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죄가 공격할 때는 ‘보혈의 능력’을 계속해서 요청하라.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모든 생각과 행위를 말한다. 이 죄의 근거는 인간의 조상인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배반하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사람에게 들어왔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다. 아담의 배반사건으로 하나님의 벌이 처해졌고 인간에게 죽음이 숙명이 되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육체를 지니고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는 죄를 향하고 싶은 죄성(罪性)을 지닌 채 살아가야 한다. 죄성이란 우리의 몸이 원하는 탐욕과 방탕을 비롯한 교만, 미움, 질시, 분열 등의 악한 속성들을 말한다. 죄성이 몸에 남아있는 한 탐욕과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소원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미움과 시기, 속임, 분열로 죄악을 저지르게 된다. 이 같은 죄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들어가 있다. 이 죄성 때문에 불행한 삶에 빠지게 된다. 모든 중독은 쾌락을 탐닉한 결과이다. 알코올중독을 비롯해서 포로노중독, 게임중독, 쇼핑중독 등이 그렇다. 짜릿한 쾌감을 즐기다보면 어느새 중독의 포로가 되어 인생을 망치게 된다. 이러한 증상은 쾌락을 쫓는 죄성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이는 교만, 미움, 질투 등의 악한 마음이 분노, 싸움, 분열의 증상으로 나타나서 이혼이나 복수, 살인 등의 결말로 치닫게 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악한 죄성이 있다. 탐욕이다. 탐욕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러나며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모든 세상 사람들을 자신의 포로로 만든다. 부자가 되기 위해 평생 노동에 시달리다가 족음이 임박해서도 포기를 모른다. 부자가 된 사람들도 이 돈들을 불리고 지키기 위해 남은 시간과 정력을 소비한다. 그보다 더욱 무서운 행위는 수단방법과 불법과 불의를 마다하지 않고 돈을 거머쥐려는 태도에 있다. 이러한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가정을 파괴하고 자신의 생명과 영혼을 팔아넘긴다. 사람에게 닥치는 모든 불행의 원인은 아담에서부터 들어온 이러한 죄성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갖가지 죄성은 기도를 방해한다. 술이 조금만 들어가도 기도에 집중할 수 없는데 술에 중독된 사람이 어떻게 기도에 몰입할 수 있겠는가? 포르노나 게임에 중독된 사람은 눈만 감으면 이러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자욱하다. 부부싸움이나 분노를 표출한 사람 역시 기도에 집중할 수 없다. 죄를 범한 사람도 죄책감에 시달려 기도를 하지 못한다. 이렇게 현상은 여러 가지이지만 기도에 집중할 수 없는 현상은 동일하다. 이는 기도습관을 들이려는 초보자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이 아니다. 오랫동안 규칙적인 기도습관을 들였던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예를 들어 우연히 컴퓨터 메일에 들어온 포르노를 훔쳐보았다면 그 강렬한 생각이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부부싸움을 하였다면 격앙된 감정이 내려앉은 이후에도 머릿속이 산만해지고 죄책감에 시달려 기도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에 기도에 집중하는 방법은 먼저 가슴 깊이 담은 회개를 하는 것이다. 형식적인 입술을 움직이지 말고 마음이 후련해질 때까지 반복해서 회개한다. 그리고 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능력을 간절하게 외치며 기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의 죄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과거의 죄는 이미 용서함을 받았을지 몰라도 사람 안에 들어있는 죄성은 언제나 죄를 촉발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연약한 육신 때문에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까지도 철저히 회개하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죄가 공격할 때 대단한 능력을 발휘한다. 내 안에 있는 여러 죄성의 공격으로 기도에 집중이 안 되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마음이 산만할 때는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에 기대어서 기도를 해야 한다. 이럴 때는 다른 기도를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만이 하나님과 다시 관계가 회복되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42. 기도에 집중이 되지 않을 때는 생각을 지켜달라고 기도하라. 죄성이 기도를 공격할 때는 기도가 집중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기도자체가 하기 싫어진다. 분노가 폭발할 뒤에는 감정이 쉬 사그라지지 않으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범했다면 죄책감으로 마음이 어두워져 있는 상태일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는 기도자체가 하기 싫어진다. 그래서 기도를 쉬다가 아예 기도행위를 놓아버리는 이들도 흔하다. 그래서 기도결심이 오래 유지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오랫동안 기도습관을 유지한 사람들도 이러한 상태에 빠지면 기도가 괴로운 정신노동이 된다. 기도하려고 앉았어도 집중이 되지 않아 시간만 허비하다가 일어나곤 한다. 특히 여러 문제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면 기도하려해도 집중이 되지 않으며, 기도하는 시간이 걱정과 염려에 몰두하게 되니 더욱 아이러니하다. 필자는 기도에 집중되지 않을 때 가장 많이 하는 기도가 생각과 마음을 지켜달라는 요청을 많이 하게 된다. 이는 빌립보서에 있는 바울의 권면이기도하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요청하는 기도를 할 때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성경구절을 붙들고 기도하는 게 효과적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자신이 성경에 약속하신 말씀들은 온전하게 지키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약속을 말씀을 반복하며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어렵지 않게 받게 된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고 강하게 활동할 때는 기도집중도 쉽게 된다. 그러나 마음이 분열이 되고 산만할 때는 기도가 집중이 되지 않고 잡념이 틈타고 졸게 되는 일이 흔하다. 이러한 경우에는 그냥 기도하기보다 위의 성경말씀을 반복해서 통성으로 기도하기를 권한다.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은 침묵으로 기도할 때보다 기도에 몰입하기 쉽다. 게다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내려오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기도란 자신과의 싸움이다. 오랜 습관으로 기도하는 게 어렵지 않은 사람들도 기도에 집중하는 것은 늘 어려운 싸움이다. 영적인 기도습관이 들었다는 것은 기도에 집중이 되지 않을 때에도 나름대로 몰입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날마다 기도의 싸움을 하는 사람들은 기도가 잘되지 않은 날도 꾸준하게 기도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43. 기도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라. 기도를 좀 하는 사람이라면 기도는 으레 해야 하는 행사로 여기기 일쑤이다. 규칙적으로 새벽기도를 나가는 사람이라면 어쩌다 늦잠을 자서 기도회에 참석을 하지 못하면 하루가 찜찜하다. 매주 교회에서의 기도회에 참석한다면 다른 일을 제쳐놓아야 한다. 이러한 여파는 식사 앞에서 두 손을 모으는 식사기도나 잠자기 전에 침대에서 기도하는 버릇도 비슷한 유형일 게다. 필자는 이러한 기도모습을 폄훼할 생각이 없다. 일정한 때에 규칙적으로 정해 놓고 기도를 하는 것은 좋은 기도습관이다. 예수님과 새벽마다 밤마다 한적한 시간이면 으레껏 감람산에서 기도를 하곤 했다. 예수님 시대의 경건한 유대인들도 하루 3번 정해놓고 기도하곤 했다. 다니엘은 정적들이 보는 앞에서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도하였고 베드로와 고넬료도 규칙적으로 기도했다는 성경의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규칙적으로 습관을 들여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도 치명적인 독이 없는 게 아니다.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칭찬할만하지만 형식적으로 기도하는 습관이 되었다면 허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형식적인 습관으로 기도하게 되었다면 기도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보아야 한다. 우려스런 일이지만, 실상 우리네 교회에서 흔히 보는 일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새벽기도회에 출석하지만 20분을 채 넘기지 못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기도란 하나님과 만나는 영적인 교제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려면 정신을 몰입하여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 그렇기에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유창하게 방언이 나온다 해도 아직 하나님을 만난 것은 아니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기도를 시작하여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시간이 적어도 10분 이상 되어야 한다. 필자는 약 2,30분 하나님을 찾고 찬양하는데 시간을 소비한다. 그런데 기도시간이 20분이 채 되지 않았다면 제대로 하나님을 만났다고 보기 어렵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원하는 기도목록을 요청하는 것으로 기도시간을 채우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기도훈련이 되지 않았든지 아님 성령이 내주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렇게 문제가 심상치 않은 데도 자신의 기도방식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은 기도매너리즘에 빠져있다는 증거이다. 기도매너리즘이란 형식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말하며 기도의 증거나 열매를 얻기보다 기도행위를 단지 자기위안으로만 삼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매너리즘에 빠진 형식적인 기도행위는 아무런 능력도 열매도 없다. 하나님이 듣지 않는 기도는 죽은 열매를 땅에 심는 것과 같다. 아무리 물을 주고 거름을 주더라도 싹이 나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기도해도 기도의 응답도 문제해결도 되지 않았다면 기도시간을 단지 형식적으로 채우지 않았는가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자기만을 만족시키는 형식적인 기도행위는 시간낭비이며 종교적인 크리스천의 모습이다. 44. 주기도문을 묵상하라. 마 6:9~13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 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 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주기도문은 하도 유명해서 더 이상 언급이 필요 없다. 그렇지만 주기도문처럼 형식적으로 쓰이는 성경구절도 별로 없다. 주기도문은 내용보다 예배의 마침을 알리는 의식으로, 지루한 예배가 끝나는 신호로서 즐거운 마음(?)으로 외치고 있다. 그렇지만 주기도문의 중요성을 제대로 깨달은 이들은 드물다. 주기도문은 제자들이 기도요청에 대해 말씀해주신 대목이다. 내용은 크게 두 부문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부문과 이 땅에서 우리가 필요한 내용을 요청하는 부문이다. 이 땅에서 구하는 목록도 우리가 요청하는 내용처럼 성공이나 형통함을 구하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생계비와 평안한 영혼을 위한 요청이다. 사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함축하는 최상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우리의 속내와 다른 이유로 실제적으로 그리 애용되지 않는 듯하다. 우리의 탐욕과 하나님의 뜻의 커다란 차이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세간의 생각이 어떠하든지 간에, 필자는 아침저녁의 규칙적인 기도시간에 주기도문을 빠짐없이 반복하여 묵상하고 있다. 특히 앞 구절의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부르라는 대목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는 대목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 해달라는 대목은 수십 번 반복한다. 오랜 시간동안 이 내용을 무한 반복하여 묵상하면서 기도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수도 없이 받았다. 성령이 충만하게 채워진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반증이기도하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게 해달라는 내용은 정말 중요하다. 우리의 삶이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도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기도도 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살겠다고 말만 하는 것은 가증스러운 일이다. 우리의 모든 능력의 원천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통로로 하기 때문이다. 45. 바울의 기도문을 묵상하라. 골 1:9~12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 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 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 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 를 원하노라 필자는 주기도문을 묵상하고 나서 곧바로 위의 바울의 기도문 묵상에 들어간다. 바울의 기도문은 골로새서뿐 아니라 에베소서에 있는 기도문(엡3:16~19)도 유명하다. 예전에는 두 가지 기도문을 병행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위의 기도문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필자와 같은 사역자에게 꼭 필요한 기도문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첫머리인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달라는 내용은 언제나 마음에 깊이 와 닿는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삶에 적용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지켜야할 본분이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행위이기도 하다. 덧붙여 선한 열매를 맺는 간구와 더불어 기쁨으로 견딤과 오래 참음을 이루는 것도 필자의 마음을 짠하게 해준다. 견딤과 오래 참음은 하나님이 모든 당신의 자녀에게 요구하는 덕목이다. 고통스럽기 짝이 없기에 모두 회피하고 싶겠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우리에게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내용이다. 결국 날마다 기도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마지막으로 영광의 힘을 따라 능력을 달라는 내용은 항상 필자가 간구하는 목록이다. 사역자라면 자신의 지혜나 능력으로 사역을 하는 게 아니라, 성령의 나타나심과 그 능력으로 해야 한다. 성령의 능력이 없다면 허수아비 같은 종일게 분명하다. 필자는 위 기도문의 응답은 적지 않게 받았다. 지혜와 지식의 은사는 물론 인내의 능력도 얻게 되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천국의 소망을 향한 마음을 잃지 않게 된 것이 최고의 수확이다. 필자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고자하는 크리스천이라면 항상 위의 바울의 기도문을 묵상하고 기도해야한다. 덧붙여서, 에베소서의 기도문도 함께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성경의 기도문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이다. 우리의 탐욕이나 방탕이 전혀 없는 모본적인 기도문을 내 기도로 삼는다면 축복받은 자녀임에 틀림없다. |
출처 :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 쉰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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