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신학

[스크랩] 교 회 론

수호천사1 2014. 7. 3. 09:27

교 회 론

 

 

 

 


교회론(ecclesiology)은 교회에 관한 진리들과 은혜의 수단들에 관한 진리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다.


1. 교회의 명칭

'교회'(敎會)라는 우리 말은 '교(敎)를 믿는 자들의 모임(會)'이라는 뜻일 것이다. '교회'라는 영어 춰취(church)는 '주님께 속한 것'이라는 뜻인 헬라어 퀴리아케에서 나왔다고 한다.

'교회'라는 뜻을 가지는 구약성경의 용어는 카할과 에다인데, 이 두 말의 차이는 별로 없어 보인다. 이 말들은 흩어져 살고 있든지 모여 있든지 간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한글 성경에는 '회중, 총회'로 번역되었고, 영어 성경에서는 컹그리게이션(congregation) 혹은 어셈블리(assembly)로 번역되었다.

카할은 구약성경에 123회 사용되었는데, 그 어원은 '부르다, 소집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출애굽기 12:6에서는 고센 땅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켰고('회중'), 신명기 5:22에서는 출애굽하여 시내산 아래 모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켰다('총회'). 에다는 구약성경에 149회 사용되었는데, 그 어원은 '약속하여 모이다'는 뜻이다. 한글 성경에는 역시 '회중'으로 번역되었다. 출애굽기 12:3, "이스라엘 회중."

이 두 말은 구약의 70인 헬라어역에서 에클레시아와 쉰아고게로 번역되었다. 에클레시아는 주로 카할의 번역어이며, 쉰아고게는 카할 혹은 에다의 번역어이다. 에클레시아(단지 60여회 사용됨)보다 쉰아고게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교회'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에클레시아이며 115회 가량 사용되었는데, 그 어원은 '부른다'는 뜻이다. 이 말은 구약의 카할과 에다와 같이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무리를 가리킨다. 에클레시아는 '불러낸 무리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한글 성경에서는 주로 '교회'라고 번역했으나 때로는 세속적 모임들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9:30에서는 '민회'로, 19:41에서는 단순히 '모임'으로 번역되어 있다.

신약성경에서 '교회'로 번역된 몇 구절들을 들면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16:18,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내 교회'는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과 구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무리를 의미한다. 사도행전 2:47,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그 교회에 더하게 하시니라"(전통 사본)--예수님을 믿고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여 성령을 기다렸던 120명과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던 3천명의 신자들을 교회라고 부른 것이다. 사도행전 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도행전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들(전통 사본)이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교회에는 어떤 명칭도, 심지어 특별한 예배당도 없었다. 단순히 예수 믿는 성도들의 모임을 교회 혹은 교회들이라고 불렀다. 사도행전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로마서 16:5, "저의 교회[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도 문안하라"--이와 같이 초대 시대에 교회는 흔히 집에서 모인 성도들의 무리를 가리켰다.  

또한, 성경에는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비유적 명칭들이 나온다. 첫째로,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른다. 에베소서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고린도전서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고 표현된다. 에베소서 1:22,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명칭은 그리스도와 성도 간의, 그리고 성도 상호 간의 친밀한 생명적 관계를 보인다. 머리와 몸은 나뉠 수 없다. 머리와 몸이 분리되면 그 몸은 즉시 죽는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떠난 교회는 즉시 죽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교회는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 또한 머리와 몸의 비유는 명령과 복종의 관계성을 보인다. 머리는 몸에게 명령하고 지시하며 몸은 머리의 그 명령과 지시를 따라야 한다. 또한 부수적으로, 이 명칭은 교회가 자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인다. 에베소서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둘째로,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부른다. 아가 1-8장, 하나님과 그 백성 이스라엘의 관계를 신랑 솔로몬과 신부 술람미의 사랑의 관계로 묘사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상징한다. 에베소서 5:22-33,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비유하였다. 요한계시록 19:7,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자신을] 예비하였으니."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명칭은 그리스도와 성도 간의 친밀한 사랑과 연합의 관계를 보인다. 또한 이 명칭은 성도 편에서 그리스도를 향해 가져야 할 순결한 사랑과 순종의 의무도 암시한다.

셋째로, 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 성전, 성령의 전'이라고 부른다. 고린도전서 3:9, "너희는 하나님의 집."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이 명칭은 교회의 거룩함과 존귀함을 보인다. 구약 시대의 성막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계시는 처소이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은 거룩하다. 신약 시대의 교회는 구약의 성전과 같다. 여기에서 교회는 건물을 가리키지 않고,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물론 성도들이 모인 장소와 건물도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구별되었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 또한 이 명칭은 교회가 지금 건축중에 있음을 나타낸다. 에베소서 2:21, 22,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넷째로, 성경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부른다. 디모데전서 3: 15,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이 명칭은 교회가 진리의 수호자요 전파자임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교회에 위탁하셨다. 교회는 이 진리를 보존, 보수(保守)하며 모든 사람들 앞에 제출하고 그것을 변호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진리는 교회의 권위 위에 기초하지 않는다. 진리의 기초는 하나님 자신뿐이시다. 교회는 이런 저런 오류에 떨어질 수 있고 또 역사적으로 그러했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탁받았으므로 사탄의 권세가 교회를 이길 수 없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는 오늘도 진리의 수호자요 전파자이다.



2. 교회의 본질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의 본질적 요소는 무엇인가? 개혁파 신앙고백들은 교회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벨직 신앙고백 27조, "(하나의 공동적 혹은 보편적[세계적]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 모두의 구원을 기대하고, 그의 피로 죄씻음을 받고, 성령으로 거룩케 되고 인침을 받은 참 그리스도인 신자들의 거룩한 회중이요 모임이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 17장, "교회는 세상에서 불러 모으신 신실한 자들의 무리이다. . . . [교회는] 모든 성도들의 교통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무형적(無形的)인 공동적 혹은 세계적 교회는 그것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여진, 모여지는, 혹은 모여질 선택된 자들의 수 전체로 구성되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아내요 몸이요 충만이다"(1절). "이전에 율법 아래서와 같이 한 국가에 국한되지 않으므로, 복음 아래서 역시 공동적 혹은 세계적인 유형적(有形的) 교회는 참 종교를 고백하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요, 하나님의 집과 가족이니, 이 교회 밖에는 구원의 일반적 가능성이 없다"(2절)

이상의 진술들과 같이 성경에 의하면, 교회는 어떤 건물이나 외적 조직을 의미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모임 혹은 연합을 가리킨다.

전통적 개혁신학은 교회를 '성도들의 교통'(communio sanctorum)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교통'이라고 번역한 라틴어 콤무니오라는 말은 '연합, 참여, 나눔' 등을 의미한다. 교회가 성도들의 교통이라는 말은 교회가 성도들이 영적으로 연합하여 하나님께 함께 예배하며 그를 섬기고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며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의 공적 집회들과 교회 생활에서 나타난다.

마태복음 16:18,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신약성경에 제일 처음으로 '교회'라는 말이 나온다.

사도행전 2:47,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그 교회에 더하게 하시니라"(전통 사본)--사도행전에서 처음으로 '교회'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말이라기보다 단순히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카할과 에다의 뜻과 같다. 즉 교회는 예수 믿는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도행전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들(전통 사본)이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도행전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로마서 16:5, "저의 교회[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도 문안하라"--성도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표현은 교회의 영적 성격을 아주 잘 보인다. 교회는 외적 형식이 아니고 어느 곳에서나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서로 교제하는 것 자체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교회는 성도들의 연합과 교제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적 요소는 성도들이다. 만일 성도들이 없다면 교회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성도는 어떤 자인가? 성도는 창세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구속(救贖)함을 얻고, 하나님의 복음을 믿음으로 성령의 거룩케 하심과 인치심을 받은 자이다(엡 1:4-14; 벧전 1:2). 교회는 바로 이러한 성도들의 연합과 교제인 것이다.

교회의 본질이 이러하기 때문에, 교회는 기본적으로 교인들, 특히 세례교인 혹은 입교인을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지교회 목사와 당회는 교인들의 신앙고백을 성실히 확인해야 한다. 만일 교회가 이 기본적인 의무에 성실하지 않는다면 교회와 세상이 구별되는 선이 흐려지고 말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부패는 부분적으로 이 점에 있어서 교회가 불성실하기 때문에 왔다. 신명기 23:2, 3,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교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 . .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신명기 22: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교회에 외적 조직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이지 않고 부수적이다. 천주교회는 교황과 주교 회의를 중심한 소위 '가르치는 교회'의 조직을 교회의 본질적 요소로 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조직체를 떠나서는 교회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외적 조직이란 본질적이지 않고 더욱이 하나님의 진리에서 이탈된 외적 조직체는 하나님 앞에서 무의미하고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증스럽다.

교회가 단순히 외적 조직체가 아니므로, 교회의 건립은 단순히 외형적 건립이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 교회의 건립은 단순히 예배당 건축이나 교인수의 증가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약 시대에 예배당 건축을 명령하신 적이 없다. 예배당은 교회의 모임을 위해 필요해서 건축하는 것뿐이다. 교인수와 헌금 액수 등도 비록 복음의 결실을 측정하는 요소들이 될 수 있을지라도 교회의 본질적 요소는 아니다.

교회 건립은 일차적으로 영적 건립이어야 한다. 복음 사역에 있어서는 한 명의 영혼의 구원과 그 영혼의 영적 성장이 중요하다. 참된 교회 건립이란 순수한 복음 진리를 선포하여 결신자들을 얻고 그들을 신구약성경 말씀으로 성실히 가르쳐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장하도록 양육하는 것이다.

또한, 교회에서 성경적, 역사적 바른 교훈의 계승은 외적 조직의 계승과 비교할 수 없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교회에서 바른 교훈의 계승이 없는 단순한 조직의 계승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떤 교회 혹은 교단이 아무리 찬란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사도들로부터 전달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유산이 계승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역사와 전통은 전적으로 무의미하며 진정한 교회의 계승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바른 신학의 교육과 전수(傳授)는 생명같이 중요하다. 신학은 하나님의 진리의 체계적 바른 지식이다. 우리는 역사적 개혁신학이 성경적으로 바른 신학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개혁신학을 바르게 연구하고 파악하며 또 후대에게 성실히 가르치고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3. 역사적 고찰

초대교회의 교부들과 변증가들, 예컨대, 로마의 클레멘트, 익나시우스, 폴리갑, 순교자 저스틴 등은 교회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인 성도들의 교통이라고 바르게 보았다. 그러나 2세기 후반부터 교부들은 분파들과 이단들에 대항하여 교회의 외적 일체성과 주교(主敎, 한 교구를 맡은 성직자)의 역할을 점점 더 강조하게 되었다. 터툴리안의 제자요 카르타고의 주교이었던 키프리안(Cyprian, 258년경 사망)은 처음으로 감독교회의 교리를 발전시켰다. 키프리안이 주장한 요지는 다음과 같다: ① 주교(bishop, 혹은 감독)은 사도들의 후계자이다. ② 주교는 교회의 기초요 주인이다(마 16:18). 그러므로 교인이 교회에 가입하거나 나가는 일은 주교의 결정에 맡겨져 있다. ③ 주교는 제사장이며, 그가 집행하는 예배는 제사이다. ④ 주교들의 연합체인 주교회는 교회 일체성의 기초이다. ⑤ 주교들은 모두 동등하다. 아직 로마 주교의 우월권은 주장되지 않았다. ⑥ 주교에게 대항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교에게 대항하는 자는 교회의 교제를 상실하고 따라서 구원을 상실한다. ⑦ 참된 교인들은 교회에게 복종하고 교회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교회 밖에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 여기에 유형적 일체성에 의한 전세계적 교회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이것은 천주교회적 오류의 씨앗이다.

2세기의 몬타누스파, 3세기의 노바시안파, 4세기의 도나투스파 등은 교회의 부패와 세속화에 강하게 반대하며 참 교회의 표가 교인들의 성결성(聖潔性)이라고 보려는 경향을 보였다. 몬타누스파는 사람이 세례받은 후에 범하는 큰 죄는 순교를 통하지 않고서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노바시안파는 로마 황제 데시우스의 대박해 때에 변절했던 자들을 받지 않다가 후에 재세례를 베풀고 받았다. 도나투스파는 로마 황제 디오클레시안의 박해 때에 동일한 경향을 보였고, 엄격한 교회 권징과 순결한 교인 자격과 목사의 자격을 주장하였다.

어거스틴(Augustine, 354-430년)은 교회를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된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보면서도, 키프리안의 감독교회의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의 교회관은 그의 구원관과 일치하지 않는다. 중세의 스콜라 신학자들은 성도의 교통이라는 교회의 본질적 개념보다 교직 제도와 같은 외면적 조직을 점점 강조하였다. 이것은 키프리안의 교회관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교직 제도에 대한 강조는 마침내 교황 제도로 발전되었다. 주교들의 출현은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등의 총대주교들(Patriarchs)의 출현으로 발전되었고, 마침내 533년 비쟌틴 황제 유스티니안은 로마 주교의 수위성(首位性)을 인정했다. 그러나 607년 로마 주교 보니페이스 3세는 역사상 최초로 자신을 '세계적 주교'(Universal Bishop)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교황 제도의 시작이었다.

천주교회의 교회관은, 비록 공식적으로는 종교개혁 이후에 작성되었으나, 중세 시대에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트렌트 요리문답은 교회를 정의하기를, 교회는 "하나의 무형적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하나의 유형적 머리인 로마 교황청의 베드로의 후계자를 가진 지금까지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신실한 자들의 단체"라고 했다. 16세기말 천주교회의 탁월한 변호자이었던 벨라민(Bellarmine) 추기경은 교회를 정의하기를, "동일한 기독교 신앙의 고백과 동일한 성례들의 사용에 의하여 연합되고, 합법적 목사들과 첫째로 지구상의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로마 교황의 치리 하에 있는 모든 무리들"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천주교회에 의하면, 교황을 우두머리로 한 교회의 외적 조직은 교회의 본질적 요소인 것이다.

천주교회는 또한 '가르치는 교회'와 '듣고 배우고 믿는 교회'를 구별하며, 전자를 더 중시하고 교회의 유일성, 보편성, 사도성, 무오성 등의 속성들을 그것에 돌린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해 구원의 은혜와 복들을 나누어주신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자기들의 교회는 독점적으로 구원의 기관이며 구원의 중보자이다.

한편, 헬라 정교회는 천주교회와 같이 외적 조직을 중시하나, 교황 제도를 인정치 않고 그 대신 교회의 주교단과 대회들에 무오적 권위를 둔다. 그들에 의하면, 권위의 궁극적 원천은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교회의 공통적, 불변적 마음'이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의 교회만 지상에서 참된 유일한 교회라고 본다.

루터와 칼빈은 공통적으로 교회를 성도의 교통이라고 바르게 이해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파되며 성례가 바르게 시행되는 곳에 참 교회가 있고 따라서 바른 말씀을 떠난 외적 조직의 계승은 무의미할 뿐이라고 보았다. 한편, 재세례파(再洗禮派, Ana-baptists)는 유아들을 제외하고 성인 신자들만을 교회의 구성원으로 간주했다. 또한 그들은 교회의 제도와 은혜의 수단들을 경시하였다.



4. 교회의 구분

교회는 인류 창조 때로부터 세상 종말까지 동일한 집합체로 있다. 벨직 신앙고백  27조, "이 교회는 세상 처음부터 있었고 세상 끝까지 있을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1, "선택된 자들의 수 전체로 구성되며." 그러나 그 구성원과 예배 방식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 아래서 시대적 독특성을 가지며 따라서 우리는 교회를 구약교회와 신약교회로 구분할 수 있다.

구약교회는 구약성경에 계시된 대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율법과 성막 혹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생활로 나타났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신약성경에 증거된 대로 모든 민족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믿음을 중심으로 한 생활로 나타났다. 구약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율법의 형식으로 증거되었으나, 신약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복음의 형식으로 증거되었다.

물론 구약교회와 신약교회는 본질적으로 두 개의 별개의 교회가 아니고 한 교회이다. 그 교회들은 근본적으로 동질성 혹은 연속성을 가진다. 구약교회와 신약교회의 동질성 혹은 연속성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 교회들에게는 동일하게 '교회'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성경의 카할이나 에다는 70인 헬라어역에서 헬라어 에클레시아로 빈번히 번역되었는데,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교회로 번역된 그 동일한 말이다.

둘째로, 구약 시대에서나 신약 시대에서 구원의 원리는 동일하다. 아담 이후의 모든 죄인들은 오직 유일한 중보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만 죄씻음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요한복음 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셋째로, 구약교회나 신약교회에서 교인들의 신분과 특권이 동일하다. 로마서 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갈라디아서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에베소서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에베소서 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마태복음 8:11,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로마서 11:17, "또한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어떤 이들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과격하게 구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물론,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특징들은 서로 다르다. 구약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의 은혜가 예언과 예표로 증거되었고, 신약 시대에는 그것이 성취와 실체(實體)로 증거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는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에 동일하게 흐르고 있다. 구약 시대에는 비록 도덕법이 전면(前面)에 강조되어 있지만, 또한 하나님의 긍휼이 성막제도와 제사제도 등의 의식법에서 밝히 증거되어 있었다.

또한, 교회는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로 구분될 수 있다. 현실 교회들의 불완전함을 생각할 때 이러한 구분은 더욱 필요하다.

첫째로, 무형교회(無形敎會)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1, "무형적(無形的)인 보편적 혹은 세계적 교회는 그것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여진, 모여지는, 혹은 모여질 선택된 자들의 수 전체로 구성되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아내요 몸이요 충만이다."

교회가 신자들의 연합이라는 점에서 유형적이지만, 참된 교회는 무형적인 면이 있다. 그 이유는, 첫째로, 현재 우리가 이미 천국 간 자들이나 장차 구원을 얻을 자들을 다 볼 수 없기 때문이며; 둘째로, 우리가 현실 교회 속에서 참 신자와 거짓 신자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유형교회(有形敎會)는 바른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과 그 자녀들로 구성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2, "이전에 율법 아래서와 같이 한 국가에 국한되지 않으므로, 복음 아래서 역시 보편적 혹은 세계적인 유형적(有形的) 교회는 참 종교를 고백하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요, 하나님의 집과 가족이니, 이 교회 밖에는 구원의 일반적 가능성이 없다."

교회는 공적 신앙고백과 예배, 성례, 그리고 외적 조직 등에서 그 유형적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유형교회의 한 특징은 그 회중 가운데 중생치 않은 자들이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의 곡식과 가라지 비유는 세상에서의 교회의 모습을 나타낸다. 교회 속에는 종종 위선자들이나 가룟 유다 같은 이들이 섞여 있다.

교회는 또한 유기체적 교회와 조직체적 교회로도 구분된다. 유기체적 교회란 교회가 영적으로 하나의 유기체와 같이 연합되어 있음을 말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고 성도 상호 간에도 연합되어 있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생명적 연합이다. 로마서 12:5,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조직체적 교회란 교회가 외형적으로 하나의 조직체임을 말한다.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교회의 현실적 모습이다. 교회 안에는 목사와 장로와 집사 등의 직분자들이 있고 각 부서와 기관과 구역 등의 조직들이 있다. 또한 개체 교회 외에도 노회와 총회 등의 큰 회의들이 있다. 일상적으로 교회라는 말은 조직체적 교회를 가리킬 것이다. 교회는 이런 의미에서 '신자들의 어머니'라고 불리운다.

교회는 또한 전투하는 교회와 승리한 교회로 구분된다. 전투하는 교회는 세상에 있는 교회들을 가리킨다. 세상에 있는 교회 곧 성도들은 마귀와 악령들과 싸움을 한다. 이 세상은 영적 전쟁터이다. 에베소서 6:10- 18,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승리한 교회는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여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는 자들이다. 히브리서 4:10,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는 . . . 자기 일을 쉬느니라." 히브리서 12:22, 23, "하늘의 예루살렘과 . . .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 . .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또 그 둘은 어떻게 서로 다른가?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단계로서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씨앗과 같이 세상에 이미 뿌려져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중생함으로 그 나라에 들어간다. 이렇게 중생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 그들이 또한 교회를 구성하므로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 씨 뿌리는 비유, 곡식과 가라지 비유,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 그물 비유 등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세상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마태복음 11:12,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마태복음 12:28,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7:20, 21,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 . .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요한계시록 1:6,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그러나 교회 곧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적 단계를 소망한다는 점에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는 구별된다.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올 것이다.

마태복음 25:34,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빌립보서 3:20, "우리의 시민권[나라]은 하늘에 있는지라." 히브리서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베드로후서 1:10, 11,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요한계시록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요한계시록 22:5,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



5. 교회의 속성

니케야 신조는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데, 이 고백은 교회의 몇 가지 속성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라는 것과 거룩하다는 것과 보편적 혹은 세계적이라는 것과 사도적 교훈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 등이다.

첫째로, 교회는 하나이다. 전세계에 많은 교회들과 교단들과 교파들이 있어도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의 전체의 수로 구성된 교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그리고 온 세계에 오직 하나이다.

교회의 이러한 일체성(一體性, unity) 혹은 통일성은 영적, 교리적, 유형적(有形的)이다. 첫째로, 교회의 일체성은 영적이다. 창세 전에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얻고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모든 진실한 성도들은 영적으로 하나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한 몸이다. 비록 세상에서 그들이 나뉘어 있을지라도 영적으로는 나뉠 수 없이 하나가 되어 있다. 이 사실은 아무도 깨뜨릴 수 없다. 로마서 12:5,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둘째로, 교회의 일체성은 교리적이다. 교리(敎理)는 진리를 말로 표현한 것이다. 성도들의 일체성이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즉 바른 교리 안에서 하나인 것이다. 바른 교리를 떠나서는 교회의 일체성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공동적 이해와 고백을 위해 힘써야 한다. 디도서 1:4, "같은 믿음(코이네 피스티스, 공동적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예수님은 요한복음 17:11, 21에서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 .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이 기도에서 성도들의 일체성은 그 대상을 보든지, 그 성격을 보든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의 일체임이 분명하다. 바울 사도도 에베소서 4:3-6에서 성도들의 일체성의 근거로서 성령과 소망과 주와 믿음과 세례와 하나님 등 여섯 가지를 들었다. 이러한 진리들에 근거한 일체성은 교리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워필드는 바르게 말하기를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의 일체성은 신자들의 공통적 기독교 신앙에 기초했다"고 말했다("True Church Unity: What It Is," in Selected Shorter Writings of Benjamin B. Warfield, p. 302). 로이드 죤스도 밝히 말하기를, "진리와 교리를 떠난 일체성이란 없다"라고 하였다(Martyn D. Lloyd-Jones, The Basis of Christian Unity, p. 50).

현실적으로, 세계의 교회들은 인간의 무지와 오해로 인하여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에 대해 동일한 이해와 동일한 신앙고백을 가지지 못하고 있으나, 참된 교회들은 적어도 복음적 개신교단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기본적 진리들에 있어서 하나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교회들은 그 정도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에 있어서 공동적 이해와 신앙고백을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교회의 일체성은 유형적(有形的)이다. 교회는 자신의 일체성을 외적으로 나타내어야 한다. 성도들은 영적으로 하나라는 사실로 만족하지 말고 가능한 한 눈으로 보기에도 하나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다. 분열과 파당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다. 고린도전서 1:10,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에베소서 4:1-3,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 . .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우리는 교회의 유형적 일체성을 연합 예배와 신앙고백, 성도들의 교제, 복음 전파를 위한 협력, 그리고 조직체적 연합 등으로 나타낼 수 있고 할 수 있는 대로 그러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또한 거룩하다. 에베소서 5:25-27, "이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교회의 거룩함 혹은 성결성(聖潔性, purity)은 법적인 면에서와 실제적인 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교회의 성결성은 법적이다. 성도들은 법적으로 이미 거룩해진 자들이다. 고린도전서 1: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졌고." 히브리서 10:10,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헤기아스메노이, 완료수동태분사). 이것은 칭의(稱義)의 진리가 의미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회는 또한 실제적으로도 거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진리이다. 성도들의 실제적 거룩함은 교리적 사상에 있어서의 거룩함과 윤리적 생활에 있어서의 거룩함을 다 포함한다.

교리적으로, 오늘날 세계의 많은 교회들은 매우 부패되어 있다. 역사적인 대교단들의 다수가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 역사상 그 어느 사상 체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지어 개신교 종교개혁 당시의 천주교회보다도 더 복음진리에서 이탈한 이단적이고 배교적인 사상이다. R. B. 카이퍼는 적절히 말하기를, "우리 시대의 거의 모든 대교단들과 그 밖의 많은 작은 교단들이 신학적 자유주의의 침해를 받아 왔는데, 그 신학은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초자연적 중생(重生)이 바로 구원의 본질임을 부정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 p. 89). 더욱이,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 이후의 이단 종파들인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크리스챤 싸이언스, 통일교, 천부교 등과 달리 장로교회, 감리교회 등의 기존하는 역사적 대교단들 속에, 특히 목사 양성원인 신학교들 속에 들어와 교회들과 목사 후보생들을 부패시키고 변질시켰다.

이런 자유주의 신학 문제 외에도, 오늘날 교회들은 신약성경의 전통적 본문의 포기와 비평적 본문의 수납, 세대주의적 종말론, 또한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의 인정 등의 교리적 문제도 안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교리적 오류들을 버리고 그 거룩함을 지켜야 한다.

윤리적으로도,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심히 부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성직자들의 교권주의, 명예심, 시기, 미움, 분열, 부요화, 오락 생활, 귀족화 등의 문제, 일반 성도들의 세속주의적 생활, 돈 사랑, 술, 담배, 영화, 춤 등의 문제, 오늘날의 심각한 사회악인 낙태, 동성애, 안락사(安樂死) 등의 문제들이 그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윤리적 악들도 배격해야 한다.

교회는 또한 보편적이다. 교회의 보편성(普遍性, catholicity)은 하나님의 교회가 전 세계에 퍼져있고 각 족속,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사도신경에 '공회(公會, the catholic church)'라는 말은 이 보편적 교회를 의미한다. 천주교회가 자신을 '카톨릭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비록 그 말이 그 교회에 사용되는 것이 부당하지만, 이런 의미에서이다. 에베소서 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요한계시록 7:9,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교회의 이런 성격을 생각할 때, 우리는 교회를 생각하는 우리의 시야를 좀더 넓게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좀더 포용적이게 가져야 할 것이다.



6. 참 교회의 표

그리스도인은 참된 교회에 속하여 주님을 섬길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고, 그 순결성의 정도도 다양하여 그 중에는 비교적 순결한 교회들도 있으나 심히 불순결한 교회들도 있다. 어떤 교회의 순결성 정도를 판단하는 기준, 즉 참된 교회를 분별할 기준은 무엇일까? 참 교회의 표는 무엇이겠는가?

우선 분명한 것은, 참된 교회의 기준이 외적인 것들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교회의 크기나 교인의 수 혹은 예배당의 규모가 참된 교회의 표는 아니다. 만일 그런 것이 참된 교회의 표라면, 세계에서 교세가 가장 큰 천주교회는 가장 참된 교회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천주교회가 참된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박형룡 박사는 말하기를, "종교 개혁자들은 강조하기를, 참된 교회는 대다수가 문제를 결정하듯이 그것의 크기나 사람 수에 의해 구별되기 불능하다. 구약과 신약의 전교회 역사는 큰 교회라는 관념을 정죄한다. . . . 교회가 세계에서 자라서 커지고 왕성함에 따라 통상으로 배교하며 부패하여지고, 참된 교회는 흔히 육체와 세상의 표준에 따라 약하고 멸시받는 소수로 된다"라고 하였다(교회론, 98쪽).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참된 교회의 표를 3가지로 말해 왔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전파; 둘째, 성례들의 바른 시행; 셋째, 권징의 성실한 실행. 이 중에서도 첫번째 표가 가장 중요하다.

참된 교회의 첫번째 표는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전파이다. 앞에서 생각한 대로, 교회의 본질은 성도들의 교통이며,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곧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고 표현되기도 하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교훈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고 표현되기도 한다. 고린도전서 3:11,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교회의 본질과 기초가 이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전파는 참된 교회의 표이며, 이것은 가장 중요하다. 어떤 교회의 순결성의 정도는, 그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순수하고 바르게 전파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성경의 어떤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거나 왜곡시킨 교회들, 예를 들어, 천주교회,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통일교 등은 참된 교회일 수 없다. 또한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들을 포용하는 교회들도 참 교회의 표를 잃어버리고 있다.

참된 교회의 두번째 표는 성례들의 바른 시행이다. 세례와 성찬의 성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의 유형적(有形的) 표현이다.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하고 성찬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성례들의 바른 시행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 진리의 바른 선포요 성경적 복음 신앙의 바른 고백인 것이다.

마태복음 28:19,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고린도전서 11:27-29,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 . .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성례들을 성경적 의미대로 바르게 시행치 않고 미신적이게 시행하는 교회는 참된 교회의 표를 상실한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사역에 모독적이고 매우 미신적인 미사를 고집하는 천주교회는 이런 점에서 참된 교회일 수 없다.

참된 교회의 세번째 표는 권징의 성실한 실행이다. 권징(discipline)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성도들의 신앙 훈련을 의미한다. 그것은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의 일치를 요구하는 것이다. 성도들에게 합당치 않은 교리적, 윤리적 잘못들과 오류들은 교회에서 마땅히 책망되고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실한 신앙 훈련과 권징은 참된 교회의 표이며, 권징을 폐하는 교회는 참된 교회의 표를 상실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고 하셨고, 그 외에 성경은 여러 곳에서 권징에 대해 밝히 가르친다. 로마서 16:17, "너희의 교훈[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고린도전서 5:6, 11-13,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 . .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7. 현대교회문제

현대교회에는 여러 가지 신학적, 윤리적 문제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신학의 변질이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다양한 현대 자유주의 신학들은 한마디로 이단적인데, 이 신학이 오늘날 기독교의 대교단들과 신학교들 속에 널리 퍼져 있는 실정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① 성경의 신빙성, 신적 권위, 무오성(無誤性), ②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 혹은 진노의 속성, ③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및 처녀 탄생, ④ 그의 기적들, ⑤ 그의 형벌적 대속(代贖), ⑥ 그의 부활의 확실성, ⑦ 그의 재림 등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학 사상은 명백히 이단적이다.

기독교는 불변적 진리들 위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참된 교회와 성도들은 기독교의 바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을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디모데후서 1:13, 14, "너는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요한이서 7, 10, 11,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 . . .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유다서 3,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현대교회의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에큐메니칼(ecumenical) 운동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이란, 세계의 모든 교회들을 재연합시키려는 운동이다. 이 운동의 문제점은 교회의 일체성이라는 이름 아래 기독교계 안에 존재하는 각종 신학 사상들을 무비판적으로 용납하는 신학적 포용주의에 있다. 오늘날의 기독교계는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에 깊이 물들어 있으므로, 신학적 포용주의는 곧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을 포용하는 것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또한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매우 우호적이며 궁극적으로 천주교회와의 연합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천주교회를 우상숭배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교회라고 증거했고 그 때 이후 지금까지 천주교회는 그 근본 교리들에 있어서 변한 것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천주교회와 일치할 수 있고 연합할 수 있단 말인가?

에큐메니칼 운동은 심지어 이방 종교들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심적 기관인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지도자들 중에는 기독교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부정하며 다른 종교들을 포용하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의 타종교와 이념과의 대화 분과장인 웨슬리 아리아라자(Wesley Ariarajah)가 그 대표적 예이다. 아리아라자는 세계교회협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출판한 그의 책 성경과 타종교인들(The Bible and People of Other Faiths <1985>)에서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히 부정하였다.

참된 교회는 일체성(unity)과 성결성(purity)을 둘 다 성실히 지켜야 한다. 거룩함이 없는 하나는 참된 하나가 아니며, 하나가 되지 못한 거룩함은 참된 거룩이 아니다. 여기에 현실적으로 교회들의 문제와 갈등이 있다. 성결성을 빙자한 교회들의 부정당한 분열과 분파주의도 명백히 잘못이지만, 오늘날 교회들의 보다 큰 문제는 잘못된 연합주의의 문제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포용주의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다. 바른 교리와 바른 신학은 기독교에 본질적이다. 교회의 하나 됨은 교리적 성격을 가진다. 더욱이, 주께서는 교회에게 바른 교리를 보수하고 이단을 배격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들과 성도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배격하고 거기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고린도후서 6:14-18,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 . .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분리하고]."

R. B. 카이퍼는 교회가 외적으로만 조화와 평화를 유지하고 내면적으로 교리적, 윤리적 오류들을 포용하는 것은 교회의 파멸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의의(意義) 있는 교리적 논쟁에서 중간 노선을 취하는 평화주의(平和主義)는 많은 교회를 폐허로 만들었다. . . . 오늘날 교회의 타락상은 얼마나 슬픈가? 교리적 무관심의 암(癌)은 교회의 생명력을 좀먹는다. 교회 합동을 위한 강한 요구와 에큐메니칼 운동에 과도한 치중은 이 암종(癌腫)을 점점 더 악화시킨다"라고 하였다(박형룡, 교회론, 87, 91쪽).

현대교회의 심각한 또 하나의 문제는 복음주의 혹은 신(新)복음주의(Neo-evangelicalism)이다. 신복음주의란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주장하지만 자유주의자들로부터의 분리 혹은 교제 단절을 반대하는 입장이다. 즉 신복음주의는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들을 포용하고 그들과의 공존을 추구하는 입장이다. 신복음주의는 오늘날 단순히 복음주의라고 자주 불리운다(Geroge M. Marsden, "fundamentalism," in New Dictionary of Theology, p. 268).

자유주의는 명백히 이단이므로, 성경을 믿는 성도들은 자유주의자들과 자유주의 교회들을 마땅히 배격하고 그들과 분리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들을 고의적으로 포용하고 협력하는 태도는 악에 대한 타협이며 주께 대한 불순종이다. 로마서 16:17, "너희의 교훈을[너희가 배운 교리를]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뿐만 아니라, 성경은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는 자들로부터의 교제도 단절하라고 가르친다, 데살로니가후서 3:6, 14,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므로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와 신복음주의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하는 소위 근본주의(根本主義, Fundamentalism)가 성경적으로 바른 입장이다.

현대교회의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교회들은 분리에 대한 성경의 교훈에 성실해야 한다. 성경은 성도들의 사랑의 교제를 강조하는 동시에 악한 자들과의 교제의 단절 즉 분리(分離, separation)를 가르친다.

성경은 성도들이 어떤 자들과 교제하지 말고 분리하라고 가르치는가? 성경이 교제치 말고 분리하라고 가르치는 대상은 네 부류의 사람들이다.

첫째로, 성경은 성도들이 불신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고린도후서 6:14-18,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여기에서 교제란 물론 영적 교제를 가리킨다. 불신자는 성도들에게 전도의 대상이지, 영적 교제의 대상이 아니다.

둘째로, 성경은 성도들이 이단자들과 분리하라고 가르친다. 로마서 16:17, 18, "너희의 교훈[너희가 배운 교리]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거절하라]." 요한이서 10, 11, "누구든지 이 교훈[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교리]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기독교 역사상 천주교회는 큰 이단이며, 19세기에 나타난 각종 이단 종파들과, 특히 20세기에 교회들을 부패시킨 자유주의 신학은 가장 심각한 이단이다.

셋째로, 성경은 성도들이 드러난 죄를 범하고 회개치 않는 자들로부터 분리하라고 가르친다. 고린도전서 5:11-13,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 . .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교회가 성도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다 살필 수는 없지만, 드러난 일들에 대해서는 판단하고 적절한 권징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네째로, 성경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형제들과도 교제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데살로니가후서 3:6, 14-15, "규모 없이[무질서하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치 않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 . .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않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오늘날에 신복음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들은, 비록 복음 진리를 믿는 형제들일지라도, 고의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고 있고 교회의 질서를 깨뜨리고 있는 자들이다.

성도들은 왜 이런 대상자들과 교제하지 말고 분리해야 하는가? 첫째로, 성도들은 교회의 본질 때문에 그러해야 한다. 교회는 바른 신앙을 고백하고 주님께 순종하기로 다짐하는 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을 생각할 때 바른 교훈과 그것에 대한 순종은 교회의 기본적 요소이다. 여기에 교회의 참된 교제의 선, 그리고 교회와 세상 간의 선이 있다. 둘째로, 교회의 거룩함 때문에 성도들은 교제의 원리를 지켜야 한다. 교회는 교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거룩해야 하기 때문에 드러난 오류들을 고의적으로 포용해서는 안된다. 셋째로, 악은 퍼져나가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성경적 분리가 필요하다. 교리적 악이든지 윤리적 악이든지 악은 누룩처럼 퍼져나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고전 5:6; 갈 5:9). 디모데후서 2:17,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데."그러므로 악한 자들과의 교제의 단절 혹은 분리가 없다면, 교회는 점점 더 부패되고 말 것이다.

악한 자들과의 교제의 단절 혹은 분리는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그것은 우선 지교회 안에서 권징의 단계들, 즉 권계(勸戒, 권면과 책망)와 일시적 수찬 정지(성찬에 참여함을 일시적으로 금지함)와 제명 출교(교회에서 내어쫓음)의 순서를 따라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성경적 분리의 원리는 전통적으로 이해해온 권징의 원리와 동일하다.

오늘날 교회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함으로써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와 같이 배교적이게 되고 있다. 성경적 분리의 원리는 오늘날 교회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만일 지교회 혹은 지교단이 자유주의화 되거나 자유주의 신학을 고의적으로 포용할 때, 신실한 종들과 성도들은 그 교회의 갱신을 위해 합법적 방법을 사용하여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교회의 갱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예를 들어 교회의 지도층의 다수가 배교적이거나 배교를 고의적으로 포용할 때, 신실한 종들은 그 교회 혹은 교단을 떠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종교 개혁 때와 같이 지교회 혹은 교단이 전체적으로 부패하고 배교적일 때 참된 종들과 성도들은 그 교회 혹은 교단에 머물러 있을 수 없고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 정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부득이한 상황에서, 혹은 교회적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그 속에 머물러 있으나 그 악을 반대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경우 그는 자신의 신앙의 절개와 순수성을 지켜야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2:24, 25,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요한계시록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또한, 오늘날 성경을 그대로 믿는 보수적 교회들은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를 포용하는 복음주의 교회들과 교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보수적 교회들은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포용주의적 교회들과 연합 전도집회, 연합 성찬식, 및 성서공회, 기독교 방송국, 찬송가 발행 등의 연합적 사업 혹은 활동들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악한 자들과의 교제의 단절 혹은 분리는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성급한 단절과 분리는 교회의 일체성을 저버리며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표와 영광을 손상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교제를 단절하거나 분리할 때 매우 신중히 처신해야 하며, 또 그때에도 성도들은 항상 겸손과 사랑의 덕을 간직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남보다 높게 생각하는 교만이나 형제에 대한 미움은 악에 대한 타협보다 결코 작은 죄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8. 교회의 권세

주께서는 교회에 권세를 주셨다. 그 권세는 세 가지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가르치는 권세 즉 교훈권이다. 이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수(保守)하고 전파하는 행위에서 나타난다. 주께서는 사도들에게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라고 명령하셨다. 마태복음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권세는 사도들의 제자들에게 계승되었다. 바울 사도는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말씀 전파를 명하였다.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또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파하기 위하여 그 말씀을 변호하고 보수해야 한다. 빌립보서 1:7,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바가 됨이라." 디모데전서 3:15, "이 집은[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교회는 이 권세에 근거하여 성경을 연구하고 신학을 정립하며 신조나 신앙고백서 등을 작성한다. 교회의 밝은 미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히 연구하고 보수하고 전파하는 데 있다.

둘째는 다스리는 권세 즉 치리권(治理權)이다. 이것은 교회가 자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그 거룩함을 지키는 행위에서 나타난다. 주께서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질서 있게 운영되기를 원하신다. 고린도전서 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고린도전서 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바르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교회가 헌법과 규칙들을 제정하는 것은 이 권세에 근거한 것이다.

또 주께서는 교회가 자체의 거룩함을 유지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권세를 사용하여 교리적 혹은 윤리적 오류에 떨어진 자들에게 권징을 행사한다. 고린도전서 5:2, 13,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 그러므로 교회가 정당하게 시행한 권징은 효력을 가진다. 마태복음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권징의 원리는 구약성경에서도 밝히 나타나 있다. 구약율법 중 재판법은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의 사회법으로서 오늘날 세속국가에 직접 적용될 수 없으나, 그 원리가 교회에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레위기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교회는 간음하는 자들을 포용해서는 안된다. 특히 신명기 13장은 이단자나 거짓 신비주의자를 제거할 것을 가르치면서, 이단자나 거짓 신비주의자를 확인했을 경우 그를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 . . 용서 없이"(8, 9절) 죽임으로 너희 중에서 악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였다(5절). 또한 어느 한 성읍이 이단이나 거짓 신비주의에 미혹되었을 때는 그것을 확인하면 그 성읍을 다 진멸하라고 하였다(12-15절). 이것은 제명 출교의 원리를 보인다.

권징의 목적은 네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범죄자의 회개를 위함이고, 둘째는 악의 전염을 방지하기 위함이고, 셋째는 주의 명예를 옹호하기 위함이고, 넷째는 하나님의 진노를 방지하기 위함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0:3). 권징의 방식 혹은 단계는 흔히 세 가지로 말한다. 첫째는 권계(勸戒, admonition, 권면과 책망)이고, 둘째는 일시적 수찬 정지(受饌停止, 성찬에 참여함을 일시적으로 금지함)이고, 셋째는 제명 및 출교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0:4).

권징은 매우 중요하다. 권징은 주께서 교회에 명령하신 것이므로, 교회가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해 성실히 권징하지 않는다면 주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권징을 행하지 않은 교회들을 책망하셨다. 요한계시록 2:14, 20,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칼빈은 말하기를, "권징은 교회의 힘줄이다. . . . 권징의 폐지는 교회를 황폐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마태복음 13장의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29절)는 말씀은 무엇인가? 이것은 권징을 폐하신 말씀이 아니고, 전체 교회의 완전 정화가 심판의 날까지 보류된다는 것을 보일 뿐이다. 이것은 현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서 밝히 계시하신 바와 같이, 지교회나 지교단은 자체의 정화(淨化)를 위해 최선을 다해 성실히 노력해야 한다.



셋째로, 주께서는 교회에 서로를 섬기는 권위와 권세, 즉 봉사권을 주셨다. 이것은 교회가 자체 안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돕고 병자들을 위로하는 행위에서 나타난다. 이런 일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일부분이었다. 마태복음 4:23,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초대 교회는 이런 봉사의 일에 힘썼다. 사도행전 2:44, 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사도행전 6:1, ". . . 매일 구제에." 고린도후서 8: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고린도후서 9:1, "성도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갈라디아서 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야고보서 5:14, 15,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9. 교회의 임무

교인들의 모임인 단체로서의 교회의 임무는 무엇인가? 성경은 교회의 임무를 세 가지로 계시한다. 첫째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요, 둘째는 그 자체를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요, 셋째는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교회의 첫번째 임무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지극히 기본적인 임무이며 따라서 교회의 기본적 임무이다. 하나님은 창조자와 구속자로서 성도들에게서 찬송과 감사와 영광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에베소서 1:6, 12, 14, "[이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오직 하나님을 향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신앙의 기본적 태도이다. 예배가 성도들에게 영적 유익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지 부수적일 뿐이다. 예배에서의 찬송이나 기도도 그러하다. 우리는 공예배가 우리에게 주는 은혜를 생각하기 전에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단체적 경배가 되도록 해야 한다. 예배 의식은 결코 회중을 즐겁게 하거나 회중의 기호(嗜好)에 맞춰져서는 안될 것이다. 설교까지도, 먼저 설교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의 뜻을 온전히 선포하고 회중들은 진지하게 그것을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어야 하며, 그 다음에 회중들의 구원과 성장과 유익을 생각할 것이다.

예배의 방식에 있어서, 예배는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의 유일한 중보자시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죄인들은 그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그를 섬기며 그에게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의 속죄 사역과 십자가의 공로와 의(義)를 의지함이 없이 드려지는 예배는 다 인본주의요 윤리 종교와 행위 종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찬송하고 기도해야 한다.

예배는 또한 예수께서 요한복음 4:24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신령(프뉴마, 심령)과 진정(알레데이아, 혹은 진리)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물론 주일날의 공예배가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지만, 신약 시대의 예배는 어떤 장소나 어떤 시간이나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두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예배는 결코 외형적이거나 의식적(儀式的)인 예배가 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의 부패된 마음은 종교를 내용이나 진심이 없이 의식화(儀式化)하고 형식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그러한 잘못된 경향을 조심해야 한다.

예배는 또한 엄숙하고 경건하게 드려져야 한다. 그것이 전통적인 예배 모범의 정신이다. 시편 96:9,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요즈음 일부 교회들에서는 '열린 예배'라고 하여서 교회의 전통적 모범을 깨뜨리고 예배 시간에 멀티비젼(대형 자막에 비쳐지는 그림들), 드라마, 무용, 세속적 형식(록이나 랩 스타일)의 복음 성가와 밴드, 혹은 심지어 청바지 형태의 예배 복장을 도입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질서 있고 아름답고 선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다(고전 14:33). 또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고 교훈했다(빌 1:9, 10).

예배의 요소들에 관해, 신약 교회의 예배는 구약 시대의 제사에 비해 매우 자유로우며, 찬송과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과 헌금 등의 순서를 가진다.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고린도전서 14:26,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詩)도 있고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고린도전서 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利, 이익)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초대 교회는 '매주일 첫날' 곧 일요일에 공적 집회를 가지기 시작했다. 히브리서 13:15,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빌립보서 4:18,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신약 교회의 예배와 구약 교회의 제사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신약의 예배가 구약 제사의 대치물은 아니다. 구약 제사는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예표한 것이고, 부수적으로 성도들의 신앙생활 전반에 대한 교훈적 의미가 있었다. 물론 신약 시대에는 성도들의 헌신의 삶 전체가 제사이므로 교회에서의 공적인 예배도 그런 의미에서는 제사이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가 독특한 의미를 가졌듯이, 신약 성도들의 예배가 제사라는 독특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즉 예배만이 제사라는 관념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성경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찬송하며 순종하며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 자체를 제사라고 계시한다. 로마서 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히브리서 13:15, 16,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교회의 두번째 임무는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 자신을 영적으로 건립하고 성장시키는 것, 즉 건덕(建德, edification)이다. 이것은 교회가 자기 자신 즉 교인들을 향해 가지는 임무이다.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임무 때문에, 교회는 '신자의 어머니'라고 불리운다. 주께서는 이 임무를 위해 교회에 가르치는 직분 즉 목사들을 주셨다. 에베소서 4:11-13, "그가 목사와 교사를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임무는 특히 교회의 교훈권과 관계된다.

교회는 이 임무를 위해 성경 말씀의 강론과 기도와 교제와 봉사와 구제에 힘쓴다.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요한복음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사도행전 2:44-45,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 . . 나눠주고." 고린도후서 8:7, 8,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성도를 섬기는 일]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 . . [이는]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고린도후서 9: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교회의 세번째 임무는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특별한 임무 곧 사명(使命, mission)이다. 세계 만국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의 최대의 임무요 사명이다. 이것이 선교(宣敎, mission)이다. 선교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 바로 그것이며 그 외의 다른 무엇이 아니다.

죄인들의 영혼의 구원 즉 그들의 영생과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6:38-40,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죽으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또 그는 승천(昇天)하시기 전 그의 제자들에게 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라고 부탁하셨다. 마태복음 28:19, 20,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가복음 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누가복음 24:47,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요한복음 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러므로 교회는 그 어떤 일들보다도 전도(傳道)의 일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힘을 합하여 세계 복음화(福音化)의 일을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교회는 이 사명을 위해 하나님께 전도자들을 주시기를 간구하고 그들을 불러 모집하고 훈련시키고 파송하고 물질과 기도로 후원해야 한다. 마태복음 9:37, 38,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에베소서 4:11, "그가 . . .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주셨으니." 디도서 1:3, "이 전도는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에베소서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복음 8:3,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빌립보서 4:14-18에 보면,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물질적 후원이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교회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자체를 위한 영적 건립과 세상 사람들을 위한 전도의 임무들을 잘 수행하기 위해, 우선 자주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히브리서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재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사회적, 정치적 선한 활동들이 교회의 사명 혹은 임무인가 하는 문제는 근래에 자유주의자들과 에큐메니칼 운동가들의 소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과 죤 스타트 같은 어떤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이다. 그들은 교회가 사회 정치적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사회 참여 혹은 정치 참여가 그리스도인 개개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혹은 해야 하는 일이지만 성도들의 모임 즉 하나의 단체로서의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이나 임무는 아니라고 믿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예수님의 사명은 사회 정치 활동을 포함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사회적인 일이나 정치적인 일에 관여하거나 참여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그런 일들에 관심이 없는 말씀과 태도와 행동을 하셨다. 누가복음 12:13, 14,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요한복음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요한복음 18:36,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더욱이 예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자신의 사명과 임무가 죄인을 구원하는 일, 즉 전도의 일임을 분명히 증거하셨다. 마태복음 9:1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태복음 20:28,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요한복음 6:38-40,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永生)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물론,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병고치심은 그의 긍휼과 능력의 당연한 표현이요 그의 신성(神性)의 증거들이었으며, 그의 사역에 있어서 부수적이고 제한적인 일들이었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이 병자들을 고치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더욱이, 많은 경우에 병고침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그의 주위에서 그를 믿었던 자들에게 주어졌다. 그래서 그는 빈번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8:2, 3, 4, 10, 13; 10:21, 22, 28, 29).

둘째로, 초대 교회의 사명은 사회 정치 활동을 포함하지 않았다. 초대 교회는 주께로부터 사회 정치 활동에 대한 명령을 받지 않았고, 그런 일에 관여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주님께 받은 것은 오직 전도에 대한 명령이었고 그들은 그 명령에 순종했고 그 일을 위해 힘썼다. 이러한 사실은 복음서들의 마지막 부분과 사도행전에서 분명하다.

사회 정치 문제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 태도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1:5에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나 있다: "대회들과 협의회들은 교회적 문제 외에는 아무 것도 다루거나 결정해서는 안되며; 비상한 경우들에 겸비한 청원의 방식으로나; 국가의 위정자들로부터 요구된 경우에 양심의 만족을 위해 충고의 방식으로 외에는, 국가와 관계되는 세속적 사건들에 간섭할 것이 아니다." 이 진술이 보이는 바와 같이, 우리는 국가의 일과 교회의 일이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다고 믿는다. 교회는 교회의 본연의 임무들에 충실해야 하며 국가의 일들에 직접적으로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국가나 위정자들에 대한 성도들의 의무에 대하여, 성경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세금을 내며 또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딤전 2:1, 2; 롬 13:1-7; 벧전 2:13, 14).

사회 개선이나 정치 개혁의 일들은 필요하고 선한 일들이지만, 그것들은 교회가 직접적으로 관여할 일들이 아니고, 성도 개개인이 그의 직업에서와 그의 시민으로서의 의무 수행에서 성실히 노력해야 할 일들이다. 즉 사회 참여나 정치 참여는 성도 개인의 일이지, 성도들의 모임 즉 단체인 교회의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신학교가 아닌 유치원이나 중고등학교나 대학교의 설립과 경영 등의 일반교육적 활동들이나, 병원이나 고아원이나 양노원의 설립과 경영 등의 자선사업적 활동들이나, 각종 교양강좌나 음악이나 미술 등의 문화적, 예술적 활동들은 성도 개인의 일들은 될 수 있어도, 단체인 교회의 임무나 사명은 될 수 없다. 교회는 그런 일들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말아야 하고, 그런 일들에 재능과 관심을 가진 교인들로 이사회나 위원회를 구성하여 계획하고 설립하고 운영하도록 해야 한다.



10. 교회의 조직과 정치

교회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면에서 볼 때, 조직은 비록 교회의 본질적 요소는 아닐지라도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된다. 성경은 초대 교회가 어느 정도의 조직을 갖고 있었음을 증거한다. 예를 들면, 세례를 통해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마 28:19), 장로와 집사의 직분을 위한 자격 규정(딤전 3장), 교회 집회의 순서들(고전 14:26), 성찬의 규례(고전 11:23-26), 헌금의 규례(고전 16:1, 2), 권징(고전 5장), 과부들의 등록과 관리(딤전 5:9), 교회에 시행되고 있는 규례(고전 11:16), 질서의 필요성(고전 14:40) 등의 말씀들이 그러하다(박형룡, 교의신학 제6권 교회론, 105쪽).

교회 역사상 교회 정치에 있어서 세 종류의 형태들이 있었다. 첫번째는 감독정치(Episcopalism)이다. 감독정치는 교회가 주교들 혹은 감독들, bishops)에 의해서만 다스려지는 방식이다. 이 방식에 의하면, 주교들은 사도들의 계승자로서 교인들을 감독하며 그들에게만 교회 치리(治理)의 권한이 있고 일반 교인들에게는 없다. 주교는 여러 교회들을 관할하고 치리하며 또 성직 임명권을 가진다. 영국교회(성공회)와 감독교회가 이런 정치 형태를 취하며, 천주교회의 교황제도는 감독정치의 극단적인 형태이다.

두번째는 회중정치(Congregationalism)이다. 회중정치는 교회가 교인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방식이다. 이 방식에 의하면, 목사는 지교회의 한 회원에 불과하며, 교인들 위에 감독의 권위를 가지는 사람들이 따로 없다. 또 지교회는 개체성과 독립성을 가지며 그것을 간섭하는 노회나 총회 같은 것은 없고 단지 서로 교제하고 협력하는 협의체 같은 것이 있을 뿐이다. 이런 정치 형태는 침례교회나 회중교회 등에서 볼 수 있다.

세번째는 장로정치(Presbyterianism)이다. 장로정치는 감독정치와 회중정치의 장단점을 성경적으로 보완한 형태로서, 교회가 교인들 스스로 선택한 대표자들, 즉 목사와 장로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방식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대의정치(代議政治)이다. 이 방식에서는 일반 교인들의 권한과 목사의 권한이 둘다 동등하게 존중된다. 우리는 이 정치 형태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본다.

성경은 일반 교인들의 제사장적 권한을 증거한다. 감독정치는 이 점을 무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사도들이 증거하는 대로,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요한계시록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또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대로, 교회의 직분자들은 교인들 스스로에 의해 선출되었다. 이것이 성경이 보이는 모범이었다. 사도행전 6:5, 6,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사도행전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택하다'는 원어(케이로토네오)는 '손을 내밀다'는 뜻이다. 이 구절은 교인들이 손을 들어 장로들을 뽑았음을 암시한다. 사도행전 15: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러나 성경은 또한 목사 혹은 장로들의 직무와 권위를 증거한다. 목사와 장로들은 교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감독자들'이며 교인들은 그들이 돌보며 먹여야 할 하나님의 양떼이다. 요한복음 21:15-17,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 . 내 양을 치라 . . . 내 양을 먹이라." 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목사와 교인들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이다. 이와 같이 성경이 증거하는 바대로 일반 교인들의 제사장적 권한과 목사와 장로들의 감독의 직무와 권위를 고려할 때 장로정치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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