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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 세상과 구별되는 교회(교회의 거룩성)

수호천사1 2014. 9. 28. 22:22

2. 세상과 구별되는 교회(교회의 거룩성)

교회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르셨을 때는 교회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하시고자 하는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특이한 성격이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

특성이란 교회가 세상과 구별됨을 말하는데 그것은 이미 창세 전부터 그렇게 구별되어진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교회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셨다. 이러한 가르침은 에베소서 1 7절에 나타나는 것처럼 죄사함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죄사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서 되어진 은혜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1:7-8).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죄사함을 받았으니( 1:7)라는 말씀에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이것을 교회의 거룩성이라고 한다).

우리를 세상과 구별하신 이유는 본래 우리가 자유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었는데 그러한 숭고한 위치에서 죄로 말미암아 오히려 죄의 종이 되어 본래의 고귀한 위치를 잃어버리고 자유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리에서 우리를 구속하심으로써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최고의 능력과 가치를 발휘하고 드러낼 있기 위하여 타락한 세상과 구별을 하셔야 했다.

왜냐하면 죄의 자리에 있는 상태에서는 도저히 영광된 하나님 앞에 나갈 수도 없고 본래의 능력 자유함을 행사할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아래 있는 그의 백성을 구속하여 자유케 하려고 우리가 짊어진 죄의 대가를 속량하셨다.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에게 죄의 값을 치른 것처럼 오해하는데 여기에서 예수께서 속량하셨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대가를 속량하셨다는 의미이다.

1) 대가를 요구하는

죄란 본래가 죽음을 가져다주는 지독한 독이라서 죽음을 대가로 하지 않고서는 자리에 들어온 사람을 결코 풀어주지 않는다. 누구나 죄로부터 해방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해야만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이다. 아무도 법칙에서 예외일 없다.

죄의 마지막은 죽음이라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공의의 심판이 얼마나 엄중하고 무서운 것인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주셨고 결코 죄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셨다( 2:17). 대신 아담에게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을 향하여 나아갈 있는 능력을 풍성하게 주심으로써 아담의 가치를 세상에 충만하게 드러낼 있도록 보장해주셨다.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담이 죄의 자리에 빠져버렸기 때문에 인류가 자기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해야만 죽음의 자리에서 나올 있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기의 생명을 내어놓는다 할지라도 이미 그는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영원히 자리에서 나올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하나님은 죄인 대신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속량의 피를 죽음의 대가로 지불하고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침내 계획을 십자가 위에서 성취하셨다. 이것이 구원의 사실이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구속이라고 말하고 구속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자리로 옮기어 자유의 상태를 회복된 것을 중생이라고 한다.

2) 중생의 본좌

중생이란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던 자유함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있는 능력을 회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우리는 그동안 아래에서 노릇하던 자리에서 벗어나 이제부터 적극적으로 우리의 능력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고 영광을 나타내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자유인들이 모여 인생의 가치를 실현할 있는 곳이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세상과 구별되어 본연의 능력을 행사하기 위해 불리움 받은 성도들로 무리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때문에 교회의 지체로 들어오는 사람이나 받아들이는 성도들은 서로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성도의 무리인지 그리고 십자가의 구속 사실을 참으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신앙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확인하고 있어야 한다. 그와 같이 신앙을 고백하고 확인한 성도라면 이제는 자기 혼자서 자신의 삶을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구별된 성도의 무리가 되었음을 각성하고 지체된 자로서 책임과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알았다고 한다면 이제는 결코 자기 혼자가 아님을 자각해야 한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성도들의 무리 속에 소속되었다는 사실과 무리들이 이루는 교회 안에서만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유를 보장받을 있으며 자기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속을 받았다면 당연히 사람은 세상과 구별되는 교회에 소속이 된다. 이후부터는 교회와 상관없이 자기 혼자 하나님을 섬길 있을 것이라든지, 본연의 가치를 충분하게 드러낼 있을 것이라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고 영광을 드러낼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점에서 교회에 소속된 것이 중생했다는 하나의 증표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무리를 이루었다는 구성 자체가 중생의 사실이다. 이러한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어떤 곳에서도 중생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없기 때문이다. 내가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중생의 여부를 없다.

3) 중생의 증표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었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속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 어느 우연히 성경을 읽었다 해서 자기가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었는데 아래 팔려있는 노예와 같이 되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효로 말미암아 자유를 회복할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마련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기독교의 도리를 깨달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도리는 성경을 많이 읽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정상한 가르침을 통해서 알게 된다. 특히 이와 관련해 역사적으로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위대한 신앙고백서들이다.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아무리 그런 이야기를 해주어도 그들이 알아듣고 예수를 구주로 믿는 일이란 쉬운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계신다 말하면 대뜸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반문한다. 그리 쉽게 믿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 하면 그런 일이 어찌 있을 있느냐? 반박해 온다. 그러므로 이런 복음의 도리는 아무데나 가서 아무나 붙들고 전하는 아니다. 체면 때문에 앞에서는 아무 할지 몰라도 필경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복음은 그렇게 전하여지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가 복음의 도리에 따라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시는 능력을 힘입고 사는 것이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가장 일이다. 그리고 증거가 확실하다면 세상 사람들이 복음에 관심을 갖고 물어옴으로써 자연스럽게 복음은 전이된다. 아무리 지식이 많거나 돈이 많다고 해도 그런 것들이 복음의 도리를 알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관심을 갖고 성경을 읽는다 해도 복음의 도리를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뛰어난 두뇌가 아니더라도 웬만한 판단력으로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이 계시다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활동 하신다든지 혹은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이야기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증거라고는 없다. 왜냐하면 복음의 도리가 그렇게 성경을 읽고 가지 사실을 아는 것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경영해 나가는 실제적인 능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구원의 도리를 깨달았다면 사실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하나님께서 주시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자기의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셨다는 증표가 있어야 한다. 자기 혼자서 찾고자 해도 찾을 없으며 존재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실제적인 삶의 터전인 교회안에 들어와 있어야만 구원의 증표를 찾고 확인할 있기 때문이다.

4) 거듭남을 보증하는 교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혼자만의 진리가 되어서는 된다. 자기 혼자만 어떤 신비한 진리를 알고 있다면 그건 사람 이야기이지 그것이 객관화된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어떤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건 사람만이 알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과연 진리인가 아닌가를 확인할 있는 어떤 기준(criteria) 있어서 진실성을 증명해 주어야 한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땅에 성도를 보내실 사람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공감하고 나눌 있는 무리를 함께 보내신다. 같은 시대, 같은 곳으로 복음을 정당하게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무리를 보내주신다. 누구 혼자서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고 홀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되어 있지가 않다.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를 알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도해주신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도록 하신다.

그러한 무리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부르신 무리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형제임을 바로 알고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워 나가고 영광을 위하여 협력하게 된다. 지체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서로 같다는 것으로 확인되고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서로 명확하게 비추어 봄으로써 모자라고 부족한 것을 서로 보충하고 격려해 가면서 점차 완성되어 가도록 하는 데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깨달음과 지식이 우연히 얻어진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고 교회를 통해 보존해 오셨으며 이미 명료하게 밝혀진 성도들 안에서 객관적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비로소 발견하게 된다. 사실을 발견할 있는 터전이 교회이다.

교회는 신앙과 신학이 같은 사람들로 모이게 되고 세워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한 무리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이 기본적인 모습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는 먼저 세상과 구별된 무리를 모으심으로부터 시작하신다. 어떤 사람만을 세상과 구별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구별시키시어 무리로 만나게 하신다.

전에는 전혀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들이었지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면 거절했던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서로 형제임을 확인하고 모여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교회는 이렇게 기적처럼 세워진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이며 지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구원의 기관이 된다.

 

3. 구원의 기관으로서 역사적인 교회(교회의 통일성)

교회가 세워지면 이렇게 서로 만나고 함께 하나님의 일을 추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사실이 거기에서 발생하게 된다. 그것이 역사의 흔적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있다면 분명히 거기에는 역사의 자취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고 시대에 속한 성도들의 신앙과 우리의 신앙이 같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이 남겨 놓은 발자취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이정표가 된다.

그렇게 멀리 가지 않더라도 16세기의 종교 개혁 시대의 칼빈의 사상을 보면 신학이 우리와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의 신앙과 신학을 뒤따르고 있음을 명백히 있다. 어느 누가 칼빈의 생애와 사상을 나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길을 같이 가고 있음을 언제든지 확인할 있다(이것을 교회의 통일성이라고 한다). 이것이 개혁 교회의 모습이다.

개혁 교회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역사로서 항상 우리에게 남아 있다. 어느 시대의 교회가 시대의 교회와 단절되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면면히 흘러오는 역사적인 교회에 바탕을 두고 교회가 존재한다.

따라서 개혁 교회의 역사가 지금까지 흘러온 발자취를 지켜보면 신앙과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내가 신앙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학 노선이 같다는 사실을 확인할 있다. 그렇지 않고 지금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신학적인 지식이 지금까지 교회가 가지고 왔던 흔적 역사적인 자취와 비교해 전혀 다르다든지 엉뚱한 것이라면 매우 일이다. 그건 이단이거나 사이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가지는 신앙의 노선과 삶의 모습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 등이 역사적인 또는 전통적인 교회가 가지고 왔던 것과 비교해 같아야 하며 안에서 객관성을 찾을 있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무언가 추구해서 이만큼 이룬 것이 있다면 우리에게서만 아니라 적어도 역사 안에 있는 개혁 교회의 발자취 안에서도 모습을 찾을 있어야 한다. 특히 초대교회가 보여주었던 신앙의 모습과 면밀히 비교해 보았을 동질성을 확인할 있어야 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초대교회의 신앙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비교해 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과 우리의 신앙이 같은지를 확인할 있어야 한다. 내가 중생했고 하나님을 알았고 신앙하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습과 삶의 모습이 닮은 데가 많아야 한다. 특히 교회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었던 초대교회와 맥을 같이 하고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이 초대교회의 속에서는 분명히 나타나는데 그들의 삶이 나와 무관하다면 우리는 스스로 점을 주의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좀더 올라가서 구약의 교회와도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맥이 일치해야 한다. 광야 교회, 사사 시대의 교회, 이스라엘 왕국 시대가 보여준 교회적 삶의 모습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현재 존재하는 우리 교회 역시 그들이 추구했던 기본적인 삶의 열매가 같아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 역사의 장을 구성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 교회가 추구한 신앙 생활의 흔적이 역사 안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흔적이 10년이 지났든 100년이 지났든 우리 다음 세대에 개혁 신앙을 가지고 있는 후진들이 자기들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비교해 같아야 되고 그들에게 신앙의 좌표가 만한 이정표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야 한다.

구약 교회에서나 초대교회에서나 종교 개혁 시대에 있어서나 지금 우리의 신앙이나 장차 후진들의 신앙이 항상 맥을 같이 하게 된다. 만일 각각의 신앙고백이 전혀 별개의 것이라 한다면 우리의 모습을 점검할 근거가 없어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이라는 것은 역사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삶이 역사에 기록될 만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중생한 사람들의 삶이기도 하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질 필요 없고 역사에 대한 책임도 없다. 그들은 역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별개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잇고 후세에게 넘겨줄 책임이 있으며 우리가 남길 발자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옳은 길로 가거나 또는 그른 길로 가는 책임이 있음을 인식하면서 시대를 살아야 한다.. 출처 God`s Will 글쓴이 서성필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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