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운동은 왜 일어났는가
오덕교 교수
종교개혁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한 해석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역사적 사건도 없을 것이다.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이해는 그 사건에 관련된 주변의 요인들과 그것을 묘사하고 있는 글들에 대한 역사가의 주관적인 반응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역사가들은 종교개혁 운동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을 따르는 것을 배척하고 어떻게 하면 객관적인 해석을 할 수 있을까 고심하여 왔다. 그러나 인간은 객관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것에 대하여 말할 때 인간들은 언제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에 근거하여 생각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전제 없는 객관적인 역사 해석은 불가능하다.
역사가가 역사를 해석하면서 어떤 점을 강조하고 어떤 사건에 비중을 두며 의미를 부여하고 평가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오게 된다. 역사에 대한 해석은 역사 해석자가 가지고 있는 전제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종교가 인간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것은 철학의 가치관만이 아니라 그에 따라서 기인하는 행동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인간이 단지 물질에 불과하다는 사상이 유물주의적인 사회주의 체제를 만들어 놓았다면,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사상은 기독교적인 서구 자본주의를 만들어 놓았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운동이 왜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나게 되었는가 묻는 물음에 답하는 답변도 그것을 해석하는 자의 전제에 따라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Ⅰ. 종교개혁에 대한 해석들
비록 역사 해석자의 주관과 전제하는 사상에 따라 종교개혁에 대한 해석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종교개혁 운동에 대한 해석은 주로 세 부류의 사람들에 의하여 해석되어 왔다. 첫째는 개신교 역사가들의 해석이다. 개신교 역사가들은 종교개혁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16세기의 종교개혁 운동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했던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이와 같은 개신교도들의 종교개혁에 대한 해석은 독일의 역사학자요 개혁자인 플라키우스 일리리쿠스 (Flaccius Illyricus)가 1562년에서 1574년 사이에 쓴 「마그데부르그 세기 (Magdeburg Centuries)」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시도하였다. 두번째 해석은 로마 천주교 역사가들의 해석이다. 로마 천주교 역사가들은 중세 교회의 무오를 주장하면서, 종교개혁 운동을 하나의 이단적이요 분리주의적인 운동으로 평가한다. 이와 같은 로마 천주교회의 해석은 추기경 바로니우스(Baronius)가 1588년에서 1607년 사이에 완성하였고, 후대의 로마 천주교회 역사가들의 종교개혁 운동에 대한 해석의 기본적인 교과서가 된 「교회 연대기 (Annales Ecclesiatici)」에 기인한다.
바로니우스 전통에 따라 로마 천주교회의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종교개혁 운동을 이단적인 동기에서 시작된 분리 운동으로 해석한다. 그들에 따르면 종교개혁은 중세 신학이 혼란한 틈을 타 일부의 학자들이 정통 로마 천주교 신학에서 이탈한 데서 기인한 운동이다. 중세 말엽 서구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재론을 따르는 고전주의 (via antiqua)와 오캄의 유명론을 따르는 현대주의 (via moderna)가 서로 대립상태에 있었다. 오캄주의자들이 유명론적인 인식을 극단화하여 신앙과 이성의 영역으로 나누었다. 유명론자들은 로마 천주교회의 교리들이 신학적으로는 정당할 수 있으나, 성경적으로는 오류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로마 천주교 역사학자들은 루터가 이와 같은 오캄의 이단적인 유명론을 받아들이면서 분리주의적인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루터가 오캄주의의 영향을 입은 것은 사실이다. 그는 최후의 오캄주의자라는 가브리엘 비엘 (Gabriel Biel, d. 1485)의 글을 통하여 유명론을 수용하였다.2 비엘은 15세기 초반 독일에서 태어나 공동생활 형제단에 입단하였고, 1432년부터 하이델베르그 대학과 에르푸르트 대학 그리고 콜로냐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아퀴나스의 복고주의와 오캄의 현대주의를 두루 익힌 중세 말기의 학자이다. 가브리엘 비엘은 자연 신학의 입장을 취하는 아퀴나스보다는 종교의 초자연성을 강조하는 오캄의 입장을 지지하였지만 토마스 아 켐피스 (Thomas a Kempis)의 반지성주의에 찬성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실을 간과한 로마 천주교회의 신학자 요한 에크 (Johannes Eck)는 1519년 라이프찌히에서 열린 개혁자와 로마 천주교도 사이에 있었던 종교개혁 논쟁에서 루터의 개혁을 전통적인 아퀴나스 신학에서 이탈한 오캄의 입장이라고 지적하고, 종교개혁 운동은 다름 아닌 로마 천주교회의 정통적인 교리에서의 이탈이라고 하였다.3
마지막으로 세속적인 해석이 있다.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난 배경을 종교적인 데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당시의 경제생활과 사회적인 가치관의 변화 또는 국가적, 정치적인 개념의 변화에서 찾는다.4 예를 들면, 사회학자들은 자본주의의 발생, 중산층의 형성, 인쇄술의 발명, 광업, 조선술 기술의 혁명등과 같은 사회구조의 변화 가운데서 종교개혁의 동기를 찾고자 하였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종교개혁을 봉건주의의 붕괴와 중산층의 일어남에 초점을 두면서 해석하였다.
개신교 역사가들 가운데도 종교개혁을 보는 시각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가들도 그들이 소속되어 있는 종파의 신학적 전통에 따라 해석하기 때문이다. 곧 루터의 개혁 사상을 따르는 루터파는 종교개혁에 있어서의 루터의 위치와 그의 업적에 초점을 두어 설명한다. 이와 같은 루터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학자로는 고든 럽 (Gordon Rupp), 베인튼 (Roland H. Bainton) 그리고 게하르트 리터 (Gerhard Ritter)등을 지적할 수 있다.5 칼빈주의자로 일컬어지는 개혁주의자들은 울리히 쯔빙글리와 존 칼빈, 영국의 청교도와 존 낙스의 가르침과 개혁 운동에 초점을 두어 종교개혁 역사를 설명한다. 이와 같은 개혁파 입장을 취하는 이들 가운데는 종교개혁이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역이었다고 주장한 메릴 다비네 (Jean Henri Merle d' Aubigne)와 쟌느 카디에 (Jean Cadier) 그리고 죠셉 보하텍 (Josef Bohatec)등을 예로 들 수 있다.6 그러나 영적인 유산의 기초를 과격파에서 찾는 역사가들은 로마 천주교회를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루터파와 개혁교회의 개혁 운동을 비판한다. 그들은 차라리 칼슈타트 (Carlstadt), 토마스 뮌쳐 (Thomas M nzer), 슈벵크펠트 (Schwenkfeld)와 같은 과격파의 개혁 운동이 진정한 종교개혁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과격파의 입장을 두둔하는 글들은 노만 콘(Norman Cohn), 조지 윌리엄스 (George Hunston Williams)등에게서 나타난다.7
위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종교개혁에 대한 해석은 그것을 해석하는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이 취하는 것과 같이 종교개혁에 대한 과격파의 입장을 두둔하면서 개혁주의적이라 할 수 없고 천주교회의 해석을 따르면서 자신의 입장을 과격파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종교개혁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는 과격파의 입장이나 세속적인 해석 그리고 로마 천주교회의 입장을 따르는 것보다는 보다 성경적이었고 종교개혁 운동에서 주류를 형성하였던 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 종교개혁을 바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Ⅱ.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난 16세기는 믿음 때문에 살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던 시기였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유럽의 마을에는 교회당들이 서있고, 교회당에는 성직자들이 교회를 섬기곤 하였다. 성도들의 영적인 만족을 위하여 교회당에는 채플이 즐비하였다. 그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하여 단적인 한 예를 들어보자. 15세기 말의 콜로냐는 30,000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였다. 그러나 이 도시에는 100여개의 교회당과 채플 그리고 100개가 넘는 수도원이 있었다.8 따라서 콜로냐에는 인구 300명에 하나의 교회당과 채플 그리고 수도원이 서 있던 도시였다. 이와 같은 상황은 콜로냐라는 도시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개혁 이전만큼 종교적인 시대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 운동이 종교적인 시대에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들이 그렇게 왕성하던 시대에 종교개혁 운동이 반드시 일어나야만 했는가, 종교개혁은 오히려 교회의 힘을 약화시킨 것이 아닌가 묻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당시의 교회들이 고백하던 신앙과 생활이 기독교적인 것이냐 하는 점이다. 비록 어떤 집단의 지도자들이 기독교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른 신앙, 성경이 제시하는 바른 예배, 성경이 제시하는 바른 생활에서 이탈하여 있다면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없다. 비록 종교개혁 이전에 교회들이 왕성하였다 하더라도 교회가 고백하는 교리가 성경에서 떠나 있고, 미신적인 예배가 드려진다면 성경적 기독교회의 번성은 아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이전에 교회들이 번성하였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성경에서 떠나 있는 교회들이었다면 개혁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종교개혁이 인간에 의하여 의도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였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기 위하여 오랫동안 많은 준비를 하셨던 것처럼, 종교개혁을 통하여 그의 교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수많은 준비를 하셨다.9 이제 종교개혁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 곧 종교개혁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학문적인 배경에 대하여 살펴보자
1. 경제 구조의 변화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 유럽은 전쟁과 질병 그리고 기근으로 황폐한 시기였다. 십자군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1346년엔 전염병으로 2,500만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다. 그리고 백년 전쟁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생겨났고, 유럽에 불어닥친 기근으로 수많은 인파가 죽임을 당하였다. 따라서 1499년에서 1502년 사이 유럽의 인구가 급격히 감소되었다. 독일의 라인란드와 스와비안 지역에서는 전염병으로 인구의 절반 이상이 죽었다. 이와 같은 인구의 감소로 1500년대의 유럽의 인구는 1300년대의 인구와 거의 같은 숫자였으며, 자연히 노동 인구의 감소 현상을 초래하여 경제적인 불안을 낳았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와 인구가 급증하면서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1500년 경에는 인구 10만명 이상이 되는 도시가 유럽에 콘스탄티노플, 나폴리, 베니스, 밀란, 파리 등의 5개 뿐이었으나 1600년대 초반에는 12개의 도시로 늘어났다. 영국의 인구가 1500년경에 350만이었으나 1600년에는 500만이 되었고, 유럽의 인구도 1,200만에서 2,000만으로 증가하였다. 이와 같은 인구의 급증으로 인하여 노동력이 풍부하여지자, 귀족들과 영주들은 임대료 인상등의 방법으로 농민들을 억압하였다. 귀족들의 농민 억압 정책으로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나서거나 용병으로 지원하였다.
로마 제국의 군대들이 가는 곳마다 길이 놓여 쉽게 여행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중세 말기에 시작된 조선술과 해양 기술의 발전은 서구의 경제계를 변화시켰다. 15세기 경에는 비행기나 자동차가 없었으므로 최고의 수송력은 배였다. 조선술과 항해술은 14세기 중엽부터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발전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은 발전된 항해술로 서남 아프리카의 노예들과 금, 직물, 향료, 목재, 양곡, 가죽, 옷, 소금, 포도주 그리고 인도의 후추, 상아, 중국의 비단들을 가져왔다.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전에 힘입어 1492년 콜롬버스 (Christopher Columbus)가 신대륙을 발견하자 교회는 두려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신대륙의 발견으로 중세의 미신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일어나게 되었고, 무역업은 크게 발전하였다. 피에르 (Pierre)와 초운스 (Huguotto Chaunce)의 통계에 따르면 1550년경에는 스페인의 세빌 (Seville)에서 신대륙까지 200척의 배가 30,000t의 물건을 날랐고, 1660년에는 50,000톤의 물건을 운송하였다.10 무역량이 증가하면서 노동력이 요구되자, 노예 무역이 성행하였고,11 노동력의 도시로의 유입을 재촉하였다. 노동력이 도시로 이동하자, 넓은 토지를 소유한 영주들은 이제 노동력의 빈곤을 체험하여야 했다. 이를 해소하는 방법은 기계화를 촉진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산업혁명과 함께 협동조합과 은행들이 생겨났고, 은행제도의 출현과 함께 신용제도, 지폐, 할인제도 등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재정구조가 등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자본주의는 경제력의 집중화 (concentration of economic power)를 가속화 시켰다.12
이와 같은 경제적인 구조의 급속한 변화는 경제구조와 사회구조의 불안을 초래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물가의 상승이다. 중세 말기에 물가는 매년 2∼3%인상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신대륙에서 금과 은이 유럽에 수입되면서 물가가 급등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초반 영국에서 양곡의 도매 가격이 5배나 올랐고, 프랑스에서는 7배, 스페인에서는 그보다 더 많이 올랐다. 따라서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은 설교와 강의를 통하여 전매업자들, 고리대금업자들, 상인들, 특히 양곡 상인들의 농간에 대하여 비난하곤 하였다. 물가 상승으로 식량 폭동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전매업자, 고리대금업자, 상인들의 창고와 집은 공격의 주된 대상이었다.13 이러한 경제적, 사회적인 혼란은 사람들에게 개혁이든 혁명이든 간에 어떠한 변화를 요청하게 되었다.
2. 정치 구조의 변화
또한 십자군 전쟁 이후 장원제도의 몰락과 함께 봉건군주제가 무너졌다. 산업혁명 이후 상업으로 치부한 상인들은 중산층으로 변모하였다. 상인들이 경제를 장악하면서 그들은 왕의 자문 역할을 하는 등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세속권은 중산층의 후원으로 점차로 절대 군주화하였다. 이와 같이 시작된 절대군주들은 다른 왕에 대해 도전함으로 전쟁을 수행하거나, 교회권에 대항하여 왕권 신수설 (the divine right of kings)을 주장함으로로 왕권을 확장하였다. 이러한 왕권 확장 운동과 함께 영국과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 등에서 절대왕조들이 일어났다.14 절대군주들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하여 재산의 해외유출을 금하여야만 했다. 특히 재산의 로마 유출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교황청은 유럽의 3분의 1을 소유하면서 소작인들로부터 물질을 긁어모았다. 특히 독일에서는 국민 총수입의 40%가 로마로 유출되었기 때문에 독일 통치자들의 불평은 대단하였다.15 그러므로 국가 재산의 로마 유출을 막는 길은 바로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었고 이는 바로 종교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하였다.
3. 인쇄술의 발명
인쇄술의 발명은 종교개혁을 가능케 하였다. 인쇄기가 1450년 구텐베르그에 의하여 발명되자 프로벤 (Johannes Froben), 아메르바하 (Johannes Amerbach), 알두스 마누티우스 (Aldus Manutius)와 같은 인문주의적인 인쇄업자들은 헬라의 고전들과 교부들의 책, 중세의 서적과 문서들, 경건서적과 성경을 인쇄 보급하였다. 인쇄기의 발명으로 1457년에서 1500년 사이에 각기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100여종의 성경이 인쇄되었고, 그 결과 성경 값은 이전에 비하여 20분의 1로 떨어졌다. 1500년경에는 4만여종의 책이 출판되었고, 그 총 수량은 1,000만권 정도에 이르렀다.16 종교개혁으로 인쇄업은 크게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 한 인쇄업자가 연간 발행한 서적은 약 40여종이었으나 종교개혁으로 매년 500종류 이상이 출판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역으로 인쇄술이 종교개혁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나를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강림 때에 온 유럽의 사람들이 헬라어를 통하여 복음을 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인쇄기의 발명으로 루터의 개혁 사상을 즉시로 접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하여 슈비베르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독일어로 인쇄되었고, 매력적인 목각으로 새긴 인쇄물들은 개혁의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그는 인쇄기를 이용하여 몇주 안에 그의 대적인 로마 교회의 공격에 답하였고, 설교와 신학적인 논문과 출판에 사용하였다. 따라서 보통 시민들도 개혁 운동에 친숙할 수 있었다. 이는 1517년에서 1520년 사이 루터의 책들이 370판이나 출판되었고, 30만부 이상이나 판매되었다는 사실로 증명이 된다.”17 인문주의자 베아투스 레나우스 (Beatus Rhenanus)는 쯔빙글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루터가 95개조 신조를 발표하자 마자 그의 항의문들은 2주만에 유럽 전역에 퍼져나갔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므로 슈피츠가 “인쇄술이야말로 복음 전파를 위해 하나님이 내리신 최고의 선물”이라고 말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영국의 종교개혁자 요한 폭스 (John Foxe)의 평가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의 「순교기 (Book of Martyrs)」에서 폭스는 인쇄술로 인하여 “올바른 지식과 분별하는 빛이 훌륭한 양식 속에 자리잡게 되며, 어두움은 물러가고 무식은 드러나며 오류로부터 진리가, 미신으로부터 참된 종교가 구별되었다.”고 하였다.
4. 종교적 배경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다 변화하였다. 그러나 변화를 거부하는 하나의 집단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로마 교황청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교회는 어떠한 상황에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종교개혁 이전의 유럽의 사회는 매우 종교적인 사회였지만, 비기독교적인 사회였다. 프랑스 리용에서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였던 피터 왈도 (Peter Waldo, d. 1217)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성경을 번역하여 보급하면서 로마 천주교회를 개혁코자 할 때, 교회의 당국자들은 피터 왈도와 그의 제자들을 눈의 가시처럼 취급하였다. 왈도의 개혁 사상이 온 프랑스에 번지자, 로마 천주교 당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229년에 발렌시아 교회회의 (Council of Valencia)를 소집하였다. 그들은 교회회의를 통하여 왈도의 성경 중심적 개혁 사상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왈도를 따르는 자들을 적어도 100만명이나 살해하였다. 또한 교권주의자들은 평신도들이 성경을 소유하는 것이 그들에게 장애가 된다고 판단되자, 평신도나 하층 성직자가 성경을 소유하거나 연구하는 것을 금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따라서 1229년 이후 로마 천주교회가 지배하는 유럽에서는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성경을 소유한다는 것은 요즈음 세상에서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연구하는 공산주의자와 다름 없는 취급을 받게 되었다.
교회 당국에 의하여 말씀의 빛이 가려지면서 말씀의 암흑 시대가 시작되었다. 말씀에 대한 무지는 언제나 인간적이요 미신적인 신앙으로 인도한다. 따라서 중세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미신에 빠지게 되었고, 그들의 모든 생활은 미신적이 되었다. 더구나 당시에 잔인하였던 흑사병의 만연으로 인한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계속적인 터어키인의 위협은 서구인들로 더욱 미신 가운데 빠지게 하였다. 무지와 미신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왜곡되자, 중세인들은 하나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간주하였고,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인간편에서 무엇인가 고행과 종교적인 행사를 수행해야만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거닐던 성지를 고행으로 순례하면 모든 죄들이 감면된다는 사상이 나왔고, 지옥의 공포에서 벗어나 종교적인 안위를 얻기 위하여 새로운 기도문을 작성하여 암송하는 풍습과 분위기 나는 예배를 드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는 사상이 나와 촛불 예배가 생겨났다. 그리고 불교인들이 현세의 고뇌를 잊기 위하여 사용하는 묵주가 알레인 로쉬 (Alain de Roche)에 의하여 교회에 소개되면서 중세인들은 묵주를 만지면서 그들의 소원을 아뢰기 시작하였고, 죽음의 공포를 덜기 위한 죽는 기술 (The ars moriendi)도 고안되었다. 말씀의 빛이 가리워져 하나님은 공포의 대상이 되고 인간의 구원이 모호해지면서 중세인들은 미신에 더욱 빠졌다. 그들은 사람이 임종할 때가 되면 귀신이 찾아와 유혹하여 지옥에 데려간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임종시에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는 일이야말로 천국에 가는 지름길을 얻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천국의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인가 아니면 지옥의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인가는 그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보다는 죽음의 순간에 임종자가 어떠한 결정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이와 같은 반기독교적인 사상들은 바로 말씀에 대한 무지에서 기인한 것들이다. 더구나 한심스러운 것은 로마 천주교회의 지도자들이 성경적인 기독교 대신 미신적이요 반기독교적인 종교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지는 헌신의 어머니 (Ignorance is the mother of devotion)"라는 격언으로 중세인들을 세뇌하였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비성경적이요 미신적인 종교 형태로 나타난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중세에 가장 만연하였던 성자 숭배 사상이었다. 말씀의 빛이 가려지자, 중세인들은 하나님을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으로만 간주하여 감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존엄하신 하나님보다는 성자(聖者)들을 통하여 기도하면 어려움 가운데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성자숭배 사상이 나왔다. 중세인들은 성자들을 그들의 수호신으로 모셨는데, 성 죠오지 (St. George)와 성 마틴 (St. Martin)은 의사와 병자들의 수호신으로, 성 도로시아 (St. Dorothea)는 정원사의 수호신으로 성 바바라 (St. Babara)는 사냥꾼의 수호신으로, 성 바돌로뮤 (St. Bartholomew)는 정육업자들의 수호신으로, 그리고 성 안나 (St. Anna)는 광부들의 수호신으로 숭배되었다.19 특히 중세 말기에는 마리아 숭배도 급증하였는데, 마리아는 대표적인 성자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마리아를 “우리의 경애하는 여인 (Our Dear Lady)"으로 부르면서, 그녀의 생애, 신앙심 등을 기념하기 위하여 미사를 드리기도 하였다. 마리아 숭배 신앙의 극치는 프란시스칸 수도원과 도미니칸 수도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문주의자들에 의하여 제시된 마리아 무죄 잉태 (Immaculate Conception) 교리이다. 인문주의자들과 로마 교회의 당국자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처럼 죄없이 잉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중세인들의 또 다른 반기독교적인 미신적 신앙은 성물(聖物)숭배 사상에 잘 나타난다. 중세인들은 성물에는 죄를 면해 주는 효과가 있다고 믿어 성자들의 유물이라는 유물은 다 긁어모았다. 이와 같은 성물숭배의 대표적인 인물은 아마도 삭소니 (Saxony) 주 지배자였던 프레데릭 현인 (Fredrick the Wise)일 것이다. 그는 성물에 대한 신앙심으로 5,000종류의 성물을 긁어모았다. 그 가운데는 예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뽑아왔다고 하는 볏집, 예수께서 달리셨다.는 십자가의 한 파편, 예수께서 유아시절에 차고 다녔다는 기저귀, 마리아의 어머니가 되는 성안나의 엄지손가락 등이 있었는데, 프레데릭이 소장했던 성물들은 총 1,902,202일에 해당하는 면죄 효과가 있는 분량이었다.20 칼빈이 태어난 프랑스의 노아용 (Noyon)의 한 성당에도 이른바 예수께서 쓰셨다는 가시관의 일부와 세례요한의 머리카락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루터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비텐베르그 성 안에도 5,005개의 성물이 보관되어 있었고, 성물 하나 하나에는 100일의 면죄 효과가 있다고 말해져 왔었다.21 중세인들의 미신적인 신앙은 성자 숭배와 성물 숭배에만 머물지 않았다. 미신에 빠져 중세인들은 영국의 켄터버리 (Cantabury), 스페인의 콤파스텔라 (Compastela)등을 향하여 순례하였고, 독일 바바리아의 레겐스부르그 (Regensburg)와 알트 욋팅 (Alt Otting)등을 향한 순례자도 계속 늘어났는데 이 무리에는 병 낫기를 원하는 자들, 특히 절름발이가 다수 포함되었다.22
이와 같은 미신뿐만 아니라 로마 천주교회의 경제적인 타락 역시 종교개혁을 요청하는 하나의 동기를 제공하였다. 교회의 재정적 타락은 성직을 가진 자가 사망할 경우 그의 성직록 (benefice)을 교황이 마음대로 재할당할 수 있다는 교회법이 13세기에 제정되면서 가속화 되었다. 교황의 교회의 재정에 대한 입지가 강화되면서, 교황들은 다양한 세금제도를 고안하였다. 그들은 더 많은 세금을 거두기 위하여, 어떤 지역의 성직자가 유고될 경우를 고려하여 그 자리에서 후보자를 약속하면서 후보자에게 미리 세금을 거두는 예약세 (reservation), 성직자로 임직한 뒤 1년간의 수입을 교황청에 내는 임직세 (annate), 어떤 교회의 성직의 자리를 놓고 대기하는 대기세 (expection)를 고안하고, 성직매매 (simony) 등의 방법을 통하여 축재했다. 특히 교황 레오 10세 (Leo X, 1513-1521)는 돈 받고 팔 수 있는 많은 성직의 자리를 고안하여 매매하므로 그의 치하에서 돈 주고 살 수 있는 성직의 수는 사상 최고에 달하였다. 이와 같이 로마 천주교회와 지도자들이 돈만 밝히자 로마교회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로마교회의 탐욕을 빗대어 세상 사람들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라틴어 (Radix Omnium Malomum Avaritia)의 첫자를 따서 중세 교회의 중심지였던 이른바 거룩한 도시 로마를 탐욕의 도시 ROMA라고 풍자할 정도였다.23 인노센트 8세 당시 로마를 방문하였던 아우구스부르그 시의 서기였던 콘라드 퓨팅거 (Conrad Peutinger)는 로마의 부패상을 1491년에 아래와 같이 지적하였다.
나는 이곳에서 최고위직에서 최하위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직을 살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음모와 위선, 아첨이 아주 영예를 누리며, 종교는 탈선하였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야비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으며 정의는 잠자고 있다. 폐허가 된 고대의 유적들을 볼 때마다 이 유명한 도시가 들어보지도 못한 위선과 허식에 의하여, 그리고 모든 포악과 악독을 행하는 자들에 의하여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악한 자들은 그러한 악때문에 규제받는 대신 칭송을 받고 있다. 내가 그들을 책망하자 그들은 운명이 그렇게 결정된 곳이라고 말하였다.24
교회의 재정적인 부패는 결국 성직자의 타락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중세 교회의 도덕적인 타락의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로마의 교황 알렉산더 6세 (Alexander VI, 1492∼1503)를 들 수 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여자와 돈이었다. 그는 교황이 되기 전에 여러 명의 여자와 관계를 가짐으로 4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리고 돈으로 교황이 된 다음에도 첩을 두어 아들을 더 생산하였다.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교황은 그의 일곱살 밖에 안된 아들 세사레 보르기아 (Cesare Borgia)를 추기경에 임명할 정도였다. 성직자의 도덕적 부패상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여자와 돈 문제에 걸리지 않은 성직자가 없을 정도였다.25 이와 같은 성직자들의 부도덕에 대하여 당시의 많은 설교와 방문기록, 벌금형 장부, 첩을 데리고 살던 성직자에 대한 벌금제도 등에 잘 나타난다. 따라서 16세기의 순시 보고서에 의하면 화란 성직자의 4분의 1, 남부 라인지역 성직자의 3분의 1이 첩과 동거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성직자의 타락은 재정적인 풍요 때문에 주로 기인한다. 그러므로 중세의 지각있던 성도들은 세상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가난과 동거하기를 서원하고 황금을 돌 보듯 하라고 하였다. 중세의 대표적인 수도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프란시스 (Francis)의 물질관에 대하여 살펴보자. 그는 프란시스칸 수도사들을 위하여 규칙을 만들면서 「규칙」8에 다음과 같이 성직자와 물질의 관계를 말한다.
수도사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혹 어디를 가든지 어떤 방법으로 돈을 취하거나 받아서는 안된다. 의복을 의해서든 책을 위해서든 혹은 노동의 대가로든 아픈 형제의 긴급한 필요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이유로든 돈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돈을 돌 같이 여겨야 한다. 돈을 가치있게 생각하거나 추구하는 자의 눈을 가리려고 사단은 찾아 다닌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부정한 후에 그처럼 사소한 것으로 인하여 하늘나라를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자. 만일 우리가 어느 곳에서 우연히 돈을 줍게 되었어도 그것을 발로 밟는 먼지 이상으로 여기지 말자. 돈이란 헛되고 헛된 것이다.
물질에 대한 금욕적인 자세를 요구한 것은 프란시스만이 아니다. 베네딕트 (Benedict) 수도원과 도미니칸 수도원 (Dominicans) 그리고 시토 수도원 (Cistercians)에서도 수도사가 추구할 제일 목표는 청빈이라고 규정하였다.26 비록 수도사들이 이와 같이 청빈을 강조하였음에도 교회 지도자들이 물질로 인하여 타락하게 된 것은 말씀에 대한 무지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중세말의 성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무지할 뿐 만아니라 세상적인 교육 수준 역시 최저의 상태에 있었다. 당시에는 라틴어와 기초적인 교리문답 그리고 미사 드리는데 필요한 예배 의식 정도만 공부하면 누구든지 지방의 사제직에 임직되었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에 따르면, 우트레히트의 주교 데이비드(Bishop of Utrecht David, 1457∼1494)가 성직을 받으려 하는 자들을 평가하는 시험을 주관하였다. 데이비드는 부집사 (subdeacon) 후보에게는 쉬운 문제를 묻고 집사와 사제가 되고자 하는 자에게는 조금 어려운 것을 물었다. 그러나 많은 응시자가 형편 없는 무자격자임을 알게 된 데이비드 주교는 300명의 응시자 가운데 겨우 3명만 시험에 통과시켰다. 이러한 데이비스의 개혁 운동을 옆에서 본 그의 동료들은 불평하기를 “요즘과 같은 현대 시대에는 성 바울이나 성 제롬과 같은 이가 필요하지 않고, 데이비드와 같은 이가 필요하겠군”이라고 말하면서 비아냥거렸다고 한다.27 그러므로 종교개혁 전야의 교회는 교회 개혁에 대한 시도도 없었고, 그것을 시도하고자 하던 사람을 정죄하는 어두운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중세 말기에는 소수의 성직자만이 성당학교나 대학에서 수학했고 대부분은 라틴어도 읽을 줄 모른 경우가 많았다. 펠릭스 페이버 (Felix Faber)가 쓴 「울름의 연대기」(Chronicle of Ulm)에는 15세기 말에 울름에 있던 1,000명의 성직자 가운데 대학촌을 구경한 이가 거의 없고, 그 가운데 학사 학위만 소지했다 하더라도 큰 학자로 대접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28 이와 같이 수준이 낮은 성직자들 때문에 교회는 타락하고, 타락한 교회는 더욱 저질의 목회자를 배출하므로 중세 교회는 타락을 가속화하였다.
5. 학문적인 배경
로마 제국에 의하여 서유럽이 군사적, 문화적인 통일을 이루었던 것과 같이 중세 말기의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인 가치관의 변화는 종교개혁을 위한 하나의 준비였다. 경제적인 구조의 변화로 인하여 정치 구조가 바뀌고 종교적인 부패는 종교개혁을 요청하고 있었다. 더구나 어거스틴 신학의 부흥 운동과 르네상스 운동의 일어남으로 신학운동은 새로운 궤도를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어거스틴 신학의 부흥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과 은총이라는 이중구조를 강조하면서 자연을 통하여 우주와 보편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자연 신학은 성례신학을 중시하게 하였고, 성례신학이 중시되면서 은혜를 무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은혜에 대한 갈증이 점차로 증가하면서 위클리프 (Wycliffe)와 롤라드 (Loliards)에 의하여 은혜를 갈구하는 운동이 부흥하였고, 결국 이러한 사상은 루터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어거스틴 신학의 부흥이라고 할 수 있다.
어거스틴 신학이 신학자들에 의하여 일어났다면, 일반적인 평민들을 통해서는 인문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인문주의 운동은 아랍인들이 고전적인 문서를 서구에 제공하므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히브리어성경, 헬라어 성경과 초대 교부들의 믿음으로 돌아가자는 ‘원전으로의 복귀’운동(ad fontes, back to the sources)의 결과이다. 르네상스와 함께 독일의 인문주의자들은 교부신학과 고전에 대해 연구하였고, 스위스의 인문주의자들은 교부의 글들과 고대 문헌을 함께 연구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독일에서는 로이힐린 (Reuchlin)이 구약의 문법 연구를, 화란에서는 에라스무스가 헬라어 성경을 편집하여 출판하였다. 인문주의 운동은 두 가지 면에서 종교개혁 운동에 공헌하였다. 첫째는 인간의 위치를 높인 면이요, 다른 하나는 성경에 대한 연구의 강조이다.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의 감정과 그 가능성 그리고 인간의 유일함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인문주의자 마르실리오 피키노 (Marsilio Ficino, 1433∼1499)는 주장하기를 인간의 최고선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사후의 생활에서 성취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에게 인간은 우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자로 물질계와 영계를 이어주는 존재였다. 또한 피코 (Giovani Pico, 1463∼1493)는 히브리 신비 철학을 옹호하면서 인간에게는 그의 일생을 결정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함으로 인간의 가능성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인문주의자들은 모든것을 결정한 능력이 인간에게 있고, 또한 어떠한 것을 성취할 가능성도 인간에게 있기 때문에, 보다 나은 세상은 인간의 교육을 통하여 온다고 믿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문주의자들은 중세의 부패는 교육을 통하여 고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문주의 운동이 어떻게 종교개혁에 영향을 미쳤는지 대표적인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의 사상을 통하여 살펴보자.종교개혁 전야의 대표적인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 (Disiderius Erasmus, 1468∼1536)는 1468년경 한 사제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는 공동생활 형제단에서 교육받고 파리대학에 유학한 후, 1495년부터 일정한 소속 없이 유럽 전역을 여행하였고, 한동안 케임브리지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고, 1535년에는 바젤로 돌아와 생활하다가 1536년에 세상을 떠났다. 에라스무스는 교회의 부패가 무지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교회 개혁은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1524년에 쓴 「자유의지론 (De Libero Arbitrio)」에서 에라스무스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교육에 의하여 선한 양심을 소유케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 깨끗한 양심은 무엇을 의미하나? 그에게 있어서 깨끗한 양심은 연구하고, 좋은 글을 쓰고, 배우는 기쁨에 대한 열린 마음을 의미하였다.29 인간은 배움을 통하여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믿음은 학문 자체를 초월하면서 하나님과의 초월적인 연합을 가질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움을 통하여 지상에서 윤리적이며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에라스무스의 인본주의 사상은 로마 천주교도 뿐만 아니라 개신교도에게도 평화 애호주의 사상과 종교적 관용론을 포용케 하였다. 이러한 그의 영향으로 그의 제자들은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의 중간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또한 타락한 교회 생활을 개혁하는 길은 실천적인 경건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보았다 실천적인 경건이란 성경을 읽는 가운데 오는 진정한 경건을 의미하는데, 이와 같은 사상은 영국의 인문주의자 존 콜렛 (John Colet)에게서 온 것이다. 콜렛은 1509년 에라스무스가 영국에 와서 그의 집에 머물 때에 신약 연구를 권하였다. 콜렛의 지도 아래 그는 참된 경건은 말씀을 실천하는 것, 곧 실천적 경건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실천적 경건을 보편화하기 위하여 1516년 헬라어 신약성경을 편집하여 출판하였고, 교부들의 글을 편집하여 세상에 소개하였다. 또한 그는 로마 천주교회의 교리와 제도에 대하여 가혹할 만큼 잔인하게 풍자하는 글들을 써서 종교개혁으로의 길을 열었다. 즉 그는 「그리스도인 병사의 지침서 (Hand Book of a Christian Solidier, 1503)」와 같은 책을 통하여 경건의 실천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우신예찬 (The Praise of Folly)」과 같은 책을 통하여 당시의 교회를 풍자하였다. 우신예찬은 1509년 그의 친구인 토마스 모아의 집에서 집필되었는데, 책이 나오자 마자 매진되어 600회 이상이나 출판되는 기록을 세웠다. 에라스무스는 이 책을 통하여 교황들과 성직자들의 부도덕한 생활, 수도원 제도, 중세 스콜라 철학의 모호성 등 당대의 악폐를 꼬집었다.
사도들은 사방으로 다니며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지만 세례의 형식, 제재, 세례의 유효하고도 긍정적인 근거 등에 대하여 결코 교육한 적이 없다. 그들은 세례에 어떤 제거할 수 있는, 그리고 제거할 수 없는 특성이 있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한술 더 떠서, 마치 거기서 몇년이나 살다가 나오기라도 한 것과 같이 지옥의 구석 구석을 정확하게 그려낸다.
그들과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행복해 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경건한 자들” 또는 “수도승”이라고 불리운다. 그렇지만 이는 모두 그 이름의 진정한 의미를 속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은 가능한 한 경건한 것과는 거리가 먼 곳에 안주하려 하며, 또 세상에서는 안 가는 곳이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된 신념 중의 하나는 무식한 것이 거룩의 최고 상태라는 것이다. 그와 같이 확신하기 때문에 그들은 글을 읽지 못한다. 어떤 교단에 속한 사람들은 단순히 돈을 만지기만 하는 것도 마치 독약을 피하듯 한다. 그러나 그들은 술이나 여인을 가까이 하는 것을 결코 피하지 않는다.30
또한 에라스무스는 1517년 경에 무명으로 「천국에서 추방된 율리우스 (Julius Excluded from Heaven)」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을 통하여 악명 높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사후 세계를 그리고 있다. 율리우스는 천국 문전에서 베드로에게 추방당하는데, 다음은 율리우스와 베드로가 천국문 앞에서 행한 대화를 묘사한 글이다.
율리우스―문을 빨리 열어라. 만일 그대가 진정으로 그대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면 하늘의 모든 의식으로 나를 영접하였을 것이네.
베드로―당신이 내게 명령하는 것 같소. 당신이 누구인지 내게 말하시오.
율리우스―물론 당신이 나를 알꺼요.
베드로―내가? 나는 전에 당신을 본 적이 없는데, 특별한 사람이군.
율리우스―당신은 분명 눈이 멀었군. 당신이 율리우스 가(家)의 문장(紋章)인 이 황금 참나무를 모르지 않다면, 이 은 열쇠를 알아볼 것이요. 나의 삼층왕관과 보석으로 된 이 빛나는 옷을 본다면 말이오.
베드로―내가 은 열쇠를 보고 있지만, 그것은 교회의 참 목사이신 그리스도께서 내게 맡기셨던 그 열쇠와는 전혀 다른데. 그리고 자네가 쓰고 있는 그 거만한 왕관,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알아보겠나?31
또한 그의 「담화집 (Colloquies)」은 300회 이상 출판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1527년 파리에서 비판되기 시작하였고, 반동 종교개혁과 함께 그의 모든 저작물은 1559년 금서목록에 오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에라스무스는 헬라어 성경을 편집하며, 로마 천주교회의 부패상을 풍자와 해학의 방법으로 지적함으로 종교개혁의 기초를 놓았다. 루터가 알을 품어 부화시켰다면, 그 알을 낳은 사람은 에라스무스였다.
Ⅲ. 맺는 말
이와 같이 하나님은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종교개혁으로의 길을 마련하셨다. 비록 어떤 이는 로마 천주교회가 바젤 (Basel), 콘스탄스 (Constance) 교회회의와 같은 개혁 회의들을 통하여 교회를 개혁하였고, 트렌트 회의에서 다시 한번 개혁하였으므로 루터의 개혁 운동이 필요없는 것이었다고 주장하지만,32 루터의 개혁 운동은 하나님의 역사였다. 왜냐하면 개혁회의들은 로마 천주교회의 근본적인 오류를 청산하지 못했고, 단지 도덕적인 개혁만을 시도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안에서 회복되었고, 비성경적인 모든 교리가 사라지게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에 의하여 인간적인 모든 전통과 권위는 사라지고 성경중심적인 신앙과 생활들이 회복되었다. 또한 계급구조적인 사회에서 성경이 제시하는 평등과 자유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비록 종교개혁이 하나님의 일이었지만, 종교개혁에 대한 역사의 교훈을 가볍게 여기게 될 때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범하기 쉽다. 종교개혁이 하나님의 사역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 시대에 사는 우리는 성경보다 교회회의가 권위를 가지고 성경이 명하지도 않는 예배들이 교회당에서 시행되는 것들을 개혁해야 할 것이다. 개혁자들은 일반적으로 성화(聖畵)나 성상 숭배를 금하였고,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들이나 십자가를 예배하거나 부적처럼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만연되어 가고 있다. 개혁자들은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여 사제복을 입는 것을 거절하였으나, 한국의 개혁교회들은 로마의 신부처럼 로만 칼라를 하고 다니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개혁자들은 교회와 교회 사이의 평등을 주장하였지만, 한국교회에는 인간의 전통을 따라 한 교회가 다른 교회를 지배하는 형태들이 만연되고 있다. 어떤 교회는 이른바 ‘디아스포라’운동이라는 것을 전개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에 지점을 세우고, 또 다른 교회들은 한국 여러 지역에 지점 교회들을 세우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반 종교개혁적이요, 로마 천주교회로 돌아가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의 루터가 되어 한국교회 안에 점차로 일어나는 비성경적이요, 비종교개혁적인 요소들을 과감히 개혁해야 할 것이다.
주(註)
1. 종교개혁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바로니우스의 사상은 최근에 스팔딩 (Martin J. Spalding), 그리사 (P. H. Grisar), 윌리암슨 (Hugh Rose Williamson), 조지스 타바드 (Georges Tavard), 피에르 자넬 (Pierre Janeile), 그리고 조셉 로츠 (Josoph Lortz)와 같은 로마천주교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계승되어 왔다. 미국 루이스빌의 주교였던 스팔딩은 1860년 개혁주의 역사가 다비네 (Merle dAubigne)의 「종교개혁사 (History of the Reformation)」에 답하는 글인 The History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Louisville, Ky., 1860)의 제1권 102쪽부터 109쪽에 종교개혁은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리사는 Martin Luther, His Life and Work(Westminster, Md:The Newman Press, 1960)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심리적인 요인에서 찾았다. 또한 윌리암슨은 The Beginnings of the England Roformation(Sheed & Ward Inc. 1957)에서 종교개혁은 탐심에서 기인한 것으로 묘사하였다. 조지스 타바드는 Protestantism(New York:Hawthorne Books, Inc, 1959)에서 종교개혁 사상을 다루면서 개신교와 천주교회의 신앙적인 차이가 없고 다만 개신교는 분가한 작은 집이라는 주장을 폈다. 자넬은 Catholic Reformation(Milwaukee, Wis:The Bruce Publishing Company, 1963)에서 종교개혁은 불필요한 사건이었다고 주장하였다.
2. 가브리엘 비엘은 ‘오늘의 헌신 (dovotio moderna)’운동에서 강조하는 영성과 자신의 학문적인 연구를 조화시키려고 하다가 반(半)펠라기안 주의에 빠졌다. 비엘의 반펠라기우스적 신학은 그의 구원 서정에 관한 교리에 잘 나타난다. 비엘은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서정에 대하여 논하면서 성령의 은혜나 외적인 도움 없이 죄인의 독자적인 자유의지로 구원이 성취된다.고 하였다. 또한 인간의 우선적인 행동이 공로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획득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은혜의 상태에 거하므로 계속 선을 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가브리엘 비엘은 자신의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는 ‘자비의 약속’과 은혜의 상태에서 계속 선을 행하는 자에게 그 공로로 인하여 의인으로 인정하는 ‘공의의 약속’을 주셨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반펠라기우스 사상은 인간의 노력을 통한 구원을 추구하게 하였는데 이는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 (sola fide)’, ‘오직 은혜 (sola gratia)’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3. Lewis W. Spitz, The Renaissance and Reformation Movements(St. Louis, Mo:Concordia Publishing House, 1980, p 308).
4. 이와같은 부류에 속하는 학자로는 스미스 (Preserved Smith), 에바 프리스터 (Eva Priester)와 반 겔더 (H. A. E. Van Gelder)등이 있다. 스미스는 The Age of the Reformation(Holt, Rinehart and Winston, Inc, 1920)에서 주장하기를 종교개혁은 국가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개인주의가 팽배하면서 일어난 운동이라고 하였다. 또한 에바 프리스터는 Kurze Geschichte Osterreichs(Vienna:Globus Buchvertrieb, 1946)에서 종교개혁은 사회적 경제적 배경을 연구하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반 겔더는 종교적인 것으로 보는 해석을 지양하고, 참된 종교개혁 운동은 루터나 칼빈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의 전통을 계승한 계몽주의 시대의 인문주의자들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겔더의 입장에 대하여는 The Two Reformations of the 16th Century(The Hague:Martinus Nijhoff, N. V. Publishers of the Hague, 1961)의 pp 3∼10을 참고하라
5. 종교개혁 운동에 있어서 루터의 위치를 강조하는 대표적인 저서로는 루터의 회심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고든 럽 (Gordon Rupp)의 「하나님의 의 (The Rightoeusness of God)」와 루터의 생애를 묘사한 로랜드 베인톤 (Roland H. Bainton)의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Here I Stand)」등이다. 게하르트 리터는 Luther:His Life and Work(New York:Harper and Row, Inc, 1963)에서 루터의 종교적인 체험을 독일의 종교개혁의 의미를 여는 열쇠라고 강조하였고, 슈비베르트 (E. G. Schwiebert)는 Luther and His Times(St. Louis, Mo:Concordia Publishing House, 1950)에서 루터의 공적을 평가하면서 루터가 종교개혁에 성공을 거둔 것은 대학과 인쇄술과 같은 기관을 동원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6. 다비네는 History of the Reformation of the Sixteenth Century(Grand Rapids, Michigan:Baker Book House, 1846, Reprint edition)에서 종교개혁은 그리스도의 초림 사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의하여 준비된 교회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같은 그의 사상은 쟌느 카디에의 John Caivln, the Man Whom God Called와 죠셉 보하텍의 Bude und Calvin에 다시 나타난다.
7. 토마스 뮌쳐나 칼슈타트와 같은 과격파의 입장을 묘사한 저서로는 죠지 윌리암스의 The Radical Reformation(Philadelphia:Westminster Press, 1962)과 노만 콘의 The Pursuit of the Millennium(New York:Oxford University Press, 1970)이 있다. 윌리암스는 종교개혁이 성공한 것은 개혁자들의 과격한 요소 때문이라고 말하였고, 노만 콘은 그의 책에서 과격파들을 혁명적인 방법을 통하여 지상에 천년왕국을 실현하고자 하였던 무리로 묘사하였다.
8. Hans J. Hillerbrand, The Reformation:A Narrative History Related by Contemporary Observers and Participants(Grand Rapids:Michigan, 1981), p 17.
9. Merle d' Aubigne, History of the Reformation of the Sixteenth Century(Grand Rapids, Michigan:Baker Book House, 1846), Reprint edition pp 1∼2.
10. H. G. Koenigsberger and George L. Mosse, A General History of Europe:Europe in the Sixteenth Century (London:Longman Group Ltd, 1968), p 47.
11. 노예제도에 대하여 폴란드의 개혁자 존 아 라스코 (John a Lasco)는 비인간적이라고 비판하였고,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인문주의자들도 이에 반대하였다.
12. 이러한 배경에서 제네바의 개혁자 요한 칼빈은 다른 상품을 재생산시키기 위한 이윤제도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사유재산 제도는 인간들의 사악한 꾀로 인하여 점차로 착취수단이 되었다.
13. Koenigsberger, op, cit, p 23.
14. 서구에서의 국가주의의 일어남에 대하여는 Harold J. Grimm의 The Reformation Era 1500∼1650(New York:Macmillan Publishing Co. inc, 1965) pp 16∼29를 보라.
15. Spitz, op, cit, p. 313.
16. Ibid, p, 306.
17. E. G. Schwiebert, Luther and His Times (St Louis, Mo:Concordia Publishing House, 1950), pp 1∼11. Stanford Reid, ed The Reformation Revival or Revolution (New York:Holt, Rinehart and Winston, 1968),
p 26에서 재인용
18. Spitz, op cit, p 306.
19. Ibid, pp 309, 312.
20. Hillerbrand, op. cit, p 18.
21. Ibid, pp. 47∼49.
22. Spitz, op. cit., p 312.
23. Ibid, p. 313.
24. Peutinger to Valentin Eber, August 5. 1491, in Konrad Peutingers Briefwechsel, ed Erich K nig (M nich, 1923), p. 9. Lewis Spitz, The Renaissance and Reformation Movements (St Louis: Mo.: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71), p 313에서 재인용.
25. 종교개혁 전야의 성직자의 도덕적인 타락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예를 들어 유명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바로 한 수도승의 사생아였다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은 순결한 성직자가 있느냐 하는 것보다는 누가 타락의 정도가 약한가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1518년 12월 스위스의 대표적인 도시인 취리히 시가 목회자를 선정하면서 취한 자세를 살펴보자. 취리히 시의 목회자로 2명의 성직자가 응모하였는데, 시의 참사회는 첩과 여러 명의 자녀를 둔 스와비아 지방의 후보 대신, 여성 편력으로 문제가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나은 울리히 쯔빙글리 (Ulrich Zwingli) 그들의 목회자로 선택하였다.
26. 오덕교, 교회사 강의 중세편(서울:합동신학교, 1991). pp. 46∼52.
27. Heiko Oberman, Forerunners of the Reformation: The Shape of Late Medieval Though Illustrated by Key Document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1), p. 7.
28. Spitz, op. cit., p 313.
29. Koenigsberger, p. 103.
30. 토니 레인, 김응국 역, 복음주의 입장에서 본 기독교사상 (서울:도서출판 나침판사, 1990), p. 252에서 재인용.
31. Owen Chadwick, The Reformation (Middlesex, England: Penguin Books, 1979), p. 17에서 인용.
32. 일반적으로 로마 천주교회의 역사가들은 루터의 개혁 운동은 불필요한 운동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피에르 자넬 (Pierre Janelie)일 것이다. 자넬은 The Catholic Reformation (Milwaukee, Wis: The Bruce Publishing Company, 1963)의 제1장에서 루터의 개혁을 교회 안의 질병이며, 무질서한 행위로 매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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