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학

[스크랩] 축도의 문제의식 제기

수호천사1 2014. 4. 10. 20:37

한성기 교수 /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장

Ⅰ. 문제의식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공예배 가운데 하나의 공통적인 특징은, 예배가 끝날 때는 반드시 목사의 축도로서 마친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목사가 없는 교회의 예배에서는 주기도문으로 예배의 끝을 맺기도 한다. 그러나 목사가 있는 경우는 교파를 초월해서 모든 교회가 축도를 한 후 성가대가 응답송을 하고, 그리고 반주자의 후주로서 예배를 마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이는 기독교 예배의 전통으로서 형식과 내용의 차이는 있으나 이를 시행함에 있어서는 대부분 교회법의 기초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장로교회의 경우, 총회 헌법예배모범 제6장 강도의 제5항에 보면 “강도를 마친 후에는 목사가 기도하며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고 그 다음에는 시나 찬미를 부르고 하나님을 대표하여 축복기도로 폐회함이 옳다(고후 13:14, 히 13:20-21, 유다 24-25, 엡 3:20-21, 살후 3:16-17, 민 6:24-26)”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예배시의 축도는 교회법의 근거 아래 명문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는 또한 오랜 전통 속에서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예배순서의 한 행위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축도에 대해 근래에 들어 많은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데, 특히 축도자의 자격, 축도문의 내용, 축도의 형태 등이 그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즉 축도는 반드시 목사만이 해야 하는가?
축도문의 내용가운데 종결어미를 “있을지어다” 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축원하옵나이다”라고 할 것인가? 축도문의 성경적 근거로서는 고린도 후서 13:13절의 소위 ‘바울의 축도’만을 사용하는데 개혁자들이 사용했던 민수기 6:24-26의 ‘아론의 축도’는 왜 사용하지 않는가? 축도할 때 목사는 두 손을 들어야 옳은가 한 손을 들어야 옳은가? 축도의 대상인 교인은 눈을 감아야 옳은가 떠야 옳은가? 등등에 관한 문제들이다.


이러한 문제 외에도 아직 목사안수를 받지 않고 담임교역자로 시무하고 있는 전도사들은 손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여러 가지 형태의 축도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 이유는 교인들이 축도를 하지 못하는 전도사들이 시무하는 교회를 기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축도문의 내용을 변형시켜 예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 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행위들은 한마디로 말해 축도에 대한 바른 이해와 의미 파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현실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우리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제 본고에서는 축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순서에 의해 그 내용을 몇 가지로 나누어 전개하고자 한다.
첫째로 이상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문제의식을 가지고 축도에 대한 일반적 고찰로서 축도의 어원, 축도와 축복의 개념 파악, 축도의 성격 규정 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는 본 주제의 중심 문제를 풀어 나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될 축도의 성격 규정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둘째로 축도에 대한 형식적 고찰로서 특히 축도문의 종결어미 문제, 즉 “있을지어다”와 “축원하옵나이다”에 대해 각각 그 문제점들을 성경의 본문대조를 통해 성경적, 국문학적 고찰 속에서 그 논리의 타당성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셋째로 축도에 대한 내용적 고찰로서 축도문의 내용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경적 근거 아래서 파악하며 그 이해의 깊이를 더해 갈 것이다.
마지막 결론적 고찰에서는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을 가지고 축도에 대한 바른 이해의 방법을 모색하면서 이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Ⅱ. 축도의 성격
축도가 그 성격에 있어서 기원적((optative)이냐, 아니면 선언적(pronounce)이냐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말하자면 이는 축도가 기도의 한 형태이냐 아니면 강복의 선언이냐 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축도에 대한 바른 이해에 있어서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의미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축도의 종결어미 문제에 있어서 “할지어다”냐 아니면 “축원하옵나이다”냐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축도의 성격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세 가지의 견해가 있다.
첫째로 축도는 성직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사장적 축복 그 자체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견해이다. 즉 구약의 제사장들과 신약의 사도들이 사용했던 축도는 단순히 기도라기보다 하나님이 복내려 주실 것을 선언하는(pronounce) 행위라는 것이다.
둘째로 축도는 축복을 기원한다는 견해이다. 즉 이는 바울의 축도(고후 13:13)내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축도자가 회중과 함께 회중을 대표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함께 해 달라고 기원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셋째로 축도는 그리스도와 계약적 교제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성령이 전하는 영적 축복의 선언이 기도의 형식을 취한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상과 같은 견해들은 나름대로 그 타당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이론의 근거가 빈약함으로 인해 그 주장 또한 확실하지가 못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축도의 형태인 ‘아론의 축도’(민 6:24-26)와 ‘바울의 축도’(고후 13:13)는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를 서로 비교해 보기로 하자.
아론의 축도는 여호와께서 제사를 담당한 아론과 그 아들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할 말로서 준 것이다. 반면에 바울의 축도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인사말이다. 즉 아론의 축도는 순수한 축복의 말이고 바울의 축도는 작별인사의 한 형식이다.


그런데 이 둘을 축도로 인용할 경우 말하는 사람은 목사요 듣는 사람은 예배에 참석한 회중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한 가지 공통점은 아론의 축도든 바울의 축도든 그 내용은 발화자, 즉 말하는 자의 희망과 바람에 대한 피력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어떤 이들은 아론의 축도의 “원한다”의 주격이 “여호와”라고 잘못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 “원한다”의 주격은 분명히 아론(목사)이다. 즉 아론의 축도의 본문 앞에는 “나는”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점에 있어서는 바울의 축도도 마찬가지다. 즉 바울은 말하기를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나는...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론의 축도를 G.N.B에서는 “May the Lord bless you”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바울의 축도에서도 본문의 형식적인 주어인 “The grace of the Lord ...”를 받는 동사로 원문에 없는 ‘be’동사를 써서 기원문의 형태, 즉 현대 영어에서 ‘may’로 시작하는 문장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처럼 명령문이나 기원문의 주어는 생략되는 것이 여러 언어의 일반적 법칙이다. 따라서 축도에 있어서 축도를 지나치게 신성시하여 목사는 주어진 성경 구절을 그대로 옮길 뿐이라고 하면서 기계적 강복 선언설을 주장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강복선언이라고 하면 복을 내려 주신다고 선언한다는 것인데 복을 내리시는 주체는 하나님만이 될 수가 있으며 따라서 그 선언도 그 주체만이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즉 단지 하나님의 복을 비는 주체에 불과한 목사는 선언(pro nouncement)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축도는 하나님의 권한을 대행하는 ‘강복선언’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예배를 마감하면서 목사가 회중들에게 하는 기원적 의미를 지닌 ‘축복의 작별 인사’라고 할 수 있다.

 

축도에 대한 바른 이해(Ⅱ)

한성기 교수 /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장

축도에 대한 바른 이해(Ⅲ)

한성기 교수 /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장

Ⅲ. 축도의 형식
1. ‘있을지어다’의 문제
우리말 개역성경은 ‘바울의 축도’라고 불리는 고후 13:13의 종결어미를 ‘있을지어다’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원문인 헬라어 성경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라고 하는 세 가지의 주어 다음에 “여러분 모두와 함께”로 문장이 종결된다.
즉 원문에는 이 말을 받아 주는 동사가 없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서는 문장의 완결을 짓기 위해 ‘있을지어다’를 첨가하면서 그것이 원문인 헬라어 성경에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작은 글씨로 표시를 했다.
그런데 이 ‘- ㄹ 지어다’를 ‘국어대사전’에서는 설명하기를 “받침 없는 동사의 어간에 붙어서 ‘마땅히 하여야 함’의 뜻을 나타내는 종결어미”라고 하면서 그 예문을 “사람들이 부모님께 효도를 할지어다”라고 하는 예문을 들고 있다. 이처럼 예문에 나타나 있는 바대로 ‘- ㄹ 지어다’ 형태의 종결어미는 2인칭 명령형의 형태를 갖는다. 따라서 이 ‘- ㄹ 지어다’의 종결어미는 축도의 형태로서는 문법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첫째로 축도의 종결어미인 ‘있을지어다’가 형태상으로는 명령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축도의 내용상 문맥대로 보면 명령을 받는 이는 회중이 아니고 ‘은혜’와 ‘사랑’과 ‘교통하심’이 된다. 즉 생물이 아니고 무생물이 명령을 받고 있는 형태가 된다. 그러므로 기원문의 형태인 ‘바울의 축도’의 종결어미로서 ‘있을지어다’는 문법적인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축도의 종결어미인 ‘있을지어다’는 문법적으로 형태상 비존대형이기 때문에 우리말의 관습에 있어서는 그 표현이 바람직하지 못하다. 요컨대 ‘축복의 인사’의 의미를 지닌 축도를 실제적으로 목사가 성도를 향해서 하는 경우 우리말로서는 자연스러운 인사말이 되지 못하다는 것이다.


2. ‘축원 하옵나이다’의 문제
그렇다고 해서 이 ‘바울의 축도’의 종결어미를 ‘축원하옵나이다’라고 하면 얼핏 들어 기도가 되는 것 같으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기도는 삼위일체의 제이위인 성자의 이름으로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바울의 축도’인 고후 13:13은 이와 같은 골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기도는 기도의 대상을 부르는 말로 시작되는데 고후 13:13은 그렇지가 않으며 더욱이 여기에는 성부, 성자, 성령인 3위가 동시에 언급되어 다시금 성자 예수의 이름을 언급할 수도 없게 되어 있다.
첫째로 ‘축원하옵나이다’라고 할 때 이 동사의 가상적인 주어(기원을 나타낼 때는 일반적으로 주어를 쓰지 않는다)는 1인칭이 될 수밖에 없는데 축도 본문의 가상적인(생략된) 동사의 주어는 주기도문 가운데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의 경우와 같이 3인칭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축원하옵나이다’라고 하면 3인칭으로서 복의 주체인 성삼위보다 복을 비는 1인칭으로서 목사가 더 주체적이 되는 결과가 된다.
셋째로 ‘축원하옵나이다’라는 종지법은 축도 본문의 내용으로는 기원을 나타내고 있지만 문장의 형태상으로는 기원문이 아니고 서술문이 되기 때문이다.
넷째로 ‘축원하옵나이다’로 끝맺을 때는 종종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문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이 첨가되기도 하는데, 축도 본문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기도와는 달리 이 말을 첨가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말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여 기도할 때에 요청되는 말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복의 주체이시기 때문에 이 말을 첨가할 수가 없다.
다섯째로 ‘축원하옵나이다’라는 종지법이 헬라어 원문으로나 우리말의 문법상으로는 문제가 없지 않으나 의미상으로는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그 종결어미가 직설법이 되어서 다른 일반적인 기도와 동일시되기 쉬운 결점이 있다.

한성기 교수 /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장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 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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