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시대의 협력 선교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목사, 합동신학대학원 겸임교수)
협력과 동역은 현대 선교의 가장 중요한 이슈의 하나이다. 역사적 안목과 초문화적 경험이 부족한 한국교회의 선교에 있어서는 더욱 더 그렇다. 교회 분열과 선교 갈등에 결코 뒤 지지 않는 한국교회와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여전히 협력과 동역이다. 나는 선교에 있어서 협력과 동역의 필요성을 인식하며 다음과 같은 사역에 참여했고 다음과 같은 글들을 발표했다.
1) 한국동반자선교협의회 창립(1988.1.18), 초대 총무 2) (미주)한인세계선교대회 개최(1988.7.25-30, 시카고), 준비위원 3) 한국세계선교협의회 창립(1990.6.25), 창립회원 4) "Cooperation and Partnership in Missions"("선교의 협력과 파트너십") AMC(아시아 선교대회, 1990.8.27-31), 주제강연 5) "Principles of Two-Third World Mission Partnership" Consultation on Partnership for World Mission(세계복음화를 위한 파트너십 협의회, 1991.5.9-11, 시카고), 주제강연 5) "일본교회와의 사역의 협력" 제3회 일본전도대회(1991.6.4-6, 시오바라), 주제강연 6) "한국교회와 연합운동" 「한국교회 쟁점진단」(1998 규장).
선교에 있어서 협력과 동역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 관점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세계를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
세계선교에 있어서 협력을 말하기 전에 세계를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를 정복의 대상으로 볼 때 세계선교에 있어서 협력과 동역은 이루어지기가 힘들다. 세계화는 세계를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정책이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계를 섬김과 아울러 함께 삶의 대상으로 보는 정책과 자세가 올바른 세계화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세계화 시대의 세계 선교는 북한이나 모슬렘권 등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섬김과 아울러 함께 삶의 대상으로 본다. 만약 북한이나 모슬렘권 등을 정복의 대상으로 본다면 그것은 선교가 아닌 십자군 전쟁이다.
나는 세계선교에 있어서 협력을 말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이 세계를 바라보시는 눈과 마음을 가지도록 힘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이사야와 요나 등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눈과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폭 넓은 눈과 마음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말씀이 이사야 19:23-25이라고 생각한다.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서 복이 되리라 그 날에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이 나의 백성 나의 산업이 되리라." 이것은 우리들의 생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높고 넓은 생각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사랑하는 열정이 뜨겁다고 할지라도 북한을 미워하고 일본을 질투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무시하는 눈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선교의 협력은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수년 전 북한과 중국과 러시아가 국경을 연접하고 있는 곳에서 이사야 19:23-25을 읽으며 북한과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을 향한 하나님의 눈과 마음을 느껴보려고 애를 쓴 일이 있다.
나는 북한을 미워하고 일본을 미워하고 러시아를 미워하고 중국을 무시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나는 북한을 사랑하고 일본을 사랑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존중한다. 선교의 전망이 어둡고 선교의 열매가 거의 없는 터키와 모슬렘권에 선교의 열정을 쏟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들을 존경한다. 세계를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사람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
세계선교에 있어서 협력을 말하기 전에 선교현지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교현지의 사람들은 문화와 가치관과 생활습관이 많이 다르다. 부정적인 요소들을 많이 지닐 수도 있다. 마음에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현지인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며 지배하려는 생각을 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저들을 섬김의 대상으로보다는 정복의 대상으로, 하나의 노획물과 전리품으로 볼 수도 있다. 구약의 예표들을 내세우며 그와 같은 자세를 정당화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눈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선교에 있어서 협력과 동역은 이루어지기가 힘들다.
나는 선교 현지의 사람들을 무시하고 지배하는 대신 그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품은 한 선교사의 고백을 들으면서 마음에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은 일이 있다. 그는 중앙 아시아 알마타에서 사역하던 신송태 선교사이다. 그는 다투지 않고 싸우지 않으면서 현지인들을 품고 섬기는 자세로 선교에 임했다. 때로는 너무나 억울하고 속이 상해서 화장실에 들어가 소리 내어 울기도 하고 산에 올라가 가슴을 치며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한번은 자기가 그렇게도 신임하던 고려인 신자 정 모씨가 갑자기 교회를 떠났다. 정 모씨는 교회를 떠나갈 때 신 선교사에 대한 온갖 중상 모략을 다 했다. 정 모씨가 떠난 후 고려인 교인 50여명이 모두 함께 다른 교회로 갔다. 신 선교사는 너무나 속이 상해서 산에 올라가 고함을 지르며 울면서도 한 사람에게도 화를 내거나 비방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정 모씨가 갔던 다른 교회의 한인 목사의 약속이 거짓인 것이 드러났다. 정 모씨는 다시 신송태 선교사에게로 돌아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신 선교사는 정 모씨를 향해 자기에게 무릎을 꿇을 이유가 없다고 만류하며 그를 따뜻하게 맞았다. 50여명의 신자들도 다시 돌아왔다.
한 번은 신 선교사가 교회 건축 공사의 일부를 현지 카자흐스탄 인들에게 맡겨서 일을 시켰다. 그런데 카자흐스탄 사람들이 너무나 게을러서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삽질 한번 하고는 앉아서 술을 마시고 삽질 한번 하고는 앉아서 노는 것이었다. 결국 2달에 마칠 공사를 7개월을 걸려서 마쳤다. 현지인 노동자들이 일을 마치고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지금까지 욕을 먹지 않고 일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욕을 먹지 않고 일을 한 것은 이번 뿐이라는 것이었다. 신송태 선교사의 신념은 분명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선교하러 온 현지인들과 다투거나 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 선교사는 또한 현지인들과 현지 문화를 존중하면서 사역에 임했다.
신 선교사는 카자흐 민족의 거성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민족의 지도자 아바이의 잠언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카자흐어와 한국어를 병행하여 아바이의 잠언」을 출판한 일이 있다. 이 출판은 현지인들을 놀라게 했다. 한인 선교사를 높은 눈으로 보게 만들었다. 나중에는 신 선교사가 카자흐스탄 국무총리 명의로 된 감사 증서까지 수여 받았는데, 그 증서만 보여주면 비자 발급을 비롯해서 거의 안 되는 일이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선교에 있어서 협력을 이루기 위해서는 선교현지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일곱 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를 귀하게 여겼고 남편 다섯을 두었던 수가성 여인을 귀하게 보셨던 것처럼 우리도 별 가치가 없어 보이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며 바라보는 따듯한 눈과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3 동역자를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
세계선교에 있어서 협력을 이루기 위해서는 선교의 사역보다는 선교의 동역자를 귀하게 여기며 바라보는 따뜻한 눈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선교사역에 지나친 열정을 혼자서 다 쏟다가 그만 동역자들을 귀하게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선교에 있어서 협력을 이루기 위해서는 동역자들을 바라보는 너그러운 눈과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서 나 혼자뿐 아니라 나에게 사역의 동역자들을 붙여 주시고 그리고 현지의 사역자들을 일으켜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선교사 바울은 선교사역을 혼자서 한 일이 거의 없다. 언제나 동역자들과 함께 일했고 현지 사역자들에게 사역을 넘겨주곤 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요 예수님의 방침이다.
나는 선교의 동역자들을 귀하게 여기며 따듯하게 바라보면서 협력선교를 이루고 있는 지역 중의 하나로 블라디보스톡을 생각한다. 블라디보스톡에는 통합측에 속한 정균오 선교사가 주도적으로 사역하는 신학교가 있다. 현지인을 양성하는 이 신학교를 중심으로 블라디보스톡 현지에서 사역하는 다양한 교단 소속의 한인 선교사들이 아름다운 협력을 이루고 있다.
구세군을 비롯한 다양한 교단과 단체에 소속한 여러 선교사들이 신학교 사역을 함께 협력하며 개 선교사의 선교사역을 서로 격려하며 돕고 있다. 어느 선교사가 교회당을 건축할 때 다른 교단에 속한 선교사들이 교회당 건축헌금에 참여하는 것을 보았다.
구소련 각지에서 사역하는 한인 선교사들은 이제 현지인들을 많이 양육하여 내일의 사역자들로 키우고 있으며 그들과 아름다운 동역을 시작하고 있다. 마스크바 미르교회에는 제니슨과 릴리야라는 현지인 사역자들이 있는데 저들은 기도와 말씀과 전도에 전력하며 담임 목사인 허충강 선교사와 아름다운 동역을 이루고 있다.
이제는 현지인 사역자들을 많이 양성하여 현지 사역을 주도하도록 격려하여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되도록 빨리 현지 사역자들을 현지 교회의 지도자들로 세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인 선교사들은 선교의 동역자들은 물론 현지인 동역자들을 귀하게 보며 격려하는 따듯한 마음과 눈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할 때 사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고 하나님의 경륜을 거스릴 수도 있다. 동역자들을 귀하게 보며 격려하는 너그러운 마음과 눈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럴 때 선교의 협력과 동역이 아름답게 이루어질 것이다.
4 자신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
협력선교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선교사 자신이다. 그것은 선교에 있어서 뿐 아니라 목회와 모든 사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기를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하고 가장 유능하게 보기 때문에 즉 자기를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다른 한 편으로는 자기를 과소평가하며 자기를 하나님의 큰 유기적 사역의 한 부분으로 보는 긍정적인 역사적 안목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협력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교회의 분열의 원인을 진단하면서 임택진 목사가 다음과 같이 지적한 일이 있다. 한국교회가 지도자들을 지나치게 우상화한 것이 바로 교회 분열의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즉 한국교회가 한 편에서는 김재준 목사를 다른 한 편에서는 한상동 목사를 또 다른 한 편에서는 박형룡 목사를 우상화한 것이 한국교회 분열의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올바른 지적이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 같다. 큰 교회의 목회자일수록 더욱 더 그렇다. 그것을 본 받은 선교사들도 자기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로 바라보며 과대평가하는 것 같다. 결국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른 한 편으로는 역사적 안목과 유기적 연계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하며 협력을 주저하는 경우도 있다.
초문화적 경험과 민주주의적 삶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바라보는 겸허한 눈과 마음을 가져야 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구속사의 한 점을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존재로 바라보는 긍정적인 눈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왜곡하며 교회분열을 조장한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면서 목회자 또는 선교사 자신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를 시도했다. 먼저 자기 자신을 극도로 낮추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린도 교회가 각각 자기의 지도자들을 높이며 그들을 추종하려고 했을 때 바울은 이렇게 그들을 질책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슨 물건이며 바울은 무슨 물건이뇨?"
바울은 일부러 멸시의 의미를 나타내는 중성명사를 사용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아볼로나 바울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조금 내려가서는 자기를 가리켜 "만물의 찌끼"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자기 자신을 바울처럼 극도로 비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협력에 장애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낮게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동시에 사도 바울은 자기를 죄인중의 괴수라고 여기면서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한 점을 차지하는 중요한 도구와 그릇으로 택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체의 비유를 즐겨 사용하면서 모든 지체들이 서로 협력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간다고 지적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가 필요하다. 자기를 어리석고 무능한 사람으로 여기는 겸허한 자세와 동시에 자기를 하나님이 자기의 구속사역을 이루어 가시기 위해서 택하여 사용하는 충성된 머슴의 한 사람이라고 보는 긍정적 믿음의 자세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5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변화
세계선교에 있어서 진정한 협력과 동역을 이룰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10년 전 일본 시오바라에서 개최된 제3회 일본전도대회에서 사역의 협력을 강조하면서 협력과 동역을 이룰 수 있는 비결은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데 있다고 지적했다. 그곳에 모였던 1200여명의 일본 지도자들에게 한 말을 여기 옮기면 다음과 같다.
"오늘 밤 우리들은 '인간적' 또는 '문화적' 이야기를 하려고 모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하고 듣기 위해서 여기 모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명령을 듣기를 원합니다. 오늘 밤에 하나님은 이야기 하십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너희들은 모두 나의 증인들이다. 너희 일본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은 모두 나의 증인들이다. 너희들은 모두 하나님을 위한 동역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전도와 선교에 대해서 이야기하실 때 흑인과 백인이 분리되어 있을 수 없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나뉘어져 있을 수 없고 일본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이 분리되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이야기하실 때 다락방에 모여 있던 120명의 신자들이 더 이상 다투거나 싸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연합되지 않을 수 없었고 개인주의와 지방주의와 민족주의의 죄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기도에 전심하게 되었고 전도에 전력하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안디옥교회에게 이야기하실 때 그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나뉘어 있을 수 없게 되었고 흑인들과 백인들로 나뉘어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두 연합하고 협력하여 예배와 기도와 선교에 전력했습니다.
1907년 하나님께서 장대현교회에 모인 천여명 신자들에게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서로를 향한 미움의 죄를 고백하며 사랑으로 하나되는 역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목사를 미워하던 죄, 선교사를 미워하던 죄, 일본 사람들을 미워하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사랑으로 하나되는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전도와 선교에 진력했습니다."
그날 밤 나의 호소는 놀라운 역사를 가져왔다. 일본을 미워하던 나의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빌면서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이야기를 함께 듣자고 호소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눈물과 화해와 사랑을 자아내게 만드셨다. 어떤 의미에서 일본 복음주의 교회들과 한국복음주의 교회들간의 협력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요한복음 17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 소리를 듣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나는 자주 말한다. 우리가 잘났기 때문도 아니고 우리가 옳기 때문도 아니다. 우리가 선교와 목회에 있어서 협력과 동역을 이루어야 할 근거와 이유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1-23).
선교에 있어서 협력은 가능한가? 아니 도대체 한국교회의 협력과 연합은 가능한가? 대부분의 언론인들이나 교계 지도자들은 한국교회의 협력이나 연합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진단한다. 정진경 목사는 한국교회 일치와 연합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지적하면서 일치와 연합을 저해하는 두 가지 요소를 지적했다.
첫째는 지도자들의 사욕이요 둘째는 개교회주의 또는 개집단주의라고 했다. 그리고 한국교회 안에 일치와 연합의 운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성령이 역사해야 하고 선각자들이 희생적으로, 실천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성령의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나 다른 지도자들을 자기보다 높이며 겸손해질 때에 진정한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일치와 협력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부언했다. 올바른 지적이다. 선각자 열명이 나타날 수 있다면 한국교회의 협력과 연합은 조금씩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현실적으로 한국교회의 협력과 연합의 가능성을 어둡게 보면서도 선교에 있어서 협력의 가능성은 조금 더 밝게 보고 싶다. 윗물이 흐려도 아랫물이 맑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비유가 적당하지 않을 수 있다. 순수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들보다는 더 쉽게 협력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그네들이 고향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보다 더 쉽게 가까워질 수 있다는 말이다. 초문화적 경험을 하면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는 사람들이 좁은 한반도 안에 앉아서 영남이 어떻고 호남이 어떻고 하는 사람들보다 더 쉽게 협력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오직 기도의 무릎을 꿇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님이 맡기신 일을 이루어가는 선교사들이 교회나 교단이라는 조직체에 매어 있는 사람들보다 더 쉽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고난과 박해와 역경을 몸으로 체험하는 사람들이 고난과 박해와 역경을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더 쉽게 자기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며 협력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너무 이상적인 말을 했는지 모른다. 아니다. 지금 선교지 곳곳에서 선교의 협력이 이전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선교의 협력이 보다 잘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것을 주님이 바라고 계시기 때문이다.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들어선 한국교회의 선교에 아름다운 협력과 동역이 불라디보스톡과 마닐라와 몽골과 타시겐트 등등 세계 곳곳에서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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