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한국교회여, 번영신앙위에 굳게 서라!

수호천사1 2013. 11. 6. 18:57

한국교회여, 번영신앙위에 굳게 서라!

 

 

오늘 새벽기도시간에 몇몇 주제들에 관하여 글을 써야만 한다는 강력한 부담이 밀려왔다. 이 글도 그때 밀려온 주제들 중의 하나였기에 순종함으로 써내려 가는 것이다.

 

번영신앙이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그 언약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실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는 겸손한 신앙을 말하는 것이지, 성경말씀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라딘의 마술램프와 같이 여기며 자기 자신의 욕심대로 하나님을 마음껏 부려먹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적극적인 신념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번영신앙을 설교하거나 말하면 그 즉시 그것은 잘못된 번영신학이라고 함부로 정죄하면서 “‘번영신학’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신앙’을 가지고 순종하면 영적으로뿐 아니라 물질적으로, 즉 부와 건강으로 ‘항상’ 축복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현대의 신학적 교훈이다. 번영신학으로 인해 성도들이 ‘그릇된 신관(神觀)’을 갖게 되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열심에 의해 조종되시는 분이 아니다. 번영신학은 그분에 대한 ‘적극적인 신앙’만 가지면 그분으로 하여금 ‘항상’ 축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그 핵심인데, 그렇다면 그분은 이미 하나님이 아니시다.”라는 식의 비판들을 여기저기에 쏟아내고 있음을 본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비판의 말들이 성경적으로 볼 때 다 맞는 말들일까? 물론 위에서 비판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약속을 항상 지키시는 우리들의 신실하신 아버지가 되신다.

 

(렘 1:1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

 

이상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언제나 변함없이 약속하신 말씀 그대로 역사해 주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약속의 말씀인 성경에서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들의 번영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언제 어떻게 보상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이 주시는 부와 건강을 ‘항상’ 받아 누릴 수 있다는 말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종교지도자들의 사탕발림과 같은 사기성이 있는 잘못된 말들일까?

 

성경말씀을 통하여 그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하나하나 찾아가 보아야 할 것이다.

 

(시 1:1-3)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로다(they prosper in all they do/NLT)

 

(수 1:7-8) 『[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신 28:1-6)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 28:12-14) 『[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13]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you will always be at the top, never at the bottom/NIV)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14]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이상의 성경말씀들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자녀가 말씀대로 순종하면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게 되며, 항상 위에만 있게 된다는 말이 과연 잘못된 말이며 성경적으로 틀린 말일까?

 

(신 15:4-5) 『[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출 23:25-26) 『[25]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26]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

 

(사 1:19, 새번역) 『너희가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소산을 먹을 것이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잠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시 112:1-3) 『[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3]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막 10:29-30)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신앙’을 가지고 말씀대로 순종하면 영적으로뿐 아니라 물질적으로, 즉 부와 건강으로 ‘항상’ 축복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으로 틀린 것이며, 잘못된 것일까?

 

“번영신학은 그분에 대한 ‘적극적인 신앙’만 가지면 그분으로 하여금 ‘항상’ 축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그 핵심인데, 그렇다면 그분은 이미 하나님이 아니시다”라는 비판이 과연 성경적으로 정당한 비판일까?

 

서두에서 밝힌 대로, 번영신앙, 혹은 번영신학이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그 언약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실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는 겸손한 신앙을 말하는 것이지, 성경말씀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라딘의 마술램프와 같이 여기며 자기 자신의 욕심대로 부려먹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적극적인 신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인 번영신앙 혹은 번영신학을 인본주의적 적극적인 사고방식정도로 치부하는 어리석고 무지하며 오만방자한 말들을 함부로 쏟아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R교수는 “참 신앙이란 예수 믿으면 건강해지고, 부유해진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며 감사할 줄 아는 것”이라면서 “그러나 번영신학에 길들여진 사람은 이러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을 하며 “가난하게 살아도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임을 성도들에게 ‘바르게’, ‘정직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말을 강조했고, G대학교 L교수는 “소위 번영신학을 내세우며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교회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를 속단할 수는 없다”면서도 “하지만 이생에서 누리는 온갖 부와 명예와 갈채를 볼 때 후세 사람들이 길이길이 그들을 기억할 것 같지는 않다. 성경은 이생에서 찬란한 삶을 누렸던 사람을 칭찬하지 않고, 고난의 연속인 삶을 살면서도 믿음을 놓치지 않은 사람을 칭찬하고 있음을 목회자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라는 충고를 했다고 하는데, 그러한 말들이 과연 성경적으로 맞는 말들인지 두 눈을 크게 뜨고 성경말씀과 비교해 보기를 바란다. 우리가 성경말씀에 무지할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적인 진리를 대항하여 오만방자한 말들을 함부로 쏟아내게 될 것이고,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그런 말들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마 12:36-37)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우리나라 기독교계의 큰 어른이시며 전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영향력을 나타내시는 J목사님, 더군다나 이 분은 우리나라 교계 번영신학의 대표적인 선두주자로 알려지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설교에 다음과 같은 비성경적인 내용이 들어있음을 보았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 가운데 반드시 좋은 일만 계속 다가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라고 말했는데 영혼이 잘되려면 우리에게 햇빛 비치는 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평안한 날만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기 위해서는 비오는 날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바람 부는 날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과 환난이 다가와서 우리가 눈물 흘리며 금식하며 주님께 몸부림치며 부르짖어 기도하는 이러한 날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여러분과 나를 멸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나의 삶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말이 과연 성경적으로도 맞는 말인지 진지하게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시 107:10-20) 『[10]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2]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13]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14]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15]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16] 그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17]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18] 그들은 그들의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사망의 문에 이르렀도다 [19]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20]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이상의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는 근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며, 미련한 자들이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이 오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큰 믿음을 얻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훈련과 같은 것들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건강해지고, 부유해지는 삶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며 감사할 줄 알며 살아가기를 기대하시기에, 신실한 믿음으로 말씀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에게 조차도, 때때로 질병을 주시고 가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심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면에서 욥의 고난에 대한 매우 잘못된 해석들- 하나님께서 의로운 욥을 더 정결하게 하시려고 일방적으로 시험을 주신 것이라는 식의 잘못된 해석들 ( http://cafe.daum.net/gvlove0691/K3zB/217 참조)을 -매우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R교수의 말처럼 목회자는 “가난하게 살아도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임을 성도들에게 ‘바르게’, ‘정직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 과연 성경적으로도 맞는 말일까? 나는 그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성경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 15:4-5) 『[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빌 4:11-20)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 빌4:11-20 이 구절이 꽤 많은 사람들에게 본의와 상관없이 여러 가지 큰 오해들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듯하다. 이 구절은 사도바울이 풍부한 삶을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복음전파사명을 위하여 자원함으로 궁핍한 환경을 초월하였다는 고백이지, 사도바울이 어쩔수 없이 궁핍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여졌다는 말도,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그와 같은 훈련을 주셨다는 말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시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신 28:13-14) 『[13]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14]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마 8:16-17)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 14:34-36) 『[34] 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3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36]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행 5:16)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사 33:20-24) 『[20] 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21] 여호와는 거기에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24] 그 거주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No one in Zion will say, "I'm sick.") 거기에 사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 (히 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But you have come to Mount Zion)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자동차운전을 잘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교육을 잘 받고 조심하여 운전을 잘하면 되는 것이지, 운전을 잘하기 위해서 반드시 크고 작은 사고들을 당해봐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크고 작은 시행착오들을 통하여 능숙한 운전자가 될 수도 있겠지만, 능숙한 운전자가 되려면 반드시 그러한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운전경력 10년 무사고, 20년 무사고, 평생무사고로 능숙한 운전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는 것이 제일 바람직한 운전자의 삶이 아니었던가? 마찬가지이다. 신앙생활도 말씀으로 훈련을 잘 받고 말씀 안에서 살아감으로, 굳이 크고 작은 사고들을 당하지 않더라도, 항상 잘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참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하였을 때 조차도 처음부터 채찍의 매를 드시는 분이 아니라, 말씀으로 충분히 훈계하시고 훈련시키셔서 돌이킬 수 있게 하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히12:7-11에 기록된 "징계"라는 말의 헬라원어는 채찍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 훈계"를 뜻하는 "파이데이아(paideia)"이고, "연단"이라는 말의 헬라원어는 고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 연습"을 뜻하는 "굼나조(gumnazoo)"라는 것도 알기 바란다. 부디 한국교회가 성경적인 번영신앙, 번영신학의 기치를 높이 들고 더 힘차게 부흥의 길을 달려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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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병천카페 [성령전인치유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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