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전쟁

[스크랩] 기독교 영성의 변천

수호천사1 2014. 3. 18. 14:35

1. 성경에 나타난 영성

원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인 "영성"은 라틴어 스피리투알리타스(spiritualitas)의 번역이다. 이 단어는 영어, 블어, 독일어 등 현대 서구어에서 거의 비슷한 형태로 전이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의 어원은 "스피리투스"(spititus)이다. 이 단어는 숨, 호흡, 입김이나 대기 중에 있는 공기, 산들바람 등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동시에 신(神)의 입김이란 뜻인 영감(inspiration)의 뜻으로 사용된다.1) 그러므로 이 단어에서 파생된 형용사형인 스피리투알리스(spiritualis)는 "영으로 채워진", "정신적인", "영적인" 등의 뜻이 있고, 이 단어의 명사형이 우리가 말하는 스피리투알리타스 즉 "영성"인 것이다.

이 단어는 물론 라틴어가 사용되던 라틴 문화권적 배경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신구약을 라틴어로 번역할 때 사용됨으로서 신구약적 배경, 즉 성서적으로도 이 영성이라는 개념을 조사해 볼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한다. 즉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할 때 어떤 단어가 이 단어로 번역되었는지를 살피므로서 영성이란 개념을 성서적으로 조명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라틴어 성경에 "스피리투알리스" 즉 "영성"이란 단어는 나타나지 안는다. 그러나 이 단어의 뿌리인 "스피리투스"와 형용사형인 "스피리투알리스"는 대단히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신구약에서는 이 두 단어에 상응하는 단어를 살펴보므로 이 단어의 성서적 배경을 살펴볼 수 있다. 다만 이 글의 목적이 영성의 성서적 배경을 살피는데 있지 안으므로 간단하게 정리하고 넘어갈 것이다.


1)구약에서의 영성

구약에서 영성, 또는 영적인 것에 상응하는 단어는 두 개다. 하나는 루아흐이고 다른 하나는 네페쉬이다. 이 단어들은 영이나 혼, 또는 영혼으로 번역이 되는데 곧 라틴어 단어 스피리투스로 번역이 되어있는 단어들이다. 단어상의 뜻은 루아흐는 호흡, 기식, 공기, 생명, 바람, 정신, 영혼등의 뜻이고2) 네페쉬는 원래 목구멍, 식도, 욕구, 욕망, 생명, 개별적인 삶 자체, 또 생명체나 인간을 나타낸다.3) 이들 단어는 영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을 나타낼 때 혼합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보통 네페쉬는 육신을 말하는 히브리 단어 바사르의 반대 개념이다. 그러므로 네페쉬는 정신, 영혼, 마음 등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루아흐는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숨이다. 원래 이 루아흐의 뜻은 "움직이는 공기", 즉 숨, 호흡의 뜻이다. 조금 구체적으로 보면 루아흐는 만물을 살리는 힘이나 하나님의 영으로 이해되고, 네페쉬는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생명을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4) 이렇게 보면 원래 우리가 사용하는 "영성"이라는 단어의 원형인 "스피리투알리타스" 또는 "스피리투스"가 호흡이나 신의 입김을 뜻한다는 것과 의미가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의 영성은 네페쉬보다는 루아흐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고, 이것은 루아흐의 라틴어 번역은 대부분 영혼이나 생명, 공기, 또는 생기로 번역되었다는 데서도 그 일치점을 찾을 수 있다.5)

2) 구약 시편에 나타난 영성6)
시편에서 나타난 구약 영성의 중심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시내산에 계시된 토라질과 내용과 방향과 성격은 시내산에서 계시된 토라에 근거한다. 토라를(객관적 말씀)와 기도(애가,감사,찬양)가 두 중심축으로 자라잡고 있다. 구약 영성의 질과 내용과 방향과 성격은 시내산에서 계시된 토라에 근거한다. 토라에 계시된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참으로 영적이며 합리적인 예배이다.7) 토라를 떠난 영성은 있을수 없으며 계시된 진리를 떠날때 이방인의 영성에 빠지고 만다8). 토라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를 경외하는 도'를 깨우쳐준다9) 토라에 근거 한 영성은 전인격적이며, 사회성과 역사성을 띠고, 세상에서 언약의 백성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또한 토라를 진리의 기준으로 받아들인 시인들은 다양한 삶의 현장 속에서 애가와 감사와 찬양으로 주님께 나아가며 교제한다. 여기에서도 초점을 이루는 것은 시인의 간절성이나 영역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다. 애가에서 시인은 구원을 베푸실 주님을 가라보고, 감사 시에서 구원을 베푸신 주님을 전하며, 찬양 시에서 주님 자신의 아름다움과 위엄과 영광을 노래한다. 시인에게 구원을 베푸신 주님은 바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율법을 주신 그분이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 103:8;출 34:6)

3) 신약에서의 영성
이제는 신약을 살펴 볼 차례이다. 이것은 구약이 그리스어로 된 구약성서인 70인 역으로 번역될 때 이 루아흐가 어떻게 번역되었는지를 살피고, 이 단어가 신약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면 될 것이다. 여기서도 상세한 설명은 약하기로 하고 간단히 말하면 프뉘마와 프쉬케로 번역이 되어있다. 그리고 루아흐에 해당하는 번역은 프뉘마이다.10) 그런데 이 프뉘마 역시 바람, 호흡, 생명, 영혼, 그리고 전이적 의미로 영(soul)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11) 하지만 신약에서는 이 프뉘마의 뜻이 인간의 생명이나 육체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이 사실이나 독자적 능력을 갖는 영적 존재에 대해 프쉬케가 아니라 프뉘마가 사용된 것을 보면 (악령을 말할 때 대개 프뉘마가 사용되고 있다) 구약에서의 루아흐의 의미가 신약에서는 프뉘마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은 특히 바울에게서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그는 고린도전서 2장 14절, 로마서 8장 5절, 또 갈라디아서 5장 16절 이하 등에서 육신의 일과 성령의 일을 구별해서 설명하고 있다.16) 이때 "영적", "성령" 등의 단어가 나타나는데, 여기에 바로 프뉘마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12)

위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영성"은 성경적 근거를 가지며, 그 단어는 루아흐와 프뉘마라는 것이 그 하나이고, 둘째는 이 "영성"이라는 단어는 루아흐와 프뉘마라는 단어의 뜻에 비춰볼 때 공기, 숨, 생명이라는 뜻 외에 어떤 것을 살게 하는 (또는 영향을 미치는) 실체적 존재를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단어 "영성"에다 나 자신에 의해 길러지고, 만들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외적인 존재에 의해 주어지는 힘의 근원, 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힘이나 능력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영성은 그 단어상 외부적 힘에 의해 어떤 능력을 받아 인간이나 어떤 생명체를 살게 하는 힘인 것이다. "대저 그렇다면 우리는 위에서 우리가 내린 정의인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와 교제하는 것"은 성경적 의미와 관련하여 좀더 구체화된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와 교제하되, 그 체험의 주도권, 즉 경험이나 일상적 삶에서의 주체가 나, 즉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성령이라는 것이다. 루아흐나 프뉘마가 사람의 영이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야기되는 외부적 힘이라면 이로 인한 기독교 영성은 당연히 성령의 인도나 그의 주체적 역할 아래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2. 교회사에 나타난 영성
영성형성(spiritual formation)은 항상 중요한 문제였지만, 오늘날처럼 문제를 의식적으로 고찰한 시대는 없었다. 따라서 영성형성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는 교회사를 시대적으로 구분해서 중요한 시기에 대한 고찰을 할 필요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13)

1)초대교부시대의 영성
기독교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며, 원천은 신약성경이다. 초기 교부시대의 대표적인 사건들을 살펴보면 치명적인 박해, 타 종교와의 갈등에서 오는 대립, 그리고 영지 적인 사상과의 충돌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하고 그 전수과정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강렬하게 체험하게 되었다 4 세기 이후인 325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교인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한 반면 질적으로는 점점 혼탁해 가는 현상을 가져왔다. 그리고 오랜 교리, 정통이단에 대한 논쟁100년 200년 동안 계속되면서 이내 염증을 느낀 신실한 성도들이 애굽과 시내 사막과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지에 있는 사막이나 계곡 또는 광야로 나가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가지는 운동이 일어났다. 거기서 기독교 영성운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실상은 거기서부터 100년 더 앞서 AD 2-3세기에 기독교 교부들에 의해 기독교 영성은 그 신학적인 기초가 세워지기 시작했다.14) 이런 초기 영성운동가들 중 대표적인 유명한 리용의 갈독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클레멘트, 오리겐과 같은 유명한 신학자들에 의해서 기독교 성경적 진리, 기독교 영적 진리에 대한 깊은 신학적 기초가 놓임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영성신학이 발달하게 되었고 기독교 영성은 기독교에 깊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들은 사막이나 계곡 등지에 은거하면서 금욕, 기도, 사색, 명상 등으로 우리 인간의 내면적인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과의 합일(合一)과 일치의 체험을 추구했다.15)

2) 수도원의 영성
면면히 그 맥을 이어서 교회의 부패를 불식시켜 오던 영성운동은 중시대인 13-15세기에 카톨릭교회가 너무 방대해지고 형식화, 교권화, 물화되어 타락하면서 새로운 영적 각성과 함께 일어났다. 3-5세기의 동방 수도원 정착기에는 로마제국의 말기적 현상과 종교의 다툼과 교리 논쟁분열로 인해 자연히 은둔적인 수도회가 일어났다, 은둔 수도사들의 영성 수련방법은 육체적인 고행과 노동을 통한 고행이었다.16) 그들은.노동을 천하게 취급하던 시대에 노동을 신성하게 만들었다. 수도원생활의 목적적은 영의 풍성함을 얻기 위해서 육의 문제를 무시하거나 학대한 것이 아니라 "몸을 잘 다스리고 순화시켜서 정욕의 도구가 되지 않고 순수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와 영을 좇는 삶에 지배될 수 있게 하는 것' 이였다, 17) 이러한 청빈, 겸허 그리고 사랑의 실천운동이 그 유명한 도미니크 수도원 계층의 영성운동과 성 프란시스의 수도원 운동을 활발히 일어나게 했다. 또한 13세기는 본래적인 수도원 운동의 흐름과는 상당히 다른 탁발 수도회가 주된 운동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식사 문제들을 해결 하기위해 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침체, 우주와의 일체감, 이웃과의 관계의식주에서 해방, 생명의 고귀성 체험, 자기 겸손 등을 목적으로 하며, 그들에게 있어서 걸식은 그 자체로 예배요 훈련이었다.18) 그러나 다양한 수도원 운동은 외형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된 관심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가장 바른 삶을 살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수도원 운동은 시간이 갈수록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긴 했으나 그것을 통한 영성 훈련과 영적인 삶은 교회 갱신, 자기 정화, 구제사업, 교육제도 발전, 종교사상가 배출 등 많은 결과를 남겼다.19) 수도원의 영성은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의 영성의 대안의 전형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영성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이루는 것이다. 수도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감미로움을 영험하는 고백들은 21세의 비 영적인 삶의 구조에서 활력소가 될 수 있다. 20)

3)종교개혁자의 영성
수도원주의의 영성이 단절되고 말씀과 믿음이 영성의 기초가 된 16 세기 종교개혁의 영성은 기독교 영성의 새로운 주제요 발견이었다. 믿음기초가 된 영성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인간 의존적인 영성의 개발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존하는 영성이다.21) 종교개혁은 가톨릭 교회의 부패에 반하여 끈질기게 지속되어 온 영성운동과 더불어 루터는 독일에서, 칼빈은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그 후 요한 웨슬레는 영국에서 히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한 영적 각성 운동이었다 그와 동시에 청교도운동(Puritanism)또한 새로운 영성운동이라 볼 수 있다 종교개혁자 중 대표적인 칼빈은 경건, 즉 영성의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22) 그의 경건이 인간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철저한 절제와 금욕적인 자기 부정을 내포하고 있다.23) 31)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삶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절제되며 하나님을 위한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24)결국 칼빈의 영성은 믿음과 성령 안에서 경건한 삶을 통한 세상과 사람들을 섬기는 봉사와 헌신의 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삶의 전체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는데 비전을 갖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극도의 물질주의 물량주의 시대에영성에 대한 새로운 갈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현대의 한 조류라고 볼 수 있는 바로 오늘의 시대는 기독교의 새로운 제 3의 영성운동의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어 가는 시기라고 본다.25)

스피리투알리타스(spiritualitas)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5세기 초 리츠의 파우스투스(Faustus of Riez) 썼다고 여겨지는 위(爲) (Pseudo-Jerome)의 서신에 나오는 "영성의 발전을 위하여 행동하라" (Age ut in spiritualitate proficias)는 표현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26) 이것의 뜻은 바울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성령에 따라 살 것을 권하는 말이라 한다.27) 한편 9세기에 수도사 칸디두스는 이 스피리투알리타스를 코르포랄리타스(corporalitas:육체)나 마테리알리타스(materialitas: 물질)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하므로 영성이 육체나 물질과 대립하는 개념으로 이해되는 전초를 열었고, 그 결과 중세기 전체에서 정신적, 이성적 의미로 사용되거나 또는 신비적이고, 영적개념으로 사용되는 계기가 되어 아퀴나스도 이렇게 사용했다고 한다.28)

그후 17세기부터 프랑스에서 경건한 종교적 삶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원래는 경멸 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한다.29) 이 단어가 가지는 부정적 인식 때문에 잘 사용되지 않다가 유명한 프랑스 신학자 삐에르 뿌라(Pierre Pourrat, 1871-1957)가 신학을 교의(theologia dogmatica), 윤리(th.moralis), 영성(th. spiritualis)으로 분류하면서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고30),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최초로 기독교 전시대를 다룬 영성사를 저술했다.31)

그리고 1920년부터 프랑스에서 기독교 영성 연구지가 발간되기 시작했고,1932년에 기독교 영성사전(Dictionaire de spiritualite)이 출판되기 시작했으며, 1943년 파리 가톨릭 협회가 영성사 강좌를 개설하고 저명한 신학자 에티엔느 질송을 초청하여 "영성의 신학과 역사"라는 강연을 개최하였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영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자 영어권에서도 영성 즉 스피리투알리티(spirituality)라는 단어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사전, 연구서, 전집, 세미나 등 영성에 관계된 여러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편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개신교에서는 영성이라는 말에 냉담한 반응을 보여왔고, 영성이란 표현보다는 경건이나 헌신이란 용어를 선호했으며, 특히 종교개혁자들이 영성을 중세의 펠라기우스적 입장과 같은 것으로 보고 배척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개신교는 영성이란 말을 열정주의나 신비주의와 연관시켜 생각했으며, 신앙생활에서 도덕적 요소를 무시한다는 의혹을 품어왔다.32) 하지만 현대에 와서 이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개신교적 입장에서 정리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다. "'영성'이란 단어는 많은 개혁주의 개신 교인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고 전제하는 하워드 라이스는 이것은 영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영성이 없이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하고있다.33)

이것은 영성에 대한 이해가 수덕이나 관상 또는 어떤 신비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시각에서 탈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즉 영성이 영혼과 육체, 물질, 세상을 대립시키는 이분법적 도식 속에서 개인 수덕이나 자기 부정을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특별한 소수의 성직자나 종교인의 영적 능력이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가 현대에 와서 점차로 인간 삶 또는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말로 폭넓게 사용되어 사회적, 정치적 영역까지 포함하는 전인적, 총체적 삶의 모습을 가리키는 말로 확대된 것이다.34) 그리고 그런 흐름과 함께 오늘날은 한국 기독교뿐만 아니라 세계 기독교계가 영성에 대한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35)

3. 현대의 영성36)
서양의 20세기 기독교 영성의 역사속에서 중요한 특징들을 세가지만 살펴보면 첫째: 중세신비주의의 부흥을 통해 영성신학의 깊이가 더해지고,(예:언더힐과 그의 저서 -신비주의), 둘째, 영성과 예언자적 전통의 접목으로 영성의 폭이 넓어진다.(예:본 회퍼와 그의 저서-제자의 길), 셋째, 기도와 영성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훈련을 통해 영적 생활이 일상화된다.(예: 머튼과 그의 저서-기도의 새 씨앗들),포스터와 그의 저서 영성 훈련 등이다.

21세기의 영성신학의 전망 우리들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또 하나의 지구촌 규모의 다면(多面), 다차원적 출애굽체험을 하고 있다. 21세기의 영성신학은, 신학의 지성소로서의 구실을 하여 다른 신학의 영역들을 형제자매로서 연결시키며, 신학들 간의 유기적인 대화를 도모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영성신학은 타 신학분야들과 더불어 일반학문(인문, 사회, 자연과학 등) 그리고 아직 학문화되지 않은 삶의 이야기와 비판적, 건설적 대화를 하게 될 것이다. 영성 신학은 신학의 깊이와 높이를 더하면서 동시에 신학의 지평을 r관장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을 염두에 두며, 영성신학의 3대 과제를 설정해보면 첫째, 대신 관계이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참 나를 찾아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전인이 변화, 성화, 성숙함을 체험하고 공부한다(좁은 의미의 영성신학). 영성신학은 기도와 삶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이를 표현하고 이해하면서, 더 깊고 더 넓은 새로운 하나님 체험을 도모한다. 둘째, 대인(對人)관계이다.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 인생관, 역사관에 기초하여, 공동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영역들을 사랑, 정의, 평화, 자유의 체질로 바꾼다(공동체 ,문화 영성신학). 성령 충만한 개개의 크리스챤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어울리어, 지구촌 문화에 빛과 소금의 변혁자(transforme)로 봉사해야 한다. 이러한 봉사 속에서, 우리의 신앙과 세계관이 더 넓고 깊어 질적인 변화를 체험한다. 곧 개인영성과 공동체 영성은 상호상승작용을 한다. 해방신학의 아버지인 남미의 구띠에레즈는 그의 저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샘에서 물을 마신다( We Drink from Our Own Well)에서 해방신학과 영성신학의 접목을 시도하고 있다. 경건과 기도가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해방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아시아의 대표적인 정치, 문학 신학자인 송천성(대만출신, 미국 이름은 C.S.Song."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 교수)는 1993년 3학기 세미나에서 개인 혹은 집단의 하나님 체험과 사회 , 문화변혁의 유기적 상호 작용을 강의하고 토론했다. 셋째, 대자연(大自然)관계이다. 전 생태계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영적 환경(spiritual milieu )을 열어야 한다(생명 -생태-영성신학),성령의 바람과 단비 속에서 우리는 자연과 우주의 청지기요 정원사이다.37) 위의 세 가지 과제는 순차적으로 진행되기도 하지만 그 순서가 바뀔 수도 있고 한꺼번에 체험되기도 한다. 영성신학은 삶 속에서 기도하는 신학으로서 , "하나님사랑, 이웃사랑, 자연 사랑의 지구촌 2000 년 대가 열리게 하소서 ! "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나라를 살고,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사람을 체험하게 한다.

영성의 현대적 의미

그러면 영성의 현대적 의미를 살펴보자 즉 영성이 가지는 현실적 의미에 관해 짚어보기로 한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영성에 대한 관심이 크게 대두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세계적으로 영성운동이 확산된 이유는 20세기 후반의 문명 반전의 패러다임 변환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현대 문명은 그 태동 자체가 근세에 나타난 이성주의와 과학주의를 모태로 출발했다. 이것은 모든 것을 객관화시켜보자는, 즉 모든 것을 그것자체로 증명해 보이고 가치를 찾아내고자 하는 객관성을 인식의 근본 바탕으로 삼자는 과학주의적 인식론적 전제가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객관성은 다시 두 개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그것이 진리임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는 의미의 과학적 객관성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수긍하고 동의한다는 의미에서의 주관적 객관성인데, 전자는 자연과학을 주도했고, 후자는 정치와 윤리를 주도했다.38) 이러한 객관성 위주의 과학과 윤리는 본질적이고, 본체 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잃게 하고 눈앞에 보이는 이익과 편리함만 추구하는 경향을 만들어 냈고,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전제 하에 자신의 소욕과 욕심만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현상을 낳았다. 이렇게 해서 학문의 흐름은 존재론적 입장에서 인식론적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래서 인간의 주체성과 능동성은 부각시켰으나 인간밖에 있는 실체는 인정치 않는 경향, 즉 인간 바깥에 있는 객체의 신비를 인정치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39)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나타난 생태학적 위기가 인간을 포함한 생명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등장하게 되자 지금까지의 과학적 실증주의의 패러다임은 심각한 도전을 받게되었고, 자기반성과 수정이 불가피하게 요구되었다. 이는 근세 이후 인간의 역사를 지배해온 계몽주의적 이성주의적 사고의 한계를 드러내 준 것으로40) 지금까지 전통적인 모든 것이 도전 받고 해체되며, 모든 것을 다시 세우려는 노력과 도전이 곳곳에서 나타나게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것이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심대하다. 결과론적으로 영성에 관심을 돌리는 계기도 이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전통적 신학방식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논리와 실증을 통해 컨테이너에 냉동시켜 저장하던 이성주의적 인문주의 방식"에 안주했던 신학이 해체의 때를 맞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신학적 인문주의의 대표격인 역사비평은 문자주의라는 구시대적 신학 방법, 예를 들어 사랑을 느낌이나 감정으로보다는 개념이나 정의로 설명하고자 했던 그 방식이 이제 거센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41) 이제 "교리"와 "신학 지식"에 의존하고, "윤리"와 "사회 개혁 프로그램"에 집중해온 전통적 교회는 커다란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한국기독교, 한국교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의 기독교 역시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적 삶의 문제에 대해 적절한 해답이나 방향제시를 못했던 것이 사실인 것이다. 이는 한국에서 영성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게 된 이유를 한국의 "기독교가 그 신앙의 본질성을 상실하고 신앙 없는 기독교, 사랑의 실천과 교회의 역사적 책임성을 망각한 교회, 세속 이데올로기화로서의 신학의 변질 등 현실에의 반작용으로 이해"42) 해야할 것이라는 주장에서 잘 드러난다. 즉 그 동안 한국교회가 무분별한 물량적 성장만을 중시하고, 서양신학의 무조건적 답습, 정치적이고 외적인 모습에의 집착 등을 통해 기독교 고유의 모습을 찾으려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살았던 결과가 영성에의 관심이라는 측면을 만들어 냈다.

현재에 나타난 한국교회 영성 연구 흐름은 두갈래로 나눠진다. 하나는 현실참여를 중시하는 (김경재, 박종화 등)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적 입장을 중시하는 (오성춘, 이수영, 이후정 등)이다. 그렇다고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신학적 접근의 방향과는 좀 다르게 성령론적 입장에서 실제적으로 접근하는 방향이 박철수 목사를 중심한 "영성 운동"이다. 이러한 세 갈래의 흐름이 서로를 보완해 주면서 함께 발전하면 한국교회 영성 운동이 한국교회의 회복에 커다란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 된다.

 

출처 : 서초 베데스다 치유센타
글쓴이 : 현주아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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