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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은사들의 다양성

수호천사1 2014. 6. 5. 23:24

은사들의 다양성

 

 

 

 

 

몇 가지 은사들과 직분에 관한 한, 바울은 그것을 조직화 시키지 않고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은사들과 직분들의 커다란 다양성에 강조점을 둔 것을 볼 수 있다.(롬12:6 ; 고전12:4) 그렇지만 그 다양성은 몸의 통일 성과 그 공통선(고전 12:7)속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롬12:6~8 ; 고전12:8~10, 28~30 ; 엡4:11에 언급된 목록들은 우리가 연구 조사해 볼 때, 바울은 반복하여 은사와 사역을 언급한다. 그들 중 다수는 동일하지만 다수는 다른점이 있다. 그것들을 성경에 나타난 18가지를 분류해 보자.

(1) 사도들(롬12:6~8 ; 고전12:8~10, 28~30 ; 엡4:11)

(2) 선지자들(롬12:6 ; 고전 12;10, 28 ; 엡4:11)

(3) 교사들(롬12:7 ; 고전12:28 ; 엡4:11)

(4) 복음 전하는 자들(엡 4:11 ; 딤후4:5)

(5) 섬기는 일(롬11:7)

(6) 구제하는 일(롬12;8)

(7) 다스리는 자(롬12:8)

(8) 권위하는 자(롬12:8)

(9) 지혜의 말씀(고전12:8)

(10) 지식의 말씀(고전12:8)

(11) 능력을 행함(고전12:10, 28)

(12) 병고치는 은사(고전12:10, 28)

(13) 각종 방언 말함(고전12:10, 28)

(14) 방언 통역(고전12:10, 28)

(15) 영들 분별함(고전12:10)

(16) 감독들(빌1:1 ; 딤전3:2 ; 딛1:7)

(17) 장로들(딤전5:17, 19 ; 딛1:5)

(18) 집사들(빌1:1 ; 딤전3:,8,12)

 

1. 사도들

사도직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의 부활의 증인된 자들에게 수여하신 은혜이며 그들은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권위를 부여핫니 구원의 전파자들이다. 그리스도를 교회로 발전케 하는 특수한 관계에 있는 이 사도직은 그 성격상 반복 될 수 없고 계승 될 수 없는 것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교회에 주신 첫 은사로서 종결된 그룹을 구성한다.

 

사도라는 말의 개념은 무엇보다 임명과 권위부터 개념으로 규정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그들의 말은 교회에서 절대적 권위를 가진다. 그리고 그들은 순종을 요구한다.(롬1:5 ; 고후2:9 ; 빌2:12) 그들은 유전의 전수자요 전달자이며 복음의 근본(살전2:13 ; 고전15:3~7, 11:23)이요 신앙의 보증인들이요 신앙의 초석을 놓은 자들이다. 그들의 행동은 교회의 예배이며 작품들은 교회의 정경이 되었다.

 

우리들은 교회로 소속되어 있고 교회로 통하여 주님께 직분을 받았으나 사도들은 교회로부터 직분이 나지 않고 교회가 오히려 그 기원을 사도들에게서 갖는다. 사도들은 교회의 창설자들일 뿐 아니라 그들은 전체 교회에게 권위를 행사한다. 우주적인 기능과 계승하고 본 받아야 할 사실들이 바울에게서 밝혀진다.

 

2. 선지자들

사도들과 함께 선지자들도 바울이 제시한 목록에서 보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들은 예언하는 자들이다. 구약의 모든 예언들을 신약의 사도들이 받을 수 있도록 사역을 하였고 주님께서 사도들로 하여금 완전케 하신 것이다. 바울은 선지자으 ㅣ사역이 신약의 교회 안에 있음을 보여 줄 때 고린도전서에서 예언을 방언하는 것 위에다 둔다.(고전14:1)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고 하나님께만 의사 전달이 가능한 반면 선지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고 권하고 격려하는데에 관련된다.(고전14:3,31)

 

바울이 이 예언을 성령의 사역으로 보았고 따라서 그는 교회에 성령을 소멸치 말고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살전5:19,20) 예언은 교회에 주어지고 교회 안에서 사역하시는 성령의 특수한 하나의 형태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예언을 말함도 계시라 불릴 수가 있다.(고전14:30 ; 엡3:15) 그리고 그들은 사도들과 함께 언급되었다.(엡3:5) 예언의 이 계시적 성격을 성령의 직접적인 감동하게 말하는 것 및 그 말해진 바의 내용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고전14:30)

 

예언자는 하나님의 비밀들에 대한 통찰력을 받는다(고전13:2) 그는 하나님의 구속적 활동의 의미와 진전을 설명도 한다.(엡3:5) 롬11:25 ; 고전 15:51 ; 살전4:13에서 바울이 교회가 아직도 기대해야 할 하나님의 구속적사역을 선포하고 해석 할 때 그는 또한 예언적 은사와 능력으로 말한다.

 

3. 교사들

교사는 "세째"로 고전12:28에 언급되고 엡4:11에서 목사들과 함께 언급되었다. 바울이 예언적 은사를 자기에게 부여하듯이(고전14:6) 가르침의 은사도 부여한다.(고전4:17 ; 살후2:15 ; 골1:28 ; 딤전 2장 ; 딤후1:11) 고린도 전서 14장(롬12)에서 "가르침" 은 교회에서 자유로이 나타내는 하나의 은사로 나타난다.(고전 14:26)

그렇지만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경우처럼 교사도 어떤 영적 자질을 갖춘 분명히 한정된 일단의 그룹이다.(고전12:28 ; 엡4:11) 이것은 지속적이고도 규칙적인 활동을 가리킨다. 우리는 교사의 뚜렷한 직분을 곧 교회 안에서 교회가 교사로 어떤 사람을 지명하는 것을 볼 수는 없다. 감독들 같은 교회의 지도자적인 인물들에게 가르침의 은사가 필요하다.(딤전3:2 ; 딤후2:24) 그리고 장로님들에게도 가르침의 은사가 필요한데, 그들은 그 때문에 존경을 받아야 한다.(딤전5;17 ; 살전5:12 ; 딤후2:2)

 

이 교사들의 활동을 정확하게 다른 은사들, 예컨대, 예언자들의 활동과 구분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예언자들과 같이 성령의 직접적 영감과 감동에 의거치 않고 사도적 전승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일로 구성된다. 사도적 전승이란 거대한 구속사적 내용과 관련되는 것이며, 그것에서 일어나는 훈계에 관련되는 것들이다. "가르침"과 "전승"이 바울에게 매우 긴밀한 관계 이념이듯이(롬6:17 ; 갈1:12 ; 살후2:15 ;골2:6,7) 마찬가지로 기독교 전승과 교훈은 다른이들을 가르치기에 유능한 "교사들"이 맡아야 할 일들이다.(고전4:17 ; 딤후2:2)

 

따라서 이러한 교사들의 활동을 교훈과 같은 기독교 교리의 어떤 부분에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선포의 전체 내용까지 확장 포함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 번은 전체 포괄적인 의미에서 "그 복음"이라 지칭 되었고 다른 곳에서는 그 복음을 ㅗ살아야 할 방식, 곧 이 "교리"의 내용으로 진칭되기도 했다.(갈1:11,12 ; 골 1:23 ; 3:16) 그러므로 구전이 아직도 기독교 신앙의 지식에 원천이었던 그 때에 교사들은 그 전승의 전파에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공관 복음에서 언급된 교사의 명칭, 예컨데 유대교 교사들의 칭호같은, 상응하는 관례를 살펴 볼 필요가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정된 전승 자료를 전달할 임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구약에 관한 전승은 큰 역할을 차지했다. "전승"과 "교리"의 밀접한 관계에서 나타나듯이, 기독교 교사들의 명칭은 유대교 교사직에 유추하여 유래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 교사들의 활동도 더 상세히 이해 되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교사들의 활동은 요리문답 참여자들과, 세례 지원자에 대하여 큰 중요성을 가졌을 것으로 본다. 다른 한편으로는 엡4:11에서 "목사와 교사들"의 밀접한 관계에서 나타나듯이 그들의 가르치는 활동도 더 광범위한 범위를 가졌다고 본다. 그러나 예언자들과 교사들의 양식은 다른데가 있었다. 전자는 좀 더 현재적인 면을 나타내었고 후자는 복음의 설교의 좀더 전통적인 양상을 띠었다.

두 가지 모두의 기능은 교회를 세우고, 위로하며, 영적인 지도를 주는 일이었다. 그 결과로서 경계선을 정확히 설정하기는 어렵다. 예컨데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이것들이 정확하게 예언적 혹은 교훈적 성질을 갖는 것인지 구분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우리가 골2:1~8을 읽을 때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지식과 지혜의 보고들은 예언적 국면 뿐만 아니라 교훈적 양상도 나타내 주고 있다. 둘 다 교회를 세우는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다르게 은사가 주어진 사람에 의한 해석이 필요하다.

 

4. 복음 전하는 자들

교회에 주어진 은사들의 목록에서 복음 전하는 자들은 단지 에베소서 4장에만 언급되어 있다. 딤후4;5에서 바울이 이 자격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하길 "전도인의 일을 하라"고 했다. 그리고 행21:8에서 또 나타난다.(여기서는 전도자 빌립을 가르치고 있다.)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규정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빌립같이(행8:4,12,35,40) 복음을 선포하긱 시작한 자들 혹은 사도들을 돕는 자들로 생각한다.

 

바울은 이처럼 디모데를 그리스도 복음의 동역자(살전3:2)라 칭한다.(골4:11 ; 고후8:18 ; 빌4:3)

 

그런데 이 직무를 규칙적인 임명의 의미에서 특수한 직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겠다. 이 직무네 규정적으로 채용된 어떤 사람들은 확실한 자격을 가졌을 것으로 본다. 그들은 선교사로 뿐만 아니라 이미 설립된 교회의 지도자들로 간주되어야 한다. 딤후 4:5에 근거한 가정은 신빙성이 크지 못하다. 확실히 복음 전도자들은 복음 선포에만 국한하지 않고 교회조직의 설립을 지시하고 세례를 주었을 것으로 본다.(딤전2:2 ; 행8:12) 그렇지만 그들의 고유한 일은 분명히 우리가 몇 가지 예로부터 결론지을 수 있는 한에서는 교회의 다스림 보다 지속적인 복음 선포에 있었다고 할 수가 있다. 초기에 그들은 자주 사도들과 교회의 지도적 인물 사이의 교량 역할도 담당했다. 사도들이 하나 둘 사라짐과 함께 복음 전도자들도 사라져 갔다.

 

5. 목사들

엡4:11에 목사는 교사들과 함께 언급되었다. 이것은 둘 사이의 동일성을 의미한다기 보다, 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가리키는 듯 하다. 우리는 이 목사들의 사역의 성격을 은유적 표현 양식에 따라 추론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교회를 돌보고 지도하는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겠다. 벧전2:28에서는 에베소의 장로들은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주의하라)고 명을 받고 있다.(벧전5:1,2)

 

따라서 목사들은 장로들과 감독들에게 위탁된 일과 같은 일을 한다. 엡4:11에서는 비록 감독의 직무가 언급 된 것일 수도 있지만(빌1:1) 목사와 교사의 직무보다는 활동의 면을 언급하고 있다. "목사와 교사"가 그처럼 밀접히 연결된 것은 그들이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공통적 직무를 갖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 지도자로서 특히 교사들은 자기들을 가르치고, 목사들은 교회에서 일반적인 지도를 한다.(딤전5:17)

 

목사의 직분과 관련해서, 우리는 교회 내의 지도적 은사를 가리키는 다른 칭호들을 또한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롬12:8은 지도하는 자가 열심으로 이 은사를 행사토록 권한다. 동일한 문맥에서 "너희를 권하는 자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딤전 3장에서 다시 동일한 말로 감독들에게 명하기를 그들은 자신의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그는 말하길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그리고 딤전 5:17에서 동일한 특성이 장로들에게 부여되었다.

 

비록 로마서의 디모데전서에서는 관점이 다르긴 해도(한쪽에서는 은사로 다른 쪽에서는 직임으로 간주되었음)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제시킬 수는 없다. 그리고 롬12장에서 지도하는 자들로서 바울은 장로들 혹은 감독들을 언급했다. 동일한 것이 고전 12:28~30에 언급된 목록들에도 적용된다. 거기서 바울은 동일한 의미에서 "다스림의 자질"을 언급했는데, 여기서도 그는 확실히 교회 안에서 특정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본다. 그들은 주어진 능력 때문에 지도적 위치를 점유하며 다른이들은 그들에게 순종해야만 한다.(고전16:16) 다시 한 번 더 여기에서는 자질들과 직부상의 능력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러한 교회들 안에서 장로직과 같은 직분들이 아직 제도화 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빌1:1)

 

6. 상호 봉사

교회 내의 상호 봉사를 지칭하는 은사들은 다소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신자들이 롬12장에서 권고 받길, 모든 성도는 자기에게 수여된 은사를 올바른 방식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혹 그것이 섬김의 은사이면 '그것이' 섬기는 일로 '나나타게'하라"

=> 자기 재산을 나누어 주는 자가 그것을 성실함으로 하라.

=>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그것을 하라(롬12:8)

그리고 고전12:28의 "서로 돕는 것" 혹은 "봉사하는 능력"도 동일한 범주로 분류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이러한 모든 서술들의 분명한 개념을 구성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아마도 전자는 가난한 자를 돕는 일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고, 후자는 좀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자비의 행위를 지칭 할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전12:28의 서로 돕는 것은 그렇다면 이것과 저것 모두를 포함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더욱 어려운 것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도 사용하는(롬15:31 ; 고전16:15 ; 고후8:4) 롬12:7의 문맥에서 "섬기다"라는 일반적 명칭을 해석하는 일이다.

 

아마도 일반적으로 말해 모든 섬김의 행위를 지칭할 수 있는 그 말은 롬12:7에서는 좀 더 특수한 면을 가리키는 용례이다. 사랑의 돕는 행위, 봉사의 실제적 시행의 뜻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롬12:7에서도 우리가 고전 12:28에서 "봉사 행위"로 취한 의미와 동일한 뜻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다른 여러 은사들 중에서 사도는 서로 돕는 것의 실제적 시행의 영역에 놓여있는 은사들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7. 장로들, 감독들

지금까지는 주로 특히 전면에 나타난 직분들의 질적 성격을 가졌던 은사들을 살펴 보았고 교회를 위해 있어야 할 여러 직분들과 직무들 사이의 경계가 분명치 않았던 점도 살펴 보았다. 그러나 빌1:1과 목회 서신들에 언급된 장로, 집사, 감독의 직은 다른데에 있다. 무엇보다 장로들과 감독들에 관한 한,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동일 직분과 관계하고 있음을 제시해야 하겠다. 물론 그 명칭들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장로, 영장자는 확실히 유대교에서 유래한 족장적 배경을 갖고 있다. 유대교에서 장로는 어떤 지위를 가르치는 명칭이다. 목회 서신들에서 그것은 "직무에 대한 명제가 아니라 연령을 지칭한다."는 것은 디도서 1장 5절에 비추어 볼 때 그 신빙성이 약하다.

 

에피스코포스는 그것이 유대교 배경에서 왔든, 헬라적 배경에서 유래 되었든지 간에 기독교 이전 형태의 어떤 대응과 쉽사리 동일시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 할지라도 두 말은 다른 관점에서 동일한 종류의 직무 책임자를 가리킴에는 틀림없다. 왜냐하면 딛1:5~9에서 선한 장로가 되길 요구하는 것은 딤전 3:2에서 에피소코포스에 대해 언급하 바와 아주 유사할 뿐 아니라 또한 그 명칭들은 딛1:7에서 다른 사람에게 이전 됨이 없이 교차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장로 혹은 감독직의 의미는 목회 서신들에서 분명히 언급되어 있지는 않다. 그것은 잘 알려진 것으로 가정되었다. 딤전3:1~7과 딛1장에 각기 언급된 장로 혹은 감독에 필요한 선행 조건들은 대부분 일반적이고 윤리적인 성격을 띄고 있으며 그 직부이 어떤 성격의 것들을 나타낸다. 예컨데 딤전3:4,5에서 "의 머리가 되며", "규율을 세우다" 등이 직부의 어떤 성격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것으로부터 장로, 감독의 직무는 딤전5:17에서 "잘 다스리는" 장로들과 딛1:7에서 감독이 "하나님의 청지기"로 불리운것과 꼭 같이 특히 지도하고 교회 안에서 일이 잘 되어 가도록 살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우기 특별한 점은 그들은 기독교 교리를 옹호하고 변호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감독은 가르치기를 잘 해야먄 한다.(딤전3:2) 이 말을 우리는 "가르치는 자질이 있는"것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딛1:9에 따르면 감독은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는데,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다. 유사하게 딤전 5:17에는 잘 다스리는 장로를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특별히 말씀(말씀 전파)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추론해 볼 때 장로들은 행정과 교회 질서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영적이고 본질적 의미에서도 지도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교회 안팎으로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과 원래적 의미를 옹호하고 변호해야만 했다. 이 점에서 부분적으로 그들의 사역은 교사들의 그것과도 일치된다. 그렇지만 딤전 5;17로부터 분명한데가 있는데 모든 장로들이 모두 동일하게 직접적으로 특별하게 "말씀과 가르침의 사역"에 관계한 것이 아니었다. 몇몇은 좀더 일반적인 지도직에 치중했고 다른 이들은 선포와 가르침에 더욱 비중을 두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도권과 가르치는 국면을 따로 생각 할 수는 없겠다. 따라서 직무적 은사와 비전문적 은사 사이의 경계가 유동적임도 나타난다.

 

다스림과 지도권의 은사(롬12:9 ; 고전12:28)는 불가분리의 관계이며 그런 의미에서 바로 장로, 감독의 전제 조건이 되었다. 더우기 가르치는 재능이 결여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지도직에 부름받은 자들은 그러한 특별 은사를 가진 자들이었다. 은사는 직분화 되기 쉬우나 직분이 은사를 결여시킬 수는 없다. 더우기 직분으로의 발전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것은 은사적 측면에서 고려하든지 직무적 측면에서 고려하든지 모두 사실이다. 은사적 측면에서 보면 성령께서 부여하신 어떤 재능은 그 자질을 자동적으로 전면에 나타나게 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을 직무상의 지도자인 장로, 감독들로 승인하고 임명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고, 이러한 것은 교회는 순전하고 덕을 세우는 것과 겉치레적이고 덕을 파괴하는 것 사이를구분해야 했다는 사실에의해 촉진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직무적 의미에서 일반적인 지도자들을 임명함은 기독 교회에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유대교회의 회당적 배경과 및 교회의 실제적인 요구와 조화가 된다. 그러나 모든 개인적 은사들이 직무로 되었던 것은 아니다.

 

장로, 감독직이 비전문적 은사들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고안 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들 직분의 의미와 구조는 좀더 일반적인 의미를 가졌으며 그것은 곧 교회의 조직적 삶과 영적 삶을 지도하는데 있었다. 그들은 사실상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 모집되었으나, 후자에게서 비 직무적 의미에서 교회를 계속 세우는 자유와 여지를 빼앗지는 않았다. 지도하는 장로직무의 일반적 성격은 어떤 은사들(예컨데 병고침과 방언의 은사 같은 것) 보다 더욱 추천에 있어서 본질적이고도 유용하다는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

 

직무상의 국면이 좀 더 전면에 부각되는 부분, 예컨데 목회 서신들에서는 어떤 은사들은 언급이 되어 있으나 어떤 은사는 빠져 있는 사실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런 발전은 직무가 은사를 밀어 제쳤다거나 혹은 직무가 은사를 가리키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일방적으로 요구되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회중의 삶이 사도적 전승과 교리(전경의 형성)에 근거해서 견고화 되었던 것처럶 교회는 바울이 장로, 감독직무의 기초로 또는 그 직무에 필수적이라 칭하는 그러한 은사들이 절대로 필요했다. 즉 다스림의 은사, 가르치는 재능, 바른 교리와 상충되는 바를 올바로 식별해 내는 분별력, 외인들을 향한 바른 자세 등은 꼭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사도들과 사도들의 직속 후계자들이 교회를 다스리던 시대가 점점 종언을 고하는 때가 다가왔을 때 바울은 장로, 감독직무에게 교회의 세움과 발전을 위탁하게 되었다.

 

8. 집사들

장로, 감독직과 밀접히 연관해서 바울은 집사를 언급하고 있다.(빌1:1 ;딤전2:1,8 ; 딛1장에서는 전자만을 언급한다.) 딤전3:8~13의 "집사의 모범"에서 의도된 직무의 성격이 희미하게 나타난다. 집사들이 요청받은 사항들은 보다 더 일반적인 종류의 것이다.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부터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바는 집사직은 특히 교회에서 상호 도움을 제공했으며, 또한 바울이 롬12:6~8에서 기술한 섬기고, 구제하고, 긍휼을 베푸는 은사와 고전12:28에서 언급한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돕는 능력"의 은사와 관련을 가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이러한 은사들을 말하는 방법에서 분명히 나타난 것은 이 모든 활동은 전체로서의 은사에 종속적이고 의존적 의미를 갖는 다기 보다는 그들의 특수하고도 독자적인 성격이 현저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할 수가 있다. 즉, 집사직은 이 상호적 도움을 통상적으로 관리하도록 하기 위해 제정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사실로부터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점은 집사는 단순히 장로를 돕는 직이 아니다. 혹은 감독에 종속하는 직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적 삶의 고유한 기능에 상응하는 특수한 직무가 집사들에게 부여된 점이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의 독립된 직무가 생겨난 사실은 장로직이 생겨난 것과 동일한 관점에서 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직무가 은사적 직임을 대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집사직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사직은 규칙적이고 확실한 질서에 필요한 것임이 입증된다.

 

그리고 직무로 채용되지 않고 있었던 성령의 은사들을 위해 여지가 남겨져 있었고 남겨져 있어야 했던 것은 우리가 장로, 감독의 직무처럼 집사직을 그 자체의 존재 이유로서 구분할 수 있을 때,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은사와 능력들을 바로 관리하며 그 지시된 방식으로 교회에 지시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바로 생각하게 될 대 더욱 분명해 진다. 이는 교회의 계속적이고 정상적인 세움을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

 

9. 여자들

교회를 세우고 정비함에 있어서 여자의 위치도 독자적 문제로 등장한다. 우리가 할 것은 가장 중요한 것만을 살펴 보는 일이 되겠다. 일반적으로 바울이 언급한 교회 내에서의 여자의 위치에 관한 진술은  이미 우리가 그의 결혼에 관한 훈계에서 고찰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동일한 두 관점들을 드러내어 주고 있다. 즉 한편으로는 여자도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에 완전히 참여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남녀는 완전히 평등성을 갖는다. 이 평등성은 유대인이나 헬라인, 종이나 자주자나 모두에게 차별이 있을 수는 없다.(갈3:28 ; 골3:11 ; 고전 11:11,12)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라 할 지라도 남,녀 관계의 사이에서 그 자연적 구분을 없이 할 수는 없으며, 남자는 여자에 대해 지도적 위치에 있다. 바울의 시대, 즉 일반적으로 말하면 고대에서의 특수하게 말한다면 유대교 내에서의 여자들의 지위를 고려해 볼 때, 교회내에서의 여자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확실히 하나의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바울 서신들에서 보는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남,녀 평등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는 "형제들" 앞으로 교회에 서신을 보내지만 그럼에도 여자들을 향해 명령한다.(회당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또한 다른 방식으로, 즉 롬 16장에 언급된 인사 목록에서도 여자들의 이름이 많은 것을 볼 수가 있다. 교회의 유익을 위한 예언의 은사는 바울이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에게도 부여하고 있다.(고전11:5) 또한 "기도함"이 문맥에서는 확실히 개인적, 사적 기도 뿐만 아니라 공중 앞에서와 남의 덕을 세우기 위한 기도도 포함하여 이와 마찬가지로 여자에게 부여된 것으로 본다.

 

그것과 함께 브리스길라 같은 여인들도 지적되어야 하겠다. 바울은 비단 그녀의 남편 뿐만 아니라 그 여인도 자기의 동역자라고 소개한다.(행18:2) 그리고 마리아(롬16:6)도 언급 되었는데, 바울은 복음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사역을 특히 지칭하는 말로 그녀를 증거하길 많이 "수고했다."라고 하고 있다. 동일한 사상이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와 버시에게도 해당된다.(롬16:12) 그리고 롬16:1에서 바울은 뵈뵈에게 특별한 직무와 자질을 자신과 교회를 위해 부여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분명히 롬12:7과 고전 12:28에 언급 된 돕고 섬기는 은사들로 분류 되어야 할 것이다. 비록 뵈뵈가 "직무상으로"는 여집사가 아니었으나, 우리가 거듭 주장한 바와 같이 뵈뵈의 직무는 교회가 임명한 그러한 직무와 어떤 본질적 차이가 없다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바울 서신들로부터, 여자가 가질 수 있었던 직무는 통상적인 직무가 아니라 비직무상의 은사 뿐이었다라는 점을 추론할 수 없다.딤전5:9 이하에 보면 교회 내에서 과부에게 할당된 과업이 있었고 그들 중 누구는 허용되고 다른 이는 허용되지 않는 직분에 대한 언급이다.

 

다른 한편, 바울도 역시 여자들에 대한 어떤 제한을 부과하고 있다. 특히 교회의 회합에서 여자들은 제약을 받는다고 언급되었다. 고전 14:34에 언급된 대로는 여자들은 교회(모임)에서 잠잠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잠하라는 명령과 고전 11장에서 허용된 기도 혹은 예언의 은사와 자유와의 관계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 하는 것은 난제가 된다. 어떤 이들은 생각하기를 고전 14:34에서 여자들은 다른 이들의 예언을 판단하는 데서 조용하라고 요청되었다고 한다. 복음 전파와 주의 사역에 잠잠하라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은 34,25절을 보다 후기의 첨가어로 간주한다. 또 다른 이들은 만족 할 만한 어떤 해결책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본다. 그렇지만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는 고전14:28의 말씀은 교회의 모임에서 잠잠 하라는 뜻임을 회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자들이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은 공적 모임 밖에서의 영적 언사들에 한정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공석에서 말하는 것을 삼가하도록 여자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바울은 여러 방식으로 조용하라고 명령한다. 고전 14:34에서 그는 말하기를 여자들의 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에 그 처럼 이른 것"과 "같이", 그는 이것을 첨가한다. "오직 복종해야 함"은 그들에게 정해진 혹은 규율에 순응해야 함을 가리킨다. 명백히 나타나는 바는 여자가 남자와 관련하여 갖는 위치에 관한 규칙 혹은 규율이다. 따라서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 지니 라고 한 말이 뒤 따르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바울은 계속해서 "여자가 교회(모임)에서 말 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유사한 선언을 딥전 2:11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 여자는 교회 모임에서(여기서는 교회 모임에 관한 지시를 한다.) 일체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따라서 여자가 가르치고 "남자 위에" 주관함을 허용치 않고 여자는 조용해야 하고 잠잠해야 한다. 여기서 다시 고린도전서14장에서 율법이라 지칭된 바에 대한 호소가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최초의 역사, 즉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브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받아 죄에 빠졌음이라는 사실에 호소한다.

 

이 논거에서 다른 두 개의 동기들이 매우 긴밀하게 함께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1) "율법"이 말하는 바, 혹은 태초의 역사로부터 추론된 것, 바울 당대에 통요되던 권위(표준)에 따라 여자에게 부적당하다고

      생각한 것

(2) 그가 고전11;5~13에서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것이 "합당한가"와 "부끄러운 일"인가에 대해

     말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것은 부끄러운 일임이라"고 {후자를 가르침 - 역자주}를 언급한다.

 

이 마지막 경우의(우리가 더 상세한 의미를 고찰하기 곤란한) 의도는 남녀 사이의 구분과 아마도 여자는 남자에 종속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었다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더 깊은 동기, 즉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남자와 관련해서 여자에게 부여하시기로 의도하신 지위는 여자가 공적인데서 자신을 처신해야 할 방식과 여자가 남자에 대한 자신의 위치를 알아야만 되는 합당한 방식에서 그 구체적 형태를 찾고자 한다. 바울은 여기서 이것을 분명히 포괄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똑 같은 방식으로 그는 그 새 자유를 의식함으로 교회가 남을 실족치 않게 되도록 권하며, 이 점에서 분명히 다른 교회들 보다 자유에 방임하고 있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행위의 일반적 한계를 지키도록(고전14:33) 또한 권고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관습과 "공통 표준"에 대힌 이러한 호소 안에 종속적 위치가 어떤 시대와 문화에 따라 적절히 고려되고 표현되어져야 한다는 점에더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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