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교수님은 일본에 다녀온 후에 이스라엘에 대학을 세우는 일을 나에게 도와 달라고 했다. 그분도 예기치 않게 그 일을 맡게 되었는데, 처음엔 의구심을 갖다가 이것이 하나님의 일임을 깨달으셨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역시 학교를 세우고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여전히 나의 일은 다큐멘터리고 나는 그 땅에서 작업했던 순간들을 그리워 하며 다시 가서 그 일을 하고플 뿐이다. 게다가 그 때, 내 영에 부어진 주님의 마음과 길은 '일본'이었다. 일본 역시 나는 그다지 마음에 품지 못했던 곳이다. 어릴적 신앙적 영향을 받은 미우라 아야꼬, 우찌무라 간조, 단가(短歌)를 좋아하여 하이쿠의 바쇼나 무라카미 하루키, 마루아먀 겐지같은 소설가들을, 그리고 테라사와의 <미스터 초밥왕>같은 만화를 즐겨할 뿐... 그런데 2006년 대구에 집회를 다녀 오다가 강력한 성령님의 사로잡힘 속에서 "아빠, 아버지의 가장 기뻐하는 일을 가르쳐 주시면 순종하겠나이다." 라고 기도한 응답으로 일본의 변방인 나가노 땅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보여주시는 아버지의 마음과 애통을 부여잡고 동지들과 기도하게 된 것이다. 그것을 통해 아버지는 1억2천의 그 영혼들...하나님 사랑을 모르고 주님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그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갈망을 심어 주신 것이다. 그런데 K 교수님이 이스라엘 얘기를 꺼냈을 때엔, 마침 놀랍게도 그 때 내 마음에는 어떤 아버지의 갈망이 부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그 이전 몇개월 동안 서서히 내 안에 형성된 것이었다. 2007년 초에 미국에서 온 성현경 목사님이 갑자기 몇 사람을 모아서 어느 문화원에서 교제를 하자고 했다. 헤비타트와 예수원 대천덕 신부님과 연관된 고왕인박사님, 치유사역을 하시는 손기철 장로님 외엔 낯선 분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무협지에서 막 튀어 나온 듯한 성 목사님은, 그 모임을 조성해 놓고 미국에 훌쩍 가버리고 한달에 한번씩 그 모임을 공지하는 메일이 와서 나는 막연히 참석하였다. 그 다음달 부터 거의 다 떨어져 나가고 몇명의 새로운 이들과 함께 그 모임은 겨우 유지되어 갔다. 내가 꾸준히 참석의 이유 가운데는 너무나 독특한 영적인 정탐을 하는 온누리교회 L 집사가 한 몫을 했다. 그의 말을 듣노라면 처음엔 나같은 온갖 이력을 겪은 종자도 머리에 쥐가 나듯 특이한 것들이었다. 그는 신앙을 가진지 그리 오래지 않았지만, 누구도 하지 못했던 영역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듯 했다. 그 인도를 따라 전국을 다니며, 이 땅을 오랜동안 묶어 온 흑암의 세력들을 근거를 파악하고 기도하는 사명이었다. 나는 솔직히 '영적도해'니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었다. 오직 진리에 순종하고 성령님의 권능으로 내게 부여된 영역에서 희년을 선포하는 단순한 구조가 더욱 중요하다고 믿는 체질이었다. 그런데 그와 토론하고 나누고 하는 동안 주님은 내게 우리의 싸움이 그저 '혈과 육'의 문제만이 아님을 극명하게 가르쳐 주셨고...손기철 장로님과 나가노에서 그 땅의 영적인 묶임을 꾾는 전쟁을 치루게 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런 전(前) 이해가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이미 이런 것들을 다 아시고 그렇게 훈련하셨다고 믿는다. 우리 아버지는 진정 그런 분이시다. 또한 L 집사는 사업가였는데, 유대인들과 비밀스런 사업(?)을 하는 것만 알려졌다. 나와 고왕인 박사님은 "오직 그리스도!", "오직 복음과 성령!"을 외치는 파였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며 나와 다른 것에서도 배우려는 태도를 가지고 조율을 해갔다. 그런 가운데 그 만남의 장소가 이스라엘 문화원이다 보니, 조금씩 이스라엘대한 정보들을 듣게 되었다. 결국 그런 가운데 나는 그전에 알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던, 이스라엘을 향한 아버지의 언약과 역사에 마음의 틈새가 열리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죽였다고들 하며 그들을 손가락질하고 미워하는데.. 사실 주님은 우리가..내가 죽인 것입니다. 나의 죄때문에...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러시아에서 오랜동안 선교사로 계시다가 이스라엘에 대한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그 사역을 하시는 k 권사님의 말은 내 영혼을 흔들었다.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같은 날 위해... 그날 이후 내 영혼에 이 찬송이 큰 울림으로 자꾸만 번져 나왔다. '주님이 나 때문에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 이 단순한 진리가 전율처럼 나를 흔들어 그 사랑에 잠기게 한 것이다. 진정 주님의 나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고, 유대인들은 장자로서 자기들도 모르는 가운데 그 고통스러운 일을 담당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타락한 아담과 하와처럼 자신의 죄를 남에게 전가시키려는 음험한 영적 DNA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손가락질과 우리의 악한 죄를 대체하는 저주받은 종자들로 심판받아온 것이다. 역사를 통하여 그것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그들의 불순종, 율법주의, 우상과 배교는 심판을 받아야 했다. (그것은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후에 다루겠지만, 하나님의 깊고 놀라운 섭리와 측량못할 지혜를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너무 피상성에만 매몰되어 그 깊이와 경륜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 때, 나의 관심은 오직 '아버지의 마음'이었고 그분의 '기쁘신 뜻'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대체신학'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주님을 부인하고 불순종함으로 심판을 받았고, 이제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영적 이스라엘'로 대체 되었다는 신학이다. 이것은 캐톨릭이나 복음주의권에서는 보편적인 이해다. 그러므로 저 육적인 이스라엘과 그 땅의 회복에 대해서는 본질적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유대인에 대한 그다지 좋지 못한 감정도 거기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 대체신학이 역시 그동안 유대인을 엄청나게 핍박하는 구실 역할도 했다. 결국 다시 성경을 읽으며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성경의 본질과는 다른 이해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11:1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를 읽으면서 결코 하나님은 아직도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고, 그들을 향하여 여전히 마음이 애타고 불타오름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동안 어떤 틀과 생각, 지금 어떤 일에 묶여 있느냐 보다 우리 아버지의 갈망과 마음이 무엇이냐이다. 오히려 유대인들의 실패와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인 우리에게 흘러 넘쳤는데, 하물며 그들이 다시 온전한 순종 가운데 돌아 온다면,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흘러 넘치겠느냐고 바울은 반문한다. 나는 완전히는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이 하나님의 간절한 소망임을 그렇게 느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 23:39 주님은 그 생의 마지막에 예루살렘성을 보시고 우시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주님을 부인하고 핍박하는 자기 백성, 유대인들이 진정으로 주님을 찬송할 때까지 주님의 그 성에 다시 오심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주님이 우신 이유는 그들을 향한 안타까움과 긍휼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주님의 마음은 만지지도 못한 채, 한방울의 그 눈물을 흘려 보지도 않은 채, 그저 인간적인 생각으로 그들을 판단하고 심판자의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성경전반을 꼼꼼히 탐구하며 이스라엘의 회복이이야 말로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주님의 재림과 연관된 다는 것을 새로이 깨달았다. 그것은 나같은 종자에게 충격이었고 혁명같은 것이었다. 주님의 얼굴을..다시 오심을 너무나 사모하는 나였다. 그런데 그 일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유대인의 회복'과 성경의 언약이 이루어 져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뭐래도 당연히 나는 그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내 고정관념의 틀에서만 성경을 이해했기에 이것을 그동안 알지 못했었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며 이스라엘을 항하여 마음을 연다는 것이 무척이나 쉽지않은 것임을 알수가 있었다. 다만 어린 시절 누구나 그렇듯 '휴거'니 '종말론'에 관심을 가질 때에,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마24:32,33 이 말씀을 통해 '무화과 나무'인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될 때에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다는 징조임을 알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묘한 흑암의 세력들이 극단적인 종말론 주위자들을 통해 물을 흐린 후에 안타깝게도 교회에서는 종말에 대한, 주님의 재림에 대한 열망이 사라졌다. 그것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아버지의 역사도 그들은 집요할 정도로 교회에 부어지지 않게 하려고 애썼음을 알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를 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교회사 전반을 검토하며 그 과정을 발견했다. 오히려 그런 것을 탐구하는 것은 조심하고 스스로 부리깊은 고정관념으로 검열하며 경계의 대상처럼 여겨지는 이상한 풍토가 생겼다. 그것이 이해는 된다. 오순절을 통과한 베드로조차도 유대교적 율법주의를 벗지 못해, 그 고정간념의 틀에 묶여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행10장) 교회사 면면을 살피며 심지어 어거스틴이나, 루터등도 그들에 대한 몰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단언하건데 오늘 교회의 이 나약함과 불경건의 원인 중에는 '재림신앙'의 부재가 한몫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주님을 다시 만나려는 갈망과 그 앞에 서는 날에 대한 인식이 없이, 어찌 깨어있음과 진실한 청지기의 추구가 가능하겠는가? 나는 뒤늦게 변화되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다시 그 재림신앙이 회복되었다. 그 대망하는 재림에 앞서 가장 중요한 일이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그런데 정말 주님의 말씀처럼 이스라엘은 다시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돋우는 나라의 회복을 이루었다. 1948년 2천년간 나라도 없이, 각처로 뿔뿔이 흩어져 살던 그들이 기적적으로 이스라엘로 돌아와 나라를 세운 것이다. 이것은 지나간 역사로 치부하여 이젠 흥분이 덜하지만 상상못할 일이었다. 아버지의 약속, 언약은 그렇게 정확하고 놀랍고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1967년엔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기적으로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후에 알고 보니 이것은 성경에 수없이 예언된 말씀이 성취된 것이었다. 나는 새롭게 그런 말씀들을 찾아 가며 주님의 재림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을 회복해 가던 중이었다. "교수님..저는 학교를 세우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언약 가운데 회복되는 일이라면..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습니다." K교수님의 도와 달라는 제안에 나는 그렇게 답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24:32 그 말씀이 떠오르자 내영혼이 화라락 타오르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