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19세기 후반 독일 개신교회의 선교에 대한 비판과 대안 (임희국)

수호천사1 2012. 9. 16. 11:19

19세기 후반 독일 개신교회의 선교에 대한 비판과 대안

임희국


I. 블룸하르트와 선교사들                                                 

1. 선교사 집안에서 자란 블룸하르트

        블룸하르트(Christoph Friedrich Blumhardt: 1842-1919)는 독일 서남부 지역에 있는 작은 마을 뫼틀링엔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이 마을과 받볼에서 자랐고, 16세에 부모곁을 떠나서 스튜트가르트에 있는 중고등학교(Gymnasium)에 다녔다. 튀빙엔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졸업한 뒤에 근처의 마을에서 목회실습(Vikar)을 하다가 아버지가 목회하는 받볼로 가서 아버지를 도우며 목회훈련을 쌓았다. 1880년 2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 아버지의 목사직과 요양원 원장직을 물려받았다.

        블룸하르트의 집 안에는 해외에서 선교사로 일했거나 해외선교와 관련된 사람들이 있었다.1)  그의 아버지(Johann Christoph Blumhardt: 1805-1880)는 스위스 바젤에 있는 선교기관에서 6년 반 동안(1830-1837) 선생으로 일했다. 그 당시 바젤선교부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온 선교사 후보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고 경건 훈련을 시키고 선교지를 파악케 하는 교육기관이자 기숙학교였다. 또한 이 곳에서 일하는 선생들도 유럽 여러 나라에서 -스웨덴, 스위스, 독일 등- 왔다. 아버지 블룸하르트는 이 곳에서 일하는 동안에 해외선교의 동향을 잘 파악할 수 있었고, 또 선교사 파송에 대한 각 나라별 현황을 동료 선생들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바젤선교부를 사임한 뒤, 다시 독일로 돌아 와서 뫼틀링엔에서 목회를 했다. 이 무렵에 아들 블룸하르트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동안 교제해 온 많은 선교사들과 계속 왕래가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자란 아들 블룸하르트는 어린시절부터 자연스레 해외선교에 관해서 듣고 배울 수 있었다.

        아버지 블룸하르트의 선교 신학은 그의 삼촌에게서 크게 영향을 입었다. 아버지의 삼촌인 고트립 블룸하르트(Christian Gottlieb Blumhardt: 1779-1838)는 바젤선교부의 초대 감독(1816-1838)이었다. 그가 자기의 조카 아버지 블룸하르트를 바젤선교부의 선생으로 청빙했다. 아버지의 삼촌은 경건하게 신앙 생활을 하는 부모의 슬하에서 자랐는데, 부모는 독일 슈바벤지역 경건주의 운동을 일으킨 인물들과 -바르트(Barth), 플라트(Flatt), 젝켄도르프(Seckendorf)등- 가까운 친구였다. 아버지의 삼촌은 1798년에 튀빙엔대학에서 신학을 시작했고, 졸업한 뒤에 그 근처의 마을에서 목회했다. 목회하면서 그는 영국 선교사들이 작성한 선교보고서를 독일어로 번역해서 출판했다. 그는 "선교가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라는 입장을 가졌는데, 이 입장이 1806년에 그가 지은 책 >나사로(Lazarus)<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거지 나사로에 관해서 얘기한 예수의 비유를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서술하면서 가난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과 함께 연대해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바젤선교부에서 감독으로 일하면서 약 340명 이상의 선교사 후보생들을 교육시키고 또 해외선교사로 파송했다. 이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서 일했다.

        아버지의 형제인 칼 블룸하르트(Carl Heinrich Blumhardt)는 아프리카와 인도에서 선교사로 일했다. 그는 노예매매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라고 지적했다. 인도에서 선교사로 일하는 동안에 그는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서 일하고자 했다. 그는 당시 영국의 다국적 기업인 동인도회사의 경영방식에 대항해서 농민들을 규합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런던에서 일하는 가까운 친구 슈타인콥프(A. Steinkopf)를 통해서 영국이 인도를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실상을 본국에 알리고자 했다. 슈타인콥프는 독일에서 런던으로 건너온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에서 일하는 목회자였고, 또한 그는 여러 선교단체에서 -die freikirchliche Londoner Missionsgesellschaft(LMS), die kirchliche (anglikanische) Missionsgesellschaft (CMS)- 임원으로 일하면서 칼 블룸하르트의 선교활동을 보고했다.

        블룸하르트 집안의 목회자들은 선교를 '하나님나라'의 확장으로 이해했다. 이들은 하나님나라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통치이며, 또 이 통치의 영역은 온 세상 모든 백성에게 두루 미친다고 확신했다.

2. 블룸하르트와 중국 선교사 빌헤름

        블룸하르트의 선교신학은 중국에서 선교사로 일한 그의 사위 빌헤름(Dr. Richard Wilhelm: 1873-1930)에게 보낸 편지글에 잘 반영되어 있다.2) 빌헤름은 1899년에 -장인 블룸하르트가 선교사의 열정으로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서 현실 정치에 뛰어든 해에- 스위스 동아시아선교회(Ostasienmission)의 파송을 받아서 그의 부인과 함께 중국으로 갔으며, 1922년까지 칭따오와 여러 도시에서 교육선교를 중심으로 사역했다.3) 블룸하르트는 사위의 선교활동이 마치 자신의 사역인 것처럼 인식되었다. 이러한 인식에서 그는 사위에게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는 충성스런 종이 되도록 편지를 통해서 권면했다. 그의 사위 또한 장인의 선교관을 잘 이해하고 성실하게 따랐다.4)

        블룸하르트의 선교신학은 그의 사위 빌헤름을 통해서 중국에서 실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이 글을 블룸하르트가 사위에게 보낸 편지글들을 읽고 분석하고 정리하는데 집중해서 서술하고자 한다.

II. 19세기 후반 독일 개신교회의 해외선교                                                

 

        활발했던 카톨릭교회의 해외선교가 18세기에 점차 식어져 갔고, 반면에 개신교회의 해외 선교운동이 조금씩 열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엽 사이에 이 선교 운동이 매우 활발해 졌는데, 이 때 신앙각성운동의 열매로 많은 선교단체가 결성되었고 이것이 해외 선교운동으로 이어졌다. 바르넥크(G. Warneck)와 라투렛(K. S. Latourette)이 "19세기는 선교의 위대한 세기"라고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해외로 뻗어 나가는 유럽 열강의 힘이 카톨릭 국가에서 프로테스탄트의 국가로, 특히 영국으로, 이전되었기 때문이다.5) 선교사들은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낯 선 대륙으로 건너갔다. 이 때만해도 선교사들이 모국의 정치-경제적인 이득을 돕기 위해서 활동한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이 되면 많은 선교사들이 유럽 열강의 식민지 정책에 알게 모르게 협조하면서 선교 활동을 했다. 칼 함머(Karl Hammer)에 따르면:6) 그 당시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배경사상으로서 민족주의, 제국주의, 이방인을 형제자매로 사랑해야 한다는 의식과 노예매매를 반대, 학문의 발전(지리학, 해양학, 인류학, 고고학, 동양학, 동물학 등), 식민지정책 등을 꼽았다.

        19세기 후반에 선교사들은 탐험가나 무역상인의 뒤를 좇아 선교지를 찾아가는 경우가 빈번했다. 1860년대에 탐험가들이 아프리카 내륙을 깊숙하게 탐험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이 작성한 탐험보고서가 유럽 개신교회의 해외선교에 자극과 영향을 주었다. 선교사 후보생들은 이 보고서를 열심히 읽고 연구하면서 선교지를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또 이를 바탕으로 이들은 선교계획을 세웠다. 이 무렵의 탐험가요 민속학자요 선교사인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 1813-1873)은 아프리카 선교의 대표적인 인물로 간주되었다. 리빙스톤 역시 자신의 탐험여행이 선교활동이라고 생각했다. 미지의 대륙 미지의 마을이 새로이 발견되는 그 곳에서 선교도 시작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1880년대에 이르면 유럽의 외교정책과 식민지정책이 제국주의적인 경향을 강하게 e띄기 시작했다. 개신교회의 해외 선교정책도 이러한 경향에 편승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신대륙의 발견, 신항로의 개발, 배만드는 기술의 발달, 그리고 새로운 땅의 정복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이 확산되고 하나님나라가 확장되어 간다고 이해했다, 그리고 유럽의 힘이 다른 대륙으로 뻗어 나가는 것을 '구속사'의 관점에서 낙관적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이해는 영미권의 선교신학에서 시작되었고 이것이 독일의 선교신학에 영향을 주었다. 이리해서 세계 복음화를 향한 선교열정은 유럽 팽창주의와 구속사적 역사관이 서로 잘 맞아 떨어진 곳에 불이 붙었다, 또 이 구속사관은 발전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선교열정이 유명한 선교구호 "우리 세대에 전세계를 복음화"(John Mott, 1910년)에 반영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유럽의 열강들은 해외에서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고 자국민을 지키고 보호하는 정책을 폈고, 이러한 보호의 우산아래에서 선교사들은 선교활동을 펼쳐 나갔다. 많은 선교사들이 모국의 식민지정책을 이용해서 선교활동을 했다. 대부분의 독일 선교사들도 자국의 식민지정책을7) 타당하게 생각했다.8)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두 가지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는데, 이 수단이 바로 선교와 식민지정책이었다. 그러나 원주민들에게 이러한 관점이 이해될 리가 없었다. 이들의 눈에는 독일 선교사들이 독일 정부가 파송한 외교관으로 보였다. 이들의 눈에는 선교사와 관리를 구분 짓기 힘들었고, 탐험가와 선교사를 식별하기가 힘들었다. 이들의 눈에는 종종 선교란 제국주의가 종교의 옷을 걸친 것이라고 비쳐졌다.9)       

III. 블룸하르트의 선교이해                                                 

A. 식민지정책과 제국주의에 편승된 선교를 비판

1. 목회자민족주의(Pastorennationalismus)

        블룸하르트가 이해한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고 발전되고 성취되는 것"이었다.10) 그런데 그는 -19세기 후반 당시의 독일 개신 교회를 비판하는 차원에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가 동일하지(identify) 않다고 종종 말했다. 이 생각을 해외 선교에 적용해서, 그는 기독교의 확장과 복음의 전파를 분명하게 구별지었다.11) 다시 말해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멀리 떨어져 나간 19세기 독일 개신교회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이러한 기독교를 다른 대륙으로 가져가서 선교의 이름으로 그대로 옮겨 심고자 하는 선교정책을 비판했고, 더구나 정부의 식민지정책에 편승된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비판했다.

        식민지정책에 편승된 선교활동의 출발점은 국내의 민족주의에 있다고 블룸하르트는 생각했다. 이 민족주의가 확산되는 계기는 1870년에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곧 카톨릭교회가 국교인 프랑스와 개신교회의 나라인 독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의미했다. 이때 독일의 개신교회 안에는 프로테스탄티즘과 독일정신(Deutschtum)이 하나로 합쳐져서 "목회자민족주의(Pastorennationalismus)"가 형성되었고, 이러한 민족주의가 목회자들 사이에 확산되었다.12) 이들이 가졌던 견해는: 독일이 프랑스와 싸우고 있는 이 전쟁은 개신 교회와 카톨릭교회 사이의 전쟁이나 다를 바 없으며, 만약에 독일이 이 전쟁에서 이기게 되면 그것은 곧 개신교회의 승리라고 보았다. 이리해서 수많은 목회자들이 독일의 승리를 기원했고, 이 상황에서 이들은 맹목적으로 독일제국에 충성을 표시했다. 1880년대 후반이 되면 프로테스탄티즘과 민족주의가 더욱 더 단단하게 하나로 뭉쳐졌고, 이때 흔히 사용되었던 구호는: 하나의 백성, 하나의 제국, 한 분 하나님이었다.

        이러한 목회자민족주의가 해외 선교사들을 통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여실히 반영되었다. 블룸하르트가 보기에, 선교사들의 주된 선교활동은 원주민들에게 서양 민족의 신(Nationalgott)을 선포하고 또 서양 민족의 종교를 퍼뜨리는 일이었다. 이들은 원주민들을 이방인으로 규정하고 이들에게 서양 기독교교리를 가르치며 이 교리를 주입시키려고 했다. 이러한 선교현실을 보면서 블룸하르트는 말했다:"(선교사는) 원주민들에게 기독교의 교리를 가르치려 들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만 한다."13) 그리고 그는 민족주의와 결합된 식민지정책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유럽의 각 나라들은 저마다 자기 민족을 챙기느라 뿔뿔이 흩어졌고 또 이로 말미암아 아주 불길한 기운이 온 유럽에 덮치고 있다, 모든 민족들이 각기 제 몫을 챙기느라 야단법석이다."14)

        블룸하르트가 경악을 금할 수 없었던 경우는: 독일이 다른 대륙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이 식민지를 경제적으로 착취하는데도 선교사들이 별로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독일 정부는 드물지 않게 자국에서 파송된 해외 선교사들에게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도록 독려했고, 이에 상응해서 선교사들은 마치 정부의 관리처럼 행동할 때가 많았다. 블룸하르트는 제국주의적인 식민지정책이 경제적으로 착취구조를 형성한다는 점을 알아챘다. 그는 서양 문명을 "돈에 집착하는 문명"으로 보고, 이 문명이 유럽 바깥의 세계를 "착취의 대상"으로 보게 한다고 생각했다.15)

        블룸하르트는 선교현장에 문화제국주의도 활개치고 있음을 비판했다. 이 제국주의는 자주 선교사들의 생활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바, 원주민들 틈에서 일하는 선교사가 유럽에서 하던 생활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이것을 통해서 유럽의 문화를 선교지에 옮겨다 심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활방식이야말로 선교사의 무의식 세계가 바깥으로 드러난 것인데, 선교사는 원주민들의 전통문화를 미개한 것으로 업신여기고 이들의 전통생활을 야만적이다고 보며 우습게 여겼다. 선교사들은 이를 통해서 알게 모르게 토착문화가 무너지고 사라지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자세에 대해서 블룸하르트는 종종 분노를 표시했다.

        이러한 블룸하르트의 견해는 오늘날 '원주민 사회의 개발을 통한 선교(Entwicklungshilfe)'에 관해서 진지하게 반성토록 한다. 왜냐하면 소위 개발이란 이름아래에서 서구문명을 무분별하게 원주민 사회에 이식시키고 또한 이를 통해서 그들의 좋은 생활양식과 전통문화를 파괴 시켰다는 지적이 많기 때문이다.16)

2. 바리새주의

        민족주의에 각인이 된 선교사들의 오만불손한 자세를 비판한 블룸하르트는 선교사들의 사역에 대해서 질문했다: 선교사들이 과연 성서에 증언된 하나님말씀 위에 바로 서서 사역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던지는 까닭은, 그가 성서 어느 곳에서도 민족주의의 요소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는 성서의 하나님은 온 세상의 하나님 또 모든 백성의 하나님이라고 강조했다.17)

        블룸하르트의 견해로는: 성서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 곧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우주적 차원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온 세상 모든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고자 함이 야훼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백성은 세계 인류를 위한 '제사장 직분'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우주적 차원의 약속에 근거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약속이 성취되었다. 특히, 인류를 위한 이스라엘의 제사장직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 사도들을 통해서 발전해 나갔다. 사도들이 이끌어 간 예루살렘교회 안에서 우주적 차원의 신앙공동체가 어느 정도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이 교회 안에서 여러 나라/지역에서 온 다양한 민족/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와 주님으로 고백했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들이 남긴 유산이 되었다.18) 사도들의 유산은 우주적 신앙공동체였다.

        블룸하르트는 기독교 역사 안에서 사도들의 유산이 계속 자라고 발전되어 갔는지 살펴보았다. 또한 이 유산에 근거해서 선교의 목적은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이루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는 -예수의 비유대로- 하나님나라를 마치 겨자씨가 싹트고 자라서 큰 나무로 성장하는 일에 비유했는데, 초대교회의 우주적 신앙공동체가 계속 자라고 발전했다면 이것이 곧 하나님나라의 자람과 일치한다고 보았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나라의 '왕'이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탕으로 하나님나라는 계속 자라고 발전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미 고대 교회는 사도들의 유산을 잃어 버렸다고 블룸하르트는 판단했다. 그 까닭은 교회 안으로 '바리새주의'가19)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바리새주의가 교회안에서 활개를 활짝 펼치며 설치게 되자 예배는 형식화되어 갔다. 또 교회는 교리논쟁과 정치적인 싸움을 지리하게 되풀이했고, 이를 통해서 기독교의 진리는 단단한 껍질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생명력을 잃어버린 기독교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교리의 확립을 통해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교리적으로 체계가 잡힌 종교가 되고 가르침으로 굳어진 종교가 된 기독교는 마치 쇳물을 녹여 만든 동상처럼 차갑고 딱딱한 종교가 되었다, 또 화석처럼 죽은 종교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반복해 온 기독교를 유럽 바깥으로 가져가서 선교의 이름으로 원주민들에게 교리를 주입시키는 일은 전혀 무의미하다고 블룸하르트는 생각했다. 이러한 선교는 빈 껍질만 남은 기독교를 전하는 것이고, 이미 생명을 잃어버린 진리를 외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나라의 발전에 역행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이러한 선교는 사도들의 유산과 전혀 상관이 없고, 많은 선교사들이 서양 민족의 종교를 원주민 세계에 이식시키고자 했다. 이런 뜻에서 블룸하르트는 기독교는 -비록 이 종교의 뿌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나- 그리스도는 동일하지(identify) 않다고 보았다.20) 또한 그는 바리새주의가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보았다.

        이 같은 관점에서 블룸하르트는 타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동시에 그는 복음전파와 개종시키는 일을 구별했다: 마틴 켈러(M. Kaehler)의 견해와 동일.  이러한 구별은 경건주의에 입각한 선교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19세기 후반에 경건주의에 젖어 있던 선교사들은 기독교를 '이방세계'에 확장시키는 일'에 집중했다. 그리고 이방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동시에 선교사의 교회/교파를 선교지에 이식시키고 교파의 신학을 원주민들에게 주입시키고자 했다. 이렇게 블룸하르트는 이방인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는 일을 비판하면서 올바른 선교는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라고 강조했다.

        블룸하르트는 종교와 하나님나라를 구별지었다: "이방인들이 기독교인이 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며, 이들이 서양 기독교를 통하지 않고 또 서양 기독교인이 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로 올 것이다."21) 이렇게 종교와 하나님나라를 구별짓고 또 기독교와 하나님나라가 대립되어 있다고 말한 블룸하르트는 선교사들에게 딱딱한 껍질에 둘러 싸여 있는 기독교를 깨트리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인격적(person)으로 역사 하므로 바른 선교는 "가슴(Herz)"의 선교라고 보았다.22) 이러한 선교는 원주민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할 것이다. 하나님나라에서는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참 사람 곧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블룸하르트는 "선교란 종교인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올바른 사람이 되게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23)

B. 바람직한 선교                                                 

1.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

        블룸하르트는 하나님 자신이 "선교의 주체(das handelnde Subjekt)"라고 보았다, 그리고 선교사는 이 하나님의 선교를 돕는 동역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선교사가 선교지에 도착하기에 앞서 이미 하나님이 거기에서 일하고 계신다고 믿었다, 또한 선교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리스도의 영이 원주민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역사 하시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블룸하르트는 이처럼 선교의 주권을 철저하게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생각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교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한 분만이 원주민들에게 가실 수 있는 권한이 있고, 그 분의 밝은 빛으로 이들을 깨우치게 하시고 또한 이들을 불러 주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에서) 우리 선교사들은 이렇게 깨우침을 받고 부르심을 입은 토착민들에게 시온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결코 선교사들의 견해를 이들에게 주입시키거나 자신의 교파를 강요해서는 아니 된다."24)

        하나님께 선교의 주권을 드리는 선교는 -블룸하르트가 보기에- 교리에서 해방되는 선교이다. 하나님이 그 자유 하심에 따라서 원주민들에게 다가가서 복음의 빛을 비추시면, 원주민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복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들이 표현하는 복음은 선교사들의 이해와 동일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에서 선교사들은 -이제까지 가져 왔던 바- 기독교 교리를 주입시키려는 태도를 포기해야 하고 가르치려는 선생의 자세를 버려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선교의 모든 주권을 하나님 자신이 갖고 계시므로,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 곧 교리의 주입과 가르침에서 벗어난 선교라야 할 것이다. 이런 뜻에서 블룸하르트는 선교사들이 선교 지에서 서양식 교회를 세우는 일을 반대했다. 원주민들의 신앙형태가 서양 기독교에 동화되는 일을 우려했기 때문이다.25)

        하나님의 선교는 블룸하르트에게 있어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뜻한다. 이제까지 선교현장에서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바, 기독교인/선교사와 비기독교인/원주민의 수직적인 만남이 사라지고 그 대신 복음을 먼저 깨달은 '사람'(선교사)과 복음이 필요한 '사람'(원주민)이 수평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제 선교는 수평적인 만남을 통해서 서로 "존경하는"데서 새롭게 시작된다.26) 이와 관련해서 블룸하르트는 1899년 6월에 중국으로 파송된 사위 빌헤름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 "다만 너는 중국인들과 인간적으로 잘 사귀면서 지내라. (... ...) 성급하게 그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고 본다. (... ...) 그들에겐 오직 하나님나라가 간절하므로 너는 (기독교 선교사이기에 앞서 하나님나라의 사람으로서) 하늘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과 사귀는 것이 중요하다."27) 만남과 사귐을 통해서 원주민들이 한 걸음 두 걸음 하나님 나라로 가까이 다가온다고 블룸하르트는 확신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블룸하르트는 선교사들이 원주민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말라고 권면했다. 세례는 서양식 기독교인이 되는 지름길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례는 대부분의 경우에 원주민들 사이를 갈라놓는 징표로 이용된다고 보았다, 즉 세례를 통해서 원주민들을 기독교인과 이방인으로 뚜렷이 구분 짓게 하는 징표로 이용된다고 보았다. 이리해서 세례는 기독교인이 된 원주민들을 따로 한 곳으로 모이게 하는 깃발의 역할을 하고, 또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원론의 깃발(Die Fahne des Dualismus)"이라고 보았다.28) 이런 관점에서 블룸하르트는 중국으로 떠나는 사위 빌헤름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했다: "너는 중국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말아라. (...) 중국인들에게 세례는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넘어서는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세례를 통해서 중국인이 유럽에 동화되고 또 이를 통해서 자기 민족을 저버리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너는 일부러 이러한 오해를 살 필요가 없다고 본다."29)

        그런데, 블룸하르트는 무조건 어느 때나 세례베품을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선교사가 세례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나서 선교지의 원주민에게 세례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례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고전 1:14-17), 또 세례를 통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해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이라 보았다. 그리고 세례를 통해서 각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사람들이 모여서 신앙공동체를 이룬다고 보았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요 형제자매로서 한 몸을 이룬다고 보았다. 이러한 세례의 내용을 잘 파악한 뒤에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 합당하다고 블룸하르트는 생각했다.

        선교사가 세례를 이렇게 잘 이해하고 있다면, 그는 이제 더 이상 마치 교황처럼 군림하는 태도로 세례를 베풀지 않게 되고 오직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원주민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될 것이다.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원주민들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종노릇할 것이며, 그리고 형제자매가 된 원주민들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이루게 될 것이다. 블룸하르트는 이것을 "영적세례(Geistestaufe)"라고 말했다.30) 영적세례를 통해서 선교사와 토착민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되었으므로 이제까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갈라놓는 세례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이제부터 선교사와 원주민들은 형제자매로서 서로 서로 존중하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블룸하르트는 원주민들이 자기 발로 스스로 찾아와서 선교사에게 기존의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고자 한다면 막을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선교사는 어떤 경우에도 원주민을 서양 기독교인으로 만들어서 유럽 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2.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발전되고 완성되는 것

        블룸하르트가 이해한 선교의 알맹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고 발전되고 성취되는 것"이었다.31) 그리고 한 번 더 반복해서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기독교의 교리가 한 몸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복음 전파와 기독교의 확장은 각각 서로 다른 영역이라는 것이다.

        블룸하르트는 복음의 확장과 발전에 관해서 말하면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은 "예수의 품성 가운데 일부(ein Teil der Persoenlichkeit Jesu)"32)라고 얘기했다. 이 말의 뜻을 다음과 같이 풀어볼 수 있겠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약속으로서, 이 복음은 문자 적으로 되풀이하는 가르침과 교리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며 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원약속은 이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계속 자라고 발전해 간다. 마치 겨자씨가 싹트고 자라듯이 복음도 그렇게 발전해 가는데, 이 복음의 뿌리는 그리스도의 품성(Person)안에 박혀 있고 이것이 싹트고 자라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란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라는 뜻은 온 세상 모든 백성을 향해 우주적 차원으로 복음이 자라고 발전해 간다는 말이다.33) 따라서 복음이 작고도 작은 겨자씨에서부터 우주적인 차원의 나무로 자라기까지 그리스도는 항상 중심에 계신다. 그리고, 이 복음이 자라고 발전되고 확산되기 위해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선교사이다. 그런데 복음은 언제나 계속 자라는 가운데 있으므로, 선교사는 복음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복음의 '비밀' 가운데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것이 많이 있음을 그는 항상 의식해야 한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특히 트뢸치(E. Treoltsch)도, 발전의 법칙과 보편주의를 많이 강조했다.34) 이들은 진화론에 입각해서 발전의 법칙을 낙관론 적인 입장에서 생각했고 또 자유방임적인 발전을 생각했다. 그런데 이와 달리 블룸하르트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해서 종말론적인 복음의 발전을 말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 선교는 지식 전달이나 교리의 주입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이다. 이것이 곧 복음의 전파이다, 여기에서 부활의 법칙에 따라 '생명'과 '사랑'이 선포된다. 여기에 대해서 블룸하르트는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선교하는 요한센(Johanssen)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했다: "친애하는 요한센, 네가 쉽게 (원주민들을) 개종시키려 거나 가르치려고 들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대신 생명과 사랑으로 그들 곁으로 한 발짝 두 발짝 다가가서 그들의 마음에 선교의 터를 닦았으면 좋겠구나."35)

        이제, 블룸하르트는 새로운 선교에 대해서 이렇게 제안한다: 이제부터 선교는 교리를 주입하고 종교를 옮겨 심는 '가르치는' 차원에서 생명과 사랑을 '증거 하는' 차원으로 옮겨져야 한다. 증거 하는 선교에는 생명과 사랑의 사건(Geschehen)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에 생명의 사건이 일어나고, 이 생명은 사람(원주민)들에게 빛으로 선포된다. 이 빛을 통해서 이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알게 된다. 이러한 블룸하르트의 제안은 선교의 방향을 새롭게 제시하는 것으로서, 이제 선교는 이교도에서 기독교도로 개종하는 차원이 아니고 그 대신 '죄와 죽음의 힘'에 맞서 생명과 사랑을 선포하는 차원으로 옮아간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과 사랑을 증거 하는 선교는 '삶의 선교'로 이어진다. 이것에 관해서 블룸하르트는 설명하기를: 선교사가 예수 안에 있는 생명과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원주민들에게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주일날 강단에서 예수의 생명과 사랑을 증거하는 일도 중요하겠으나 할 수 있는 대로 날마다 일상의 삶 속에서 이를 증거 해야 할 것이다. 즉, 선교사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모습을 원주민들에게 보여 줘야 한다. 원주민들이 선교사의 삶의 자세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을 조금씩 신뢰하게 되고 그리고 차츰 차츰 하나님나라로 다가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주인인 부활과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선교사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원주민들 나름대로 예수의 복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블룸하르트는 선교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주민들에게 설교하러 들지 마십시오, 아예 입을 열지 마십시오! 입으로 회개를 강요하지 마십시오! 예수처럼 살아가십시오, 예수 따라 사는 삶이 되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당신에게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당신으로 하여금 이렇게 아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러면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내 안에는 내가 섬기는 주님이 있습니다. 그 분은 예수입니다, 그 분은 나의 기쁨입니다, 그 분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36)

        생명과 사랑을 통한 삶의 선교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 윤리적인 차원으로 확대된다. 다시 말해서: 삶의 선교 곧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증거 하는 일은 원주민들의 사회를 갱신하게 하는 차원으로 나아간다. 블룸하르트는 이것을 선교의 "예언자적" 기능이라고 말했다.37) 그런데, 선교사는 어디까지나 선교사로서 원주민 사회의 구조를 갱신하는 주체가 아니라 이들의 곁에서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스스로 자기 발로 일어서도록 도와 줌 (Hilfe zur Selbsthilfe). 선교사가 증거하는 사랑과 생명의 힘이 원주민들의 마음에 감화를 주어서 이들 스스로 사랑과 생명의 사회구조를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결단을 심어 주는 것이다.  

3. 우주적 성령공동체를 지향하는 선교

        블룸하르트가 생각한 선교의 목적은 세계 인류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데 있었다.38) 이러한 공동체를 위해서 그는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했다. 성령은 자유의 영으로서 이 세상 어느 곳에서나 역사 하는 분으로 믿었다. 성령의 역사 하심을 통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 사이에 "영적으로 이어지는 그물망(ein geistiges Netz)"이 형성되기를 그는 기도했다.39) 또한 세계 모든 곳을 연결시키는 "성령공동체(Gemeinschaft des hl. Geistes)"를 위해서 그는 기도했다. 이 공동체 안에서는 여러 나라/민족들 사이에 보여지는 차이점들이 - 언어, 생활풍습, 생활 양식 등- 그 민족/나라의 특성으로 이해되고,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서로 사랑하기를 연습할 것이다. 또한 이 공동체 안에는 이 민족/나라가 다른 민족/나라를 정치적으로 억압하거나 경제적으로 착취하지 않을 것이다. 이 공동체가 지향하는 바는 하나님의 의가 넘치는 평화의 세계다. 그리고 이 공동체로 말미암아 종교간의 갈등이 해소되고 민족의 분쟁이 해결되어서 서로가 서로를 '존경하는' 평화의 세계가 임해야 할 것이다. 블룸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디든지 착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하나님의 집이 있다. (... ...) 눈에 보이는 성전이 있든 없든 간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하나님의 집이 형성된다. 이들은 서로의 다양함을 인정하면서 더불어 함께 사는 길을 연습해야 한다, 또한 서로 사랑하는 연습도 해야 한다."40)

        블룸하르트가 의식적으로 교리 적인 표현을 피하려고 하지만, 이 성령공동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앙고백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형성된다고 확신했다. 성령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낸다, 또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한다; 예수는 성령을 통해서 "사람을 돌보는 목자"로서 일한다.41) 블룸하르트는 성령공동체의 원형을 사도시대의 신앙공동체로 보았다. 앞에서 본대로, 초대교회 예루살렘 신앙공동체는 여러 나라/지역에서 찾아 온 다양한 민족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이 신앙공동체야 말로 우주적 성령공동체의 원형이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시작되는 성령공동체는 사도적 신앙공동체의 회복인 동시에 계승이라 볼 수 있다.

        우주적 성령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필수조건이 무엇인지 블룸하르트는 생각했다. 그것은 죄 용서였다. 죄 용서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생각한 죄용서는 이방인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데 필수적인 조건이 아니었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예루살렘 성 밖에서 집행되었던 사실을 상기하면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유대인만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 아니라 유대 땅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대속의 죽음을 우주적 차원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죄용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죄용서의 능력을 아직도 모르고 있는 기독교 바깥 사람들도 위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다. 그러므로 구원 사건은 우주적으로 드러나야 하고, 동시에 구원도 우주적인 성격을 띄어야 한다.

        성령공동체는 장차 '인자의 날(Der Tag des Menschensohnes)'이어야 한다고 블룸하르트는 생각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 날에 우주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또한 이 날과 함께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새 계약'이 맺게될 것이다.

C. 선교와 토착문화                                                 

        선교사가 선교활동을 하면서 사용하는 언어는 원주민들의 언어라야 하며, 복음 또한 원주민들의 문화 안에서 그 형체와 틀을 잡아가야 한다고 블룸하르트는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까닭은, 원주민들 스스로가 자기네 언어와 문화를 통해서 복음 화되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토착언어를 사용해서 선교함으로써 원주민들이 서양 기독교에 동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원주민의 개종(기독교에로)이 토착문화를 버리고 유럽문화에 동화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관습을 고쳐주는 말이다. 또 개종(기독교에로)은 당연히 유럽 화 되는 것이라는 의식도 고쳐 주는 말이다.42)

        이에 선교사의 과제 가운데 큰 것 하나는, 원주민들이 복음을 자신의 말로 이해하고 자신의 생활양식으로 표현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선교사는 원주민들 사이에 살면서 그들 속으로 동화되어야 한다. 선교사는 원주민들 즉 이방인들과 더불어 함께 생활하면서 지금까지 몸에 배여 있는 기독교적인 것과 유럽적인 것을 포기하고 그리고 원주민들 조차 선교사를 원주민으로 인정하기까지 연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교사가 이렇게 살다보면 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차츰 차츰 원주민들 사이에서 그들의 생활과 문화의 양식에 맞게 형체를 띄게 되리라 내다보았다. 또한 토착 문화에 자리를 잡은 복음의 형체는 서양 기독교의 모습과 크게 다를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블룸하르트에 따르면,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토착 문화 안으로 자리를 잡는 것이다. 그는 사위 빌헤름에게 권면했다: "중국 문화를 잘 이해하면서 중국 사람들을 사랑하라."43) 그러나 여기에서 두 가지를 동시에 변증법 적으로 헤아려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선교사는 한 편 복음이 토착문화 안으로 뿌리를 내리도록(Inkulturation) 해야 하고, 그러나 또 한 편 복음이 토착문화 안으로 동화되지(Verschmelzung) 말도록 해야 한다. 이와 연관지어서 그는 문화와 계시의 상관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44) 세계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일찌기 문화를 창조했던 민족들이 많다. 이를테면 바벨론인들, 희랍인들, 중국인들, 로마인들, 유대인들 등이다. 이들이 문화를 창조하고 일구어 가는 과정에 하나님이 역사 하셨고 또 그들의 문화 발전에 개입하셨음을 더듬어 찾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인간의 생활은 일반 동물의 그것과 달리 높은 이상 세계를 향해 나아갔다. 그런데 인간의 창조능력을 통해서 싹트고 자라고 꽃핀 문화는 대부분의 경우 일정한 세월이 지나면 시들어 갔다. 문화는 지역과 민족과 나라에 따라 거기에 맞는 문화의 꽃으로 활짝 피었다가 세월이 지나면 시들어 졌다. 이처럼 각 시대와 지역의 여러 문화에는 지역적인 특성, 공간적 한계성, 그리고 시간의 제약성에 따라 흥망 성쇄했다. 그러나 계시는 문화와 다르다. 계시는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영원함에 대한 인식과 관련해서, 문화의 저 편에 있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말해 왔다. 계시를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함과 동시에 인간 자신의 본질이 하나님께 속해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 계시와 문화 사이엔 차이가 있다. 문화는 마치 싹트고 자라고 꽃피고 시드는 나무와 같은데, 계시는 인간 안에 있는 불멸의 이성(Vernunft)으로 머물러 있다. 또한 계시는 문화와 달리 지역의 한계성에 매이지 않으며 우주적인 차원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한 모든 문화는 하나님의 계시와 내적으로 연계성이 있다고(존재적인 유비:Analogia entis) 말할 수 없다.

약어표(블룸하르트의 글: 설교문, 편지글, 연설문등):                                                 

AB I, II, III  Ansprachen, Predigten, Reden, Briefe: 1865-1917, 3Bde., (Hg.) J. Harder, 2. Aufl., Neukirchen-Vluyn 1982.

PA I, II, III, IV Eine Auswahl aus seinen Predigten, Andachten und Schriften, (Hg.) R. Lejeune, 4 Bde., Erlenbach; Zuerich; Leipzig 1925-1937

CW    Christus in der Welt. Briefsammlung an R. Wilhelm, (Hg.) A. Rich, Zuerich 1964/5.

GRG    Gedanken aus dem Reiche Gottes. Im Anschluss an die Geschichte von Moettlingen und Bad Boll, und unsere heutige Stellung, Bad Boll 1895.

(국문요약)

        사람들이 흔히 아들 블룸하르트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독일 서남부 지역에 있는 작은 마을 뫼틀링엔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이 마을과 받볼에서 자라다가, 16세에 스튜트가르트에 있는 중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는 튀빙엔대학에서 신학을 했고, 졸업한 뒤에 그 근처의 마을에서 목회실습을 하다가 아버지가 목회하는 받볼로 가서 아버지를 도우며 목회훈련을 쌓았다. 1880년 2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는 아버지의 목사직과 요양원 원장직을 물려 받았다.

        블룸하르트는 선교사 집안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Johann Christoph Blumhardt)는 6년 반 동안(1830-37) 스위스 바젤에 있는 선교기관에서 선교사 후보생들을 훈련시키는 선생으로 일했다. 아버지의 삼촌(Christian Gottlieb Blumhardt)은 바젤선교부의 초대 감독(1816-38)이었다. 또한 아버지의 동생(Carl Heinrich Blumhardt)은 아프리카와 인도에서 선교사로 일했다. 이들은 선교를 하나님나라의 확장으로 이해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상 모든 백성에게 두루 미친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자란 아들 블룸하르트는 친척들과 아버지 친구들의 선교활동을 자주 보고 들었다. 세월 따라 그가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고 목회자로 일하면서 그도 또한 많은 선교사들과 교류했다. 그의 선교신학은 19세기 후반의 해외 선교상황에서 전개되었으며, 그의 선교신학은 중국에서 선교사로 일한 그의 사위(Richard Wilhelm)에게 보낸 편지글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의 선교신학은 사위를 통해서 중국에서 실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신학자 리히(A. Rich)가  1958년에 이 편지글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발간했다.

        유럽 개신교회의 해외 선교는 18세기부터 조금씩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엽에 이 선교운동이 매우 활발해 졌고, 이 때 많은 선교단체들이 결성되고 이 단체들이 해외선교에 헌신했다. 19세기 전반부에 해외에서 일한 선교사들은 선교지의 사회-정치적인 상황에 관심이 거의 없었는데, 이 세기의 후반부에는 많은 선교사들이 유럽 열강의 식민지정책에 호응하는 선교활동을 했다. 이 당시 해외선교사 파송에 활력을 준 사상으로서 민족주의, 제국주의, 이방인을 형제자매로 사랑해야 한다는 의식과 노예매매를 반대, 학문의 발전(지리학, 해양학, 인류학, 고고학, 동양학, 동물학 등), 식민지정책 등을 꼽을 수 있다.

        19세기 후반이 되면 선교사들이 탐험가나 무역상인의 뒤를 좇아 선교지를 찾는 경우가 빈번해 졌다. 탐험가의 현장보고서를 선교사들이 읽고 연구하면서 선교지를 파악했고, 또 이것을 바탕으로 선교계획을 세웠다. 이들의 선교정책은 종종 유럽 여러 나라의 식민지정책에 상응해서 세워졌다. 많은 선교사들이 유럽의 힘이 다른 대륙으로 뻗어 나가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았는데, 이러한 견해는 유럽의 식민지정책에 편승한 기독교의 확장을 하나님나라의 확장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열강들은 해외에서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고 자국민을 지키고 보호하는 정책을 폈는데, 이러한 보호의 우산 아래에서 선교사들은 미지의 세계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독일의 선교사들도 -모든 선교사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종종 자국의 식민지정책을 이용해서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두 가지 수단 곧 선교와 식민지를 통해서 이루어 간다고 보았다.

        블룸하르트는 식민지정책에 편승된 선교정책과 선교활동을 날카롭게 공격했다. 선교사들이 마치 정부의 외교관리인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식민지정책에 협력하고, 또 이들은 원주민들이 경제적으로 착취를 당해도 이를 못 본 채 외면하고 있는데 대해서 그는 공격했다. 또한 그는 선교사들의 문화제국주의도 비판했다. 그가 보기에, 선교사들은 서양의 생활방식을 선교지에서도 한결같이 영위하고 있고 이를 통해서 유럽의 문화를 선교지에다 이식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생활방식의 밑바닥에 흐르는 선교사들의 의식 속에는 인종차별주의와 백인 우월 의식이 엿보였다. 여기에서 발생되기 시작하는 문제는: 원주민들의 토착문화가 무시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고 그리고 점차 존폐의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블룸하르트는 식민지정책에 편승된 선교정책의 근원지가 개신 교회 안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민족주의라고 말했다. 이 민족주의는 하나의 백성, 하나의 제국, 그리고 한 분 하나님을 강조했다. 이 민족주의는 목회자로 하여금 정부의 정책을 무조건 맹목적으로 지지하게 했다. 또한 이 민족주의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한갓 서양의 민족종교로 전락했고, 해외로 나간 선교사는 이 종교를 원주민들에게 교리로 가르치고 주입시키고자 했다.

        블룸하르트는 성서를 깊이 묵상했다. 특히 창세기를 깊이 묵상했다: 무지개를 통해서 노아에게 보여주신 인류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이방인인 소돔성의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한 아브라함을 읽으면서, 그는 하나님이 어느 특정한 민족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심을 깨달았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세계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한 제사장직분을 갖고 있었음을 그는 확인했다. 나아가서 우주적인 범주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구원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성취되었고, 이 성취된 약속은 사도시대 예루살렘교회를 통해서 계속 발전되어 갔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이 예루살렘교회는 우주적 차원의 신앙공동체였다. 그 당시 여러 나라/지역에서 온 다양한 민족/사람들이 이 교회에서 한 목소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신앙 고백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도시대의 유산이다. 그래서 블룸하르트는 사도시대의 유산을 대단히 소중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고대 교회는 이미 사도시대의 유산을 잃어 버렸다고 블룸하르트는 보았다. 교회 안에서 교리 논쟁과 정치적인 싸움이 거듭되면서 기독교는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인 종교가 되었고, 교리로 굳어진 기독교의 진리는 마치 화석처럼 죽은 진리가 되었다. 이리해서 고대 기독교는 이미 사도적 전승을 잃어 버렸다. 그는 사도시대의 유산을 상실한 기독교는 알맹이 없는 껍질에 불과했고, 또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와 동일하지(identify) 않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이러한 기독교가 선교의 이름으로 다른 대륙으로 확산되고 소위 이방인들을 타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일은 합당하지 못하다고 보았다.

        블룸하르트는 종교와 하나님나라를 구별했다. 그러면서 그는 올바른 선교란 기독교의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보았다: 선교사는 딱딱한 껍질에 둘러싸여 있는 종교를 깨쳐 버리고 하나님나라를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원주민들을 종교인으로 만들기 보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도와 주어야 한다.

        하나님나라를 향한 선교 방법에 관해서 블룸하르트는 말했다. 선교의 주체는 선교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선교(Missio Dei). 선교사가 선교지에 도착하기에 앞서 이미 하나님이 거기에서 일하고 계셨으며, 선교사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종이며 하나님의 동역자이다. 따라서 선교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원주민에게 가실 권한이 있다.

        블룸하르트는 선교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고 발전되고 완성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과 서양 기독교의 교리와를 따로 구분했다.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주적인 영역으로 발전하되, 점진적-진화론적인 발전이 아니고 계시적-종말론적으로 발전한다. 이 과정에서 부활하신 예수로 말미암은 생명과 사랑의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이러한 생명과 사랑을 증거 하는 선교는 곧 삶의 선교이며, 일상의 삶 속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선교이다. 끝으로, 블룸하르트는 선교의 목적이 우주적 성령공동체를 이루는데 있다고 보았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목자 되신 예수를 중심으로 성령의 역사에 따라 영적으로 마치 그물망처럼 연결되고, 이 세상엔 정치적인 억압이나 경제적인 착취가 더 이상 없으며 그 대신 오직 하나님의 공의가 넘쳐서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선교의 목적이다.

        블룸하르트는 선교가 토착문화 속에서 이루어 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복음이 토착문화 안으로 뿌리를 내려야함(Inkulturation)과 동시에 이 복음은 토착문화에 동화되지(Verschmelzung)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블룸하르트의 글(설교, 편지글,연설등):
Eine Auswahl aus seinen Predigten, Andachten und Schriften, (Hg) R. Lejeune, 4 Bde., Erlenbach; Zuerich; Leipzig 1925-1937.
Ansprachen, Predigten, Reden und Briefe: 1865-1917, 3Bde., (Hg) J. Harder, 2. Aufl., Neukirchen-Vluyn 1982.
Politik aus der Nachfolge. Der Briefwechsel zwischen H. Eugster-Zuest und Chr. Blumhardt 1886-1919, (Hg) L. Specker, Zuerich 1984.
Gedanken aus dem Reich Gottes. Im Anschluss an die Geschichte von Moettlingen und Bad Boll, und unsere heutige Stellung, Bad Boll 1895.
Antwortschreiben an seine Freunde, Goeppingen 1899.
Christus in der Welt. Briefsammlung an R. Wilhelm, (Hg) A. Rich, Zuerich 1964/65.
Ueber Johann Christoph Blumhardt, (Hg) R. Lejeune, Zureich 1969.

                                    주석

1. 여기에 대해서 쓴 논문을 소개하면: Karl Rennstich, "Das Vaterunser und die Blumhardts", in: Das universale Gebet. Studien zum Unservater. J. M. Lochman gewidmet zum 70. Geburtstag von der Fakultaet Basel, (Basel: Friedrich Reinhardt Verlag, 1992), pp. 127-141.
2. 이 편지글들을 정리해서 1958년에 아투어 리히(A. Rich)가 약 260쪽 분량의 책으로 펴냈다: Chr. Blumhardt, Christus in der Welt. Briefe an Richard Wilhelm, (Hg) R. Rich, (Zuerich: Zwingli Verlag 1958).
3. 빌헤름과 그의 부인(블룸하르트의 딸)이 중국 선교사로 일했던 회고록을 썼다: Wilhelm, Salome und Richard, der geistige Mittler zwischen China und Europa, (Duesseldorf-Koeln 1956).
4. 빌헤름이 모국의 선교부에 보낸 선교보고서가 잘 보관되어 있다: R. Wilhelm, Vertrauliche Mitteilungen fuer die Freunde unserer Arbeit in China, (Basel: Basler Mission, 출판연도미상).
5. 18세기 이전까지 개신교회의 선교는 카톨릭교회에 비할바가 못되었다. 신대륙 북아메리카에 터를 잡기 시작한 영국인 이주민들이 거의 대부분 개신교인이었으므로 영국의 개신교회가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확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되, 엄밀하게 보아서 선교역사에 속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대륙의 인디안들에게 선교하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또한, 개신교회가 국교인 나라에 소속된 무역회사들이 -카톨릭 국가에 소속된 무역회사들과 달리- 이교도들의 선교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몇 세대가 지나면서 이들의 무역은 선교와 연결되기 시작했다.
6. Karl Hammer, Weltmission und Kolonialismus. Sendungsideen des 19. Jhs. im Konflikt, (Muenchen; Koesel Verlag 1978)
7. 독일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게 뒤 쳐져서 식민지 확보에 뛰어 들었다. 독일은 다른 대륙에 식민지를 확보하는 일보다는 유럽 안에서 세력을 넓히는 데 힘을 쏟았다. 이러한 정책은 히틀러시대까지 갔다.
8. 그런데 독일이 식민지 개척에 힘을 쓰기 시작하자 몇몇 선교본부는 여기에 대해서 주저하는 자세로 관망했다: 예) 카메룬에서 선교활동을 한 바젤선교부. 그리고, 모든 독일의 선교사들이 자국의 식민지정책에 호응해서 선교활동을 벌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참고: Heinrich Balz, "Mission und Kolonialismus", in: Zeitschrift fuer Mission(17/3, 1991) Basel;Stuttgart, 175-181.
9. Horst Gruender, Die christliche Mission und deutscher Imperialismus, (Paderborn: Schoeningh Verlag, 1982), p. 328.
10. CW, p. 177.
11. 블룸하르트와 대조적으로 바르넥크는 선교를 비기독교의 세계에 교회를 세우고 조직하는 것이라고 본았다. 따라서 선교의 과제는 이방세계에 기독교를 확장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참고: Karl Mueller, Missionstheologie, (Berlin: Dietrich Reimer Verlag, 1985), p. 28.
12. Thomas Nipperdey, Religion im Umbruch. Deutschland 1870-1918, (Muenchen: C.H. Beck, 1988), pp. 94.
13. AB II, p. 252.
14. CW, p. 77.
15. CW, p. 49.
16. 참고: W. Gern, "Entwicklung", in> Lexikon missionstheologiscer Grundbegriffe, (Hg) K. Mueller und Th. Sundermeier, (Berlin, 1987), p. 72-81.
17. AB II, p. 25.
18. 오늘날의 선교신학에서도 사도시대의 유산과 복음의 우주적 차원에 관해서 논의되었다. 참고: Karl Mueller, op. cit., p. 27.
19. 블룸하르트의 전체 신학사상에서 볼 때, 이 표현은 정통주의를 비판하는 용어로 자주 쓰였다.
20. AB I, p. 169; PA II, p. 312.
21. CW, p. 140.
22. PA II, p. 219; PA IV, p. 11.
23. CW, p. 140.
24. GRG, p. 170.
25. 참고: GRG, p. 32, 84, 133; AB II, p. 24.
26. PA III, p. 211. 이 말은 오늘날 선교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표현이다, 특히 세계 여러 종교의 종교인들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현장에서. 참고: Th. Sundermeier, "Evangelisation und die Wahrheit der Religionen", in: Horizontueberschreitung. Die pluralistische Theologie der Religionen, (Hg) R. Bernhardt, (Guetersloh, 1991), p. 175.
27. CW, p. 32.
28. CW, p. 170.
29. AB III, p. 209.
30. CW, p. 42, 61; AB II, p. 250.
31. CW, p. 177.
32. PA I, p. 275.
33. 후기 바르트의 신학사상에도 비슷한 표현이 자주 보인다: 이를테면, Die Inklusivitaet der Person Jesu KD IV, 3/1, p. 324.
34. E. Troeltsch, Die Absolutheit des Christentums und die Religionsgeschichte, (Tuebingen, 1919), p. 70이하.
35. AB II, p. 24.
36. AB II, p. 150.
37. CW, p. 68, 77, 113이하. 1969년에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개최되었던 세계선교대회에서 이러한 의견이 개진되었다. 즉, 선교사는 선교지의 사회-정치적인 구조를 갱신하도록 기여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38. 참조: CW, p. 114, 256.
39. CW, p. 89
40. AB III, P. 112f.
41. PA III, p. 413.
42. AB II, p. 24.
43. PA III, p. 292.
44. CW, p. 211f. 참고: R. Wilhelm, 같은 책, p. 18-22.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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