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전2:4-8,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곗
오늘 말씀은 거듭난 성도의 형제사랑과 영적 성장을 위한 말씀사모의 권면을 하고 난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거룩한 공동체에 속한자로서의 신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4,5절에서는 성도들은 산돌로서 신령한 집으로서 세워져 가는 자들이고,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자로서 거룩한 제사장임을 말씀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성도들이 세워가는 집의 모퉁이 돌이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9,10절에서 성도들은 선택을 받은 자들이고 또한 거룩한 공동체에 속한 자들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깨달아 알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함을 말씀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복 받기를 예수님이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절입니다. 성도는 사람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으면
예수님에 대해 표현하기를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고 하나님에게는 택함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버린바 되었으나''아포데도키마스메논'이 '허가하지 않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포도키마조'의 수동태 완료분사로서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로서 오셨는데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배척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예수님은 끝이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를 택하심으로 부활의 은총을 입고 산돌이 되셨습니다.
이것을 이사야도 예언을했습니다. "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사53:12),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나 하나님은 그를 '택하셨고 보배롭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에게 우리에게 나아가라고 권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으신 걸까요? 예수님처럼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믿음을 지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시는가 그것이 더중요하다고 하십니다. 세상이 알아주고 스타가 되어도 하나님이 아니라고 얼굴을 돌리시면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믿고 물질복 받고 건강 복받고 사업이 잘 풀리고, 그러나 이것은 땅의 일일뿐이고 최종적으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평가와는 별개의 일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황수관 박사의 강의 중에 '내얼굴은 나를 위함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것'이라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얼굴을 늘 웃고 보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화가 난 얼굴울 보면 같이 얼굴이 굳어지므로 말입니다. 같은 이치로 우리는 하나님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세상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가 늘 같은 것이 아니고 상반되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10"18), 그러면서 갈라디아교회에게 말씀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2:4),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하고 집중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5절입니다.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4절에서 '산 돌'은 예수님을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이 산돌이신 것처럼 너희도 산돌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대단한 말씀입니다. 산돌이 되라는 말씀은 예수님과 연합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신 산돌은 단수인데 우리에게 말씀하신 산돌은 복수입니다. 단어를 보면 '존테스 리도이' '돌''리도이'는 징으로 쪼개서 잘다듬어진 돌을 의미합니다.'존테스'는 '살아있는''생기,활기 넘치는' 뜻이 있어 종합해 보면 성도는 말씀으로 잘 다듬어져서 생기 넘치는 돌, 활기 넘치는 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연합된 산돌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산돌이 되게 하신 이유가 뭘까요?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전으로 세워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울도 말씀했습니다. 고전3장에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성전이 잘 지어져야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성전이 잘 지어지지 않았는데 왕같은 제사장이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6:16),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0-2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3:6),
하나님은 출19:6, 이스라엘백성을 열방의 제사장나라로 선택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제사장의 역활을 열방을 향해 온전히 준행하지 못했습니다. 택함받은 선민이라는 자긍심은 대단했지만 열방을 향해서는 짐승처럼 대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예수그리스도를 인하여서 하나님의 집에 우리들을 택하시고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회중으로 받으시고 개개인으로는 제사장의 사명을 부여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9절에 가면 우리를 택하신 백성. 왕같은 제사장이라 했습니다.
다시 5절에서 '하나님이 받으실 신령한 제사' '신령한''프뉴마티카스'는 '영'을 의미하는 '프뉴마'에서 단어로서 '영적인''영에 속하는'이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에 속하는 제사' 즉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요한은 요4장에서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증거하시고 있고 바울은 롬12장에서 말씀합니다. '너희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라'1절에서 증거하십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히13:1,1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찬미, 선행, 구제의 삶,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받으시는 제사, 예배라고 증거하십니다.
다윗은 무어라 했을까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라고 하십니다.(시51:17), 또한 찬양과 감사하 하십니다.(시50:14, 69:30), 공의와 긍휼을 베푸는 마음이라고 하십니다.(호6:6, 미6:6-9), 한마디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걸까요? 진실된 마음, 거룩한 삶, 구약에서는 짐승의 희생이 드려졌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우리 몸을 드려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내 되신 희생의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우리의 삶을 이제는 지난 세월처럼 살지 말고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성도가 왕같은 제사장이 될수가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제사장'이란 구별된 우리말로 하면 '제주'인것입니다. 단수로 쓰였습니다. 이는 우리 성도 개인이 다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성도 개인이 산제물이고(롬12:1)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고 하나님앞에 스스로 나아가서 중보할 수 있고 하나님께 직접 경배 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카토릭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스스로 나아갈수 없어서 사제를 통해야 합니다. 죄사함을 받기 위해 신부앞으로 나아가야하고 중보기도도 죽은 자들의 영혼을 빌어서 기도합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를 통해, 마리아를 통해. 우리를 빌어 주소서..등등..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중보자는 사람의 죽은 영혼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신 만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직접 하나님께나아가서 기도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우리를 위한 마지막 희생제물이기 때문입니다. 또 돌아가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 내려서 막혔던 길을 터 놓았기 때문입니다. 성소와 지성소의 막혔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성도는 누구나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중보할 수 있습니다. 누구안에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이제는 양도 소도 필요하지 않고 사람 중재자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인 제사장 교리가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런 은총을 입고도 우리는 기도하는데 나태하고 게으르다는 것입니다. 예배에 소중함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레10장에서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불로 제사를 드리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은우리에게 크게 경각심을 주는 말씀입니다. 다른 불로 예배를 드리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즉 우리는 성령의 불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제사장이 예배를 소훌히 하면 하나님께 징계가 없겠습니까? 제사장이 중보를 게을리하면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까? 삼상2장에 엘리의 아들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삼상2:12-17)그들은 제사를 업신 여겼습니다. 3장에서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ㅎ나님의 심판을 예고 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으로서의 옙 참으로 중요합니다.
6절입니다.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다는 이말씀은 사28:16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다급하게'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헬라어에서는 이중부정어 '우 메'가 함께 쓰이고 있어 결단코, 혹은 '결코 진멸되지 않을 것, 결코 헛되지 않을 것''환란의 때에 진멸되지 않을 것''최후 심판의 때에 당당하게 하늘나라에 받아 질여질 것'등등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부끄럼을 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하늘나라에 입성하려면 저를 믿는 자, 예수를 믿는 자입니다. '저'를 이는 보배롭고 산 돌이신 시온에 두신 모퉁이 돌을 말씀하십니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당당히 하나님 아버지계신 곳에 들어가지만 핍박하는 악의 세력들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이 아니겠습니까?
잠시 잠간 후면 이제 환란이 닥칠 것인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음 위에 굳게서서 소망의 닻을 굳게 잡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것입니다. 우리 앞에 선 선진들이 그렇게 고난과 시련과 핍박속에서 믿으을 지켰습니다. 크고 작은 시련들이 우리 사회속에서도 가정안에서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앞에 서는 날, 우리 신랑 되신 주님 앞에 서는 날, 춘향이가 이도령을 위해 정절을 지키려고 옥고를 치를때, 어사 이도령을 만나 모든 고난이 끝나고 아름다운 해후를 누린 것처럼 우리도 만왕의 왕도신 주 예수께서 우리를 신원해 주실 때, 그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사50:7), 바울은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롬10:11), 사도요한은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2:28),
7절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겐 보배이나 '보배''티메'는 '영광''영예'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겐 얼마나 영광과 존귀가 있는지 말씀합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말씀은 시118:22절을 끌어 온 말씀으로 유대인들, 제사장, 서기관들이 쓸모 없다고 버린 예수, 그러나 그 버림 받은 돌이 가장 요긴한 모퉁이 돌이 되어 '모통이 돌' 구원의 근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을 영광의 나라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저들에겐 8절에서 부딪치는 돌, 거치는 반석이 되어 넘어지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8:14절을 이끌어 온 말씀으로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여기서 부딪친다는 말씀은 신앙이나 신념을 공격한다는 의미입니다. 또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주께서 피난처가 되시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오히려 인간세상에 권력을 따라가면 주님은 거치는 돌이고 함정이되고 올무가 된다고 하십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말씀을 거부하고 순종치 않는다면 넘어진다고 하시고 이 말씀이 정하신 일이라 하십니다. '정하신 일''에테데산'은 '놓다''두다' '지정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티데미'의 부정 과거 3인칭 복수 수동태로, 여기서 수동태는 신적 수동태로 그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자들의 멸망을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세워두시고 믿고 순종하면 구원, 믿지 아니하고 거부하면 유기, 유기는 성경 여러곳에 말씀하고 있는데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11:25), 이외에도 롬9:13,17,18,21,21), 선택과 유기는 잘 생각해야 하는데, 선택에 대한 예정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둔 것이라면, 유기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한 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이 구원의 팔이 짧아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퍅한 마음을 꺽고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나를 위해 생명을 나무위에 놓으신 주님, 그가 생명나무입니다. 그 생명나무로 오신 주님은 쓴 물도 바꾸시고 죽은 물도 살리십니다.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나무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그렇다면 그 앞에 복종하시고 중심에 모시기를 바랍니다. 내 안에 쓴 뿌리를 제거하시고 순전한 맘으로 주를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할렐루야!..하늘 산소..
9절입니다. 9절은 다음으로 넘기고 오늘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목회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벧전1:13-21, 성도는 거룩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0) | 2013.04.01 |
---|---|
[스크랩] 벧전1:22-2:3, 우리의 영혼이 깨끗해 지려면. (0) | 2013.04.01 |
[스크랩] 벧전2:9-10,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특권. (0) | 2013.04.01 |
[스크랩] 벧전2:11-17, 하나님이 바라시는 그리스도인 삶 (0) | 2013.04.01 |
[스크랩] 벧전2:18-25,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뜻은 ... (0) | 2013.0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