사는 내략 800명, 신도는 40만명에서 70만명 정도로 추정이 한다.
마테오 리치 이래로 거의 350년 동안 남경의 한 주교를 빼면 중국인 주교는 한 사람도 없었고, 모든 주교가 외국인이었다. 그러다가 1926년에 처음으로 중국인 주교가 세우졌다. 1946년에는 하나의 자립적인 중국 성직위계가 수립되었으며, 베이징이 처음으로 중국인 대주교와 추기경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1949년 모택동이 정권을 잡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면서 선교사들은 중국을 떠나거나 쫓겨났다. 이 때 천주교 선교사는 대략 6,000명, 신도수는 250만명, 중국인 전도인이 1만명 정도였다.
이제 바타칸은 새 주교를 임명하지 않았고, 중국 천주교인들은 스스로 주교를 선출하였다.
1995년까지 중국천주교는 1백 26명의 주교를 자체적으로 선출하였다. 최근 십여년 동안 중국 천주교에서 배양하고 축성한 젊은 신부는 9백여 명이다. 중국 천주교는 115개 교구에 중국 주교 혹는 교구장이 교회 업무를 주재하고 있다.
천주교 신부들도 문화대혁명 때 많은 핍박을 받았고, 어떤 신부들은 이십년씩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개혁개방과 함께 천주교회도 문을 열기 시작했고 부흥되기 시작했다. 천주교회도 개신와 같이 삼재교회와 지하교회가 있다. 가정교회인들은 로마 교황청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삼자교회 교인중에도 로마의 교황청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천주교는 계속해서 부흥하고 있는데, 그 중 한 예로 베이징에 있는 남당(南堂)에는 매주일 마다 4차례의 미사가 열리는데, 2천여 명이 참석하고 있다. 그 중 한차례는 베이징에 있는 외국인을 위해 거행하는 영어 미사이다.
중국 정부측에서 밝히는 바에 의하면 현재 천주교 신도는 약 4백만명, 교역자는 약 4천 명, 예배당과 집회소는 4천 6백여 개다. 그러나 다른 통계에 의하면 1997년 현재 중국 천주교 신자는 1천만명, 공개된 교회의 주교 68명, 지하교회 주교 58명, 신부는 2,200명, 공개된 교회 신학생은 2,500명, 지하교회 신학생은 700명 된다고 한다.
7. 중국교회 바로 세우기
중국의 많은지역에서는 아직도 성경책과 신앙서적의 부족한 상태이다. 이러한 성경, 신앙 서적의 부족 내지는 결핍으로 성경 외에 다른 것을 주장하는 이단 출현 등 건전한 교육 및 성장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여전히 무신론 교육을 받는 수억의 중국 어린이들이 어릴 때부터 올바른 신앙교육을 받기란 너무도 어려운 실정이다.
그리고 주로 연안개방지구나 외국인 도서를 쉽게 접촉하는 일부 지역의 신도들은 많은 신앙 서적과 훈련교재가 있어도 어떻게 활용하는지 몰라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방치하기 때문에 서적들이 낭비되는 경우도 많다.
중국교회는 계속부흥하고 있으며,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선교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중국 교회를 돕고자 하는 자들이 중국의 종교정책과 중국교회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잘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균형잡히지 않은 사역자들이 그들을 돕는다면 오히려 해를 끼치게 된다.
우리는 선교에 앞서 중국의 문화와 종교정책, 중국교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는 것을 선행해야 한다. 중국을 이해하고 나서 중국 선교를 한다면 그동안의 시행착오를 줄일수 있고, 나를 만족시키기 위한 선교가 아니라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선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중국 선교의 문이 열려 더욱 많은 중국인들이 주님을 믿을수 있도록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주님의 충성스런 마음을 가진 종들을 통해 많은 중국 사람들이 참된 진리의 말씀을 듣고, 이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해야 한다. 그리고 중국교회가 주님안에서 바로서 어떠한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어떠한 이단사설이 그들을 넘어뜨리려 할 지라도 쓰러지지 않고 견고히 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가 중국교회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겸손하고 신중하게 여러 모양으로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중국은 반드시 복음화 될 것이고 마침내 21세기 선교의 주자는 그들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참고서적
『중국선교핸드북』, 조나단 차오 지음, 중국어문선교회 편역, 두란노서원 출판, 1991.
『중국과 교회- 제4호』, 중국복음선교회 연구소, 1998.
『중국기독교사』, 이관숙 저, 쿰란출판사, 1995.
『중국천주교』, 로만 말렉 엮음, 정한교 옮김, 분도출판사.
『중국을 알자 Ⅲ』, OMF Korea, 1994.
『십자가와 면류관』, 브라이슨 부인 저, 김진선 역, 성광문화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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