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학파의 성서해석학
Ⅰ. 들어가며
Ⅱ.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성서 해석
1. 성서 영감설(오리겐을 중심으로)
2. 영적 해석의 도구로서의 알레고리(Allegory)
2.1 우화적 해석의 기원
2.2 우화적 해석의 성서적 근거
2.3 우화적 해석의 발전
2.3.1 필로
2.3.2 오리겐
3. 알레고리적 성서 해석의 알렉산드리아 학파
Ⅲ. 안디옥 학파의 성서해석
1. 유대교의 문자주의
2. 안디옥 학파
2.1 성서 영감설과 계시이해
2.2 역사적 해석(모형론)의 성서적 근거
2.3 역사적 해석의 특징
Ⅳ. 평가
1. 우화적 해석과 역사적 해석에 대한 평가
2. 영적 해석에 대한 고찰
Ⅰ 들어가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성서는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기준이요, 규범을 주는 메시지를 담고있기 때문이다. 성서가 담고있는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성서를 해석해야 한다. 즉, 성서해석의 목적은 성서기자들의 사고과정과 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며, 그 궁극적인 의도는 그 의미를 동시대인들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서의 해석에 있어서 고려되어야 할 것은 성서는 일반 서적과는 달리 영감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즉 성서의 영감론은 성서의 신학적 의미를 인식하도록 요구하는데, 이것은 다른 문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의 계시가 성서 안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초기 기독교 시대에 발생한 두 학파의 서로 다른 해석학적 입장은 상당한 주목을 끈다. 왜냐하면 우화적인 해석으로 대변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역사적, 문법적 해석으로 대변되는 안디옥 학파의 해석학적 입장은 영감에 의해 기록된 성서를 해석함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가진 결과를 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의 해석학을 비교함에 있어서 먼저는 각 학파의 영감에 대한 이해와 각 학파의 특징적인 해석이 나오기 까지의 배경을 살피고 그러한 해석의 도구에 대한 평가를 내려보도록 하자.
Ⅱ.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성서 해석
1. 성서 영감설(오리겐을 중심으로)
오리겐은 신앙의 근본적인 한 부분으로 "성서가 성령의 영감에 의해서 쓰여졌으며, 성서는 기록된 것의 외면에서 드러나는 것 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전수받았다. 오리게은 성서의 영감설을 수용하지만, 인간은 신의 손안에 있는 수동적인 도구로서 이해되는 기계적인 과정으로서 영감의 착상을 반대하였다. 오리겐은 성령의 활동을 로고스로 묘사한 것처럼 영감을 로고스의 활동으로 묘사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영감은 이성적인 과정으로서 여겨질 수 있다. 오리겐의 영감론의 특징은 거룩한 영감의 성격은 어둡게 하기보다는 명백하게 하는 것이고, 인간 의식을 축소시키기 보다는 오리혀 고조시키는 것으로 저자의 본질적인 능력이 강화되어져서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 진실의 매개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말씀이 그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은 사람의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자신을 강제로 사람에게 떠맡기지는 않는다. 그는 응답해야만 하고, 그가 만약 그렇게 하기를 거부한다면 그 목적을 좌절시킬 수도 있다. 이상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오리겐의 영감론은 그 당시의 기계적 영감론과는 다르다. 오리겐의 영감론의 특징은 인간을 활동적이고 의식있는 협력자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리겐은 타티안(Tartian)이 성서를 처음으로 대했을 때, 그는 성서를 '야만적인 작품'이라고 간주했다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람의 눈을 끌지못하는 이 외부적 형식(outward form)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 뿐 아니라 의인화된 언어와 구약성서의 도덕적 부적합성, 서로 다른 복음서의 기록들 사이의 불일치를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이한 기술들이 우리의 전체 신앙을 손상시켰고, 복음서들에 대한 불신용의 가능성에 대해서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겐은 성서에 대해 변증하기를 실제적인 사실의 기록이 언제나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영적인 진실이 재료적인 잘못안에서도 보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기술들의 차이점이 더 풍성한 영적인 의미를 제공할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표면적인 의미가 사람의 눈을 끌지 못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숨겨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감은 성서에 대한 매력적인 표면(exterior)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성서는 사람들이 바라는 형식이나 외모상의 단정함이 없다. 중요한 것은 말씀의 성육신이다. 그들의 영적인 통찰의 부족한 이유로 말씀의 거룩한 본질을 직접적으로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거룩한 말씀이 인간의 형태를 취하였다.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이 일하시는가에 대한 것이다. 말씀은 자신의 계시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적응시킨다. 이것이 성육신과 성서안에서 그가 행동하시는가에 대한 것이다. 명확하게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곳에서 출발하신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말하기 위해서 어린 아이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 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할 수 있는 단계에 맞추시는 것이다. 우리가 성서를 하나님의 인간을 교육하기 위한 과정의 도구로 이해할 때, 성서의 많은 어려움은 의미를 갖기 시작하고 긍정적인 가치를 갖게된다.
오리겐은 하나님의 말씀은 영감에 의해서 기록되었고, 그 영감은 인간의 이성적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다. 성서에 있어서 의인화(신인동형론적)된 표현과 비도덕적인 내용, 복음서 사이의 불일치를 대면할 수 있으나 이것은 단지 외부적 형식(outward)이며, 문제시되는 외부적 형식안에는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것은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에 기록된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시 되는 외부적 형식안에 있는 영적 의미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2. 영적 해석의 도구로서의 알레고리(Allegory)
2.1 우화적 해석의 기원
희랍인들은 {호머(Homer)}와 {헤시오드(Hesiod)}의 두가지 중요한 유산을 가지고 있었다. 희랍인들의 {호머}와 {헤시오드}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헬라의 종교적 전통이 갖고 있는 공상적, 기괴적, 불합리적, 비도덕적 요소들을 철학적 역사적 전통에서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가령 신들(gods)에 관한 이야기, 시적 문헌등은 문자적으로 다룰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호머와 헤시오드의 위치는 너무도 위대하고 인기적이어서 사상가들도 이들만은 무가치한 것으로 말하거나 팽개쳐 버릴 수는 없었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그들의 전통을 변증하고 해석하려는 의도에서부터 나온 해석의 도구가 바로 알레고리(Allegory-우의적 해석)이다.
이 알레고리적 해석은 문자나 명백한 사실아래에 그 구절의 진의가 따로 있다고 믿는 해석이다. 즉, 모든 본성적이고 지상적인 물체나 사건에 대응하는 영적이고 천상적인 유사체가 존재한다는 주장인데 이같은 생각은 가시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또는 현실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등 세상을 이원화하는 플라톤의 사상에서 유래하였다.
종교적 변증학과 우화적 해석 방법이 동일한 역사적 근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있는 일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자기들 독자적으로 이 우화적 해석방법을 고안해 낸 것은 아니다. 우의적 해석이 추구하는 것은 성서에 기록된 이야기나 내용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캐내어 교회의 교리가 성서에 일치한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이로써 그 교회의 교리를 성서적으로 뒷받침하면서 교리와 성서로부터 신앙과 신앙적 삶의 지침을 얻어내는 데있다.
2.2 우화적 해석의 성서적 근거
필로는 모든 지혜의 근원은 성경이라고 항상 생각하였으며 헬라지혜의 원천도 성경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필로는 우화적 해석의 철학적인 구조인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성서적 근거를 창세기 1장으로 보고 있다. 창세기 1장에서 필로는 하나님이 가장 먼저 이데아들과 이 가시 세계에 있는 모든 것들의 모범들, 혹은 원형을 포함하는 비물질적인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한다. 이 가시적인 세계는 불가시적인 세계의 형상이요, 광채이며 복사물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저 세계에 대한 모형이라고 불릴 수 있다고 해석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형상이란 신적인 로고스로 보고있다.
에덴동산에 있던 나무들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나무와는 달리 생명의 나무, 영생, 지식, 이해, 선과 악의 개념의 나무들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필로는 눈이 열려 있는 사람에게 친근한 방법인 비유(알레고리)로 우리의 시선을 돌려야한다보고 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4:24에서 바울이 사용한 비유적 해석에 근거를 두고 있다.
2.3 우화적 해석의 발전
2.3.1 필로
필로는 철학자의 하나님과 희랍적 인간의 세계 동포주의 편에 서서 액면대로의 신인동형동성설(神人同形同性說-anthropomorphism)이나 이스라엘의 배타성을 설명해서 처리할 필요에 의해서 우화적 해석의 필요성을 느낀다. 그러므로 필로에게 있어서, 풍유화는 가시적인 세계에서 더 높은 이데아의 세계로, 모형에서 원형으로 진행시켜 나아가는 것과 동일하다.필로는 성구가 우화적으로 해석되어져야할 경우를 해석자에게 지시한 3규칙이 있는데 먼저는 어떤 진술이 표면적으로 보아 하나님께 하등의 가치도 없는 사실을 언급할 경우 둘째는어떤 진술이 다른 진술과 모순이 되거나 또는 어떤 다른 방법으로 우리에게 문제점을 안겨다 줄 경우 셋째는 기록 자체가 본질상 우화적일 경우일때에는 우화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경우라고 밝히고 있다.
필로는 성서 해석을 문자적 해석과 영적 해석으로 구분하고 있다. 필로는 문자적 의미를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는 아니하고 다만 이해의 미숙한 수준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문자적 의미는 성경의 체(體)요, 우화적 의미는 성경의 혼(魂)이라고 했다. 따라서 문자는 미숙한 자를 위해 있고, 우화는 성숙한 자를 위해 있다.
2.3.2 오리겐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성서해석을 대표하는 사람은 오리겐(주후 185-254)이다. 오리겐의 성서해석은 우의적 해석(allegoric system)으로 요약될 수 있다. 오리겐은 모든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신 모독이나 모순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가령 예컨데, 신인 동형적 표현들(anthropomorph -ism)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을 육체적 하나님으로 설명하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구약 기사들을 문자적으로 보면 비도덕적이라는 것이다. 노아의 폭음, 야곱의 처들과 첩들, 유다에 대한 다말의 유혹, 탐식에 대한 금지규정등이 바로 그것이다. 구약 성경을 지나칠 정도로 문자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많은 장애물들이 초래된다는 사실 때문에 오리겐은 성경을 읽으면서 보다 깊은 의미를 파악하려 했다. 오리겐이 성경 해석에 사용한 방법은 정신이 육신적인 차원에서 영적인 차원으로 상승하는 아나고게(anagoge:상승)라는 것이다.
오리겐은 바울의 인간성의 삼중 분석에 따라 '영, 혼, 몸'(살전5:23)으로 해석하여 성서의 말씀에는 '몸'과 같은 자의적 의미, '혼'과 같은 도덕적 의미, '영'과 같은 비유 내지 비의적 의미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성경의 예비적 단계이다. 그것은 성경의 "체(體)"이지, "혼(魂-도덕적 의미)"도 아니며 "영(靈-우화적 의미)"도 아니다. 평신도들에게 있어서는 문자적 의미가 그대로 성경의 의미다. 성경은 영적인 책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성경을 영해함으로 발견된다.
3. 우화적 성서 해석의 알렉산드리아 학파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성서해석의 특징은 우화적 해석이다. 우화적 해석의 기원은 희랍문화 작품을 변증하고 해석하려는 입장에서 생겨난 것이며, 이것을 기독교 공동체들이 성서해석에서 발생하는 신인동형론적 해석이나 구약의 비도덕적 진술 그리고 공관복음의 상이점등의 난해점에도 불구하고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라는 신뢰가운데서 영적인 해석을 추구하는 과정속에서 발전하게 된 해석의 도구이다.
Ⅲ. 안디옥 학파의 성서 해석
1. 유대교의 문자주의
문자적 성경 해석 방법은 문장의 성격이나 또는 문장 속에 들어있는 구(句)나 절(節)의 성격상, 가능하다면 그 문장의 표현을 기본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즉 문자적 해석의 정신은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야할 특수한 실질적인 이유가 없는 한, 그리고 해석통제의 규칙들이 적용되고 있는 한, 본문의 문자적 의미로 만족하는 일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성경에는 불필요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다 필요해서 있으며 따라서 본문의 모든 문법적 현상들도 해석자에게는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신념에 근거한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까닭에 해석자는 본문에서 수많은 의미를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령 말의 상징이나 비유나 우화는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그러나 세부문맥에 과잉 충성을 하던 나머지 그들은 근본적인 것을 상실하고 보수적인 것을 크게 확대시켰다. 랍비적 주석의 주요한 결함은 하나의 과도문자주의(過度文字主義-hyerliteralism)나 자구주의(字句主義-letterism)의 개발이다.
2. 안디옥 학파
안디옥 학파의 안디옥 학파는 유대인의 자구주의와 알렉산드리아인의 우화주의를 피하는 해석원리를 갖게 되었다. 성서의 역사적-문법적인 해석을 강조한 안디옥 학파는 루시안(Lucian), 도로데우스(Dorodeus), 디오도루스(Diodorus), 몹쉬스티아의 데오도르(Theodore of Mopsuestia) 그리고 크리소스톰(Chrysostom)과 같은 저명한 인사들을 자랑삼아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제롬(Jerome)에게도 영향력을 끼쳤으며 중세기의 주석에 영향력을 끼쳤는가 하면 종교개혁자들의 해석학에도 역시 영향력을 끼쳤다
.
2.1 성서 영감설과 계시 이해
데오도르는 그의 동시대 사람들처럼 모든 성서의 주된 저자는 성령으로 보았다. 데오도르는 그이 시편 45편 주석에서 펜과 (성서:역자넣음)저자의 심상은 본질적으로 본문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임을 말한다: '내 혀는 기술하기 위해 준비되어진 펜과 같다.' 그러나 이같은 면이 데오도르가 인간 저자의 역할이 완전히 수동적(passive)이거나 단순히 연주하는 대로 소리만 나게 하는 기악가(instumentalist)의 개념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데오도르는 저자가 그의 펜에 잉크를 채우는 것처럼 예언자들의 마음에 계시의 아이디어를 채우는 역할을 성령이 하는 것으로 기술한다. 그의 영감이해는 인간의 역할을 전적으로 배제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성서 영감설은 성령께서 실제로 성서기자들에게 작용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성서기자들의 개인적 특성이 각 책의 문체에 새겨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또한 성서안의 청중의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용된다는 성서본문 응용의 원리를 인정하였다.
이들의 계시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면, 계시는 점진적이다. 구약은 예비적 성격을 띠며 하나님은 단 한 목적의 계시이며 그 계시는 성육신과 신약에서 절정에 도달한다고 보았다. 안디옥 신학자들은 성서를 주석함에 있어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알레고리적 해석에 대한 명백한 반대를 표명했다. 그들은 역사서들이 진정한 역사를 담고 있으며, 따라서 역사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2 역사적 해석(모형론)의 성서적 근거
안디옥 학파의 역사적 해석의 성서적 근거는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우화적 해석의 성서적 근거로 사용한 갈라디아서 4:24에 두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4장에 바울이 사용한 비유적 해석에 근거하고 있으며, 반면에 안디옥 학파의 사람들은 바울이 비유라고 하는 말을 쓰고 있으나 그는 실제로 비유적으로 해석하고 있지 않다고 해명했다. 데오도르는 신약성서 안에서 [알레고리]라는 말의 희랍어 어원이 어떠한 형태로든지 단 한 번만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는 바울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바울은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사건을 병치(倂置)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사건들의 비교를 [알레고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데오도르는 이것이 알레고리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바울이 부정확하게, 비문자적인 용어로서 이렇게 말한 것을 알레고릭적 해석론자들이 바울의 이 부정확한 말을 오용하여, 마치 바울의 이 말이 성서를 일단의 알레고리들로 분해시킬 수 있는 권위를 제공해 주는 것 처럼 전문용어로 간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존 크리소스톰은 "성서 어디에나 법칙이 있다 즉 비유로 표현하였을 때는 성서는 또한 비유는 설명도 제시하고 있다는 법칙이다."라고 말하였다.(79)
안디옥 학파의 사람은 사도 바울의 의도한 바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사람들이 의미하는 바 사이게 큰 간격이 있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그가 말한 사건들이 사실 일어났음을 믿었으며 그 발생한 사건을 예로 사용하고 있다.
안디옥 학파의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창세기를 통한 우화적 해석의 타당성에 대해 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사람들은 역사에서 그 실제성을 전부 박탈해버렸다라고 비판했다. 그리하여 아담은 사실 아담이 아니며, 낙원은 사실 낙원이 아니며, 뱀은 실재한 뱀이 아니었다. 데오돌은 반문하기를 "그런 경우 실제 사건의 발생이 없었으미 아담은 실제로 불순종한 것이 아이었는데 세상에 죽음은 어떻게 들어왔으며, 우리의 구원은 무슨 의의가 있다는 말인가?"하고 묻는다.
2.3 역사적 해석의 특징
안디옥 학파는 성경이 문자적인 동시에 영적이며, 역사적인 동시에 예표적인 측면을 지닌 하나의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데오리아(theoria)의 교리에 입각한 해석법을 주장했다. 안디옥학파의 표어인 테오리아(theoria)는 "보다"라는 의미를 지닌 희랍어에서 나온 것으로 오직 테오리아만이 양 쪽이 지닌 위험성을 벗어나 중도를 제시할 수 있었다. 테오리아는 역사적인 사건전체가 영적 신학적 진리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며, 풍유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원한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하신 수단으로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안디옥 학파는 한 가지 사상을 강조했다. 그것은 테오리아가 기본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성경의 저자들이 기록한 역사적인 사건의 중심에는 영적인 진리에 관한 비젼 또는 인식이 존재했으며, 이 역사적인 사건과 영적인 진리의 연결은 이중적인 의미가 아니고, 성경 저자들이 원래 의도한 단 하나의 의미라는 것이다. 그 하나의 의미란 문자적이면서 영적이고 역사적이면서 예표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영적인 의미와 문자적인 의미를 구분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위와 같이 안디옥 학파는 성경 해석학 원리에 당면해서는 문자적 역사적 주석에 대해 강력한 자세를 취했다.
안디옥 학파의 문자적 의미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문자적 의미는 조금 다른다. 문자적 의미란 순수한 문자적 의미(plain-literal)와 비유적(상징적) 문자 의미(figurative- literal)라고 했다. 순수한 문자적의 문장은 그 문장속에 언어의 비유는 전연 없는 직선적인 산문체의 문장이다. "여호와의 눈이 그대 위에 있노라"고 한 문장은 비유적 문자의미의 문장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인에 의하면 이 문장의 문자적 의미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눈이라고 한다. 안디옥학파의 문자적 의미는 하나님의 전지(全知)에 관한 것이다. 환언하면, 문자주의(literalism)는 자구주의(letterism)와는 다르다.
안디옥 학파가 주장한 것은 성경의 의미는 역사적 문법적 의미이며, 따라서 해석도 그런 의미로 할 때에 정당한 것이다. 시리아 학파는 구약 사건의 실재성을 주장한다. 이학파의 사람들은 구약의 많은 역사성(歷史性)을 지닌 사건들을 이끌고 나와서 상징의 그늘의 세계에 떨어뜨려 놓은 우화주의자들을 비난하고 있다. 문자적 역사적 접근이 구약의 역사성을 가장 실제적인 것으로 보증한다. 시리아 학파는 구약을 우화적으로 해석하는 대신에 보다 더 분별력 있는 모형적 접근(typological approach)를 제시했다. 안디옥 학파에 의하면 역사적 의미와 메시야적 의미는 마치 피륙의 가로와 세로의 올이 결합된 것과 같은 것이다. 구약의 메시아적 의미라고 해서 역사적 의미위에 유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는 모형론적인 것이지 우화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안디옥 학파의 역사적 문자적 해석의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안디옥 학파는 계시의 점진적 발전을 인정한다. 둘째 안디옥 학파는 성경의 통일성은 기독론적(Christological)인 모형론(Typology)인 것이다. 결국 그 유명한 안디옥학파는 우리들에게 성서가 두가지 의미, 즉 역사적 의미(historia)와 유형적(typus)를 갖고 있다는 해석방법을 남겨주었다.
Ⅳ. 평가
1. 우화적 해석과 역사적 해석에 대한 평가
우의적 해석의 장점을 볼 때 첫째, 우의적 해석은 성서가 말하는 본래 의미는 성서 본문의 문장 구조나 단어의 문법적인 뜻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올바로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의적 해석 방법은 성서 해석에 있어서 성서와 교회의 교리 사이의 관계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성서를 올바로 해석하기 위한 노력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의적 해석의 본질적인 약점은 첫째, 그것이 해석하려고 하는 본문의 정당성보다는 "해석자 자신의 선판단이나 주관이 앞서"기 때문에 성서 본문이 지니는 전체적인 전망에 대해서 정당한 평가를 내릴 수 없는 한계점을 지닌다는 데 있다. 즉 해석자가 해석학 의미들이 실제로 본문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자 자신이 갖고 싶어하는 의미를 본문에 주입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된 것이다. 둘째, 우의적 해석은 주석상 순수한 역사적 의미를 결여하고 있다. 셋째, 위의적 해석의 단점은 또한 성서를 교리의 뒷받침을 위한 자료료 전략시키는 위험을 피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우의적 해석방법은 비과학적이며 독단적 방법으로서, 성경을 모호하고도 불가사이한 것으로 저하시키며, 모든 해석의 권위를 침식히키며, 따라서 우의적 해석만을 가지고 나설 때에는 당시의 변증적인 필요에 응하지 못한다.
원래 교리라는 것은 성서를 올바로 이해하고 사용하기 위한 길 안내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고 이로써 성서를 보조하고 섬기는 기능을 가졌던 것인데 우의적 해석에 와서는 반대로 교회의 교리가 성서 이전에 또는 성서 없이 진리를 결정하고 이런 교리를 합법화하는 데 성서가 이용되는 즉, 교리의 들러리 역할로 전락하는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가 있다.
이에 반해 현대의 주석가들은 데오도르의 이와같은 통찰을 볼 때, 그가 마치 현대 주석가들 중의 한 사람인 것같은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자주 데오도르의 해석학이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파문과 함께 사라져 버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서, 데오도를 중심으로한 안디옥 학파의 역사적-문자적인 해석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2. 영적해석에 대한 고찰
우리는 여기서 교부들 고유의 해석의 성격이며 중세동안 사용된 "영적해석"을 고려해야 한다. 많은 영향들로 인해 영적 해석은 복잡한 주제가 되었다. 우리는 오늘날의 몇 역사가들이 무엇이 기독교적인 것이고 무엇이 외부적 문화 영향의 결과인지를 구별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불행하게도 "유형론"과 "우화"사이의 차이점은 명확하지 않다. 고대와 중기의 해석자들이나 교회의 교학권도 이 구별과 그것이 포함하는 가치판단의 미묘한 인식도 결코 드러내지 못했다는 사실과는 별도로 체계적이고 제한된 기독교적 시간의 생각에 너무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 시간은 몇몇 헬라철학자들이 순환하는 주기와는 달리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해서 최고점에 달하는 사건의 의해서 특징지어진 단선적이고 점진적이고 변경될 수 없는 전개의 수평적인 차원을 가진다.
기독교의 시간은 역시 수직적인 차원을 가진다. 이것은 더 높은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가 토론하고자하는 이론은 알레고리를 비기독교적 기원으로서 동일시한다. 그러나 신약은 교회의 견지안에서 시간의 신성함을 무시하려는 그러한 배제를 허락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초자연적이고 종말론적 실재의 완전한 소유를 소망하는 가운데 그것들을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소유하였다. 게다가 하나님을 알기원하는 사람들의 시도는 언제나 두 차원에서 작용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오직 의인화된 모습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심지어는 매우 고상한 신학적 개념들가운데서 그리고 우리의 접근에 최고의 것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 우리는 하나님은 그모든 것을 몹시 뛰어넘었다라고 깨닫는다. 만약 표면적인 판단이나 문학적인 장르로서 판단하지 않는다면, 주어진 해석안에서 "모형론적"인 차원과 "우화적인"차원을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가지는 사실안에서 공존하고 그리고 정확히 그렇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가분적이기 때문이다.
참고도서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Bible, VolⅠ,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0.
Sacrametum Mun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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