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종말

[스크랩] 가짜신앙/ 진짜신앙 6

수호천사1 2013. 12. 21. 15:12

"이상한 교회" '한 심한'목사는 "병든 교회"로부터 부흥회 강사로 초청을 받았다. 부흥회 첫날 저녁 '한 심한'목사의 설교 제목은 '모든 것을 주님께'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부흥회 첫날 눈먼 성도들의 반응은 대성공이었다.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 그 자체였으니까 말이다. 모두가 일어나서 '한 심한'목사에게 기립 박수까지 쳐주는 것을 보니 은혜를 많이 받은 것 같았다. 모두가 '아멘' '아멘'하면서 울부짖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 굉장히 감동을 받은 것은 틀림 없으렸다. 그러면 "병든 교회" 눈먼 신도들이 '한 심한'목사의 설교 내용이 어떠한 것이었기에 그다지도 흥분했는지 본문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그 날 '한 심한' 목사의 설교 본문은 누가복음 21장 1절에서부터 4절까지 이어지는 과부의 두렙돈 헌금 사건이었다. '한 심한' 목사는 이 본문을 가지고 생활이 구차한 중에서도 생활비 전부인 엽전 두푼을 바친 과부처럼 우리 성도들도 아무리 어려운 지경에 처한다 할 찌라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만은 자신의 전부를 바칠 때 주님은 칭찬하시고, 야베스(대상4:9-10)에게 내리셨던 축복을 능가하는 수 천배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열변을 토하였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확증하는 증거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모든 신도들은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갚아주시고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고 한다면 여러분들도 본문에 나와 있는 과부처럼 생활비 전부 혹은 전 재산을 하나님께 바쳐보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하늘 창고를 열고 여러분들에게 엄청난 재물의 축복뿐만 아니라, 건강의 축복, 사업의 축복까지도 덤으로 주실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하여 "병든 교회"의 눈먼 성도들은 그저 '아멘' '아멘' 하면서 믿음 없는 자신들을 용서해 달라고 울부짖고 있었으니 이 어찌 가당치 않은 일이란 말인가....... 


그리고 강대상 위에 올라오는 수많은 헌금 봉투들, "한 심한"목사는 헌금 봉투마다 눈먼 신도들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서 복 주신다는 성경 구절만을 골라, 한 구절씩을 일일이 불러주면서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로 약속한 그 복을, 신도 여러분 모두가 얼마든지 받으시고 더 많은 헌금을 드릴 수 있는 축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라고 외치는 "한 심한" 목사의 설파는 감동의 연속이었다. 


"한심한" 목사는 계속해서 헌금 봉투를 추겨 세우며 눈먼 성도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순간, 갑자기 어떤 헌금 봉투 하나를 강대상 위에 설치되어 있는 불빛에 비추어 보더니 헌금 봉투에 넣어있는 만원짜리 한 장을 꺼내 보이면서. 만원짜리 한 장을 헌금 봉투에 다시 집어넣고는 강대상 밑으로 내던져버리는 것이 아닌가.......(이 때 "병든 교회" 부목사는 강대상에 떨어져 있는 헌금 봉투를 다시 주워 올리는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그러면서 "한 심한" 목사왈 "요즘 세상에 어찌 만원짜리 한 장을 하나님께 정성을 다한 헌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특별히 이 부흥회 기간 중에 말입니다. 성경 본문 속에 나와 있는 과부가 헌금할 때와 요즘처럼 잘 사는 세상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헌금 봉투에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 헌금을 어찌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가 있습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시는 자들의 이름을 들어 축복하시는 모습을 성경 속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때도 눈먼 성도들은 "주여, 주여" "아멘, 아멘"을 부르짖는 것이었다. 또한 '한 심한' 목사는 오늘 헌금을 미쳐 준비하지 못한 성도들은 하나님께 약속금을 적어서 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대교회의 단면을 보면서 '한 심한' 목사가 설교한 본문은 정말 그러한가 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질의 축복은 "한 심한" 목사가 주장하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뜻인가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잠시 성경으로 돌아가 보시길 바랍니다. '한 심한' 목사가 설교한 본문 누가복음 21장1절에서 4절까지의 내용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하(눅 21:5-6)에 계속 연결되어지는 본문임을 알아야합니다. 과부의 두렙돈 헌금 사건은 마가복음(12: 41-44)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에 기록된 이 똑 같은 본문은 그 이하에 나와 있는 내용도 똑 같은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눅 21:1-4) 그 이하(눅 21:5-6, 막 13:1-2)의 내용은 어떠한 내용인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연보궤에 부자와 과부가 헌금한 내용을 언급한 이후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성전을 나설 때 그의 제자하나(막13:1)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예수님! 우리가 방금 들어갔다가 나온 이 성전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거룩한 성전은 아름다운 돌(美石)로 지어 졌는데, 이것은 신도들이 바친 헌물(獻物)로 세워진 것입니다"라고 예수님께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들이 말하는 성전은 신도들이 많은 헌금을 드려 아름답게 세웠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예수님께 말씀을 드린 내용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너희들이 하나님께 드린 헌물로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 건물을 짓기 위하여 얼마나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였는가, 참으로 너희의 수고가 크도다"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예수님의 반응을 보면 전혀 엉뚱한 모습으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가 자랑스럽게 말하는 내용을 반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뜨려지리라(막13:2)"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아름답게 지어진 성전 건물에 대하여 장차 무너져 없어질 것이라고 저주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때의 성전은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무너짐) 


그것은 구약 백성들이 그렇게도 애지중지 하던 건물로서의 성전은, 이제 성전의 실체(요2:21)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대속 사역을 감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믿는 모든 주의 백성들의 심령 속에 성령의 전 곧, 성전(고전3:16)을 세우시고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나갈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탄생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건물로서의 성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주로 고백하고 주님의 백성이 된 교회원의 심령 속에 주님은 이미 성전을 이루고 계시기 때문에 구약적인 건물로서의 성전이 사라진 지금, 오늘날 현대교회의 모습들은 하나님께 정말 아름다운 성전 건물을 세워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큰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건물로서의 성전을 짓기 위하여 그렇게도 힘쓰는 것은 그들 심령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는 증거이며, 그들의 심령 속에는 주님이 좌정하신 성령의 전, 곧 성전이 없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 마음 속에 주님을 모시면 그 곳이 주님의 성전인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 심령 속에 허전한 마음을,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을 지어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날 것을 기대하며 살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건물로서의 성전을 짓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만약 그들 심령 속에 주님이 좌정하신 성전이 있다고 한다면, 더 이상 건물로서의 성전을 짓기 위하여 수고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미리 생각하시면서,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 사건 이후, 주님께서는 건물로서의 성전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장차 무너질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셨는데, 이제 이 문제의 본문을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한 심한"목사가 설교 본문으로 택한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 사건과, 주님께서 건물로서의 성전은 장차 무너져 없어질 것이라는 본문이, 같은 본문인가 하는 사실을 먼저 이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원래 신구약 성경이 정경으로서 완성된 이후에도 "장"과 "절"이 구분되어 있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찾기 쉽도록 하기 위하여 "장"은 13세기에 영국 캔더베리 대 감독 랭톤(1215년 마그타칼타 Magna Carta 초안자)에 의해 완성되어 졌고, "절"은 1551년 프랑스의 스테파누스가 시작해서 1560년 영국의 휘팅감이 완성했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같은 내용을 가진 본문임에도 불구하고 별도로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본문이 있는데, 바로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 사건과 성전이 무너져 없어질 것이라는 본문이, 누가복음 21장 1절에서 4절까지의 내용과, 마가복음 12장41절에서 13장2절까지의 내용이 똑 같이 붙어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개혁주의 성경 신학자들은 같은 본문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 사건과 주님께서 장차 성전은 무너져서 없어질 것이라는 내용은 결국 같은 본문이기 때문에, 본문을 제대로 해석할려면 본문 전체를 함께 엮어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전체가 말씀하고 있는 진정한 내용은 어떠한 것인지를 함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어야할 최고의 강령은 옛날 구약의 선지자들로부터 선포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말씀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7-40)"는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염두에 두면서 본문을 생각하면 본문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한 심한" 목사가 설교 본문으로 선택한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 사건을 보면, 생활이 구차한 중에도 생활비 전부인 두렙돈을 헌금한 과부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주의 백성들 모두에게 경고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본문은, 어찌 한 하나님을 믿으면서 한 성전 안에서 돈 많은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함께 공존할 수가 있는가를 꾸짖고 있는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가난한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최고의 강령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한 백성이면서 한 형제요 한 자매라는 사실을 모를리 없었겠지만 그들은 가난한 우리들의 형제들을 모르는척 외면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그들이 믿고 있는 믿음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사실에 대하여 주님은 경고하는 있는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엽전 두푼(당시 렙돈이라는 동전의 단위는 최소의 가치를 가진 단위임)을 생활비 전부로 살아가는 가난한 과부의 형편에 대해서는 눈 감아 버리면서도, 아무리 많은 헌금을 바친다고 해서 그러한 헌금을 하나님께서 받아 주실까? 또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까지 착취하여 크고 아름다운 건물로서의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께 바친다고 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받아 주실까? 


하나님께 봉헌한답시고 우리의 이웃들의 어려움은 무시하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착취하여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서 자랑하는 그들의 모습이 주님이 보실 때에는 너무나 위선적인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당시의 상황에서 그들이 십일조의 의미를 잘 알고 실천만 하였더라도 가난한 과부를 그대로 놔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구약의 십일조의 규례 속에는 객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의미(신명기 14:29)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즉 가난한 우리의 이웃들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실천적인 삶이라는 것을 그들은 너무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요즘 현대 교회들도 십일조 헌금은 얼마든지 강조하면서 거두어들이지만 십일조 헌금이 성경이 정한 규례대로 사용되어지는 교회는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들이 말하는 성전을 짓기 위해 은행에서 빌려다 쓴 이자를 갚는 데에 탕진하는 교회가 수없이 많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일부 교회에서 실천하고 있는 선행은 그저 흉내를 낼뿐 주님의 지체로서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극히 일부 교회는 제외-) 


주님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마23:23)"라는 책망 속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백성들의 삶이, 하나님이 거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물로서의 성전은 얼마든지 아름답고, 크게, 높게, 지으려고 하면서도 진작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신 곧 실천적인 삶(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미에서의 사랑)은 전혀 무관하게 그들의 종교심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전을 아무리 아름답게 꾸미고 세운다고 해도 거기에는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다는 사실을 주님은 본문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면서, 그러한 위선적인 믿음에서 나오는 건물로서의 성전은 더 이상 존재의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장차 무너져 없어짐으로 으로서, 성전의 실체이신 주님을 모신 주님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공동체가 나타날 것임을 예언하시는 말씀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건물로서의 성전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개념임을 알아야합니다. 구약에서 제사드리는 성전은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화목제물이 되어준 사건 이후에는 성전은 이미 주님의 예언대로 사라진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 공동체라는 의미는 이미 신학적으로 검증되어진 것으로, 주님께서 선택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 자체를 교회라고 하는 사실을 모든 목사들이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들의 이율 배반적이고 이원론적인 신앙에서, 굳이 교회공동체 회원들이 모이는 예배장소를 성전이라고 말하면서 거대한 건물을 짓기에 막대한 거금을 투자하는 것은 저들의 욕심이 지나쳐서 아름다운 건물이 세워져야 많은 손님들(눈먼신자)을 얼마든지 끌어 모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잘못된 교회개념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성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건물을 지어야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는 명목을 가지고 더 많은 헌금을 거두어 들일수 있다는 잘못된 사상도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 심한"목사가 그렇게도 외쳐대는 복의 개념은 세상의 물질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복은 주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깨달으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축복이며, 하나님의 궁극적인 축복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임을 알아야합니다. 시편 133편 3절 하반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라는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한 심한"목사는 헌금 봉투에 꼭 이름을 써야 하나님께서 축복을 하신다고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절대주권을 무시하는 이단적인 처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성도들의 마음을 미리부터 알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시고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오늘날도 건물로서의 성전을 짓는다는 명목 아래 가난한 성도들을 교묘히 유혹하거나 협박하여 거두어들인 헌금으로 아무리 아름다운 건물을 지었다고 해도 과연 하나님께서 받아주실까? 거대한 교회 건물 옆에는, 다 쓰러져 가는 집에 세 들어 살아가는 가난한 우리의 이웃들을 외면하는 현대교회,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줄 압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은 건물로서의 성전 안에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일까? 


과거 다윗왕이 하나님이 거처하실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허락을 하시지 아니했습니다(대상17:4). 그리고 다윗왕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서 그가 고백한 내용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계시지 아니한다(왕상 8:27, 행 7:47-50)"고 말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권에 속해있는 많은 교회들이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미명아래 얼마나 많은 신자들의 호주머니를 털고 있는지 모릅니다. 말씀에 눈먼 신자들은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일생일대의 최고의 업적을 쌓는 것이며 하늘의 상급을 얼마든지 쌓아놓는 기회로 알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할 따름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경계해야할 보상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 땅을 넓히고 집짓기를 좋아하며 안락을 꿈꾸는 자들은 이 세상에 미련을 두는 자들이며, 그들은 천성을 바라보는 자들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주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행인과 나그네와 같은 존재로 살아가면서 오직 천성을 향한 마음으로 내 안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피를 함께 나눈 생명공동체이며 구원의 방주를 함께 탄 공동운명체임을 제대로 인식할 수 만 있다면 우리네 교회 공동체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더아름다운 공동체로 서로를 아끼며 사랑하는 모습으로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해 나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개혁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가기를 소원하는 여러분! 

더욱더 그리스도 안에서 어려움에 처한 우리의 형제들을 외면하지 마시고, 관심을 가지고 주님의 사랑으로 돌보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형제, 자매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출처:  remnant7000카페


출처 :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글쓴이 : 예수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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