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에 대한 이해
1. 성공회
성공회라는 명칭은 '하나이요, 거룩하고(聖), 공번되고(公), 사도적인 교회'라는 교회에관한 신앙고백 가운데 성(聖)과 공(公) 두 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 밖에 영국 국교회, 영국 성공회, 앵글리컨 처치(Anglican Church)라고 하며, 미국의 성공회는 '주교 감독제 교회'라는 의미의 에피스코팔교회(Episcopal Church)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근세 영국의 해외 진출에 따라 성공회는 북미주,아프리카,아시아,오스트레일리아로 확대되었으며 세계성공회 공동체에 속한 모든 교회를 일컫고 있습니다. 세계 성공회는 중앙헌법이나 연방적 통치의 체제를 갖지 않으며 독립관구가 되지 못하여 켄터베리 관구 관할에 있는 소수 교회를 제외한 나머지 성공회는 나라마다 독립된 관구나 관구군을 갖고 독립적인 헌장과 교회법 체계를 갖추어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성공회(聖公會)는 영국에서 시작된 교회입니다. 영국에는 성공회라고 하는 교회가 틀을 갖추기 이전부터 켈틱교회라고 불리우는 독립적이고 민족적인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이 켈틱교회는 AD175년경부터 시작되었는데 아주 민주적이며 이성적(理性的)인 교회였습니다. 영국민족이 독특하게 키워온 민족교회였습니다. 그후 AD596년에 로마 카톨릭과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로마 카톨릭은 시간이 흐를수록 부패하기 시작했고 로마교황은 "왕중의 왕"으로서 무한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루터, 위클리프, 칼빈 등 종교개혁가들은 부패한 로마교황에 대항해서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인 교회체제를 부정하고 "오직 성서로, 오직 말씀으로, 오직 은총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교회의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이즈음 영국에서도 교황이 부과하는 과중한 세금과 지나친 간섭, 성직자들의 권위와 신비에의 지나친 의존 등으로 인한 신앙의 정체등을 타파하고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 보자는 기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로마교황은 이런 기운을 무력을 동원해서 억누르려고만 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영국민족의 민족적 자존심이 발동했고 교회의 잘못된 모습들이 더욱 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교회"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헨리8세의 이야기도 로마로부터 영국이 독립하기 위한 계기였고 새로운 교회가 태동되는 복잡한 과정 중의 일부입니다.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많은 신앙 선조들의 사려깊은 고민 끝에 16세기에 이르러서 지금의 성공회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성공회가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갖추면서 영국의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몇 가지의 특징적인 모습들이 교회의 요소들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첫째, 당시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로마 카톨릭의 요소가 배제되고 켈틱교회의 민주적이고 이성적인 전통, 높은 도덕적 품성을 요구하는 사상과 철학을 받아들였고,
둘째, 전통과 기본적인 권위(교회질서)마저 무시하는 개신교적 요소도 배제되었습니다. 또한 방언만 있고 예언은 없는 교회의 모습도 배제되었습니다.
셋째, 사도시대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질서(주교제를 비롯한 삼품성직)와 교부들의 신앙고백의 전통을 계승하였습니다. 당시 로마 카톨릭의 예전들을 좀더 합리적이고 아름답게 그리고 성직자와 회중이 함께 하는 예전으로 개혁했습니다.
넷째, 개신교 종교 개혁가들이 주창한 성서, 은총, 말씀의 요소들을 수용해서 예전 중에 성서를 가장 많이 읽는 교회가 되었고 말씀과 성예전이 조화를 이루는 예전을 이룩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카톨릭적인 요소와 개신교적 요소의 장점들이 민족주의적 요소와 결합된 교회가 성공회(거룩하고 공번된 교회)입니다. 세계의 많은 신학자들이 교회일치의 모델 교회로 성공회를 지적하는 것은 위의 요소들을 생각할 때 타당합니다.
2. 왜 영국교회는 로마교회에서 독립했나?
영국교회의 개혁은 헨리 8세(1491-1547) 때 그 불꽃이 점화되었습니다. 로마교회와의 단절의 표면적 계기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헨리 8세와 캐서린 왕비의 결혼무효 소송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영국의 정치력과 경제의 장래는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헨리 8세와 캐서린 왕비 사이에는 사내아이가 없다는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시 왕위를 계승할 왕자가 없다는 것은 영국이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헨리 8세는 왕위 계승을 위해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해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했던 것입니다. 사실상 헨리 8세는 국가 이익을 위해 형수인 캐서린과 정략 결혼했고(헨리 7세는 정치상 이 결연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교회법에도 어긋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레위 20:21). 그러나 교황 클레멘트 7세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는 교리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었습니다. 당시 교황은 독일 찰스 5세의 보호 아래 있었고 찰스 5세는 캐서린의 조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헨리 8세가 미망인 형수와 결혼한 것은 전임 교황 유리우스 2세가 허락한 것인데 이를 무효로 선언하면 북구(北歐)에서 철저하게 공격을 받고 있던 교황권에 대해 더욱 불신임을 가져오게 되는고로 그는 이 사실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혼무효 청원이 거부당하자 헨리 8세는 의회를 소집했고 의회는 '영국은 어떠한 외국 세력으로부터도 자유롭다'는 결의를 하고 영국의 로마교회(Church in England)를 영국성공회(Church of England)로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영국의 종교개혁은 헨리 8세의 이혼문제가 표면적 계기가 되었을 뿐 근본적인 동기는 외국의 지배를 벗어나 왕권과 강력한 국가를 이루려는 국가주의에 기초한 국민의식이 일치되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학자 앙드레 모로아는 그의 영국사에서 '헨리 8세의 이혼은 왕자를 얻어 전쟁의 위험을 피하고 영국 국가를 강하고 안전하게 하고자 한 것이며 그의 개혁의 시도는 군주로서의 무정견한 망동이 아니라 영국 국민의식의 종교적 표현이었다'고 하였습니다.
3. 영국의 종교개혁 과정
영국 성공회 종교개혁의 중심에는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 대주교가 있습니다. 크랜머 대주교는 중세의 미신적이고 습관적인 의식을 폐지하고 프로테스탄트적 방향으로 개혁했습니다. 1547년, 헨리 8세의 서거를 계기로 영국의 종교개혁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첫째는 로마교회를 중심으로한 외국교회의 간섭이나 교리, 예배의식을 싫어하는 국교회파가 있었고, 둘째는 교황청 세력을 회복하려는 로마 가톨릭파가 있었으며, 셋째는 대륙의 종교개혁을 도입하려는 신교파가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에드워드 6세(1537-1553) 치하에서 6년 동안은 프로테스탄트를 새롭게 시도해 보았고 메어리 여왕 6년동안 다시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갔습니다. 영국 성공회는 엘리자베스(1553-1603) 여왕이 즉위하면서 종교개혁의 정착기를 맞이했습니다. 두개의 극단적인 그리스도교를 경험한 그는 극단을 피하고 중용의 길(中庸, Via Media)을 표방하는 신중하고 온건한 종교정책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자를 포용하는 기도서 제정(1559)과 극단을 배제하고 중용의 노선을 추구하는 39개신조(1563)를 발표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공회는 초대 교회로부터 이어져오는 가톨릭적 전통을 유지하면서 종교개혁적인 복음사상을 받아들여 가톨릭적이며 개혁적인 성공회의 전통을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헨리 8세와 엘리자벳 1세를 연결한 기간에 가장 대표적인 중심 인물을 뽑으라면 당연 크랜머 대주교일 것입니다. 1547년 헨리 8세가 죽었을 때, 영국 종교개혁 지도의 중책이 크랜머의 양 어께로 넘어갔습니다. 크랜머는 교의나 미신을 제거하기 위해 먼저 예배에 대한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라틴어라는 것 때문에 화를 입게 되었으며, 성찬식의 은혜로운 공동예배에 출석하는 것을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래서 크랜머는 예배개혁이 참 종교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크랜머는 공동기도서를 만들었는데 이 기도서는 일반 국민이 모르는 라틴어 대신 영어를 사용하여 모든 사람이 예배에 참여토록 했으며 성서 읽기표를 많이 넣어 중세교회가 상실한 성서적 요소를 회복시켰습니다. 이 기도서는 오늘날까지 세계성공회의 보배로운 유산이 되고 있습니다.
4. 성공회의 신앙과 특징
성공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는 권위에 대하여 독특한 관점을 발전시켰습니다. 성공회는 신앙을 판단하는 권위를 성서와 이성(理性) 그리고 전통의 근거에 의해 서로 비판적으로 조명합니다. 성서는 종교개혁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성서는 잘못된 전통과 진리를 비판하는 힘입니다. 진리의 회복으로 종교개혁은 존재하는데 그 비판과 회복을 위한 최우선의 권위는 성서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서의 권위는 전통과 교리를 절대화하려는 모든 신학적 노력과 주장을 상대화하려는 비판적 윈리입니다. 따라서 성공회는 잘못된 교회를 비판하기 위해 성서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로서 성서로만'이라는 원리에도 약점은 있습니다. 즉 역사적 발전을 간과하여 환상적인 원리적 신앙을 추구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환상을 피하기 위하여 인간 이성(理性)의 개입이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이때의 '이성(理性)'은 해석자의 자의(恣意)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며 교회공동체가 함께 공유하고 판단하는 이성(理性, Cosmic and corporate Reason)입니다. 이 점에서 이성은 전통보다 앞서는데, 전통은 이성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이성의 역할은 합일이 이루어지는 원칙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성은 인간의 경험이 사물의 본질과 조화를 이루는 근거입니다. 즉 성서에 담긴 계시는 특정한 역사와 조건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다른 역사 속에서 재해석되려면 이성을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성공회에서 전통은 인간의 경험과 실천 그리고 합의가 최종적으로 만들어낸 산물로서 교회의 중요한 권위입니다. 즉 성서에 대한 이성적 작업으로서 축적된 신앙의 결과물이 바로 전통입니다. 그러므로 전통은 성서와 이성에 의해 제공된 것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전통은 성서에 속한 초자연적인 최고의 진리를 가져다 줄 수 없지만 개인적 판단의 위험성을 피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전통은 성서와 이성에 근거한 인간의 '실천, 경험, 동의'에 의해 필요에 따라 변경되고 폐지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회는 이렇게 성서와 이성과 전통의 긴장관계를 통하여 교회사에 나타나는 극단적인 주장과 오류를 피하는 '중용(中庸, Via Media)'의 정신을 구현해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중용의 정신이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극복하고 일치를 추구하는 데 공헌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울러 세계성공회는 1888년 람베드회의에서 채택한 다음의 람베드-시카고 4개 조항을 함께 고백하므로써 그리스도교의 일치릉 위한 신앙적 기준을 삼고 있습니다.
1. 구약과 신약 66권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이다.
2.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은 그리스도 신앙을 드러내기 충분한 선언이다.
3. 세례와 성찬례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두 가지 성사(聖事)이다.
4. 역사적 주교직은 교회의 일치를 위한 적절한 처리방법이며, 그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
토마스 크랜머
토마스 크랜머는 1489년 노팅엄셔주 애스럭턴에서 아버지 토마스 크랜머와 어머니 아그네스(하트필드)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4세때 부터 캠브리지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530년에 대집사(Archdeacon)가 되었습니다. 크랜머는 캠브리지 대학의 학생 시절부터 새로운 학문에 열성이었고 철저한 반교황주의자였습니다.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의 종교개혁가들과 마찬가지로 크랜머는 전 그리스도교회에 끼치고 있는 교황의 지배권 주장이 성서에 의해서나 초대교회의 역사에 비추어 보아서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헨리 8세의 눈에 들게 되었으며, 국왕은 로마와 분리하기 직전, 크랜머를 대주교로 성별(聖別)할 것을 인가 하므로써 교황의 허를 찔렀던 것입니다. 이런 사정으로 크랜머는 23년동안 영국교회의 중요한 시기에 매우 중대한 책임있는 위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크랜머는 교의(敎義)나 미신을 제거하기 위해 먼저 예배에 대한 개혁에 착수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라틴어라는 것 때문에 화를 입게 되었으며, 성찬(미사)식의 은혜로운 공동예배에 출석하는 것을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크랜머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크랜머는 예배개혁이 참 종교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새 권위의 토대를 두고 여러가지 금지령이나 법적 개혁을 해 보고 혹은 무수한 교의에 관한 해설서를 발행했습니다. 크랜머의 수년간의 계획은 영국 국가교회로서의 예배의 개혁에 있었습니다. 사실 크랜머는 교황 승인과 교회생활의 퇴폐제거 이외의 모든 것에 있어서 보수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헨리 8세는 대주교가 마음대로 교회예배를 개정하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크랜머는 국왕을 설득시켜 사제가 회중에게 주님의 기도, 신경(信經), 십계명 등을 영어로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설득하였으며, 나아가서 국왕으로 하여금 각 교회에 새로운 영어 번역 성서를 상비하도록 명령하도록 하였습니다.
1544년 국왕은 크랜머의 제안을 받아들여 대주교가 멋진 영어로 된 총도문(탄원)이란 기도문을 간행하는 것에 동의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총도문은 후에 성공회 공도문 안에 수록되었습니다. 일부분은 중세교회의 라틴용어로 된 연도(連禱)로부터, 또 다른 부분은 루터파의 리타니(Litanies,호칭기도)로부터 번역한 이 총도문은 크랜머의 깊은 신앙상의 감각을 잘 내타내고 있었고, 또 크랜머의 영어에 대한 탁월한 기교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1547년 헨리 8세의 뒤를 이은 에드워드 6세의 평의회는 대주교가 순수한 종교개혁을 자유롭게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즉시 국어(영어) 예배를 목표로 세우고 그 수단을 강구하였습니다. 교회 조만도의 성서 일과나 성찬식 때의 성경, 사도서, 복음서가 국어역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1549년 영국 최초의 공도문을 만들었습니다. 그해 성신강림일에는 개정, 번역된 여러가지 예식이 새 공도문(New Book of Common Prayer)으로 발표되고, 국내 도처에서 이것의 사용을 명령하였습니다. 이 기도서에는 대주교의 예배 개혁방침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1552년 에드워드 6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뒤를 이은 메어리 여왕이 즉위에 의하여 다시 라틴어 예식문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당한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권위를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크랜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가혹하게 종교개혁 지도자를 체포한 메어리 여왕은 영국을 로마교회로부터 이탈하여 이단(異端)으로 이끌어갔다는 이유로 크랜머를 극형에 처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여왕의 견해에 의하면, 크랜머는 교황에 대한 서약을 파기하고 자국 사람들의 영혼을 좌절하게 만든 대죄인이었습니다. 대주교가 볼품없이 굴복하고 자신의 이단을 잘못 된 것이라고 자백하는 광경을 보게 되면 반드시 종교개혁에 대한 불신임을 영국인의 마음에 심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여왕은 확신하였습니다. 결국 교황청이 크랜머에 대한 판결문 작성에 분주할 동안 그는 수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동안 그는 심각한 회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크랜머의 종교적 입장은 교황의 권위나 모든 외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독립된 국가교회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찬 국왕의 왕위지상권이 그가 지닌 종교 권위적 개념의 바탕이었습니다. 이제 이 원칙은 꺾어진 화살과도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크랜머는 메어리를 크리스찬 왕으로서 충실하게 우러러 보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메어리는 그 왕위지상권을 이용하여 비성서적인 교황의 권한 아래로 영국을 다시 되돌려 놓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크랜머가 죽기 전 몇 주간 이렇게 혹독한 내적인 갈등 속에서 그는 지금까지의 그의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교황과 여왕 양자에게 그는 정면으로 도전을 하였습니다. 영국을 다시 한번 교황의 전제와 로마주의의 교리에 얽어매려는 왕위지상권을 반박하면서, 크랜머는 모든 외면적 권력을 초월한 크리스찬으로서의 절대적인 양심에 따라 항변하였습니다.
크랜머가 불 속에 서야만 했던 1555년 옥스포드에서 그의 최후의 모습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하느님의 진리로 묶는 새로운 그물인 개혁 성공회로 관점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이 하느님의 진리, 즉 하느님의 살아 있는 목소리는 권위를 가지고 각 시대에 걸쳐 그 시대의 사상적, 정신적 경험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초대교회의 전과 역사적 연속성에 기반을 둔 공교회적(Catholic) 권위를 갖는 앵글리칸니즘(Anglicanism)은 성서가 갖는 복음적 권위의 영향력을 재생시키고 바로 잡는데 그 목적을 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교의 죽음이라는 제3의 요소, 즉 왕의 최상권을 부정하고 양심의 최고 권위를 내세우므로 해서 성령의 역사로 인한 양심의 요소들과 합쳐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영국 성공회는 전통과 성서의 양자를 크리스찬 상호간의 교제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에 의하여 해석되는 것으로 보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크리스찬 상호의 교제는 전통적인 교회의 생활과 체험의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것이며,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의 영원성을 분별하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시며 비춰주시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단어이해>
대집사 : 가톨릭에서는 대부제, 정교회에서는 장보제(長補祭). 교구의 주교를 대리하여 교회의 재산과 수입등을 관리함.
성찬식(聖餐式) :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열두제자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 행하는 예식. 성찬식의 핵심은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에서 하신 것처럼 사제가 빵을 떼고,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이것은 내 몸...", "이것은 내 피..."라고 하신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을 외는 부분이다. 그러나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셨을 때의 육신으로 변한다는 것은 아니다. 소위 '화체설'이라는 것을 성공회는 믿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예수님의 몸과 피로 알고 먹고 마시는 것이다.
신경(信經) : 신앙의 조목을 기록한 경문.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등이 있다.
공도문(公禱文) : 여러 갈래 다른 신앙 생활을 하는 영국민들이 다 함께 영국 교회에 모여서 공통적인 기도문을 가지고 기도를 보도록 나라에서 국회의 결의로 정한 기도서이다. 오늘날에도 영국 성공회 공도문은 영국 하원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성공회에서는 공도문이라 하지 않고 '교회 예식서'라고 부른다.
왕위지상권(Royal Supremacy) : 헨리 8세때에 개혁의회가 '신앙상의 권위 또는 교구가 개혁 또는 수정을 시도할 경우, 그 과오, 이단 죄악을 검열하고 개혁 수정을 가하여 근절한다.'는 권리가 왕관에 있다고 승인한 것.
엘리자베스1세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인 앤 보레인의 딸. 그녀의 어머니가 간통과 반역죄로 참수된 후 궁정의 복잡한 세력 다툼의 와중에서 헨리 8세에 의해 왕위 계승권을 박탈되었다가 다시 왕위 계승권을 회복하였습니다. 또한 이복 언니인 메리 1세의 가톨릭 복귀 정책이 불만을 사게 되어 와이어트 반란으로까지 확대되었을 때, 그녀도 반란 가담의 혐의를 받아 런던탑에 유폐되는 등 다난한 소녀시절을 보냈습니다. 메리 1세가 죽자 뒤를 이어 25세에 즉위하였으며, 그녀의 오랜 치세는 영국의 절대주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므로 국민으로부터 '훌륭한 여왕 베스'라고 불리는 경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다른 누구보다 문예부흥을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키아벨리(Machiavelli)의 정치적 교활성에 에라스무스(Erasmus)의 인도주의를 가미한 사람과 같은 여왕은 백성들의 정신적 경향을 잘 읽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헨리 8세의 종교정책을 그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신구 양파의 항쟁이 격화되었을때 여왕은 수장령(首長令)과 통일령(統一令)을 부활하여 국왕을 종교상의 최고 권위로서 인정 받도록 하는 왕권지상권도 회복하였으나 헨리 8세때 처럼 권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다소의 수정을 가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왕위지상권의 주 대상은 가톨릭 교도에 대한 회유에 있었습니다. 영국인이 국가교회에 적어도 표면상 충성한다고 하면, 국가교회가 종속하는 한, 가톨릭교도는 좋을 대로 믿으면 그만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영혼에 무리하게 창문을 열지 않는다 ... 우리 국민은 국가교회원으로 있는한, 신앙에 대하여 이러니 저러니 간섭할 만한 일이 못 된다"라고 천명하였습니다. 회유는 엘리자베스의 전 종교정책의 요점입니다. 무엇이든지 포용할 수 있는 교회로 가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강구하였으나 제일 비협력적인 퓨리탄 교도나 무정하며 참혹한 가톨릭교도는 제외 되었습니다. 이즈음에 에드워드 6세때 만든 42개신조를 수정하여 소위 39개신조를 만들었습니다. 이 신조는 영국 성공회가 가진 신앙의 전통적 가톨릭 요소를 보유하고 있지만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닮은 점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의회에 대한 행정은 강제와 양보의 양면작적으로 조종하여 권한을 축소시켰습니다. 추밀원(樞密院) 중심의 정치를 폈고, 정치범을 위한 성실청(星室廳) 외에도 종교범을 위하여 특설 고등법원을 설치하였습니다. W.세실, 월싱엄 등을 중용하고 베이컨, T. 그레셤 등의 진언을 받아들였으며, 지방에서 명망있는 사람을 치안판사로 임명하여 지방행정을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의 설립과 월터 러리에 의한 북아메리카의 버지니아 식민지의 기초가 확립된 것도 이무렵의 일입니다. 당시 최강을 자랑하던 에스파냐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펠리페 2세의 구혼을 거절하는 한편 네덜란드의 독립을 도왔으며, 에스파냐의 미국과의 무역선을 F.드레이크와 J.호키스에게 명령하여 습격함으로써 에스파냐의 해상권을 위협하였습니다. 에스파냐의 무적함대와의 해전에서 크게 승리하므로서, 영국인은 국민적 자각이 높아져서 해상 발전의 길이 트이게 되었습니다. 여왕의 치세 중 영국은 한 섬나라에서 대해상국으로 성장할 기초가 이루어졌고, 문화면에서도 영국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국민 황금시대가 도래하여 세익스피어, 스펜서, 베이컨 등의 학자와 문인이 속출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여왕은 '선녀여왕'으로서 온갖 영광의 상징이 되었고 영국의 절대주의는 절정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590년 이후부터는 퇴색되어 '반독점 논쟁'에서는 하원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단어이해>
*수장령(首長令, Act of Su- premacy) : 영국 왕을 영국교회의 수장으로 하는 법령. 1차 발표는 1534년, 재발표는 1559년에 있었다. 의회는 '신앙상의 권위 또는 교구가 개혁 또는 수정을 시도할 경우, 그 과오, 이단 죄악을 검열하고 개혁 수정을 가하여 근절한다'는 권리가 왕관에 있다고 승인하였는데, 이것이 세상에서 여러가지로 논의되어져 내려온 영국성공회의 유명한 왕위지상권(Royal Supremacy)이다.
*통일령(統一令, Act of Uni- formity) : 영국의 종교개혁 때 성공회의 예전 및 기도서를 통일시킨 법령으로 1549년, 1552년, 1559년, 1562년에 걸쳐서 발표하였다.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영국 성공회를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독립시키기는 했지만 교의(敎義)는 여전히 가톨릭교회의 것이었다. 다음 왕 에드워드 6세는 1549년 루터파의 교의를 가미시킨 제1차 공도문을 제정하였으며, 이어 통일령 예배의 통일, 성체성사 집행을 위한 법령을 발표하여 공도문 사용을 선포하였다. 1549년에 제1 통일령이 발표된 후, 1552년 공도문의 일부가 개정되면서 제2의 통일령이 발표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성공회의 기틀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1559년 다시 수장령과 통일령을 발표하였다.
*39개 신조 : 성공회의 교리적 입장을 정리한 영국 성공회의 문헌. 영국 이외의 성공회에서는 효력이 없다. 다만 성공회의 교리적 입장을 짐작하는데 유효한 문헌으로서의 가치는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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