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3권 14~16장
14장 요한계시록: 서론
1. 요한계시록 연구의 주의사항
요한계시록이 저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책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피해버리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없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예 읽어보지도 않는다. 그 책에 대한 터무니 없는 해설들과 과도하게 몰두하는 행위를 비웃는다.
요한계시록을 대할 때는 올바른 정신을 갖는 일에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배우기 위해 열린 이성과 정신과 마음으로 함께 진리를 상고하고자 한다. 많은 명망 높은 사람이 요한계시록을 다루는 데 실패했다. 마르틴 루터같은 위대한 사람도 요한계시록을 쓸모 없다고 말하는 어리석고 분별 없는 행동을 저질렀다.
2. 요한계시록의 세 가지 해석법
1) 과거주의적 견해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모든 것이 과거에 사실상 4세기 초의 기독교 시대에 이미 일어났다는 가르침이다. 먼저는 유대인들로부터, 나중에는 이교의 로마 제국으로부터 겪어야 할 일에 대한 예언이라고 말한다. 로마 제국이 어떻게 기독교화되는 영광스러운 시대로 끝맺음했는지 보여 줌으로써 우리를 격려할 뿐이다.
이 견해는 1614년 경 알카자르라고 하는 예수회 사제가 최초로 제안했다. 개신교의 선구자들은 예외 없이 교황제가 분명 적그리스도며,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짐승이고, 다니엘서 7장의 뿔이라고 가르쳤다. 이에 대해 로마카톨릭은 주의를 분산시키고자, 요한계시록 내용 전체가 교황제나 로마가톨릭 교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단지 기독교 시대의 첫 세 세기를 다루고 있을 뿐이라고 한 것이다.
2) 미래주의적 견해
예수회 사제인 리베라가 1603년 경 제안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으로 교황제 및 로마교회를 공격하는 것을 막고 그 내용을 미래와 연결시키려 한 것이다. 여기에 묘사된 사건들은 교회가 세상에서 옮겨진 후에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교황제와 아무 상관이 없다.
이 견해는 1830년대에 이르러 유명해졌다. 다비의 예언 집회 이후 대중화되었으며, 최근에는 스코필드 성경 주석에 의해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미래주의자들은 일곱 교회는 교회의 역사이며 4장 이후는 일흔 번째 이레에 일어날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들은 교회의 역사에서 일곱 개의 연속적인 기간 혹은 시대에 대한 예언들이다. 오늘날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에 해당하며 사데 교회는 아마도 종교개혁 시기일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요한계시록의 예언적 본문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미래주의적 견해와 사전휴거설
두 개의 주요 학파가 있다.
먼저, 성도들이 사전에 휴거한다고 믿는 사람들. 2장과 3장이 기독교 교회사의 연속되는 기간들을 나타내며, 교회시대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참담한 상황으로 끝난다고 말한다. 이어서 3장 마지막과 4장 시작 사이에 교회는 휴거된다고 한다. 그 순간부터 이 책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교회나 그리스도인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4장 이후부터 요한계시록은 소위 환난당하는 성도인 다시 모인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된다.
성도들의 사전휴거를 믿지 않는 미래주의자들. 이들은 4장 이후의 모든 사건이 전적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는 말에는 동의했지만, 교회와 신자들이 환난과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일들을 겪어야 한다고 믿었다.
미래주의적 견해의 근거
요한계시록 1:19와 4:1. 그들은 이 이론이 다니엘서 9장과 살후 2장에 대한 그들의 견해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고 말한다.
3) 역사주의적 견해
요한계시록을 과거나 미래에 국한시키지 않고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대한 예언이라고 가르친다. 몇 가지로 세분화된다.
① 교회역사적 견해- 루터와 종교 개혁가들의 견해. 요한계시록은 교회의 상세한 역사가 아니라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교회사의 단계들에 대한 일종의 개략이다.
② 연속적 역사적 견해- 더 대중적인 분파. 중단없는 역사책이다. 교회의 상세한 역사에 대한 예언이며, 여러 환상들은 서로 중복되어 있지 않다. 6장의 여섯 개의 인, 8장의 일곱째 인, 8장부터 11장까지 일곱 나팔, 16장의 일곱 대접의 사건이 연대기적이며 역사적으로 일어난다. 우리는 지금 여섯째 대접의 기간에 살고 있음이 틀림 없다. 그들은 여섯 인과 여섯 나팔에서 예언된 모든 것이 이미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 모든 일들을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과 동일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수 세기에 결친 교회의 역사를 죽 훑어 나간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심판이 일어나 모든 것의 종말이 올 주님의 문턱에 서 있다고 한다. 근래에 많은 인기를 얻고 있으며,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현재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에 영향받은 사람들이 이 관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③ 영적 역사주의적 견해- 요한계시록이 개략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철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요한계시록은 어떤 상세한 연속적 역사적 과정을 가르치기 위한 책이 아니다. 개혁주의자들이 가르쳤던 것처럼 교회사를 요약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초림과 재림 사이에 교회의 삶과 역사를 지배하는 원리들에 대한 설명이다. 요한계시록의 진정한 기능은 교회가 이 땅에서 견뎌내야 하는 원리와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15장 과거주의적 견해와 미래주의적 견해
1. 요한계시록의 해석법을 평가해 보아야 하는 이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시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것들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켜 우리와 대결하고 있는 원수, 이미 싸우고 있는 싸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일들과 대적하기 위해 이 주제를 연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은혜 가운데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 일들로부터 최대한의 은혜를 얻는 일에 관심이 있다.
2. 과거주의적 견해
이 책이 마귀와 그의 모든 권세와 그가 사용하는 용과 짐승의 최종적인 멸망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이 초기의 교회가 직면한 사건들과 로마 제국이 공식적으로 기독교화 되었을 때 끝나게 될 일들만을 다루고 있다는 말은 분명 옳지 않다. 예수회 사제가 개신교의 교황제의 공격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3. 미래주의적 견해
그들은 계 1:19의 “네 본 것”은 1장에 기록된 환상을 가리키고, “이제 있는 일”은 2장과 3장에 나와 있고, 이것은 교회 시대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연속적 역사이고, “장차 될 일”은 교회 시대라는 엄청난 기간이 지난 후 일어날 사건들이다. 4:1도 논증의 근거.
1) 미래주의적 견해에 대한 일반적 반론
*요한과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위로도 주지 못한다
하지만 그 책은 분명히 그 글의 수신자들을 위해 씌어졌다.
*미래주의적 견해는 예언의 일반적 기능과 목적에 반대된다
예언의 목적은 그것이 성취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것이다. 미래주의적 견해는 믿음을 강화시키는 예언의 임무를 완전히 부인하는 듯하다.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데려감을 당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인이 이로부터 무슨 도움을 받겠는가?
*성경의 유추, 성경의 질서와 모순된다
계 13장의 첫 번째 짐승이 단 7장의 네 번째 짐승과 동일한 존재인데, 이 견해는 네 번째 짐승이 로마 제국이라고 한다. 로마 제국이 복원될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납득할 수 없다. 또 다니엘서에 나오는 짐승들 및 짐승들이 대표하는 나라들은 생겨나고 발전하고 기능하다 사라지는 데에는 상당히 오랜 세월이 걸린다. 하지만 미래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요 13장에 묘사된 짐승들은 약 칠 년 혹은 심지어 그것도 안 되는 기간에 생겨나고 그 모든 일을 해야 한다.
*미래주의적 견해는 요한계시록의 단일성을 무너뜨린다
요한계시록을 “내 본 것”, “이제 있는 일”, “장차 될 일”을 기록한 세 권의 책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그 책의 단일성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과 세 번째 부분 사이에는 거의 이천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적 간격이 있다. 이는 부자연스럽다.
*요한계시록의 단일성은 다음과 같이 증명할 수 있다.
1장에 나오는 환상은 2장과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들과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다. 각 편지에는 주님에 대한 묘사가 나와 있다. 그 각각의 묘사를 1장의 환상에서 차용하여 왔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그 동일한 용어들이 19장의 세 구절에서도 사용된다는 점이다. 12절의 “그 눈은 불꽃 같고”는 1:14절에서 따온 것이며, 15절의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와 21절의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는 1:16을 언급한 것이다.
*미래주의적 견해는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의 일로 간주한다
그들은 하나님나라가 아직 임하지 않았으며 지금은 교회시대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미 나라가 되었으며, 그 나라는 이미 임했다. 계 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9절의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교회는 그 나라의 일부이다. 우리는 이미 그 나라 안에 있다. 하나님나라는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지금도 오고 있다. 장차 눈에 보이게, 외형적으로 나타날 것이지만 이미 여기에 있다. 하나님나라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곳이며, 그리스도는 그의 모든 백성의 마음 속에서 다스리신다.
2) 미래주의적 견해에 대한 구체적 반론
*요한은 이천 년 후에 일어날 일이 아닌 속히 될 일을 기술했다
이 책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세 번째 구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
이 말이 요한 시대의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요한은 덧 붙인다.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을 세 단계로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책 내용의 전체를 말한다. 환상을 보기 전에 이 지시가 주어졌다는 사실은 이것이 환상과 교회를 향한 메시지와 기타 내용을 포함하는 요한계시록 전체의 일반적인 서론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미래주의적 견해는 2장과 3장의 설명에서 스스로 모순을 일으킨다
2장과 3장의 견해는 어느 구절도 일곱 교회를 향한 편지들이 점진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장차는 엄청난 시간의 간격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한이 들은 말은 분명 “이 일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는 것이었다. 잠시 뒤에 일어날 일이라는 말이다.
*12장은 미래가 아닌 성육신 사건을 묘사한다
12장은 과거 역사에 속해 있다.
*요한계시록을 인봉하지 말라는 명령은 이 책의 사건이 속히 일어날 것임을 보여 준다
마지막 장인 22장에는 대단히 결정적인 표현들이 있다. 6절과 10절에서 극히 중요한 진술을 발견하게 된다.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1:1과 같은 말), “이 두루마기의 예언들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다니엘이 들은 말과 대조해 보라.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12:4). 그 일들이 5세기가 지난 후에야 일어났다.
3) 미래주의적 견해를 거부하면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를 준다.
이 위대한 책은 시작할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끝난다. 이 책에 있는 일들은 속히 될 일이며, 가까이 있으며, 문턱에 있으며, 이제 막 일어나려 한다. 1장의 서론에서 그것을 말해주며 마지막 22장의 요약에서도 같은 내용을 반복한다. 요한계시록은 하나의 책이며, 완전한 단일체이다. 요한계시록 전체는 요한과 동시대의 사람들을 위해 기록되었으며, 그들에게 적절한 것이었다. 또한 이 책은 그 이후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록되었으며, 그들에게 적절한 것이었다. 교회사가 이를 확실히 증명한다.
16장 영적 역사주의적 견해
1. 교회 역사주의적 견해
일종의 교회사 개요에 불과하다고 한다. 종교개혁가들 대부분의 입장이다. 저는 이 견해를 받아 들일 수가 없다. 지나치게 간략한 설명이며, 연속적 역사주의적 견해가 가지고 있는 약점 중 일부를 이 견해 역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 연속적 역사주의적 견해
이 견해는 이 책에 기록된 요한에게 주어진 환상들이 실제로 일어날 일들을 상징한다고 가르친다. 인, 나팔, 대접들은 연대기적으로 꼬리를 물고 일어나 결국 종말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사건들을 나타낸다. 현재 우리는 계 16장에 묘사된 여섯째 대접의 시기에 있다고 한다.
반론- 저로서는 이 견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12장만으로도 이 견해가 옳을 수 없음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10장과 11장은 최후의 심판과 만물의 끝을 묘사한다. 12장은 성육신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연속적 역사주의적 견해가 옳다면 다시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 견해의 또 한 가지 결함은, 이 견해를 위해서는 수 세기에 걸친 역사를 상세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여 전문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대상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으며, 수 세기 동안 이 책을 통해 유익을 얻었던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위대한 역사가나 전문가가 아니었다.
이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그 상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끝없이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모든 노력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이 견해는 대단히 위험한 곳으로 가는 문을 열어 놓는다-
성경의 특정한 진술들을 특정한 사실들에 대응시키는 것이 혼란을 일으킬 뿐 아니라 계시록 자체의 명예를 떨어뜨린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계시록 읽기를 그만두는 이유는 이런 우스꽝스러운 해설들 때문이었음을 점점 더 확신하고 있다. 사람들은 수 세기에 걸쳐 이런 일을 해 왔으며 언제나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특정한 사건들이 나폴레옹이라 했고, 20세기에는 그것이 히틀러를 의미한다고 단연코 확신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해석법은 어떤 것도 참된 해석이 될 수 없다.
이 책의 가르침들은 특정한 사람이나 사건에 결부시키려 하는 순간, 영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심각한 위험에 빠진다. 이런 견해들은 대부분 영적이기 보다 정치적인 것처럼 보인다. 때와 시기, 특정한 사건들과 정치적 사건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이 책의 내용보다는 이런 것들을 더 강조하게 된다. 성경으로 <타임>지를 해석하고 성경뿐 아니라 타임지도 전하면 안 된다. 요한계시록은 영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적인 책이다.
3. 영적 역사주의적 견해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우리 주님이시자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겪는 삶과 싸움과 최후의 승리에 대한 영적 원리를 제시해 주는 책이라고 가르치는 견해이다. 정확한 역사적 세부 사항들이 아니라 큰 원리들을 보여 준다. 이 원리들은 초대 교회 시절에 적용되었고, 지금도 적용되며, 마지막 최후의 심판에 이를 때가지 유효할 것이다.
1) 요한계시록은 교회를 향해 기록되었다
이 책은 요한이 받은 계시로부터 출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계1:1-
그것은 위대한 주제이다. 이 책의 도처에서 그것을 보게 된다.
교회를 향한 기록이고, 교회를 돕고, 위로하고, 자극하고, 세우기 위해 기록되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3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절대 잊지 말라!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엄청난 도덕적 권면이 여기에 있다.
2) 요한계시록은 계시의 책이다
묵시, 곧 드러내는 것이다. 그 책 안에서 휘장이 벗겨지고, 우리는 특정한 일들에 대해 통찰과 이해를 갖게 된다. 이 사실을 꼭 강조하고 싶다. 지금까지의 해석들은 정반대 결과를 가져오고 너무 큰 혼란에 빠뜨린다. 초대교회는 핍박을 받고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은 당혹해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장차 일어날 일들에 대해 그들의 눈을 열어 주기 위해 특별히 이 책이 주어진 것이다.
3) 요한계시록은 상징과 표징을 사용하여 진리를 드러낸다
명확하고 직접적인 의미가 표현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계시이지만 동시에 부분적으로 감추어진 계시이다.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보다 “지시하신(signied)”이 원어에 가깝다. 지시하다(signify)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여기 사용된 헬라어 단어가 표징(sign) 혹은 상징(symbol)을 의미하는 헬라어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계시록의 가장 첫 부분에 이 계시가 표징들을 통해 주어진다고 진술되어 있다. “하늘에---다른 이적(sign)을 보매”(계15;1)와 같은 표현을 책 전체에서 만나게 된다. 요한은 끊임없이 표징들을 언급한다. 계시록의 해석에 있어서 이것은 분명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계시록은 촛대로 시작하여 인과 나팔과 대접과 짐승 등을 언급한다. 진리가 전달되지만, 시각적 방법을 통해 전달된다. 또한 상징적 숫자들을 사용한다. 숫자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일곱의 숫자는 54번 사용된다. “한 때 두 때 반 때”, 삼 년 반, 마흔두 달, 열둘에 열둘을 곱한 수인 일백사십 사, 열, 열의 세제곱인 천 등의 숫자들도 상징이라는 수단을 통해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 숫자들은 분명 글자 그대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잊어 버리고 숫자들, 예를 들어 일천 혹은 “그것은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이니라”(계13:18) 등이 정확한 수를 뜻한다고 말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계시록 전체를 읽어 보면, 어떤 지점에서는 그 숫자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구원받은 사람이 144,000명만 있지는 않다. 그것은 100의 세 제곱인 일천과 마찬가지로 12를 곱한 완전수이다. 완전함의 숫자도 있고 칠 년의 절반인 삼 년 반처럼 부분적인 특성의 숫자들도 있다. 이것은 예언적 본문들이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언제나 사용하는 방법이다. 기계적이고 문자적인 정확성이 아니라 상징적 방법을 사용해 정확한 진리를 전달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상세하고 정확한 지식이 아니라 원리들이다.
우리의 복된 주님이시자 구세주께서 비유를 사용하실 때 하신 것과 똑같은 일을 요한계시록이 하고 있다고 말씀 드리고 싶다. 비유는 진리를 계시하지만 동시에 감추기도 한다. 비유는 진리를 직접적으로 말해 주지만 외인에게는 그 의미가 분명치 않다. 그림이나 숫자, 표징 등 상징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비유를 읽을 때 모든 세부 사항을 다 강조해서는 안 된다. 탕자의 비유에서 살찐 송아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는 따위는 어리석고도 얼빠진 입장에 도달하는 흔한 예이다.
이제 주님이 요한계시록에서 진리를 밝히시되 특별한 방법을 선택하셨다는 이 위대한 원리를 붙잡도록 하자. 요한은 로마 제국에게 고통을 받고 있는 독자들을 위해 주제를 원리적으로 다루어야 했으며, 이를 위해 상징을 사용했다. 진리는 이 책 안에 원리의 형태로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특정한 사살들에 적용할 수 있다. 그 책이 특정한 사실들을 다루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하지만 교회에 반대하고 우리 복되신 주님께 대적하는 세력들에게는 공통의 원리가 있다.
4) 요한계시록은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에게 교훈을 주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단순히 우리를 즐겁게 하고 호기심과 흥밋거리를 제공하고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관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책이 아니다.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거예요. 현대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여기서 발견할 수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한 책이 아니다. “누가 적그리스도이다. 그 얘기 들어봤어요? 정말 대단해요”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수 세기에 걸쳐 그런 일들을 해 왔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 그들을 위로하고, 위안하고, 교훈을 주고, 권면하고, 지지하기 위해 씌어졌다. 그 대상은 초대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그 이후 이 책을 읽는 모든 그리스도인이다. 이 책은 무서운 박해의 시기를 경험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강건하게 하고 지지하며 버티게 하는 힘이 되어 왔다. 종교개혁자들과 스코틀랜드의서약파와 청교도들 등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읽어 보라. 그들이 이 책에서 자기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의 원리를 발견했기 때문에 전진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4. 요한계시록의 개요
인위적인 구분이 아니라 자연적인 구분이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1) 1-3장 교회 가운데 나타나신 그리스도
이 세 장이 결합하여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가운데 계신 것을 본다. 교회들 가운데 계신다고 말할 수도 있다. 교회는 교회들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먼저 교회를 상징한다고 하는 촛대들 사이에 주님이 계신 위대한 환상이 나온다.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1:20). 일곱 교회가 일곱 개의 특정한 교회를 의미한다고 생각할 위험이 있다. 숫자들은 상징적인 것을 기억하라. 일곱은 완전수이다. 일곱 교회는 전체로서의 교회를 나타낸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또한 이 첫째 부분이 기독교시대의 전체 역사를 망라하는 듯이 보인다는 점에도 주목하라.
1:5에는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와 죽음과 부활로 시작된다. 하지만 이어서 7절을 본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기독교시대의 시작은 우리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다. 기독교시대의 끝은 마지막 심판이다. 그뿐 아니라 여기에는 구속받은 사람들에 대한 가르침과 멸망한 사람들에 대한 가르침이 나온다.
2) 4-7장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이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
여기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는 것에 주목하라. 4장과 5장에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운 묘사가 나온다. 4장에는 하늘에서의 위대한 장면이 나오며, 5장에는 하늘이나 땅에 능히 책의 인을 뗄만큼 위대한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스스로 놀라는 모습이 나온다. 그 때 천사가 선포한다.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5절). 두 번째 부분에서도 그리스도는 중심에 계신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십자가에 달리시고 살아나신 그분을 바라보게 된다.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은 당한 것 같더라”(6절). 또한 그분은 다시 살아나신다. 승리하셨다. 이번에도 교회를 위한 메시지를 가지고 계신다. 주님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분만이 역사의 인을 뗄 수가 있다. 그분이 역사의 인을 떼고 역사를 펼치시는 것을 본다.
6장에서 우리는 곧바로 시대의 종말과 최후 심판으로 연결되는 역사임을 알게 된다.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6:12-17).
시대의 종말은 7장 3-17절에서도 나온다. 여기에는 5장에서 이미 살펴본 구속받은 자들의 놀라운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에서 나와 그들의 옷을 씼었다.
두 번째 부분이 본질적으로 첫 번째 부분의 정확한 반복임을 알 수 있지 않는가?
3) 8-11장
8장 1절에는 반 시간이 흐른 후 하늘에서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8장 전반부에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간구와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놀라운 장면이 펼쳐진다. 그 결과 특별한 일들이 벌어지고 우리는 일곱 나팔의 엄청난 환상을 만나게 된다. 나팔은 언제나 경고이며, 그 일곱 나팔은 심판의 경고이다.
8장의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10장 7절과 11장 15-19절에서 다시 한번 최후 심판의 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 10장과 11장에서는 교회에 대한 묘사를 발견할 수 있다. 똑같은 일들을 다루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주님과 그의 교회, 세상에서 교회에 일어날 일들과 최후의 심판, 그리고 구속 받은 자와 멸망한 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4) 12-14장
여기에서 우리는 “아들”(12:5)이라고 표현된 우리 주님의 탄생에 대한 놀라운 묘사와 함께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주님의 첫 모습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님이 당하신 반대,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어떻게 하늘로 올리우시고 기독교 시대가 시작했는지 보여준다. 이어서 마귀와 마귀가 권세를 준 짐승, 바벨론 등 교회를 대적하는 모든 원수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다시 한번 이야기는 마지막 심판으로 곧장 진행한다. 14장 8절에는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다시 한 번 같은 일을 바라보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중심에 계시고, 그의 백성, 그의 자손과 대적자, 최후의 심판, 구속받은 자들과 멸망한 자들이 등장한다.
5) 15-16장
이 부분 역시 하늘에서 시작된다. 다시 한 번 어린 양과 그의 백성이 나온다. 16장에서는 심판의 대접, 쏟아부어진 진노의 대접과 아마겟돈에서의 최후의 큰 전쟁에 대한 놀라운 묘사를 만나게 된다. 다시 한 번 최후의 심판에 도달하여 구속받은 자들과 최종적으로 멸망한 자들 사이에 동일한 구분이 지어지는 것을 본다.
6) 17-19장
바벨론, 두 짐승과 그들의 모든 추종자의 최종 멸망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반면에 구속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신부로 나타난다. 성대한 혼인잔치가 열린다. 다시 한 번 최후의 심판에 도달한다. 19장에서는 주님이 백마를 타고 입에서는 검이 나오는 모습으로 영광 중에 나타나신다. 그러므로 여섯 째 부분도 다시 한 번 본질적으로 동일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7) 20-22장
여기서도 같은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마귀의 심판과 파멸,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교회의 최종적 승리, 영원한 영광의 도래,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성이 이 부분만의 특징이다. 모든 일이 끝나고 완성된다 어린 양이 그 성 가운데 계시고 그의 빛, 그 얼굴의 광채만으로 충분하여 해나 달은 쓸데없어진다.
8) 결론-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와 마귀 및 그 권세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을 말해 주는 책.
세부 사항들에 과도하게 집중하지 않고 전반적인 인상에 마음을 연 채 요한계시록을 읽으면 이상의 내용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의 여러 부분들에는 반복의 원리, 즉 일종의 대구법이 존재한다는 것과, 책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공통의 형상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다. 그러므로 제가 말씀드린 방법을 따라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어 보시기를 부탁 드린다. 이론들과 세부 사항들은 잊어 버리고 전체적인 인상이 생겨나도록 노력해 보라. 그렇게 하면 여러분도 저처럼 그 책이 다른 어떤 의도로 기록되었든 간에, 분명 주 예수 그리스도와 마귀 및 그의 권세 사이에 벌어지는 충돌에 대해 말해 주려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시라라 생각한다. 그 싸움은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들어오실 때 시작했다. 헤롯으로부터 시작된 그 싸움은 그 이후 계속 되었으며, 주님이 마지막 승리를 거두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것은 확실하고도 확정된 승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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