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클레시아(교회)의 의미
[마태복음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구절은 예수님의 입에서 직접 말씀하신 에클레시아의 출발점입니다.
교회는 종파도아니고, 교단도 아니고, 교파도 아니고, 예배당 건물도 아니고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아닙니다. 왜 그러할까요? 교회는 오직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의 이름으로 세우는 '불러낸' 사람들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I will build my church). 교회를 세울 권리는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지체일 뿐이지요. 주목할 것은 베드로가 고백한 바로 그 현장에서 "내가 베드로의 이 고백에 가치를 두어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보는 것이 전통적인 개신교의 성경 해석법이었습니다(천주교는 고백한 베드로에게 가치를 두어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 됨).
; 바로 이 해석 때문에 개신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면 누구나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지구상에 가장 많은 종파를 만들어낸 것이 개신교입니다. 그러나 문맥속에서는 확실히 예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자신이 세울 것을 언급하셨으며 미래형(어느때인가 목적하신 순간이 있슴을 암시, 저는 그 시점을 마가 다락방 성령임재 사건으로 봄)으로 선언하신 것에 주의해서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잘 아시다시피 교회의 어원인 에클레시아는 헬라어 속에서 찾습니다.
헬라어는 합성어가 많은 언어입니다.
먼저 에크+칼레오=에클레시아 가 됩니다.
에크 = ~로부터의 뜻이며
칼레오 = 부르다(동사) 뜻입니다. 그래서 에클레시아는 그냥 "불러낸다"라는 뜻 외에 없습니다.
거기다 다시 불러낸 무리라고 집합체적 성격을 부여한 것은 자의적 변개에 해당합니다.
변개는 본래의 의도를 왜곡하여 어떤 목적에 악용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어이 거기 서있는 아무개 이리 나와봐라. 내가 쓸 곳이 좀 있다"라고 표현하면 맞을까요?
2. 교회는 과정인가?
흔히 신약 교회의 그림자를 구약의 광야교회에서 찾으려는 노력들을 합니다. 저도 그것은 성경적으로 사뭇 타당한 견해인것으로 이해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단어들을 대비하면 이해하기 쉽겠습니다.
애굽 - 광야 - 가나안
세상 - 교회 - 하나님나라
이 등식에 동의하신다면 금방 제 의도를 이해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낸 이유는 가나안에 도착하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세상 가운데서 교회라고 성도에게 이름을 붙인 것은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되어 살도록 하기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큰 틀로 본다면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러내'는 것이 선행됩니다.
하나님나라의 참 가치를 혼돈하시는 분들은 '교회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맞지 않습니다. 또는 하나님나라의 참 의도를 무시하고 '영적인 나라'라고 치부하며 외면하는 것이 어떤 정통전 견해인 것처럼 하면서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만 내비치면 이상하게 보고 이단시하는 경향은 도무지 악마적인 것입니다.
광야가 가나안 땅을 향하기 위하여 지나야 하는 과정으로 해석되어 왔다면 가나안 땅이 '죽어서야 가는 천국'으로 오해되는 것은 큰 문제가 있습니다.
애굽(세상 권세를 행사하는 마귀에 손아귀)에서 압제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내(에클레시아) 광야를 횡단하게 되고 가나안(하나님나라)을 정복(사탄의 영역을 하나님 나라 영역으로 바꿈)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 입니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에게 세상 가운데서 살던 삶의 방법을 하나님나라 백성의 기준에 맞게 살도록 하는 장치는 '에클레시아' 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상징적 장소, 공간 개념과는 거리가 있지요. 성도들은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불러냄을 받아 거듭나는 과정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의 기준에 맞게 삶의 방법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즉, 에클레시아는 과정입니다.
3. 과정과 목적의 혼돈
그러나 많은 잘못은 현대 개신교의 중대한 문제가 '교회당'에 최종 목적으로 둔 패턴에 있다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확실히 한국 개신교는 신앙의 목표가 모두 '교회당'내부에서 거의 끝나버립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그것은 종교적 병폐입니다. 신앙의 참 의미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사는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종교인으로서 그쳐버리는 오류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섬김을 받으려 하시거나 제사를 즐겨 받으시는분이 아니십니다. 이것은 성경 속에서도 명백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신약과 구약의 필터를 잘 이해하고 계시는 분은 구약 제사의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의 속죄(십자가 사건)를 상징하는 것쯤은 잘 이해하시리라 사료됩니다만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 8:13] 내게 드리는 제물로 말할찌라도 저희가 고기로 제사를 드리고 먹거니와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마태복음 23: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의 섬김을 받아야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넘치는 것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신대 마치 우리가 어떤 정성이나 제사행위를 드려야 좋아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종교 시스템을 구축해놓은 전문 사제들의 의도속에서 남아있는 덫입니다. 그 덫을 간파하고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은 성도 여러분의 몫입니다.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구약의 제사는 인간의 죄악에서 비롯된 하나님과의 화해 장치였으며 필요의 시작은 사람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조 세계에 사는 인간들이 서로 인애하며, 정의로우며, 자비하며, 서로 신뢰하는 사회 구조(하나님나라의 최소한의 원칙)를 바탕으로 서로 돕는것을 더 바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이들이 개신교 안에서 종교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갑니다.
소위 주일이라는 하루 동안(또는 매일을 새벽기도회에 빠짐없이 다니시는 분도 더러는 많고, 모든 의식예배를 의무감으로 참여하는 분도 많음)의 모든 신앙의 초점을 예배당에서 행합니다. 거기서 봉사하고 거기서 교제하고 거기서 나누고 거기서 종교행사를 합니다.
즉, 예배당 안에서의 삶이 모든 신앙생활의 거의 전부를 차지합니다. 곧 그것이 목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목적과 과정을 혼돈하는데서 비롯된 이 문제는 오늘날 개신교의 한계를 만들어내는데 큰 몫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예배당에서 상처받으면 신앙을 떠난다는 사람도 많고, 예배당의 사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예배당으로 찾아갑니다. 거기에 거의 모든 신앙의 의미를 불어넣습니다.
모쪼록 많은이들이 신앙의 본질 찾기에 관심을 기울이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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