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교회 존재의 의미
여기에서 우리가 잠시 되돌아 보아야 할 것은 제1세대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에서 왜 그렇게 몰살을 당하게 되었는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애굽에서 각별한 권능을 체험하고 해방된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라는 사명을 부여받고 위용을 갖추어 가나안으로 진군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광야에서 유랑하다가 모두 멸절당했던 역사적 사실 속에 우리가 찾고자 하는 문제의 해답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내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죽어버렸는가?’ 하는 문제이다.
1)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 기관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처음에 도착한 곳은 시내산이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법을 제정해 주신다(출 20-23장). 그것을 우리는 율법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장차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세울 나라의 성격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이스라엘을 통치하실 이념을 먼저 선포하신 것이기도 하다. 또한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 하신다는 증표로서 성막을 짓게 하셨고, 그 성막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친히 다스리실 것과 인도하실 것을 자세하게 언급해 주셨다(레위기).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그들의 왕으로 모시고 모든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러한 제도가 바로 성막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 제도이다. 이러한 제반 준비를 모두 마친 후에 하나님의 인도로 이스라엘은 시내산을 떠나 가나안으로 진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막상 가나안 입구에서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후 가나안에 입성할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민 13장). 오히려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불평한다. 하나님의 소유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가나안에 진군해야 할 중대한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스로 그 사명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러한 불신앙에 따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40년 간 방황하게 하셨다.
그들이 그처럼 중요한 위치에서 하나님을 배신한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문화적 사명에 대한 각성이 박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상태로는 그들을 가나안에 인도하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 세대를 위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새롭게 가르치시기로 하였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는 동안 항상 새로운 길로 그들을 인도하셨다. 한 지역에서 장시간 머물렀을지라도 항상 새로운 지역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계심을 성경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길을 떠날 때는 먼저 하나님의 쉐키나(그 영광스런 구름)가 성막을 떠나 앞서가면 그들이 다 짐을 거두어서 그 뒤를 좇아갔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전에 갔던 곳으로 가시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길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은 ‘교회란 항상 하나님에 대하여 새로운 지식을 갖고 새롭게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아야 할 것’에 대하여 계시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그분이 누구이신가?’를 날마다 새롭게 알아 갈 것을 바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지 못하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한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2) 교회는 왕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제2세대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항상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과 그들의 왕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이다.
이스라엘 백성이라 한다면, 즉 그들이 진정 하나님의 유일한 교회라면 날마다 자기들의 삶 가운데서 새롭게 등장하시고, 새롭게 나타나시며, 새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해 나가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신지식이 정체되지 않고 점점 새로워지고 풍성해져야 한다. 이것이 제2세대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훈련시킨 이유이다. 그러한 백성이어야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사명을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시어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는 나라를 건설할 사명을 주셨는데 이는 그들이 항상 새롭게 인도해 내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식이 없다면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건설하고자 하시는 나라를 그들이 건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아니라면 이스라엘을 구태여 애굽에서 불러내실 필요가 없었다.
결국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나라를 건설하지 못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존재할 의미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바르지 못하다면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세우게 될 나라 역시 의미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은 오히려 하나님의 저주로 멸망하고 만다.
신명기 29장에서도 똑같은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신명기 29장 18-21절에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염려함이라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로 그의 위에 붓게 하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로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필경은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시되 여호와께서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구별하시고 이 율법 책에 기록된 언약의 모든 저주대로 그에게 화를 더하시리라”고 모세는 경고하고 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저주를 받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불리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신명기 29장 13절에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너희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님은 친히 너희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고 한 것같이 애굽에서 나온 제1세대 이스라엘처럼 제2세대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사명을 소홀히 한다면 의당히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에게 임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은 출애굽기 19장에서 제1세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대상이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위치에 서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신 28:7-10)는 말씀과 같이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특별한 지위에 서 있었다.
3)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이스라엘은 이처럼 독특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래서 신명기 29장은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민족의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한다.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서 산다는 것은 우상을 섬기지 않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철저히 순종하는가 안 하는가에 따라 그들의 존재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단적으로 표시하는 말이 곧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철저하게 순종했을 때 일어난 대표적인 사건이 여리고 성 전투였다. 제2세대 이스라엘 백성이 신명기의 말씀을 듣고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의 지도를 받아 가나안 땅을 점령 할 때 그들이 제일 처음 직면했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 말씀에 따라 승리한 곳이 여리고 성이었다.
그 성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지략과 전투적인 계략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 명령에 단지 순종한 결과로 승리했을 뿐이다. “엿새 동안에는 한 바퀴씩 여리고 성을 돌고 이렛날에는 일곱 바퀴를 돈 후 크게 소리를 질러라”는 명령에 따라 행함으로써 승리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기본적인 통치 방법을 하나님의 백성의 순종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 형태는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할 때가 이때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얻고 나의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다. 이 권능이란 성령님의 능력으로써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성령께서 우리를 억압하거나 강압하시는 분은 아니다. 오히려 자율적인 천국 백성으로서 자신의 자유 의지를 정상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분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를 지배해 오던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비로소 인간의 정상한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된다.
반면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기 전의 상태는 여전히 죄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을 가리켜 죄의 종된 사람이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2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세상의 제도라든지 사탄의 계략에 빠져서 죄에게 종 노릇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우리의 신분은 죄의 종이었는데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어 참 인격을 발휘하는 자유인이 되도록 하셨다.
4) 교회는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 인격체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격을 완전하게 발휘함을 말한다. 어떤 이상한 기운이라든지 어떤 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서 어떤 에너지가 되어서 자기 생명의 가치를 완전하게 발휘하게 하신다. 그것을 가리켜 성령의 충만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가 이때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그 나라가 언제 세워질 것인가는 하나님께 속한 문제이고, 그 나라에 들어갈 백성의 자질이 문제가 된다’고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 하면 자기의 가치를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자유 의지를 가지고 그것을 정상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장차 우리가 들어갈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지금의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께서 운영하시는 우주적인 나라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자유이다. ‘이 자유를 백분 발휘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이다. 그러한 능력이 없다면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자질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자유 의지를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교회의 능력이다. 이 세상은 어떤 법이 있어서 강제로 운영하고 집행해 나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러한 법으로 강제 운영되지 않는다. 자기 의지를 발휘하여 하나님께 나오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헌상하게 된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자기의 의지로 한다. 그렇게 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통일체(unity)를 이루게 된다. 정신적으로 통일성을 이루고 하나의 몸을 이루게 된다. 이것이 교회의 능력이다. 각각의 사람들이 철저하게 자기의 자유 의지를 행사하여 하나의 생명체로 유기적 통일을 이루는 것이란 큰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이 능력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행사하신다. 얼굴도 다르고, 생활 습관도 다르고, 환경도 다른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서 자기의 인격을 각각 최고로 발휘하게 하신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한 지체요 한 몸이 되고 한 단위(unity)를 이룬다는 것은 놀라운 신비이다. 그래서 교회를 가리켜 신비한 연합체(unio mistyca)라고 한다.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신비이다.
그러한 신비한 연합은 이미 하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삼위일체 하나님’ 곧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는 각각 독립된 주체시며 각각의 고유한 인격을 백분 발휘할 수 있는 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해서 전혀 침해하지도 않고, 충돌하지도 않고, 온전히 하나가 되신다.
이것이 신비한 삼위일체이며 이러한 하나님 나라적인 원리가 교회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한 신비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이 교회와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인격적인 충돌이나 침해가 없으면서도 온전하게 교통함으로써 서로 하나를 이루게 된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도 마찬가지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인격과 하나가 되어주시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인격을 침해하시지는 않는다. 우리의 의지를 억압하셔서 어떤 일을 하게 하시거나 못하게 하시는 일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의 손을 잡고 끌고 간다든지 아니면 어떤 나쁜 길을 가려고 할 때 발을 묶어서 못 가게 하는 것 등을 성령님의 인도나 역사로 생각하는데 그렇지는 않다.
성령께서는 철저하게 우리의 자유 의지를 행사하도록 하신다. 그러면서도 우리 의지를 백분 발휘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성령과 온전한 교통을 이루게 하심으로써 우리와 하나가 되어주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하나님과의 자발적인 관계, 성령님과의 자발적인 관계 확인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다고 말한다. 내가 순전하고 온전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을 의지할 때 비로소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과 합치된 하나님 나라적인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출처 God`s Will 글쓴이 서성필
'평신도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2. 세상과 구별되는 교회(교회의 거룩성) (0) | 2014.09.28 |
---|---|
[스크랩] 제3부 교회가 가야 할 길 (0) | 2014.09.28 |
[스크랩] 2. 교회 존재의 의미 (0) | 2014.09.28 |
[스크랩] 2. 교회 존재의 의미 (0) | 2014.09.28 |
[스크랩] 성도가 꼭 알아야할 성경진리 (0) | 2014.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