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벧전1:7-12, 끝까지 인내하는 자가 구원을 완성합니다.

수호천사1 2013. 4. 1. 12:35

벧전1:7-12,

우리가 시련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7절을 보면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공동번역은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라고 쉽게 번역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것은 ‘시련’입니다. ‘시련’‘도키미온’은 명사입니다. 또하나 단어는 ‘연단’입니다.‘연단하다’의 동사의 분사형‘도키마조메누’ 이 두 명사와 분사의 어근은 동일합니다. 즉 금,은,등광석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불로 연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광로에 들어가서 그 큰 시련속에서 그들의 가치가 들어나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같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앞에 시련은 하나님께 허락하신 것이며 그 시련의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크신 영광 앞으로 이끌어 주는 과정이라 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련을 만났을 때 그 시련에 온 마음을 고착시킵니다. 현상태에서 시련만 바라봄으로 실망하고 좌절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신앙생활하는데 장애가 일어납니다. 컴퓨터로 말하면 바이러스 감염으로 화면에 출력을 할수 없어 그림을 띄우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는 것이 무슨 증상일까요?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다름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는 우리의 믿음을 정금으로 비유합니다. 금은 덩어리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돌속에 소량 들어 있는 것을 용광로에 집어넣으면 금이 녹아서 분리되어 나오는 것을 정제해서 순금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금도 언젠가는 없어질 것임에도 불로 연단을 받아서 되어진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믿음도 정금 같은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불같은 시련을 통과하여서 되어진다고 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련의 연단을 통과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시련을 견디어 나가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시련의 끝에 주어지는 결과를 기억하시면서 미래를 바라보고 극복하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전하는 말씀을 찾아봅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54:7,8)

바울사도는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8절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여기서 베드로의 편지를 받고 있는 수신자들은 예수를 직접 보지 못하였지만 이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 이적,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목격을 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를 믿었고 기뻐하고 즐거워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사랑하다’의 ‘아가파테’는 ‘아가파오’의 직설법 현재 시제입니다. 현재 시제는 반복과 계속을 나타내는 단어로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시련과 고통의 순간에도 항상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 ‘아가파테’입니다. 그러나 자기만을 위하고 자신의 유익만을 위하는 것은 ‘에피뒤미아’라고 합니다. 이기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인류를 위한 신적인 사랑이 ‘아가페’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입니다. 이제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그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8절), 다시 말하면 보지 못했지만 믿었고 이제도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실 그 영광을 기억하고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는 내가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노라고 했던 도마에게 찾아 오셔서 만져 보라고 그리고 너는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더 복되다고 하셨습니다.(요20:25-29), 이것이 하나님께서 진실로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오늘은 과학과 실용주의로 진정한 믿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뢰하는 통계도 믿을 수 없고 우리 눈으로 보는 것도 거짓된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데 8절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에서 ‘말할 수 없는’이 단어는 ‘아네클랄레토’로 말로서는 표현 할 수 없는 ‘이루 형언하기 어려운’의미입니다. 이는 성도가 누리는 즐거움의 크기와 넓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표현하는 형용사입니다. ‘영광스러운’‘데독사스메네’는 ‘독사조’의 완료 분사 수동태로 ‘영화로움으로 이미 가득차 있는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로 다 할수 없는 즐거움과 영화로움으로 가득차 있는 가운데서 나오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존재, 즉 성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을 구원받았다는 표지라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11장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바울은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5:7),

9절입니다.“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9절 말씀만 보면 이미 영혼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단언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단어를 살펴보면 여기서 ‘받았다’는‘코미조메노이’는 ‘획득하다’‘적합한 보상을 받다’(히10:36, 고후5:10, 골3:25,엡6:8),히10장을 보면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10:36)라는 9절의 ‘받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 ‘코미조’의 중간태 현재 분사로서 ‘구원’이 지금도 실현 과정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예수를 입으로 고백하고 내 안에 받아들이고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구원을 받은 것은 과거 구원,(벧전1:3)이지만 현재에 이루어진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5절) 그 과정에서 힘들고 어려운 환란과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을 잃지 않도록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구원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지는 미래구원을 말씀합니다.

 

생각할 것은 현재 우리가 구원 받았다고 하는 것은 완전한 이룸이 아니고 구원의 최종적인 완성을 얻기 위하여 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구원의 반열에 올라섰지만 완성은 주님이 오셔야 하고 그 구원의 완성을 위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 현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현재의 시련 중에 있어도 환란 중에 있어도 기쁨으로 믿음을 지켜나가면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과 함께 그날에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문제는 뭘까요?

 

구원의 대한 확실한 언약을 받았는데 믿음의 뿌리가 견고하게 내리지 못하고 있어 어려운 일이 닥치면 뒤로 물러나는 행위, 직분을 가졌는데 예를 들면 무당을 찾아가 굿을 하고 점을 보러 다니고, 고통과 스트레스가 오면 술을 즐긴다면 혹은 자신의 환경을 원망과 불평을 한다면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언약과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영혼 구원에서 ‘영’‘프뉴마’‘혼’‘프쉬케’로 구별하고 있지 않습니다. 헬라 사고와 히브리사고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프쉬콘’은 ‘영혼’뿐만 아니라 ‘자아’‘인격’전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벧전2:25, 4:19), 그러므로 ‘영혼의 구원’은 육을 배제한 영만의 구원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혼 구원은 영육간의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께 들고 나와서 기도로 아뢰면 직접 주시기도 하고 사람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말씀속에서 찬양속에서 다양하게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주관적으로 보지 말고 객관적으로 볼수 있는 눈과 생각을 갖는 훈련이 필요하고 그리고 늘 주님께 묻는 훈련도 필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구원입니다. 사도요한이 선포하셨습니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4:18),

10절입니다. 지금까지는 구원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10-12절까지는 구원에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결국은 구원이지만 그러나 그 뒤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이 우리에게 오기까지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폈다고 말씀합니다. ‘연구하다’‘엑세제테산’은 ‘찾다’‘탐구하다’(히11:6, 12:17, 행15:17)라는 의미의 동사 ‘엑제테오’의 부정과거형과 ‘부지런히 살펴서’‘엑세라우넥산’은 ‘묻다’‘조사’‘연구’‘심사하다’라는 의미의 동사‘엑세류나오’의 부정과거형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선지자들이 찾고 탐구하고, 묻고 조사하고 해서(단7:16,9:2,3)즉 다니엘이 기도와 묵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깨달았던 것처럼 그렇게 그들의 헌신으로 우리에게 전해 졌고 그로 인해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경을 홀대하면 안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오시므로 구원의 완성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가 지켜야 할 법인 것입니다.

제사법이 동물희생이 페하여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곳에서 주시는 교훈은 우리가 받아야 하는 영적인 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법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을 분명하게 보고 깨닫는 것입니다. 절기를 통해서도 예수그리스도의 오심과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 재림을 보게 됩니다. 또한 구약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신4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4:2), 또한 가룟유다에 대해서 시편을 통해 미리말씀하신 것을 누가가 기록하기를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행1:16,시41:9)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1:20-21)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무관심은 구원받은 자의 모습은 아닙니다. 또한 전도 나갈 때 하는 말이 그런것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또 죽음 이후에 세계에 관심이 없다는 태도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졌고 사탄에게 종속되어 내세에 대한 생각을 지어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흑암이 꽉 차 있어서 도무지 빛의 여명이 들어가기가 어려운 상태, 그리고 죽음 앞에서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죽기 싫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사탄이 쳐놓은 견고한 바리케이트를 부수지 않는 한 이들은 영원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창19장입니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창19:14), 또 히브리서에 보면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히2:3)

 

12절입니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여기서 ‘섬긴 바’는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상고한 일, 즉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당대에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후대에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민24:17, 신18:15, 합2:1-3) 이일이 그들 선지자를 위한 일이 아니고 우리를 위한 일이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또한 신약 시대에 갑자기 일어난 생소한 구원관이 아니고 구약에서부터 시작되어서 신약에서 이루어진 계시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위한 일이라고 하는 뜻이 무슨 의미일까요? 당시에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수 없는 그럼에도 발각이 되면 붙잡혀서 죽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그 성도들을 위해 주신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동시에 우리에게도 동일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서 넘어져서 구원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비밀을 안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죽으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가를 알게 될 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12절에서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이것은 출처가 하늘(성부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고 성령을 ‘보내신’‘아포스탈랜티’는 과거 분사 수동태로 보내신 자가 ‘하늘로부터’즉 성부 하나님께서‘사명을 주어 파송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늘과 하나님의 이런 관계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도 발견되는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혹은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여 라고 하신 기도문(요17:1)기타(요14:16,26, 갈4:6)등에서 실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성령을 받은 자는 복음을 전하라는 메시지도 들어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았을 때 베드로는 고기 잡으러 디베랴 바닷가로 나갔지만 그가 성령 받고서는 매를 맞고도 그것을 기쁘게 여기며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합당한가, 사람말 듣는 것이 합당한가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령 충만 하면 강하고 담대해 진다는 의미입니다. 딤후에서 바울은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다시 12절에서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바’ 무슨 말일까요? 천사들도 신약의 성도들이 구원얻는 것을 보기 위해 실제로 노력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단어를 보면 ‘살펴보기를’‘파라큅사이’는 ‘~무엇을 조사하거나 들여다보기 위해 몸을 굽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구원의 신비는 천사들도 알기 힘든 오묘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구원이 감추어진 비밀이고 그리스도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나타나셨고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생에 하나님의 말씀을 옆에 놓고 읽고 묵상을 해야 합니다. 그속에서 성령님도 만나고 믿음도 굳게 세우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권하십니다.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17:19)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

 

우리에게 성경이 있다는 것,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언제든지 항상 읽고 싶을 때 읽을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이 성경에서 구원의 길을 제시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녀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읽었으면 우리의 삶에 적용을 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움이 오더라도 믿음을 잃지 않을 때 승리의 자리에 세게 되고 영광에 자리에 인도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하늘산소..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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