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달겨레 ․ 백의민족(白衣民族)
천손민족(天孫民族)은 밝고 환한 것을 유난히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하느님이 빛 가운데 계시는 빛의 근원이신 분이기 때문이다(요일 1:5, 딤전 6:16, 엡 5:8, 벧전 2:9, 요 12:46). 열매로 나무를 분변한다(마 7:16~20). 밝고 환한 것을 다른 어느 민족보다 더욱 선호하는 것, 이와 같은 민족성은 분명히 하느님의 백성, 곧 천손민족의 표지이다(계 21:23~25, 7:9~17, 19:7~8; 전 9:8).
한국인은 에벨로부터 셈계의 일신신앙을 계승한 욕단의 직계 후손으로서 이 땅위에 존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선민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열매가 아주 뚜렷하게 있다.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정신적 특징이 “밝음”과 “환함”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주는 것이 바로 배달겨레 ․ 백의민족이라는 우리 겨레의 유구한 별명이다.
배달겨레
빛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느님을 누구보다 공경하던 한국인의 직계 조상 셈의 현손 욕단 족속은 밝고 환한 것을 지극히 좋아하여, 광명의 본원지인 동방의 해 뜨는 땅을 찾아 가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아침에 뜨는 해를 따라 알이랑(하느님과 함께) 고개(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를 넘어 동쪽으로 쉬지 않고 이동하다가 마침내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땅 끝 ‘스발’(시베리아~만주)에 도달하였다(창 10;30). 그리하여 유라시아 대륙 가운데 가장 먼저 해가 뜨는 밝은 땅에 정착해 살게 된 백성이 알이랑민족 우리 한국인이다.
그래서 우리 겨레가 사는 땅을 ‘밝달’이라고 했고, 이 밝은 땅에 사는 우리 겨레를 “밝달 겨레”라 했다. “밝달겨레”의 이두문 음이 곧 “배달겨레”인 것이다. “밝달”과 “배달”을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밝달의 ‘달’은 땅(地)이란 말인데, 그것은 곧 양달(陽達)이 양지요, 음달(陰達)이 음지요, 빗달(傾斜地)이 비스듬한 땅인 것이다. “배달겨레”란 “밝은 땅에 사는 겨레”라는 뜻이다. 한국인의 조상 욕단은 이 밝고 환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백성이 밝고 환한 흰옷을 입고, 밝고 환한 천국에 계신 하느님께 천제를 드리며 삶을 영위하는 제사장 나라를 건국했던 것이다.
알이랑민족의 선조인 셈의 현손(玄孫) 욕단의 가계는 고대에 알타이산맥과 바이칼 호수 주변의
시베리아에 넓게 퍼져 살면서 극동으로 이주해 왔다(창 10:21~30). 우리 한민족의 뿌리는 단군이며,
그 정신적 고향은 북방, 특히 백두산과 바이칼(밝알)호에 있다.
한국인의 주류는 시베리아 바이칼호에서 이동해 온 북방계 아시아족이다.
[출처: 또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유석근 저, 예루살렘 간) 129쪽]
백의민족
중국 사람들은 흰옷을 죽은 옷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검은 옷을 즐겨 입었다. “주례(周禮)”의 춘관(春官) 사복(司服)조에 이르기를, 역질이나 기근이 크게 들거나 홍수 ․ 가뭄이 들면 임금이 흰옷을 입는다고 하였다. 흰옷을 성스럽게 생각하기는커녕 불길한 옷으로 여겼던 중국인의 색채관이 드러난다. 일본인들은 남색을 즐겨 입는다. 한편 서양에서는 검은 옷이 죽은 옷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복은 물론이고 일상복도 흰옷을 널리 입었다. 그리하여 우리 한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부른다. 실로 한국인은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백의(白衣)를 숭상하고 즐겨 착용해 왔던 “백의민족”이다.
영국 왕립지리학회의 최초 여성회원이었고, 1894년 겨울과 1897년 봄 사이에 네 차례나 우리나라를 다녀간 이사벨라 비숍여사는 1898년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그 책에서 그녀는 한국의 빨래를 묘사하면서 흰옷을 이렇게 서술했다:
“한국 빨래의 흰색은 항상 나로 하여금 현성축일(顯聖祝日: the Ttansfiguration)에 나타난 예수님의 옷에 대해 성(聖) 마가가 언급한 ‘세상의 어떤 빨래집도 그것을 그토록 희게 할 수 없다’는 말을 기억하게 했다.”(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이인화 옮김,「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도서출판 살림, 1994, p. 393).
잿물에 담가두었다가 펄펄 끓여서 순전한 흰색을 내게 하는 흰옷 빨래법이 그녀에게는 퍽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비숍 여사 말고도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흰옷 풍습을 주목하였다. 다음은 조선 고종 3년(1866년)에 두 차례, 그리고 고종 5년(1868년) 에 한 차례 내한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Ernst Oppert)의 관측 기록이다:
“조선 사람의 옷 빛 색깔은 남자나 여자나 대개가 다 희다. 저고리의 빛깔이 맑고 푸른 빛깔일 때도 있지만 바지 빛깔이 그럴 때는 없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도리어 가지각색 색깔의 옷을 입고 있는데, 가장 흔히 입는 옷 빛깔은 맑고 푸른색이 아니면 진홍빛이며, 잡색이나 검정색 옷을 입는 일은 매우 드물다. 대중이나 시민 층이 입는 의복의 재료는 국내에서 산출된 직물을 다소간 보기 좋게 바래서 만든 무명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장 흔히 쓰이는 것은 성글게 짠 일종의 삼베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나라 사람들이 더 좋고 곱게 손질한 옷감을 만들어낼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 (중략) … 먼 곳에서 보면 그들의 흰 의복은 사랑스럽고 친근한 인상을 준다.”(Ernest Oppert, Reisen Nach Korea, 韓㳓劤 譯,「조선기행」, 서울: 일조각, 1974, pp. 90~92).
우리의 예술에 관해 많은 관심을 표명했던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는 “조선의 미술”(新潮, 1922년 1월호)이란 글에서 우리의 백의풍속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 했다:
“늙은이나 젊은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같은 흰색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어찌 된 연유일까? 이 세상에는 나라도 많고 민족도 많다. 그렇지만 이처럼 기이한 현상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서울의 중심 가로’라는 제목으로 실린 구한말 남대문로의 모습.
거리에는 모두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다.
한국인이 이렇게 백의를 숭상함은 아득한 옛날부터 그러한 것으로, 수천 년 전의 부여 사람과 그 뒤 신라와 고려와 조선의 모든 왕대(王代)에서 한결 같이 흰옷을 입은 것은 그때마다 우리나라에 와서 보고 간 중국 사람들의 기록에 적혀있는 바이다. 따라서 한국인이 고래(古來)로 백의를 숭상한 사실은 의심이 여지가 없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부여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며,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북사(北史)”의 ‘열전 고구려조’를 보면 주몽이 도망치다가 세 사람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한 사람은 삼베옷을, 한 사람은 무명옷을,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부들로 짠 옷을 입고 있다고 하였다. 이들이 입었던 옷들 모두 흰색에 가까운 소색(素色)이다. “북사”와 “수서(隨書)”의 ‘신라조’에는 복색에서 흰옷을 숭상한다고 말하였다.
“구당서(舊唐書)” ‘고구려조’에는, 의상과 복식에서 왕만이 오채(五彩)로 된 옷을 입을 수 있으며, 흰 비단으로 만든 관과 흰 가죽으로 만든 소대를 쓴다고 하였다. 반면에 백성들은 갈(褐)을 입고 고깔을 쓴다고 하였다. 같은 책 ‘신라조’에는 풍속, 형법, 의복 등이 고구려 ․ 백제와 대략 같으나, 조복은 흰옷을 숭상한다고 하였다.
애석하게도 이 시대의 백의풍속을 기술한 우리 스스로의 기록은 없다. 그러나 지나(支那)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고대 사회에서 우리 민족이 흰빛을 숭상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귀족과 민중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경우, 왕은 오채(적, 황, 청, 백, 흑)옷을 입어 민중들과 차별을 두었다. 민중들의 옷은 흰색에 가까운 소색인 삼베나 무명옷이었던 반면, 지나 복식을 받아들인 지배층은 채색 옷을 입었던 것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흰옷 선호는 바뀌지 않았다. 명나라 사람 동월(董越)은 “조선부(朝鮮賦)”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옷은 흰데 굵은 베옷이 많고, 치마는 펄럭거리는데 주름 또한 성글다.”
그리고 조선 시대의 흰옷 선호도는 그대로 구한말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실로 한국인은 아득한 옛날부터 늙은이나 젊은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똑같이 흰옷을 입고서 생활하였던 독특한 의복문화를 가진 민족이다. 이 세상에 나라가 많고 민족도 많으나 모든 백성이 흰옷을 입는 이와 같은 특별한 습속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 무슨 까닭인가. 더욱이 흰옷은 쉬 더러워지니 빨래를 자주해야 될 것이요, 또한 자주 빨면 쉬 해어질 것이었다. 여러모로 비경제적이다. 그런데도 왜 한국인은 한결 같이 흰옷을 숭상하였고 백의를 즐겨 입었을까?
일제 식민사관론자들의 이론처럼 염료부족과 염직기술의 부진 때문이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의 염직 기술은 중국보다 우수하였다. 1750년대의 궁중 옷을 보면 1400 여건 중 홍색 계통이 915건으로 거의 반을 점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감색, 자색, 청색, 녹색 등으로 다양한 색상의 옷을 만들어 입었었다(이양섭, 논문 요약, 경향신문, 1982, 1, 18, 10면). 궁 밖의 일반 백성들도 아이들은 색동옷을 입었고 기녀(妓女)들도 다양한 색깔의 옷을 착용하였다. 우리나라는 동양 3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염색 기술과 미적 감각을 소유한 문화 민족이었다.
삼베나 마 같은 옷감을 그대로 입을 수밖에 없는 낮은 수준의 염료 기술 때문에 흰옷 선호가 이루어졌다는 일제 어용 식민사기들의 간교한 주장은 실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때 안타게 먹물이라도 들여 입었을 것이 아닌가? 지나 사람들이 검정 옷을 즐겨 입은 것과 비교하여 우리가 흰옷을 선호한 것은 민족성의 차이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40년대 마포나루 풍경. 당시 마포나루는 전국의 수산물이 몰려들면서 상설장터를 이뤘다.
[마포구청제공]
그러면 우리 겨레는 왜 흰옷을 입었는가? 가장 한국적인 문물, 가장 한국적인 문화 현상의 하나인 백의(白衣)! 이 백의 착용의 동기와 백의 숭상의 유래는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 민족의 흰옷 선호는 민족형성 과정에서부터 시작된 원초적인 것이다. 알이랑민족 우리 배달겨레는 처음부터 빛의 근원이신 하느님은 공경하고 섬기는 천손민족, 곧 하느님의 백성이었다. 하늘 백성인 우리는 품성은 밝고 환한 것을 유달리 좋아했다. 특히 흰 빛은 하느님의 광명을 표시하는 의미로 신성하게 알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처음부터 밝고 환한 흰옷을 선호했다.
고대 한국인은 천지만물의 주재자가 되시는 분이 ‘빛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이시라고 알고 자기네들은 그 “하느님의 자손”이라고 믿었는데, 빛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광명’을 표시하는 의미로 흰 빛을 신성하게 알아서 밝고 환한 흰옷을 자랑삼아 입다가 온 민족의 풍속을 이루고 만 것이다. 즉 알이랑 민족 우리 배달겨레가 흰옷을 즐겨 입게 된 풍습은 종교적인 이유(천손민족 ․ 제천사상)에 있고, 어떤 다른 원인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다. 한국인은 “빛 가운데 거하시는 하느님”의 백성이었기에 “하느님의 광명”을 표시하는 “밝고 환한” 흰옷을 입었던 것이다. 고대 한국인은 이 밝고 환한 흰옷을 입고서 하늘의 하느님께 천제를 드리며 생활하던 제사장 백성이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겨레가 백의민족이 된 단 한 가지 유래이다.
하늘은 빛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백성인 배달겨레는 빛의 옷인 흰옷을 즐겨 입은 백의민족인 것이며, 사는 땅도 빛이 시작되는 동방의 끝에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백의민족인 한국인은 그들이 ‘천손민족’ 곧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흰 색은 모든 색깔 가운데 가장 밝은 색이다. 하늘의 자손이라 믿었던 우리 민족은 흰옷을 숭상해서 일상복은 물론이고 상복으로도 흰옷을 널리 입었던 것이다. 때가 쉽게 타므로 빨래하기가 힘든 비경제적 색깔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흰옷 선호 습관은 고대 사회로부터 구한말까지 장구하게 이어지다가, 해방 이후 미군 진주와 더불어 양복과 양장의 원색(原色) 문화가 대대적으로 몰려오면서 최근 50년간 퇴색되었던 것뿐이다.
▼ 6.25사변 직후인 1950년대 초 대구 소시장의 풍경. 이 사진을 찍은 미국인 Adam은 한국인이 모두 검은 머리에 하얀 옷을 입었다는 것이 인상깊었다고 회고했다.
▼ 흰 옷 입은 한국 노인들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
에벨로부터 셈계의 일신신앙을 계승한 한국인의 직계 선조 욕단 족속은 빛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지극히 공경하던 천손민족이었다. 하늘 백성인 그들은 빛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백성답게 밝고 환한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그리하여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밝의 땅”(배달) 극동아시아까지 수만리를 이동해 와서 흰옷 입고 하느님을 섬기는 “배달겨레 ․ 백의민족”이 된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우리 겨레가 얼마나 밝고 환한 것을 좋아하는 민족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실로 그것은 우리 한국인이 욕단 계열의 천손민족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위대한 물증이다. 우리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지나인이나 일본인이나 몽골인은 욕단계 선민이 아니라고 충분히 단언할 수 있다. 동방에 살고 있다고 죄다 욕단계 선민은 아니다.
1971년 안동 소시장 풍경. 이때까지도 백의민족의 모습이 남아
휴버트 보스 유채 31 x 69cm 1898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미국인 화가가 그린 1898년의 한양 네덜란드 태생의 미국 화가 휴버트 보스(Hubert Vos, 1855-1935)가 1898년 서울에 와서 그린 작품이다(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미국에서 통용되는 이 작품의 제목은 <미국공관에서 바라본 서울풍경>이다. 당시 미국공관은 정동,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지금의 덕수궁 뒷길에서 덕수 초등학교 가는 길 언덕에 있었다. 그 언덕에서 그렸기 때문에 그림 속의 풍경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듯 보인다. 이 그림의 가운데에 보이는 3채의 건물은 맨 앞이 광화문이고, 그 뒤가 근정전 그리고 맨 뒤가 경회루이다. 이 그림에서 경복궁은 당시 한양을 대표하는 건물로서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서울 풍경>에서 경복궁과 함께 눈에 띄는 부분은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다. 만약 보스가 웅장한 경복궁의 모습만 그리고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지 않았다면, 이 작품은 평범한 풍경화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흰색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거리를 활보하는 행인을 몇 그려 넣어, 그림에 생동감이 흐르게 했다. 보스는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다니던 모습에 대해, “...그곳(조선)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 중의 하나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항시 “유령처럼” 흰옷을 입고 마치 꿈속에서처럼 아무 말 없이 걸어 다녔다...” 라고 회상했다. 그가 당시 목격한 조선인들이 아무 말 없이 다닌 것은 구한말 대한제국의 운명이 일본의 위협 아래 풍전등화의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민알이랑민족회복운동
유석근 목사
cafe.daum.net/ALIL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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