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전1:3-6, 기쁨과 찬송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본문은 거듭난 성도의 소망과 시련 중에 기쁨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련중에서도 기뻐해야할 이유가 소망이 있기 때문이며 그 소망은 거듭났기 때문이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거듭남이란 하늘의 기업을 받게 된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하늘의 기업을 누리기까지 힘들고 어려움에 빠져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도우실 것이기 때문에 기뻐해야하고 그 연단으로 성도의 믿음을 단단하게 하여 주님의 재림때에 칭찬과 존귀한 자리로 이끌려 갈 것이기 때문이라 하시고 있습니다. 이 구원은 구약의 성도들은 보기를 소망했어도 얻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누리시기를 소원합니다.
‘찬송하리로다’‘율로게토스’는 ‘찬양하다’라는 동사‘율로게오’에서 파생된 형용사입니다. 의미는 ‘찬양받으실 만한’이라는 것인데 롬9:5,하반절에서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했고 막14:61절에는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하나님’의 별칭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 서신을 쓰고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순교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본다면 이것은 천국의 대한 소망이 확실하지 않다면 어울리지 않는 권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확실한 소망가운데 믿음의 닻을 확실하게 내린 사람은 환란중에 기뻐하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누구처럼 바울처럼,
행16:25절에는 바울이 옥중에 착고에 채워져 있음에도 기도하고 찬송함에 옥터에 지진이 나고 착고가 풀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시절에만 있고 오늘에는 없는 것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계시는 분이십니다. 얼마전에 인터넷에 올라온 동영상 조슈아선교사의 간증에서 정치 수용소에서 거반 죽도록 맞아 버려진 상황에서 끊임없이 찬양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그가 한국에 들어와서 이제는 선교사로 간증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나 이북의 성도들이나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고 찬양합니다. 우리의 이 좋은 환경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로부터 큰 책망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 합시다, 크게.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십니다.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행동으로 옮기셨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고(엡2:4,5)십자가의 구속으로 우리를 사랑하심을 확증한 것입니다.(롬5:8), 바울은 디도서 3:5절에서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의 거듭남은 오직 우리를 긍휼히 여기심, 즉 불쌍히 여기심에서 사랑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고 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밖의 사람이고 이방이며 도무지 구원의 여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님을 놓으셨고 내가 가야할 지옥에 예수님이 가셨으며 이제 올라가신 그 천국에 주님의 제자로서 그리스도인으로 믿음을 지키면 우리를 끌어 올리실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무엇입니까? ‘아나겐네사스’는 ‘다시 낳다’를 의미하는 ‘아나겐나오’의 부정 과거 분사로 중생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1회적인 사건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부르심으로 감화를 받아 주 앞에 나온 자들을 거듭나게 하시는 이는 신비한 사건 속에 하나입니다. 참고로 말씀을 보면 (벧전1:23, 약1:18, 요3:7,8), 거듭남이 확실하면 세상에 가치관이 바뀌게 되고 천국을 바라보는 소망이 확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산 소망’에서 ‘산’‘조산’은 ‘살아있다’의 동사‘자오’의 현재 분사형입니다. 이 ‘조산’은 살아 있다라는 의미보다 더 높은 의미가 부여되고 있습니다. 즉 이‘소망’은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원리가 되고 밝은 것을 보게 하고 좋은 것을 기대하는 그래서 환란속에서 두려움에 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담대하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산소망이 무얼까요? 그것은 예수님 재림이후에 일어날 천국의 복락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새하늘과 새땅의 복인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용광로같은 시련속에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천국에서의 누릴 소망에 비교하면 거뜬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땅에서 누리는 짧은 부귀,영화는 지옥에서 맛보고 살것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믿어지면 하나님앞에서 삶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교회올라와서의 삶이 바뀌게 될것입니다. 하나님께 늘 달라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 무얼 드릴까요? 어떻게 헌신할까요, 바뀌게 될것입니다. 이제는 손님같은 신앙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집에 주인으로 헌신을 할것입니다.
4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뒤집으면 어떤 의미일까요? 이 땅의 기업은 썩어지고 더럽고 낡아지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성도가 받아 누릴 기업은 영원하고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시들지 않는 견고한 나라이며 기업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아버지께서 하늘에 간직해 두셨다고 하십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을 걸어온 자들에게 주시는 상인 것입니다.
여기서 ‘기업’이란 ‘클레노미안’은 ‘소유물’‘유산’으로서 자신이 자수성가로 이룬 것이 아니라 부친으로부터 물려받는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가 쌓은 공로로 받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유산으로서 기업이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뒤에 나오는 단어 ‘간직하신 것이라’에서 분명합니다. ‘간직하신 것’‘테테레메넨’은 동사로 원형‘테레오’는 ‘미래에 어떤 목적을 위하여 떼어두다, 비축하다, 예약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위하여 떼어 두었다고 하십니다. 비축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업은 안전한 것입니다.
그약에서 모델을 찾는 다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과 같다고 할수 있습니다. 결국은 3절에서 산 소망은 미래적인 하늘의 기업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무나 힘들고 어려워도 거지 나사로처럼 개와 같이 취급받고 개와 같이 앉아 먹거리를 얻어 먹어야 하는 처지라도 결코 놓지 말아야 할 것, 그것은 하늘의 대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한끼를 굶어도 이 믿음을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5절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은 천국에서 누릴 우리의 기업이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보호하심을 입다’‘프루루메누스’는 군사적 용어로 도시에서 구별된 ‘안전한 요새’를 의미합니다. 성도는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요새로서 우리를 보호하실 것이고 우리가 가서 얻을 기업도 안전하게 보호될 것이며 우리의 구원도 보호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찬양을 올리라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므로 거듭났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거듭남, 구원이 보호되고 우리의 얻을 기업이 보호되고 천국에 가서 누리기 전인 지금은 우리가 그 과정 속에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하십니다.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말세’는 문자대로 세상끝 ‘마지막 날’을 의미합니다. ‘말세’라는 의미는 신약성경에서 6번 나오고 있습니다.(행2:17, 딤후3:1, 약5:3, 벧전1:5,20, 벧후3:3) 이중에서 본문에 나오는 ‘말세’는 ‘정해진 시간의 끝’이라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한 끝을 의미합니다. ‘나타내기로’는 구원의 실체가 지금은 가리워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날들의 끝에는 분명하게 보이게 될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 말씀은 우리의 육의 두 눈으로 보이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배척하는 것과 반대로 믿음의 눈으로 구원을 보는 것처럼 믿고 인내로 따라가는 자들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만큼 힘드십니까? 인내로서 경주하시기를 바랍니다.
6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왜 기뻐한다는 걸까요? 좀 생각해 볼까요? ‘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원어는 분명하게 단어가 다르지만 우리말에는 두 단어를 같이 시험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시험’은 ‘페이라모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연단하시기 위해 즉 단련하시기 위해 주시는 고난입니다. 이것은 통과하면 복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마귀가 주는 유혹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템프테이션’으로 넘어 뜨리기 위한 즉 망하게 하려는 의도로서 하는 시험입니다. 시험이라기 보다 ‘유혹’인 것이죠,
‘여러가지’ 이단어의 의미는 ‘여러가지 색깔, 다채로운, 형형색색의’이라는 의미로서 옛 어른들이 수를 놓으시는 수틀을 보면 뒷면에 여러 가지 실들이 어지럽게 얽혀있는 것들을 상상하시면 됩니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여러 가지 근심과 걱정으로 얽혀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로 근심하지 않을수 없으나 그러나 기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고난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주를 위한 고난과 시련이 많은 것에 비례하여 상급도 크기 때문입니다.
이말씀을 공동 번역은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동안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하여 슬픔을 맛보고 그것이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련을 기쁘게 받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왜, 그것이 성숙으로 가는 견고한 신앙이 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일때는 작은 고통에도 울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성숙한 어른은 큰 고통도 견디어 갑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모래위에 지은 집과 반석위에 지은 집으로 비유하셨습니다.(마7:26),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이 고난이 얼마나 길겠어 혹은 이정도는 거뜬히 견딜수 있어, 우리의 입술의 신앙고백은 크고 위력이 있습니다. 시66:10절에는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사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또 119:71절에는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인내로서 경주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영광을 얻기 때문입니다.(벧전1:7)인내로서 이겨야 하고 기뻐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 교회로 인도하신 것은 낮추시고 시험 하셔서 마침내는 복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신8:16)
바울은 우리에게 권하시기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하나님은 미쁘사 감당못 할 시험은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 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감당케 하신다고 했습니다.(고전10:13), 그러므로 시험을 참는 자에게는 옳다고 인정을 받으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기쁨으로 동행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경주의 끝에는 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할렐루야...하늘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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