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여행 중 들어간 음식점 주차장에
저와 같은 차종, 같은 색깔의 차가 저와 동시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차량번호 뒤 4자리도 같았습니다. 이런 우연이!
집에서 200키로나 떨어진 곳에서 같은 늦은 점심시간에 같은 한갓진 시골길의 식당에서...
같은 차종, 같은 색상, 같은 번호가 만나다니. 그것도 동시 도착하다니.
그래서 서슴없이 문을 열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쪽에서도 번호를 확인하고 반갑다고 답을 했지요.
참 우리들은 별 걸 다 가지고 연대의식을 느낍니다.
그러나 자동차가 같다고 해서 식탁에 같이 앉지도 않았고
물론 다음 여행계획을 같이 짜지도 않았습니다.
본 포럼은 명칭부터 교회개혁을 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개혁이란 단어가 나오니
종교개혁의 추억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 쯔빙글리, 칼빈의 일을 우리가 이어간다는
자각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기독교 주제에서 같은 개혁의 단어를 쓴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과 같은 입장에서 같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무의식중에서 생각한다면 그건 좀 곤란한 일입니다.
그래도 누구나 자꾸 그런 생각이 들게 마련이니
노골적으로 거론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한국교회의 신학 부분이 잘못되어 개혁을 하겠다고 나섰다면
우리는 신학대학의 교수들의 가르침을 비판하고 있을 것이고
우리는 아마 미국교회부터 개혁을 해야 할 것이고
독일과 미국의 신학자들부터 비판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공통의 일로 삼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설교가 개혁되어야 할 것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 목사가 읽은 신학책 때문에 설교가 그렇게 되었다고 믿는다면
종교개혁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은 멀쩡해도 설교가 그렇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 설교에 '설교가 못되는' 부분이 들어갔기에 항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오염물이 개인적, 또는 집단적인 인간의 욕심으로 뭉쳐있음을 보았기에
개혁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는 개혁은 종교개혁이 아니고 사회적 개혁입니다.
믿음에 비추어 똑바로 하자는 것입니다.
신자를 이용하려는 목회자는 신자를 섬기는 목회자로 개혁되어야 하고
양적 물적 성장을 도모하던 개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돌아와
회개의 열매를 맺는 삶으로 세상의 빛이 되라는 것입니다.
종교를 고치자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 맞게 말하고 행동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아주 정신 나가고 간이 큰 설교자들은
자신의 오염물질을 자기의 '신학'안에 편입시키는 사례가 있습니다.
십일조를 안 하면 구원이 없다고 각오하라는 협박은 신학적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를 이단이라고 총회에든 한기총에든 제소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자리와 명성만 가지고도 이단이 아님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다른 사람들이 이단일 수 있지, 그 자신은 이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는? 신학적 정통이 아니라 사회적 정통성을 가진 사람이지요.
이것을 종교개혁 내지 신학개혁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런 엉터리 신학을 너무 추켜세워 주는 것이 됩니다.
어떤 세력많은 목사가 자기 설교에서 신학이라고 우기면 신학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우기는 것은 웃기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설교는 신학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입니다.
신학을 배반한 설교를 하는 저 사람을 신학자가 비판할 수 없다는 사회적 문제.
이 사회적 문제가 우리 개혁의 공통분모라고 생각됩니다.
사회적 문제가 사회구조나 외적행동만을 포함하지는 않습니다.
설교의 잘못도 한국에서는 거의 사회적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 문제가 사회적 문제인 것은 같은 교파의 외국과 한국이
같지 않다는 데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십일조 논의는 종교적 논의가 아니요 사회적 논의에
더 많이 속합니다.
어떨 때엔 포럼의 논의가 너무 종교적-신학적이 아닌가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모여서 교회에서 누릴 수 없는 신앙적 교제를 할 수 있는 장소이므로
얼마든지 신앙 문제, 신학 문제를 다룰 수 있습니다.
단지 정작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그저 '화가 난다' 정도의 앵그리버드적 일반론에
머무르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문제는 즉 인간 행동의 문제이고 집단역학의 문제입니다.
고치려면 '나쁘다' 라는 선언에 그치지 않고 왜 그런 일이 생기는가
어떻게 고칠 수 있는가 하는 이야기가 좀더 많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려면 개혁대상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화를 내는 사람은 "도저히 이해해 줄 수 없다"를 내세우게 됩니다.
이해하지 않아야 화를 더 잘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해를 하려면 판단 이전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란 "나도 그 자리에서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며
오늘의 나는 나의 옳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서 여기 있는 것이라는 자각을 필요로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다르게 태어난 것처럼 매도해서는 안되는 것이라 봅니다.
그 때에야 우리는 '그들'의 잘못을 우리의 잘못만큼이나 잘 이해하게 될 것이며
실제적인 치유책이나 탈출구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개혁자 마틴 루터 킹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Power of Love, 즉 사랑의 힘의 신봉자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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