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주의 휴거론 비판
성충정 목사
본 글은 “환난전 휴거설”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환난통과 후 휴거설”이 성경적임을 밝히려는 것이다. 환난전 휴거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자는 누구인가? 그는 세대주의의 아버지인 다비(John Nelson Darby)였다. 우리는 환난전 휴거설이 왜 생겼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세대주의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세대주의를 비판하기에 앞서서 개혁주의자들의 신앙고백과 일치하는 점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들은 성경의 축자영감과 무오성을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가견적(可見的), 인격적 재림을 말한다. 모든 시대에 있어서 구원이란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를 두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품격에 대한 교리는 카톨릭의 교리와 같다. 이 지상에 천년왕국이 세워짐을 믿는다.
반면에 우리와 같지 않은 점, 즉 비 성경적인 면도 많이 있다. 본 글에서는 세대주의의 역사의 흐름을 살피고 그리고 그들의 특징(교리)을 약술하고 비판을 하였다. 그들의 “환난전 휴거설”은 성경적이 아닌데도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는 외쳐지고 있으니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환난전 휴거설”에 대한 재고가 있어서 성경적인 휴거설이 한국의 강단에서 선포되기를 간절히 염원하여 이 글을 쓰게 되었다.
1. 세대주의의 역사
세대주의 역사는 영국과 아일랜드(Ireland)의 몇몇 지방에서 모인 독립적 단체들의 집회에서부터 비롯된다. 아일랜드에서 형제단의 기원은 1828년 더블린(Dublin)시의 위클로의 카운터의 파워스코트 맨션에서 개최되었다. 그때 존 넬슨 다비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영국에서 기원은 플리머스(Plymouth)와 브리스톨(Bristol)에서 에드워드 어빙에 의한 예언 운동과 관련이 있다. 아일랜드의 더불린시의 집회는 영국의 다른 두 집회보다 앞섰기 때문에, 더불린은 세대주의의 발생지로 간주된다. 그러나 우리는 세대주의자들을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현대 세대주의 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다비(J.N.Darby)가 교회를 “형제단”이라 불렀고, 이 형제단의 출판 본부가 바로 플리머스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형제단 운동은 다비의 이름을 따라 다비주의(Darbyism)라 불리워지기도 한다. 그 신학자들을 D-신학자라고 부른다. 세대주의의 보다 나은 이해를 위하여 그 주요한 대변자들, 곧 다비와 스코필드 그리고 세대주의의 역사적 흐름에 대하여 차례로 생각하고자 한다.
(1)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다비는 1800년 좋은 가정적인 배경을 갖고(그의 가운데 이름 넬슨은 유명한 해군 제독의 이름에서 따온 것임)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188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대학(Westminster and Trinity College)에서 법률을 공부하고(1819년 졸업) 성공적인 변호사가 되었지만, 27세 되던 해에 그 일을 포기하고 영국 성공회의 신부가 되었다. 하지만 교회의 모든 제도에 대해 못마땅해 했던 그는 1827년 그의 소론<On the Nature and Unity of the Church of Christ>(그리스도 교회의 본질과 통일)을 써냄으로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는 그의 논문이 나온 그 해에 그는 그 직책에서 물러나 애찬과 기도를 위한 더불린의 한 회합에 참가하였는데, 그의 교육과 재능과 힘차고 매력적인 성품 때문에 얼마 가지 않아서 그 회합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다비는 칼빈주의와 경건주의를 합쳐 소위 극단적인 다비파(Darbyites)를 조직하였다. 다비는 성격상 괴상한 데가 있었으나, 어린이와 가난한 사람에게 친절하고 온후하며 검소하였다. 그는 흉한 얼굴에 다리를 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고, 강한 조직력과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재능은 다양해서, 저술할 수 있었고, 몇 가지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전 성경을 독일어, 불어, 영어로 번역했다. 다비가 성경의 권위와 예언서의 중요성을 확신하게 된 것은 말에서 떨어져서 요양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특별히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로 시작되는 이사야서 32:1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 형제단 운동이 처음 조직되었을 때, 저들에게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었다. 첫째는 에큐메니칼 운동이었고, 둘째는 안수받은 목사제도와 교회제도를 없애자는 것이었다. 저들은 예배시 음악이나 어떤 형식의 의식도 반대하였다. 다비의 표어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연합”이라는 것이었다. 저들은 안수를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라고 하여 언짢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형제”란 말 자체는 교파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다비는 영국교회를 떠나 형제단 운동에 가담하고 나서 많은 진리를 재발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진리들은 처음에 사도들이 가르쳤으나 후에 그 빛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위대한 종교개혁자들도 이 진리를 알지 못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이 “재발견된 진리”란 종교개혁자들과 현존하는 많은 주석서들이 주장한 기독교의 모든 역사적 교훈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들이었다. 저들은 사도 이후의 모든 사상을 거짓된 것으로 보고, 형제단의 “재발견된 진리” 만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제멋대로 사람들에게 경고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 형제단에는 그 자체 내의 분쟁으로 불행이 찾아왔다. 그리하여 형제단은 두 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하나는 극단파요, 다른 하나는 온건파로 각각 알리어졌다. 그리고 다비는 스위스 장기 체류(1838년 이후)에서 플리머스에 돌아오게 되자, 다비가 없는 동안 플리머스 집회의 지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뉴톤(B.W.Newton)과 다비 사이에는 교리적 차이점이 있는 것이 나타났다. 뉴톤은 칭의에 대한 종교개혁의 교리, 구약시대의 성도들을 신약 계시의 교회에 포함시키는 것, 그리고 재림은 <대환란> 전에 오지 않는다는 것 등을 믿었다. 그리고 그는 그 교리를 교회가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싸움으로 결과하여 논쟁과 유인물로 맞서게 되었다.
그러나 뉴톤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다비는 하는 수 없이 50명 내지 60명은 신도들을 데리고 같은 시내에 다른 집회를 열었다. 이것이 극단파의 시초가 되었다. 자기들만이 형제단의 정통파라고 주장하고 자기들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회중이라고 생각하였다. 다비는 종교적인 지도자로서 극단적인 논쟁을 즐기는 개인주의자로 일생을 보냈다. 한번은 무디(Dwight L.Moody)와 논쟁을 벌이다가 화가 나서 성경책을 덮고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뉴톤이 자신의 교리적 오인에 대하여 유인물을 통하여 사과했는데도 불구하고 뉴톤을 징계한 일도 있었다.
한편 다비는 자기 사상의 많은 부분이 이단으로 간주되어, 많은 사람에게 슬픔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자기의 그릇된 사상을 철회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런 사람들과는 교제를 끊으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비는 자기가 인정하지 않는 회원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뮬러(George Muller)를 파문하기까지 하였다. 다비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 중에도 다비의 몇몇 교리들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였다. 그 중의 한 교리는 그리스도에 관한 사상이었다. 곧 예수는 단순히 형벌 받기 위해 하나님의 손에서 수난을 당하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다비가 1858년에 저술한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볼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에 의해 고난을 당하시되 속죄가 없는 고난이었다고 다비는 주장하고 이러한 사상은 신약에는 나타나지 않고, 시편에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2) 싸이러스 잉걸스 스코필드(Cyrus Ingerson Scofield)
세대주의 역사를 말함에 있어서 다비의 충실한 추도자인 스코필드를 놓칠수 없다. 스코필드는 다비의 사상에 매혹당한 인물이었다. 이 두 사람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다 같이 법률을 공부했다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갖고 자기의 신념을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스코필드는 많은 책을 저술하였으며, 필라델피아 성서대학(Philadelphia College of the Bible)을 설립하였고, 1909년에는 그 유명한 스코필드 관주 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을 온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은 스코필드가 다비의 감화를 받고나서 세대주의 견해를 영속하기 의해 저술된 책이다. 이 성경은 1909년 출판된 이후 200만부 이상이나 매진되었다고 한다. 스코필드는 1843년 8월 19일 미국 미시간 주에서 태어나 1921년 7월 24일 죽었다. 그는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사병으로 종군하다가 공을 세워 훈장을 타기도 했다. 군대에서 제대하자 그는 법률 공부를 시작했고, 그 후 정계에 투신하여 ‘그랜트 대통령(President Grant)'에 의하여 캔사스 주 변호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대주가로 이름이 나 있었다.
스코필드는 1879년에 회심하여, 3년후, 회중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신학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사람으로 관주성경을 썼다. 그는 영국 흠정역 성경에다가 자신의 각주를 붙여 모든 독자의 기억 속에 자신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스코필드의 충실한 제자들은 스코필드의 생각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와 동일하다고 생각하기까지 되었다. 스코필드와 사상이 다르다는 것은 곧 바울과 베드로가 다르다는 결론이 된다. 다시 말하면 스코필드의 관주 성경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스코필드 관주성경의 각주에 전부 다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스코필드 관주성경은 역사적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유익하다고 볼 수 있다. 스코필드는 성경을 믿는 보수적인 신자였다. 소위 고등비평이나 자유주의의 신학자들이 성경을 여러 면에서 공격할 때 이 관주성경이 나왔든 것이다. 이에 대한 도전이 절실히 요구 될 때, 스코필드가 성경의 주요 교리들을 변호하므로 성경 연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그의 추종자들도 역시 성경의 권위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스코필드 관주성경은 그리스도의 역사적 교훈과 전혀 일치하지 않은 것들도 많이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많은 지식을 가진 성경 학도라면 이 관주 성경을 비판적으로 읽고, 여기서 좋은 점들을 취하고 잘못된 교리들을 피할 수 있겠지만, 초신자나 아직 신앙의 지식이 부족한 자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책이다. 스코필드 관주 성경의 성경해석 방법은, 성경의 어떤 부분은 교회를 말하고 성경의 어떤 부분은 이스라엘을 말한다고 결정하고 나서, 이와 같은 구분 방법에 따라 그 관계된 귀절들을 해석하는 것이다. 마태복음과 계시록에는 환난을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타나는데, 그들이 교회인지, 또는 이스라엘인지를 스코필드 관주 성경은 결정하고, 이 결정에 따라 교회는 대환난을 면한다하고, 이스라엘은 그것을 당하게 된다고 해석한다.
스코필드 관주성경은 물론 복음주의 신학을 주장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교리를 철저하게 주장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그릇된 성경해석이 종말론에 그릇된 방향을 취하여 세대주의라고 하는 괴상한 체계를 만들어 냄으로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그릇된 종말관을 갖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코필드 관주성경의 오류를 지적하고 공격하였다. 그 중에서도 스코필드를 가장 혹평한 인사들은 자기 진영 안에 있는 인사들과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으로 계속 확신하는 사람들 이었다. 이들 가운데 Philip Mauro, S.D.Gordon, Cambell Morgan,Harry Rimmer, 그리고 Paul B.Fischer와 같은 저명한 인사들이 끼어 있었다.
(3) 미국에 있어서의 세대주의
미국의 세대주의는 다비가 1859년 처음 캐나다를 방문하고 나서, 그 후 캐나다와 미국을 여러 번 방문한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1862년 뉴욕의 제임스 잉글리스(James Inglis)가 월간지 Waymaks in the wilderness를 출간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대서양 연안에서 형제단의 사상을 보급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이 사상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옹호자 중의 한 사람 J.H.부룩스(James H.Brookes)였는데, 그가 1870년에 저술한 책 Maranatha는 여러 판을 거듭한바 있었다. 부룩스는 “Believer's Meetings for bible study”로 알려진 하계 사경회와 역시 1878년 뉴욕에서 처음 시작된 예언 사경회(Prophetic conferences)에 매우 능동적이었다.
세대주의의 역사를 상세히 추구하지 않더라도 미국에 있어서의 세대주의의 그 신속한 성장이 W.E.Blackstone의 저서 “Jesus is coming”과 스코필드 관주성경에 기인한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블렉스톤의 책은 1878년에 출판되어 처음에는 널리 사용되지 않았지만, 1908년 이후 수십만부가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 무료로 배부되었다. 스코필드 관주성경은 위에서 이미 말한바 있거니와 1909년에 출판되어 1917년에 수정을 가하였으며, 그후 계속 팔려 200만부 이상이나 인쇄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세대주의자들의 성경으로, 다비와 형제단의 예언 사상을 대중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미국의 세대주의 사(史)는 초기 형제단 운동처럼 내분으로 점철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운동을 가장 심각하게 반대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 안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약 80년 전 Robert Camerron이나 Nathanael West와 같은 인사들은 환난전 재림론 문제로 반기를 들었으며, W.J.Erdman과 Henry W.Frost도 이에 가담했든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세대주의에 가장 강한 반대자 중의 한 사람은, 한때 세대주의의 열렬한 옹호자였든 Philip mauro이다. A.W.Pink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한편 미국 내에서는 세대주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비-스코필드 형과는 다른 세대주의 한 체계가 일어났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그 대표자인 E.W.Bullinger(1837-1913)의 이름을 따라 블링거주의(Bullingerism) 또는 극단적인 세대주의(Ultra Dispensationalism)라 부른다. “진리의 말씀”을 세대적으로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 블링거의 주장이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의 하나는 교회와 관계된 것이었다. 블링거는 사도행전의 오순절의 사도적 교회와 옥중서신의 바울적 교회를 구분하고, 하나는 “신부교회”로 다른 하나는 “지체교회”라 불렀다. 이와 같은 블링거의 견해는 스코필드파에 의해 완전히 거절되었다.
(4) 시대적 상황
역사적 기독교 사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세대주의의 견해들이 어떻게 이와 같이 교파를 초월하여 광범한 영향을 끼쳤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다비시대의 영적 상황을 더듬어 보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초에는 교회 강단에서 교리적인 설교를 거의 들어 볼 수가 없었으며, 성직자들은 주님의 재림을 강조한다는 것이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자유주의가 성행하는 교회는 무기력하게 되었다. 강단은 직업적인 성직자들에 의하여 점령되었고, 신자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영적으로 굶주려 있었다. 저들은 예언의 확실한 말씀을 듣기를 갈망했으나, 주일마다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불확실한 음을 내는 피리뿐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생겨지는 부산물은 성경의 교훈에 관하여는 전적으로 무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기에 형제단 운동은 태어났든 것이다. 이러한 영적 공백기에 다비주의와 함께 각종의 혁신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몰몬교도들은 다비의 시대에 천년왕국설을 가르치고 있었다. 죠셉 스미스(Josep Smith)는 1830년에 몰몬경을 출판하였는데, 바로 이 해에 다비는 형제단의 지도자로 인정받은 것이었다. 스미스는 다비처럼 이스라엘의 재소집을 가르쳤다.
안식교의 창설자인 W.밀러(William Miller)는 1831년에 자신이 교리를 포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세계의 종말이 1843년에 온다고 단정하였다. 그래서 그의 추종자들은 소유를 팔고, 흰 옷을 입고 주의 재림을 기다렸다. C.T.럿셀(Charles Taze Russel)은 1880년에 여호와 증인을 창설하고, 다비가 죽은 바로 전 해인 1881년에는 자신이 저서를 출판하였다. 여호와의 증인파의 환상적인 천년왕국설은 너무나 유명하여, 여기 새삼스럽게 소개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영적 상황은 다비주의를 쉽게 받아들이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상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게 하였다. 그리하여 예언과 주의 재림을 강조하는 형제단의 교훈은 당시의 영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의 요구에 충분히 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2. 세대주의의 특징
(1) 7시대설
스코필드 성경에서 7시대를 다음과 같이 나눈다. 무죄시대(창조로부터 타락까지), 양심 혹은 도덕책임시대(타락으로부터 홍수까지), 인간통치시대(홍수로부터 아브라함의 부름까지), 약속시대(아브라함의 부름으로부터 시내산 율법 주실 때까지), 율법시대(율법 주심으로부터 그리스도의 공성역 기간까지), 교회시대(그리스도의 공성역 말기로부터 재림까지), 왕국시대(그리스도의 재림으로부터 1천년간)이다.
스코필드 성경에 ‘세대’는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세대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의 어떠한 구체적 계시에 대해 그들의 순종을 시험받는 일정한 시기”(A dispensation is a period of time during which man is tested in respect to his obedience to some specific revelation of the will of God"라고 정의되어 있다.
게블라인(Frank E.Gaebelein)은 7시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7시대가 있으나 그것들은 내내 순종의 단일 시취에 기초하여 원리에서는 하나다. 그래서 사람이 만일 제일 시대의 제정한 조건들을 능히 수행하였더라면 다른 여섯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실패하였지만은 하나님은 자기의 유죄한 피조물을 내어 버리는 대신에 그에게 시취를 행하셨다. 이같이 각 시대는 실패로 종지하고 각 시대는 하나님의 긍휼을 내어 보낸다”고 하였다. 이 견해에 대하여 중대한 이의들이 있다.
첫째, 세대주의 자들이 사용하는 시대론의 명칭, 즉 「오이코노미아」(οικονομια)란 용어는 성경에서 경륜(엡 1:9,3:2,9;골 1:25;딤전 1:4),청지기(눅 16:2-4),직분(고전 9:17)등으로 한역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세대주의자들이 이 단어를 시취나 시련의 기간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함은 오용이다.
둘째, 7시대로 구분하는 것은 무리이다. 제 2시대는 양심시대라 칭하나 양심은 바울 당시 이방인에게도 심판의 빙거가 되었다(롬 2:14-15).제 3시대는 인간통치시대로서 하나님을 위하여 세계를 통치하라고 하였으나 통치에 실패하였다고 하나 이때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때였다. 또 약속시대, 율법시대, 은혜시대(교회시대)로 구분하나 율법시대에도 약속들이 있고, 은혜시대에도 율법이 생의 준칙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셋째, 시련을 계속적으로 봄은 성경적이 아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사람이 계속적으로 시련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최초 시취에서 낙제하여 영생의 상급을 잃어버렸으나 하나님은 자비하시며 긍휼하시어 그에게 재시취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타락과 함께 그 자손들은 전적으로 부패해지도록 된 것인데(롬 5:12-14) 그때부터 인류의 구원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실현될 것이었다. 그렇기에 벌써 그 때에 그리스도의 오실 것이 약속되지 않았는가(창 3:15)? 구원은 어느 시대의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얻게 된다.
넷째, 성경의 유기체를 분열시킨다. 세대주의자 찰스 쿡(Charles C.Cook)은 “구약에는 그리스도인에게 신앙과 본분의 법칙으로 적용되는 한 문절도 없다”고 하였다. 이 이론은 성경을 두 권에 나누어 구약과 신약의 한 부분은 이스라엘에게, 신약의 남은 부분은 교회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하니 이는 성경의 유기체를 분열시킴이다.
(2) 세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교회에 대한 서로 다른,분리된 계획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원리를 잘 설명해 주는 세대주의 신학자의 글은 다음과 같다. “세대주의자는 인류 세대에 걸쳐 하나님께서 두 개의 특별한 목적들을 추구하고 계시다고 믿는다. 하나는 지상적 목적들과 관련된 것으로 유대주의에 관한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천상의 백성들, 천상의 목적들과 관련된 것으로 기독교에 관한 것이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교회에 대해 서로 다른, 분리된 계획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다.
첫째, 이스라엘이라는 용어를 살펴볼 때 그렇다. 이스라엘이란 용어가 이방인을 포함하는 포괄적 의미로, 따라서 신약교회를 대변하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있다. 갈 6:15-16에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에서 “이 규례를 행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이다. 이 무리 안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참 신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참조: 행 13:32-34, 38-39; 벧전 2:9).
둘째, 아브라함의 씨(자손)란 표현을 살펴보자. 구약에는 이 용어가 분명히 아브라함의 육체적, 혈연적 후손들을 가리키고 있음에 틀림없지만 신약성경은 이 용어의 의미를 확대시켜 이방인 신자를 포함하여 말하고 있다(갈 3:28-29;창 12:2-3,22:18).
셋째, 시온성과 예루살렘이란 단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서 있는 언덕 중의 하나를 구약에서 종종 의미하고 있다. 그런데 신약에서 이 용어들이 그 의미를 확장시키어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히 12:22-24;계 21: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한 별도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 계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역사의 시계를 되돌려 구약시대로 돌아가는 것과 같으며, 계시의 점진성을 무시해 버리는 처사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겐 미래가 없단 말인가? 물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자들의 소망하는 미래는 동시에 이방인들이 소망하는 미래이기도 하다.
(3) 왕국 연기설
세대주의자들의 왕국연기설이란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메시아 왕국의 건설을 예언하였는데 메시아가 강림하셨으나, 유대인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건설을 연기하시고 하늘로 가셨는데 후에 다시 와서 유대인들을 위하여 왕국을 세운다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세례 요한과 예수가 천국이 가까웠다고 전파할 때에 그들은 유대인의 신정국가의 회복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이 회개하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왕국설립을 그의 재림시까지 연기하셨다는 것이다.
이 변경의 기점을 스코필드는 마 11:20에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어떤 이는 마 12장에) 두고 있다. 그 전환점 전에는 예수께서 이방인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이스라엘인에게 왕국의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이다. 그 전환점 이후에 그는 왕국을 더 이상 전파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것이 장래 임할 것을 예언하시고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피곤한 자들에게 휴식(안식)을 제시하신 것뿐이라고 한다.
왕국의 도래가 연기되었다고 가르치는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옳지 않다.
첫째,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예수님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제시했든 왕국을 거절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옳지 않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이야기한 왕국을 배척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대인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 중 얼마는 예수님을 믿었고 또한 그의 제자가 되었다.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 병고침을 받고 예수님을 믿던 사람들, 120명의 무리들(행 1:15), 500여명의 무리들(고전 15:6)이 있었지 않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실 때 왕국을 연기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당대의 유대인들에게 왕국을 세우셨고 또한 많은 무리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든 것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고 말씀하셨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자기 당대의 유대인들에게 나타내었든 왕국은, 종종 세대주의자들의 주장하듯, 그리스도가 지상적 왕권을 가지고 유대인들을 지배하려고 했었더라면, 아마도 예수님의 원수들은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과정 중 이 일을 들먹거리며 고소하였을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제시하였든 왕국은 영적인 것이었다. 즉 사람들의 마음과 삶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 그리고 그 통치의 목적은 모든 죄와 사단적 권세들로부터의 구속이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고 하셨다.
셋째, 세대주의의 왕국의 연기에 관한 가르침은, 만일 예수님이 제시한 왕국을 그 당시 유대인들이 받아들였었더라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겠는가 하는 문제를 야기 시킨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고 유대인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고 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을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세대주의자 찰스 라이어(Charles C.Ryrie)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제시한 다윗 왕국을 수락하였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왕국건설을 위한 기초적 작업으로 필수불가결 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은 논리의 모순이다. 유대인 대부분이 영접하였는데 누가 그를 죽인다는 말인가? 예수님은 고난 후에 영광을 말씀하셨는데(눅24:26) 세대주의자들은 영광 후에 고난을 말한다.
(4) 예언의 문자적 해석
현 시대의 세대주의자인 헤르만 호이트(Herman Hoyt)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이 원리는 성경을 문자적이며 평상적 차원에서 받아들이며 이것을 성경 전체에 적용하려는 태도이다. 즉 성경의 역사적 내용들을 문자적으로 취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리적 자료들 역시 이런 식으로 해석되며 도덕적, 영적인 내용 역시 이런 형태로 해석을 시도한다. 예언적 자료들 역시 이런 방식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는 상징적 언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상징적 언어가 사용된 경우라도 그것을 해석하기 위하여 문자적 방법을 적용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어떠한 종류의 다른 해석방법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부터 그들을 위해 의도되었던 메시지를 부분적으로 -전부가 아니라면- 나마 탈취하는 것이 된다.”그러나 바른 성경 해석은 문자적 해석과 상징적 해석을 겸하여 하는 것이다. 즉 세대주의자들과 같이 과도한 문자적 해석과 무천년주의자들과 같이 과도한 영해에 치우치지 않고 두 사이의 중도를 취하여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는 해석이다.
(5) 그리스도의 이중 재림론
세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이중 재림을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첫 단계를 공중재림이라고 하고 이때에 휴거(rapture)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때에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 완전히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공중의 어느 지점까지 내려오신다. 이때 모든 참된 신자들의 부활이 일어나게 된다. 이 부활 후에 그때까지도 여전히 살아있는 신자들은 홀연히 변형되어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 때에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휴거가 일어나게 된다. 즉 죽음에서 일어난 신자들과 변화된 신자들은 구름 속에 들림을 받아 강림하시는 주님을 공중에서 만나게 된다.
교회라 불리는 신자들의 이 몸이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 그와 함께 7년 동안 어린양의 혼례잔치를 축하하며, 그 기쁨을 나누게 된다. 교회가 하늘에 남아 있게 될 이 7년 동안,땅 위에서는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다니엘 9:27에서 예언된 환란이 시작되며 그 환란의 후반부를 소위 대환난이라고 부른다. 적그리스도(바다로부터 올라온 짐승)가 이제 그의 잔인한 통치를 시작하는데, 그 통치의 절정은 그가 하나님처럼 경배받기를 요구하므로 막바지에 이른다.
그리고 무서운 심판들이 그 때에 땅위에 거하는 자들에게 임하게 된다. 또 수많은 이방인들의 무리와 함께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때에 구원받게 된다. 땅의 왕들과 짐승의 군대들 그리고 거짓 선지자가 연합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게 된다. 이 7년 기간의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함께 영광중에 다시 이 땅에 오시게 될 것이다. 이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히 땅위에 서실 것이다. 그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그의 적들을 멸망시키고 예루살렘에 그의 보좌를 세우시며 그의 천 년간의 통치를 시작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러한 두 단계로 나뉜다는 입장에 대해서 어떤 확실한 성경적 근거도 없다.
3. 세대주의의 환란전 携擧설의 부당성
(1) 성경에는 예수님의 재림을 세 가지 말로 표현하고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강림을 지칭하는데 사용하고 있는 첫 번째 용어는 「파루시아(παρουσια)강림」란 말이다. 이 용어는 주의 재림을 표시하는 대표적인 낱말이다. 특히 바울의 애용어로서 신약에 24회 사용되는 중 마태에 4회 공동서신에 6회 그 외는 모두 바울이 사용하고 있으며 데살로니가 전-후서에 7회나 보인다(살전 2:19,3:13,4:15,5:23;살후 2;1,8,9).이는 원래 왕의 임재를 표시했으나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표시하는 유명한 낱말이 되었다.
이 말을 바울이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이 용어는 원래 일반적인 말 이었으나,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고유명사 비슷하게 되어 가는 경향이 있어서, 급기야는 ‘예수의 강림이 이 용어의 다른 것과의 관련성을 거의 막을 정도로 이 용어의 용법을 전유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기에는 이것이 누구의 ‘강림’을 의미하는지를 규정하는 속격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도 기독교적 어법에서의 ‘파루시아’ 하면 그리스도의 강림이라는 한 사건만을 지칭하게 되어 더 이상의 구체화가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 말은 ‘도착’(arrival)과 ‘현존’(presence)의 두 가지 밀접히 연관된 개념을 표현한다. 이 단어는 ‘도착’을 의미하지 ‘귀환’(retur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이 단어를 주님의 공중재림에 국한시킨다.
바울의 그리스도의 강림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둘째 용어는 「아포칼룹시스(αποκαλυψι)나타나심」란 용어이다. 살후 1;7; 고전1:7,3:13; 롬 2:5,8:18에 나타난다. 이 용어는 자주 초자연적 영역으로부터 지상적 영역에로 위대한 것들이 내려오는 것에 적용한 것이다(단 7:13). 이 ‘아포칼룹시스’란 용어에 부가된 색조와 향취는 ‘파루시아’란 말에 의해서 전달되는 그것과는 좀 다르다. ‘파루시아’는 주로 신자들에게 관심하고, ‘아포칼룹시스’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들에게 주로 관심한다(살후 1;7,8). 즉, 이 낱말은 ‘숨은 것이 드러남’을 뜻하여 주께서 나타나시는 사실과 더불어 심판을 통하여 인간의 숨은 일들을 밝히시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이 단어를 대환난 끝에 주가 세계를 심판하려고 지상에 영광스럽게 오실 때에 배치하였다.
그리스도의 강림을 지칭하는 세 번째 용어는 「에피파네이아(επιφανεια) 나타나심」이란 말이 있다. 살후 2:8에 한번 보이는 외에 모두 목회서신에 나타난다(딤전 6:14; 딤후 1:10,4:1,8; 딛 2:13).이 낱말은 공중에 나타나시는 주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그로 말미암은 항거할 수 없는 권능을 표시하는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이 단어를 ‘아포칼룹시스’와 같이 주님의 지상 강림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바울은 이처럼 예수님의 재림을 세 가지 말로 표현했다. 「파루시아, 아포칼룹시스, 에피파네아」이다. 이 말의 차이점을 세대주의자에서는 교묘하게 해석한다. 여기서 첫 번째 ‘파루시아’란 것은 세계의 모든 불신자들도 볼 수 있게 오시는 것이다. 그들이 여기에 인용하는 성경은 예수님께서 “밤의 도적같이 오신다”는 말씀을 인용한다. 이 오시는 때에는 불신자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전혀 알 수 없고 이 기간에는 공중의 혼인 잔치가 있은 후에 지상 재림을 하시게 되는 것으로 그 때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되며, 이때의 재림을 ‘아포칼룹시스‘라고 했다는 것이다.
Dr. Allis는 이 문제에 대하여 평하기를 바울 사도가 재림에 관하여 말할 때에 이 세 가지 말을 사용한 것은 사실이나 살전 4:15, 살후 2:1, 살전 3:13,살후 2:8에 보면 동일한 사건을 다른 말로 표시한 것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에 있어 바울 서신에는 두 가지 재림설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재림은 두 가지로 시간적인 간격을 둔 사건이 아니고 단회적인 사건으로서의 단지 말의 표현이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이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혹자는 교회가 환난을 통과하지 않는 몇 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든다.
첫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 두 번 환난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가 환난을 통과하게 되면 주님이 두 번 심판을 받는 결과가 된다고 한다.
교회가 환난 당하는 것을 예수님이 두 번 심판을 받는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는가? 초대교회시대부터 지금까지 교회가 받은 환난과 핍박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가? 이는 이론이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둘째, 노아의 때와 롯의 때를 비유로 보건대 교회는 환난 전에 공중으로 휴거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는 환난과 진노를 분명하게 구별하지 못한데서 나온 오류이다. 앞으로 있을 환난시 성도가 그 환난을 통과하나 하나님의 진노는 성도에게 임하지 않는다(계16:2).
셋째, 계3:10에서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하였으므로 환난기 전의 휴거로 본다.
이 구절에서 “시험을 면한다”는 내용은 번역상 오역이다. ‘면하게 하리니’는 “보호한다” 또는 “지킨다”는 말로 번역이 되어야 한다. “시험의 때”는 이중적인 환난을 의미한다. 그 하나는 세상 종말에 있을 무서운 대환난(계13장)이고, 또 하나는 주께서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심판하심으로 온 세계에 임할 심판이 그것이다. 주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위로하시면서 하신 이 말씀은 이러한 이중적인 환난이 온 세계에 임할 때에 그들을 주께서 지켜 보호하여 주시겠다는 것이다.
넷째,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교회라는 말이 언급되다가 4장 이후에는 한 번도 없으니 이전에 교회는 휴거되고 나머지는 이삭줍기에 해당되는 성도들이라고 한다.
계시록 4장 이후부터 교회의 개념이 없다는 주장은 너무나 비성경적 발상이다. 4장 이후에도 성도들이 환난 받는 장면이 여러 번 기록되어 있는데 세대주의자들은 “지상에 남은 성도들과 유대인 성도들로 가리킨다”고 못박는다.
그러나 “성도”의 용어는 신약용어이며 신약적 개념이지 구약이나 이스라엘의 용어가 아니다. 구약 다니엘서 7장에서 사용한 “성도”는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섯째, 계시록 4장의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씀을 요한의 휴거와 교회의 휴거로 보고 있다.
이는 요한의 휴거도 교회의 휴거도 아니다. 그것은 성령에 감동된 것(in spirit=성령 안에 있음)이지 변화되어 휴거된 것이 아니다(계 4:2). 요한은 밧모섬에서 에배소에 온 후 천수를 누리고(100세) 죽었다(주후 106년경).
지금까지 “환난전 휴거설의 부당성”을 거론하였다.
사실 초대교회로부터 19세기까지는 대부분 “환난 통과 후 휴거설”을 주장하고, 또 그러한 신앙적인 믿음의 생활을 정립하여 왔었다. 그러다가 세대주의창시자 다비에 의하여 이 학설이 주창되었고 그 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이 학설이 발전되었다. 19세기 이 후 신비적인 세대주의 신학이 교회 내에 스며들면서 어빙 목사와 시카고 무디 신학교의 스코필드 박사와 달라스 신학교 월드 브리너 학장이 이 학설을 체계화시킴으로 환난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어서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4. 환난기 후 휴거설의 타당성
환난 통과 후 휴거설은 초대교회로부터 맥을 이어온 보수적인 신학의 정통견해이다. 이 학설은 루이스 벌콥(L.Berkhof)과 박형룡 박사의 주장이다. 환난기 후 휴거설을 편의상 “통과설”로 말하기로 한다.
(1) 바울과 요한과 마태가 예언한 종말의 진행 순서를 볼 때 통과설이 성경적이다.
바울과 요한이 예언한 종말에 대한 말씀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순서가 된다. 종말의 진행순서:
A. 바울의 종말 순서
배도하는 일(살후 2:3a) → 막는 자의 역사와 옮김(살후 2:6-7) → 불법의 사람 나타남(살후 2:8a)
B. 요한의 종말 순서
대환난(계 13:1~18) → 주 예수의 강림(계 19:11~16) → 적그리스도의 심판(계 19:17~21) → 사탄의 결박(계 20:1-3) → 휴거(살전 4:16-18, 계 20:4~6) → 천년왕국(계 20:4~6)
C. 마태의 종말 순서
(2) 그리스도의 재림은 단회적(單會的)이다.
세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이중 재림을 주장하나 그리스도의 재림은 단회적이다. 데살로니가가 전서 4:17절에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고 한 말은 마 25:6절에서 처녀들이 신랑을 영접하여 돌아옴을 의미하고, 사도행전 28:15,16절에서 로마의 교우들이 바울을 영접하여 돌아옴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들을 위하여 오시고 그들과 함께 오시는 일이 연속하여 될 일이다. 두 사이에 몇 해의 간격이 있으리라고 추상할 이유는 없다. 히 9:28절의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이중 재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말하는 것이다.
(3) 성도의 부활은 단회적이다.
바울은 부활의 순서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3-24)고 하였다. 부활의 첫 부대는 그리스도시다. 부활의 제 2부대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성도들이다. 부활의 세 번째 부대는 천년왕국 이후에 있을 불신자들의 부활이다. 이처럼 성도의 부활이 단회적임을 말하고 있는데 세대주의는 성도의 부활을 두 번 있다고 말을 한다. 환난 전과 환난 후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비성경적이다.
(4) 성경은 신, 불신을 막론하고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와 이마와 손에 666의 표를 받게 하는 시험의 때가 있음을 말한다(계13:9,11~18, 14:9~12).
(5) 성경은 대환난 기간 중에도 성도가 이 지상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계 13:6-7)
세대주의자들은 이들이 “유대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예수님의 공중 재림시에 휴거하지 못하고 환난에 떨어진 자들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1:7)고 하셨는데 그 말씀의 뜻 가운데는 성경의 해석을 바르게 하라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유대인으로 봄은 바른 해석이 아니다.
(6) 바울은 적그리스도의 출현 후에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하였다(살후 2:3)
(7) 성경은 “마지막 날”에 성도의 부활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요 6:39,40,44,54, 11:24).
(8) 살전 4:16~17절의 해석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 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본문에 나타난 휴거의 장면 즉, 상황을 살펴보면 일곱 가지의 모습을 설명할 수가 있다.
첫째, 주님의 호령소리가 난다.
여기 “호령”을 발생한 주체는 누구인가? 그리스도이시다. 이 명령(호령)은 주님이 하늘을 떠나면서 죽은 자들에게는 ‘일어나라’(막 5:41)고, 산 자들에게 ‘이리로 올라오라’(계 4:1)고 하는 명령이다. 이 명령은 주님의 입술로 통해 주님이 친히 내리시는 명령이다.
둘째, 한 천사장의 소리와 나팔은 접속사 and로 결합되어 있다.
본문의 천사장은 미가엘이다(유 9; 계 12:7). 그는 특히 하나님을 위하여 사단을 대적해 싸우는 천사이다. 주님의 재림은 사단을 멸하시는 것인 만큼, 미가엘이 활동하게 된다. 이 나팔은 천사가 불 것이다. 이 나팔 소리는 주님의 오심을 알려 주는 신호이며, 당신의 백성에 대한 당신의 구원을 선포하기 위해 발해지는 신호이다. 이 말씀을 볼 때 주님은 공공연하게 만인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들을 수 있게 오시는 것이 아주 명백해진다.
셋째, 주께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신다.
이 강림은 눈에 보이는(계 1:7), 귀에 들리는(살전 4:16), 장엄한(살후 1:7) 강림이요, 심판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마 25:31~46) 오시는 강림이다.
넷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
주님이 재림 하실 때 하늘에 있는 영혼들(성도들)을 데리고 오신다(살전 4:14). 예수님은 하늘을 떠나면서 소리를 발하시고, 이때 하늘을 떠나 예수와 같이 내려오던 영혼들이 그들의 육체와 눈 깜짝할 사이에 신속히 재연합 한다.
다섯째, 우리 살아남은 자는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간다.
그 때에 성도의 변화는 “홀연히”이루어질 것이고 그 몸은 육체가 아닌 영체이다. 죽은 자가 먼저 산자는 나중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선후를 말하는 것이고 실제적으로는 동시에 발생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는데 큰 광풍으로 물결이 배에 부딪혀 물이 배에 들어와 가득하매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를 깨우며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 하시나이까”고 하였다. 이때에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고 하였다(막4:35~41). 주님의 말씀 즉,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니 바람이 멈추고 바다가 잔잔하여졌다. 이 두 사건은 동시에 이루어졌다(막 4:35~39).
여섯째,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된다.
여기 “영접하게”로 번역된 헬라어는 “만나게”(to meet)란 뜻이다. 그들이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나기에 적합한 곳은 땅 위의 어느 지점보다 높은 공중이다. 그를 만날 자들은 땅 위의 어떤 한 지역 사람들만이 아니다. 리델보스(H.N.Ridderbos)는 이 사건이 “공중에 머물거나 하늘로 되돌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의 지상 내림에 따라 함께 있으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박형룡은 이 본문의 첫째 치중점은 그리스도를 영접함에 있고 그 영접의 처소에 있지 않다고 하였다. 공중에 치중하여 거기서 내려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했다. 이 본문의 둘째 치중은 신체의 변화, 즉 부활체와 같이 썩지 않을, 영광스러운, 능력 있는 신령한 몸으로 되는데 있다(고전 15:42~44). 그러한데 휴거의 시기에 치중하여 대환난 전에 휴거된다고 상상하는 것은 공연한 일이라고 했다.
일곱째,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두 그룹의 무리들이 연합하여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이 가르치고 있지 않은 것은 공중에서 이러한 만남 후에 주님께서 그의 방향을 바꾸사 그와 함께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심을 받은 자들과 변화받은 교회의 구성원들을 데리고 하늘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구절은 이런 말을 결코 한 마디도 하고 있지 않다.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만난 후에 그와 함께 하늘에서 7년 동안 함께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단순한 추론에 불과하다.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된다”는 것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헤어짐이 없다는 말이다. 주님과 같이 공중에도, 주님과 같이 지상에도, 주님과 같이 천상에도 항상 같이 한다는 것이다.
(9) 고전 15:51-52절의 해석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위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있을 성도의 변화에 대한 말씀이다. 위의 말씀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기로 한다.
첫째, 바울은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말한다.
바울이 “비밀”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그것은 그가 이제까지 밝혀지지 않은 새로운 어떤 진리를 말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새로운 그 비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산 자의 변화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지금까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말했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깨달은 것을 밝히고 있는데 주님 재림시에 산 자의 변화인 것이다.
둘째, 마지막 나팔이 불게 될 때에 죽은 성도의 부활과 산 성도의 변화가 있다고 말한다.
여기의 마지막 나팔은 살전 4: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과 마 24:31(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과 계 10:7(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의 나팔은 같은 것이다. 바울은 본문에서 휴거의 시기를 분명히 밝혔다. 그것은 “마지막” 나팔이 불 때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재림시 크리스천들 중에 죽음을 맛보지 않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육체적인 죽음을 겪지 않은 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것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이 비밀을 안 것이다.
넷째, 주님 재림시 모든 믿는 자들이 육체적인 죽음을 모면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이 계시의 수혜자로 고린도교회를 택하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약에 기록된 세상의 모든 교회들 가운데서 고린도교회가 가장 세속적이었기 때문이다. 휴거의 기준은 우리의 구원의 기준과 똑 같다. 믿는 자는 다 휴거된다. “우리가 다 변화하리라”고 말했다.
다섯째, 모든 크리스천들이 변화될 것이다.
바울이 이 장에서(고전15장) 부활된 몸에 관해 가르치고 있는데 변화의 성도도 죽음을 겪지 않는 점만 제외하고는 부활한 성도와 똑 같다. 즉,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몸으로, 욕된 몸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약한 몸이 강한 몸으로,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다(고전15:42-44).
여섯째, 휴거는 순간적이다.
헬라어로 원자를 아트모스(atmos)라고 하는데 그것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말하면 1시간을 나누면 60분이다. 1분을 나누면 60초이다. 또 똑닥 하는 1초를 나누어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휴거는 너무 빨리 그리고 순식간에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그 시간을 사람들이 도저히 나눌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결 론
지금까지 세대주의 역사와 특징 그리고 환난전 휴거설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그리고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들이 믿는 환난기 후 휴거설의 타당성을 논했다. 본인이 세대주의 휴거론에 대하여 비판을 하였으나 실은 세대주의를 비판할 만한 학식이 있는 자가 아니다. 그러나 세대주의자들의 환난전 휴거설은 분명히 비성경적이다. 그리고 주님의 이중 재림도 용납할 수 없다. 그리고 세대주의자들이 요한계시록을 유대인에게만 국한시키는데 그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본인은 계시록에 대한 주석 및 강해집이 40여권 있다. 그런데 슬프게도 대부분 책들이 세대주의 입장에서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말에 대한 책들도 거의 다 세대주의 입장에서 쓰여졌다는 것이다. 앞으로 개혁주의 입장에서 많은 책들이 쓰여지기를 원하는 바이다.
<기사출처: 현대종교>
☞관련기사: < 환난 ․ 진노 ․ 휴거 >
알이랑 코리아 제사장 나라
유석근 목사
cafe.daum.net/ALILANG
'설교. 신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다니엘의 70이레와 메시아 예언 (0) | 2014.05.01 |
---|---|
[스크랩] 환난 ․ 진노 ․ 휴거 (0) | 2014.05.01 |
[스크랩] 아시아 일곱 교회 (0) | 2014.05.01 |
[스크랩] 요한계시록,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0) | 2014.05.01 |
[스크랩] 마가복음16강-두 여자 이야기*구미정 교수 (0) | 2014.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